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음악이 구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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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2월 9일 9:00 오전

최근 한수진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유튜브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레슨을 해주는, 그런데 연주할 때는 갑자기 강렬해지는 이 사람

 한창 커리어를 쌓을 나이, 그는 악기를 내려놓고 수술대에 올랐다.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을까. 나를 다 부숴 버릴 것만 같았던 아픔. 한수진은 그 시기를 덤덤히 인정한다. 그는 한 살 때 높은 곳에서 떨어져 턱관절에 문제가 생겼다. 성장하면서 고통이 심했지만 정확한 원인을 몰라서 치료를 못했다. 10대 후반에야 그 이유를 알았지만 학업과 연주 활동 때문에 치료시기를 놓쳤다. 2001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 2위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참았고, 묵묵히 연주했다. 20대 중반에 결국 통증이 극심해져 더 이상 연주를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6년동안 수술과 회복, 재수술을 반복해야 했다. 건강히 회복한 그는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다시금 음악의 길을 걷고 있다.

 

클래식 음악 유튜브 채널인 ‘또모’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덕분에 지난 10월 예술의전당 ‘클라라의 사랑과 음악’ 공연은 전석 매진됐는데.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기여하는 채널이라 기쁜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예상보다 영상 반응이 좋아서 나와 ‘또모’ 운영진 모두 놀랐다. 처음으로 SNS 영향력을 경험했고, 이는 대중에 대한 인식 세계가 확장되는 계기가 됐다. 음악은 결국 삼위일체, 즉 작곡가와 연주자, 청중이 함께해야 비로소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유튜브 개인 채널도 열었더라. 한국어와 영어 두 버전으로 영상을 올려서 인상 깊었다. 유학 중인 부모를 따라서 두 살에 영국으로 갔다고.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는데 생각보다 한국어가 유창하다.

막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할 때, 외할머니께서 영국으로 한글 교본과 동화책을 보내주셨다. 집안 벽에는 한글 포스터가 붙어 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는 영어를 하고 집에서는 우리말을 썼다. 사실 쓰고 읽는 속도는 좀 느렸는데, 수술과 치료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동안 한국어가 많이 향상됐다.

수술과 치료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20대에는 수술과 회복, 재수술을 반복하며 거의 6년간 연주 생활을 제대로 못 했다. 한창 커리어를 쌓을 시기였는데,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두 번의 수술과 재활, 완쾌까지 6년이 걸렸다. 3년 정도는 악기를 아예 만질 수도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아버지가 하시는 환경 관련 일을 도왔다. 국제기구를 한국에 초대하고, 번역과 통역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해조류 화장품을 만들었다.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서 사회를 위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음악이라는 간절함이 생겼다.

이브리 기틀리스 덕에 큰 힘을 얻기도 했다고.  2009년 영국 옥스퍼드의 작은 공연장에서 이브리 기틀리스를 만났다. 그때 내가 연주한 포레 소나타를 듣고 기틀리스는 “생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던 시기에 너의 음악을 듣고 살아야 할 이유를 느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더불어 꼭 이 세계를 너의 음악으로 구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 역시 큰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여서 큰 위로가 됐다.

유전으로 인해 왼쪽 청력은 거의 안 들린다고. 우리는 쉽게 한쪽 귀에 청력이 없으면, 다른 귀가 발달할 거라고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안 들리기 때문에 연주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 같은데.

왼쪽 청력이 없다는 것은 네 살 때 알았다. 오른쪽 귀가 더 발달한 것은 사실이다. 한쪽 귀로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특혜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음정이 정확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큰 불편함은 없지만 노력이 필요한 부분은 있다. 예를 들어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면 플루트와 함께 나오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플루트 연주자가 오케스트라 왼쪽 뒤에 있고, 다른 파트의 소리가 워낙 커서 맞추기가 어려웠다. 리허설 때 플루티스트와 호흡을 맞춘 후 실제 연주 때는 지휘자를 의지하며 연주한 기억이 있다.

