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젊은 비올리스트 5인, 세계 오케스트라를 활주하는 비올라 신인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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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월 20일 9:00 오전

세계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신인류 5인

김사라·김세준·박경민·심효비·김규리

 

위로는 바이올린이 날카롭게 눈을 부릅뜨고 있고, 아래에선 첼로가 묵묵히 버티고 앉아 있다. 그 ‘사이’가 비올라의 삶의 지대이다. 이번 호는 이러한 지대에서 치열하게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비올라를 든 신인류 다섯 명의 오케스트라 입단기이자 생활기이다. 음악가에 대한 조명은 자연스레 악기에 대한 조명으로 이어지는 법. 악기에 스며 있는 역사와 구조를 통해 비올라를 이해하는 시간도 될 것이다

 

비올라 신인류가 나오기까지

2000년대에 이르자 세계 콩쿠르를 석권한 한국 청년음악가들의 낭보가 무섭게 날아들었다. 입상에 따른 세간의 관심과 언론의 조명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음악가의 얼굴이 알려졌고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악기도 조명을 받았다. 일례로 2006년 독일 슈페르거 콩쿠르와 2007년 러시아 쿠세비츠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성민제는 더블베이스라는 악기를 사각지대에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처럼 독주악기로서의 영역을 단단히 구축하지 못한 악기들은 이른바 ‘2차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바로 오케스트라 입단이었다. 입단은 곧 음악가로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길목이었으며, 생활인으로서의 안정과 직업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오케스트라 입단은 콩쿠르 입상만큼 중요해졌다. 콩쿠르가 ‘1차 관문’, 입단이 ‘2차 관문’이 되고 있는 추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대에 승전보를 올린 유망주들은 2010년에 2차 관문을 뚫는 데에 매진했다. 세계적인 지휘자가 이끄는 명문 오케스트라의 악장, 수석, 부수석으로 입단했고, 생활에 안정을 주는 직장으로 진입한 위너들은 프로페셔널 음악가들이 모여 있는 악단의 생태계를 발판 삼아 2차, 3차 성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통계적으로 바이올린, 첼로, 목관악기가 그 수순을 이루었고, 최근 3~4년 동안 비올리스트들이 매섭게 2차 관문을 뚫고 메이저 오케스트라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음악계와 시차가 없어진 한국

지금의 20~30대의 음악가들은 본고장 유럽과 동등한 지평 위에서 음악을 배우고 익히고 겨룬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걸쳐 태어난 이들은 3세대를 배출할 수 있는 환경의 세례와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1세대의 환경에서 3세대의 결실을 낳았던 한동일(1941~), 정명화(1944~), 강효(1945~), 백건우(1946~), 김영욱(1947~), 정경화(1948~) 등도 있지만, 이들은 예외적인 역사라 할 수 있겠다. 음악교육의 현장을 오랫동안 지켜온 원로 교육자들은 이러한 지금의 20~30대를 놓고 특정 세대론을 거론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제자들을 육성하다보면 특정 연령대나 세대에서 ‘독특한 힘’이 나오고, 결국 그들이 세대교체와 중심부를 장악하는 힘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누군가는 고 권혁주와 그 전후 나이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이 세대로 꼽기도 했다. 피아노 춘추전국시대를 일구고 있는 조성진과 그의 세대도 마찬가지다. 특히, 빨리 유입되고 자리 잡은 악기일수록 이러한 천재 배출의 역사는 앞당겨졌다. 음악의 ‘3대 악기’라 할 수 있는 피아노의 한동일·백건우·정명훈, 바이올린의 강효·김영욱·정경화, 첼로의 정명화 등이 좋은 예이다.

