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12월 4·5일 성수아트홀
이들의 춤을 볼 때면 여태까지 잊고 있던 마음의 어느 구석이 깨어난다. 그 낯선 깨어남에 흠칫 놀라 당황하다 보면 이 마음에 이름 붙이지 못해 ‘이건 뭐지···’하게 되고, 다시 마음은 그들의 일관된 집중과 추구의 집요함에 저릿한 채 미궁으로 빠져든다. 그들 모임의 이름인 ‘멜랑콜리’라는 감정을 말하는 건 아니다. 완전히 다른 동네라고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상투적으로 알고 있는 우울이라는 상태를 다루지도, 그 감정을 의도적으로 두드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안무를 맡은 정철인은 대학 때부터 유연할 거 같지 않은 몸인데 흠잡을 데 없이 유연하고, 쉬 지칠 것 같은 피골상접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시선을 끌어가는 힘이 대단한, 튀지 않으나 결국엔 눈길을 주게 되는 그런 존재감의 무용수였다. 무엇이라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느낌은 그의 춤에서나 작품에서나 일관적이다. 초기작 ‘비행’에서 시시포스 신화의 운명적 고단함을 다뤘고, 고단함의 원인인 시시포스의 짐의 무게로 관심이 이동하며 결국 ‘0g’에서는 짐에 무게를 지워주는 중력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번 ‘초인’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도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은 마치 채굴을 연상시킨다. 파고 파고 또 판 후에 만난 것이 니체의 ‘초인’이라면, 그래서 “편안함만을 바라는 이에게는 행복은 오지 않으며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니체의 말을 중심 삼아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 채굴은 제법 굵직한 원석에 가 닿은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작업은 끈질김만을 장착한 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관객은 색다른 여행을 하게 된다. 시시포스의 반복되는 언덕을 연상하듯 이번 무대 등장하는 사물은 손잡이 없는 트레드밀이다. 이것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연상시키며, 서류 가방·수트 상의·종이컵 등과 만나 무한 생산과 무한 노동의 굴레에 갇힌 현대인을 은유한다. 그래, 손잡이도 없는 트레드밀인데 무슨 지도가 필요하겠는가. 다리를 움직여 걷고 달리는 행위는 같으나 그들에겐 목적지도 없을뿐더러, 지도를 펼치고 선택의 여지를 즐기는 여행도 아니다. 오로지 그들은 그 안에서 옮겨지면서 배열을 달리하는 트레드밀에 올라타거나 미끄러지거나 눕거나 구르거나를 반복하며 약간의 즐길 권리 밖에는 없어 보인다.
하나의 주요한 전환점은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힘겨워 보이다가 점점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지는 지점이다. 어느 무용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들의 달리는 능력은 눈에 착시를 일으킬 만큼 놀랍다. 다른 어떤 방식의 은유가 아니라 바로 몸으로 점차 기계처럼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는 훈련되어 버린 우리가 맨바닥을 트레드밀처럼, 아니 그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것이다.
이미 이런 곳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의 ‘티끌 없는 마음’은 통상 자극받기 마련인 각성과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르는 좌절로 데려가지 않는다. 아무리 달려도 숨도 크게 쉬지 않는 이들의 어마어마한 절제와 서로에게 다리를 놓아주며 돕고 기대는 몸들을 보고 있노라면, 경변(硬便)된 마음의 껍질을 파고들어 더 연한 곳이 조금씩 저려옴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어떤 것도 가식하거나 포장하지 않는 이들 젊음이 우리라는 슬픈 ‘초인’의 초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글 이지현(춤비평가) 사진 멜랑콜리 댄스 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