성격이 참 덤덤하고 차분해 보인다. 어릴 때도 그런 아이였나.

처음 영국에 갔을 때 아버지의 연구소가 있는 한 섬에서 살았다. 아름다운 환경과 바다의 신비로움은 지금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 번은 내가 큰 다시마를 둘러매고 집에 와 욕조에 물과 소금을 넣어 키울 거라고 했단다. 그때 아버지는 내심 나를 해양학자로 키우고 싶은 마음도 드셨다고. 형제 없이 자라서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편이다. 어려운 상황이 많았는데 인내하다 보니 비교적 덤덤한 성격이 된 것 같다. 사실 난 흥분도 잘 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좋아한다.

현재의 한수진이 있기까지 정경화와 정명훈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정경화 선생님께서 나의 콩쿠르 실황 음반을 듣고 놀라셨다고 한다. 이후 정말 큰 사랑으로 이끌어주셨다. 음악적인 것 외에도 많은 시간을 나에게 할애해 주셨다. 대학 시절 방학 때는, 선생님의 뉴욕 아파트 바로 옆집에 머무르며 레슨을 받았다. 선생님은 벽을 통해 내 연습 소리를 들으시곤, 방금했던 그 부분 다시 해보라고 하셨다.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선생님과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현재 나의 ‘최애’ 활도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거다. 젊었을 때 입은 드레스도 주시고, 힘내라며 스테이크도 구워 주시고, 함께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영화와 오페라도 자주 보러 갔다. 무엇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강하게 전진하는 정신을 가르쳐주셨다. 선생님 덕분에 16살 생일 때 정명훈 선생님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때의 오디션이 기억나는가.

로열 앨버트 홀에서 두 분이 협연하신 날이었다. 정명훈 선생님은 리허설 직후여서 매우 피곤해 보였다. 소파에 앉자마자 눈을 감으시곤 아무 말이 없으셨다. 정경화 선생님께서 눈빛으로 시작하라는 사인을 주셔서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정명훈 선생님이 눈을 뜨시더니 웃으면서 ‘하늘에서 내린 재능(God-given talent)’이라며 칭찬해주셨다.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작곡가 브람스를 좋아한다고. 그렇다면 영감을 주는 연주자는 누구인지.

로즈마리 라파포트는 내가 연주하는 ‘치고이너바이젠’을 듣곤, 어린 예후디 메뉴인도 연상되고, 요세프 하시드를 닮았다고도 했다. 하시드가 누군지 몰라 여쭤보니, 하이페츠가 백 년에 한 번 나오는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하시드는 이백 년에 한 번 나올만한 연주자라고 하더라. 20대에 요절한 그의 음반을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집에 돌아와 연주를 듣는데 벨벳 사운드와 디테일, 짙은 감성에 전율을 느꼈다. 내가 연주할 때 G선의 낮은 음들은 하시드의 풍성하고 짙은 음색이 영감의 원천이다.

실내악에도 애정이 많아 보인다. 앞으로 솔로와 실내악 비중은 어떻게 둘 것인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여덟 살부터 실내악 수업을 들었다. 솔로 연주도 사실 넓은 의미에서 체임버라고 생각한다. 리사이틀은 피아니스트, 협연은 오케스트라와 호흡하니 말이다. 심지어 무반주곡에도 그 안에 음색들을 잘 살려내려면 실내악적인 마인드가 필요한 것 같다. 크게 비중을 생각하며 연주하진 않고 있다. 1월에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리사이틀을 선보일 계획이다. 유럽 음악을 테마로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 독일의 베토벤, 프랑스의 포레, 이탈리아의 파가니니를 선보일 예정이다. 음악으로 각국을 여행하며 작곡가들의 삶과 음악을 탐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국내 일정은 12월 말에 확정될 예정이라 그때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알리겠다.

글 장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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