20세기의 악기로 재등장

이에 비해 비올라는 서양음악이 유입되던 20세기 초에 유입과 보급 속도가 매우 느린 대표적인 악기였다. 태생지인 유럽에서도 그 역사성은 인정받았지만 음악적인 발전과 진화는 느렸다. 파가니니, 이자이, 크라이슬러와 같은 19~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들이 이룬 ‘바이올린 특구’도, 19세기의 쇼팽이나 리스트가 피아노의 발전기를 지렛대 삼아 ‘피아노 월드’를 이룬 역사도 없었다. 비올라가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다. 작곡가들이 새로운 소리 발견에 열을 올릴 때에 비올라의 중음은 가능성의 무엇으로 다가왔다. 이를 바탕으로 작곡가들은 현을 툭툭 쳐서 소리 내는 콜레뇨, 미끄러지듯 음고를 쭈욱 올리거나 내리는 글리산도 주법, 하나의 현에서 묘한 배음을 내는 하모닉스 등의 묘수를 통해 자신의 작품과 비올라 발전의 쌍두마차를 견인하기도 했다. 쇤베르크의 현악 3중주 Op.45나 버르토크의 현악 4중주들은 이러한 특징들이 잘 두드러진다. 쇼스타코비치는 비올라 소나타 Op.147, 블로흐는 비올라와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테라이어넬 테르티스르티스(1876~1975)나 윌리엄 프림로즈(1904~1982)와 같은 비올리스트들은 이러한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힌데미트(1895~1963)는 비올리스트이자 비올라 전문작곡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특히 프림로즈는 1944년 버르토크에게 협주곡을 의뢰하여 비올라 협주곡을 낳게 했다. 뛰어난 기교를 소유했던 그는 바이올린 작품들의 보고(寶庫)를 곁눈질하며 바이올린 작품들을 비올라의 세계로 전이시키는 데 성공의 깃발을 올리기도 했다.

실내악·관현악과 발전한 한국의 비올라계(1920~1960)

이처럼 비올라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던 때에 근대화의 물결이 일어난 조선에는 ‘클라리넷트와 비올라 선수(選手) 오시오’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동아일보 1927년 9월 2일)가 난다. “시내 중앙기독청년회에 있는 중앙관현악단은 추기부터 내용을 일층 충분히 할 터인데 시급히 클라리넷과 비올라를 하는 이를 구하는 중인데 이것을 할 줄 아는 이로 동(同)단에 가입코자 하면 청년회로 내문하기를 바란다고.” 중앙관현악단은 오늘날 한국최초의 관현악단으로 불리는 중앙악우회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구색을 갖추고 운영된 악단이다. 일제강점기에 홍난파(1897~1941), 계정식(1904~1974) 등이 선보인 ‘독주’악기로서 바이올린과 달리 비올라는 악단을 구성하는 ‘부속’악기로 수용되었다. 바이올린으로 명성을 날리던 안성교가 가끔 비올라를 잡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해방을 맞이한 후 1945년 고려교향악단, 1946년 서울관현악단 등이 만들어지면서 교향악단은 비올라 단원들을 수용하고 활동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그중 비올라 단원들이 마음 맞는 이들과 실내악단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작은 활동들이 비올라의 안착과 보급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49년에는 음악애호구락부가 제11회 정기공연으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음악회’라는 공연명을 내걸기도 했다(구락부(俱樂部)란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 장소는 서대문에 위치한 자연장(紫煙莊)으로 문화예술인들이 모인 다방이었다. 전희봉이 바이올린을 잡았고,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던 정희석(1917~2002)이 비올라를 연주했다. 1957년 계정식이 구성한 현악 4중주단에서 강필정이 비올라를 연주했고, 1958년 ‘음악천재가족’이란 기사에는 정명화, 정경화와 함께 소년 정명근(비올라)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다. 1960년대에 비올라의 발전을 이끈 것은 비올리스트가 아니라 선구적인 바이올리스트들이었다. 당시 서울대 교수이던 안용구가 대표적이 인물로 그는 재학생이나 졸업생 등 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소·중규모의 실내악단으로 드문드문 배출되는 전공자들을 껴안고 성장시켰다. 1960년 안용구가 이끄는 서울실내악회는 제37회 정기연주회를 선보였는데 그때의 비올리스트는 김용삼이었고, 그의 유학으로 공백이 생기자 김용윤이 그 자리를 메우기도 했다.

