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빅 피쉬’의 에드워드는 소시민적 영웅에 가깝다. 시대가 원하는 상을 시대가 원하고 있는 배우가 연기한다
툭 던지면 툭 하고 돌아오는 답변은 무성의하거나 깊이 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화의 흐름이 쫀득쫀득하여, 한시라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쉴 새 없이 질문하게 만들고, 바로 치고 들어오는 답변의 의외성에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배우 박호산과의 인터뷰가 그러했다. 허허실실 웃는 듯 즉각 돌아오는 답변이 대다수였지만, 뼈대가 올곧게 서 있는 생각들이었다. 평소 그가 연기에 대하여, 무대에 대하여, 그리고 배우라는 직업에 대하여 얼마나 깊게 성찰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2017년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의 문래동 카이스트 역할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은 이후, 역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철없는 맏형 역할을 맡으며 안정적인 연기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의 내공은 1996년 뮤지컬 ‘겨울 나그네’로 데뷔한 이후, 극단 연우무대와 극단 우인을 거치며 단단해졌고, 현재도 극단 맨씨어터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쉴 새 없이 매체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1년에 두 작품은 꼭 무대에 서려고 한다는 그는, 군더더기 없는 무대쟁이였다. 아직도 무대에 서면 수혈을 받는 기분이라는 박호산은 12월 개막하는 뮤지컬 ‘빅 피쉬’에서 허풍쟁이 아버지 에드워드 역할을 맡는다. 자신에게 솔직하지만 참으로 따뜻한 사람, 에드워드와 박호산은 꽤 닮았다.
뮤지컬 ‘빅 피쉬’ 무대에 서다
뮤지컬 ‘빅 피쉬’는 다니엘 월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2003)를 통해서다. 평범한 세일즈맨이지만 낭만적인 허풍을 일삼는 에드워드 블룸,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지만 어른이 되고서부터 그의 허풍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냉철한 아들 윌 블룸, 그리고 에드워드의 영원한 첫사랑인 아내 산드라 블룸. 이들 가족이 펼치는 이야기로, 영화가 에드워드의 상상 속 장면들을 팀 버튼 특유의 기괴하면서도 고어한 색깔로 그렸다면, 뮤지컬 ‘빅 피쉬’는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따뜻하다. “연출가 스캇 슈왈츠는 따뜻한 사람이다. 아기자기하고 연극적인 맛이 있는 작품으로 풀어가려 한다. 기계장치보다는 인력을 동원하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특히 다수의 퍼펫이 등장하는데, 인형 역시 무대 위에서 연기가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에 배우들이 이를 모두 직접 조종한다. 의상 역시 화려하면서도 동화적이다. 영화 속 수선화가 펼쳐진 장면에서 팀 버튼은 상상력을 동원하고자 일부러 전체 샷을 보여주지 않기도 했지만, 뮤지컬에서는 무대를 깊게 사용하여 수선화가 만발한 스펙터클을 구현할 예정이다.” 박호산은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뮤지컬 ‘빅 피쉬’는 2013년 브로드웨이, 2017년 웨스트엔드에서 공연된 적이 있는 라이선스 뮤지컬의 형태나, 이번 공연은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이 국내에 들어와 새롭게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을 거쳤다. “배우가 다른 매체에서는 가질 수 없는 특권이다.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연습 기간 내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완성품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배우의 생각이 함께 담기는 것이야말로 무대만의 매력인 것 같다.” 박호산 역시 세 명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다. 그가 해석한 에드워드라는 캐릭터는 소시민적인 영웅에 가까웠다.