1960년대에 창단되는 오케스트라들은 비올리스트들의 직장이자 집결지였으며, 새로운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1965년 김만복/서울시향은 “송년음악회로서의 다채롭고 중후한 레퍼토리”(경향신문 12월 25일)를 준비했다며 모차르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K364을 백운창과 비올라 단원 김용윤의 협연으로 선보였다. 1967년에는 KBS교향악단의 단원 김세미리가 국립극장에서 독주회를 가지며 보케리니 소나타를 선보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양대산맥이던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과 서울시교향악단의 비올라 파트는 일종의 군단 내의 사단과도 같았다.

한국에서 독주악기로의 조명(1970~1980)

김용윤은 1970~1980년대에 주목 받는 비올리스트였다. 1972년 3월 15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선보인 국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에서 버르토크 비올라 협주곡을 객원지휘자 오펠라의 지휘로 초연했다. 같은 해 9월 5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강신성이 블로흐 비올라와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을 협연했다. 강신성은 1954년 도미 후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34년 동안 재직한 이였다. 1980년대에도 김용윤이 중심을 이루었다면 오순화가 새로운 피를 수혈하기도 했다. 서울예고 1학년 때 미국유학을 떠나 줄리어드음악원에 재학 중이던 오순화가 벨리오스 비올라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곳곳의 실내악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1985년 6월 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그녀의 독주회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비올라 주자가 적은 우리 음악계에 돋보이는 활동”(동아일보 1985년 5월 10일)이라는 기사가 떴고, “바이올린을 전공하다 79년 비올라로 바꿨다”(경향신문 1985년 6월 4일)라는 이력도 언급되곤 했다. 1986년에는 KBS교향악단 수석 최승용를 중심으로 55명의 비올리스트가 한 무대에 오르는 공연도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고, 1988년 연세 비올라 앙상블, 1989년 중앙비올라 앙상블이 음악계에 얼굴을 내밀며 오케스트라-실내악-독주로 삼분화된 비올라계에 새로운 앙상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한국비올라협회도 이 물결에 합류했다.

국내음악계에 수혈된 젊은 피(1990~2000)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여행 자유화가 시작됐다. 이로 인해 해외 유학생들과 음악가들의 국내외 활동이 예전보다 훨씬 매끄럽고 유연해졌다. 1980년대에 신예로 등장한 오순화는 1990년대에 이르러 더욱 넓고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간다. 위찬주, 조명희 등 젊은 비올리스트들의 경쟁도 비올라 생태계에 건강을 불어넣었다. 1990년 창단된 금호현악4중주단에는 조중기가 창단 멤버로 합류했고, 이후 배은환, 김상진 등이 뒤를 이었다. 그중 김상진은 동아콩쿠르 비올라 부문에서 1991년 첫 수상자가 된다. 1995년에는 광복 5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최은식이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에 정명훈, 강동석, 김영욱, 한동일, 조영창 등과 함께 실내악을 선보이며 새 얼굴로 등장했다. 1993년 새로운 음악교육을 목표로 개교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오랜 전통과 기반을 닦아온 서울대와 함께 음악계에 활력소가 되었다. 국내 음악계가 간과해 온 실내악 교육에 과감히 투자했고, 오순화가 교수진에 합류하면서 재학생 및 졸업생들로 1980년대와 색이 다른 비올라 사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뉴잉글랜드 음원원과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교수 경력을 쌓은 최은식도 30대 초반의 나이로 1990년대 말에 서울대 교수진에 합류하면서 한예종-서울대 양대 산맥에 든든한 비올라 교육진영이 갖춰졌다. 1999년에 비올라 전문잡지 ‘올라 비올라’가 창간되어 비올리스트들과 마니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었는데, 이 잡지는 오순화가 발행한 것이었다.