“요즘 시대가 원하는 캐릭터가 소시민적인 영웅인 것 같다.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이 유행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구조관이나 소방관이 영웅처럼 여겨지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에드워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실제 경험한 것보다 더욱 재밌게, 마치 영웅담을 풀어놓듯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것이 과장됐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윌은 사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다. 아버지의 허풍에 신물을 느끼지만, 결국 윌 역시 아버지를 오롯이 이해하게 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매일 울면서 연습하고 있는데, 에드워드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들은 적이 있냐고 재촉하는 에드워드에게, 윌은 마치 아버지가 그동안 자신에게 들려줬던 허풍 섞인 이야기처럼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꾸며내 이야기한다. 영화에서는 다소 건조하게 그려지지만, 뮤지컬은 음악이 함께 실리다 보니 마음을 강하게 두드리더라.” 그가 해석한 에드워드의 또 다른 모습은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부모들처럼 자식이 더 큰 꿈을 갖도록 하기 위해 과장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성격인 거다. 아들의 인생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이런 이야기보다는 저런 이야기가 재밌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네게 이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는 대로 너의 인생을 살아가길 바란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마음은 솔직하나, 표현은 과장된 사람인 것 같다. 그의 이야기가 완전히 허풍만은 아니었다는 점은 에드워드의 장례식에서 나타난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 거인과 늑대인간 등이 실제로 등장하면서다. 물론 진짜 거인은 아니지만 2m는 충분히 넘는 키 큰 사람이 있고, 마치 늑대인간과 닮아 있는 털이 수북한 공연단장을 보면서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들의 수위를 깨닫는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극은 끝난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운 것이야말로 배우의 숙명이 아닐까. “배우가 무대 위에서 하는 일이야말로 일루션을 주는 것이다. 마치 에드워드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에드워드가 배우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잠시라도 행복하기를 바랐다는 점에서는 같은 부분이 있다. 에드워드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그의 이야기를 작가가 베껴 쓰고, 나와 같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그것을 연기하지 않았을까. 지금 ‘빅 피쉬’처럼 말이다.(웃음)”
극 제목이 ‘빅 피쉬’인 이유에 대해 박호산은 많이 생각해봤다. 반쯤 우스갯소리로 정말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면 ‘빅 버드(Big Bird)’라고 짓지 않았을까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윌은 에드워드가 끊임없이 목말라했다는 것을 캐치하여 마지막 순간 아버지를 물고기로 만든 것 같다. 작품에서도 블룸 가족에게 꽤나 상징적인 강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곳에서 에드워드의 삶을 마무리시키고, 자신이 빚어냈던 사실들 속에서 큰 물고기를 풀어준다. 멋있지 않나.”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배우
박호산은 무대뿐 아니라 영화·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매체마다 주된 역할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방송은 작가, 영화는 감독, 무대는 배우가 주로 끌어가는 것 같다. 무대 위 배우는 편집권을 갖는다. 물론 상의된 편집권이지만, 오롯이 배우의 몸으로 카메라 앵글 등 부수적인 요소의 도움 없이 메시지를 전달한다. 권한이 막강한 만큼 책임도 무거워진다.” 20년이 넘도록 무대에 서온 그는 ‘내 주머니 속에 카드가 꽤 많다’고 넌지시 말했다. 워낙 다양한 역할을 맡아와서다. “여러 연출가가 나를 바라보는 캐릭터가 모두 달라서 좋다. 누구는 악역으로 보고, 누구는 소시민 아저씨로 보며, 누구는 바보 같은 역할에 쓰려고 한다. 그런데 그분들이 모두 한 작품을 보면서 이러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지는 않고, 각자 내가 출연한 다른 작품들을 본 것 같다. 캐릭터마다의 사이를 벌릴 수 있었던 건 분명 연극작업의 도움이 컸다.” 매체에서 큰 인기를 끈만큼 그는 영상의 힘을 실감할 것 같았다. 더구나 최근 유튜브의 거센 유행에 혹여나 공연이라는 장르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단 한 번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저 좋아서 하면 될 일, 이것이 없어질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란다. “없어질 거라는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위기라고 생각해본 적도 한 번도 없다. 그저 무언가가 유행일 때가 있는 거다. 모두 디지털로 가서 지겨워지는 어느 순간, 아날로그를 찾게 될 수도 있고. 내 활동의 주된 시기가 유행의 시기와 맞으면 운이 좋은 놈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행복한 거다. 내가 시대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지 않나.” 최근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 대중매체로 진출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해 온 박호산은 현재 추세에 대해 꽤나 긍정적이다. “방송의 수요가 늘면서부터 추가적인 공급이 필요한 데, 더 이상 배우가 없더라. 그러니 무대에 있는 배우들을 가져다 쓰면서부터 시작된 흐름이다. 배우들이 매체 쪽으로 진출한 것을 걱정할 게 아니라 다시 무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걱정해야 한다. 인지도를 얻은 배우들이 공연 쪽을 끊임없이 두드려줘야 공연 쪽도 함께 끌어당겨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무대를 매체로 진출하려는 징검다리로 여기는 배우들도 많지 않으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부터가 이러한 진심을 테스트해볼 기회다! 좋은 협박거리가 될 수 있겠다.(웃음) 매체로 간 배우들이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지 안 돌아오는지를 지켜보면 될 일이다. 징검다리로 여기는 배우들로는 어린 친구들 중에서 몇 명 본 적이 있긴 하다. 조금만 이야기해보면 바로 알겠더라. 그러면 아예 존댓말을 사용한다. 어차피 내 후배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앞으로 어떤 연기 활동을 하고 싶은지를 묻자, 어렸을 때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단다. 그냥 얼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싶단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이것 자체가 얼굴이 되어버리니 소문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데,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이라도 알려져서 어쩌나. 그러니 인터뷰를 읽은 사람이라도 그의 진짜 얼굴은 모른 척하자. 앞으로도 꾸준히 다양한 변신을 하며, 그가 표현해낼 무궁무진한 캐릭터들을 위하여! 글 권하영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