비올라 신인류의 탄생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수석 김사라(1988~),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 수석 김세준(1988~), 베를린 필하모닉의 박경민(1990~), 세인트 폴 심포니의 심효비(1990~), 베를린 필하모닉 카라얀 아카데미의 김규리(1992~)는 이러한 환경이 일군 비올라 생태계에서 태어난 신인류이다. 독주악기로서의 한계를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입단이라는 탈출구로 삼아 음악가로서의 제 이름 석자를 드러낸 존재들이다. 학교의 실내악 교육을 자양분 삼아 동문 중심으로 끊임없이 세계적인 실내악 콩쿠르를 두드리며 승전보를 올린 노부스 콰르텟과 그 속에서 비올라를 잡았던 이승원의 사례도 독주악기로 각광받지 못한 비올라에 대한 조명을 오히려 실내악을 통해 ‘돌려차기’를 한 좋은 사례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김사라(1988~)는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를 거쳐 베를린 음대, 뮌헨 음대에서 공부했다. 멘델스존 콩쿠르와 베토벤 흐라데츠 콩쿠르, 막스 로스탈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2013년 브라운슈바이크 오케스트라 수석 비올리스트로 발탁됐고, 2019/2020 시즌부터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1743년에 창단, 예술감독 안드리스 넬손스)의 수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뮌헨 음대에서 비올라 겸임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수석 김사라
도구가 아닌 목적의 음악

1994년, 소련 붕괴 후 혼돈의 시기. 김사라는 일곱 살 나이에 선교사 부모를 따라 러시아 모스크바로 갔다. 당시에는 러시아 어디를 가도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심한 인종 차별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학교 짝꿍이 책상에 침을 뱉을 정도였다고. 그래서인지 김사라는 어릴 때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다. 자칫하면 자존감 낮은 아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 덕에 어디를 가도 자신감 가득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부모님은 김사라의 손에 바이올린을 쥐여줬다. 몇 달 지나 러시아 그네신 영재 학교에 합격했다. 바이올린은 곧잘 했는데, 사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 입학한 후, 쟁쟁한 연주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혼란스러웠다. 그제야 진정으로 좋아하는 걸 고민하기에 이른다. 어릴 때 잠깐 재미 삼아 연주했던 비올라. 그 악기가 마음을 스쳤다. 김사라는 친한 동생 박경민(베를린 필 단원)을 데리고 학교 악기 창고로 가서 비올라 한 대를 골라달라고 했다. 비올리스트 김사라의 시작이었다.

 

 

 

 

 

 

 

실내악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이다. 베를린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르테미스 현악 4중주단(1989년 창단, 바이올리니스트 비네타 사레이카·김수연, 비올리스트 그레고르 시글, 첼리스트 해리엇 크리흐)에게 실내악을 배우기도 했다.

실내악은 내 인생과 늘 함께했다. 친언니가 플루트를 전공해 늘 듀오로 호흡을 맞췄다. 그때는 제1바이올린을 하는 걸 좋아했다. 돋보이고 싶었으니까. 진정한 실내악의 즐거움은 비올라를 하면서 알게 됐다. 비올라는 빈 화성을 채워준다. 들어갈 땐 들어가고, 나올 땐 나오는 그러한 묘미를 깨달았다.

솔리스트나 실내악 연주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향성이 있었을 텐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방향성을 잡은 계기는.

실내악 주자가 하고 싶었지만 금전적인 문제가 컸다. 2013년 봄에는 나이 때문에 장학금이 끊겼다. 뮤지컬 반주도 들어오지 않았고, 콩쿠르 상금은 다 쓴 상황이었다. 당장 집세를 낼 돈도 없었다. 식당 아르바이트를 두 달 동안 했는데 팔목에 무리가 왔다. 오케스트라 원서를 열 군데 넘게 넣었는데도 오디션 제안은 두 곳에서만 오더라. 그동안 노력해서 이뤄낸 콩쿠르 입상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는 제일 처음 본 브라운슈바이크 오케스트라 수석 오디션에 합격해 일을 시작했다.

독일은 각 오케스트라마다 추구하는 소리의 특징이 다르다. 개인적인 취향은 어느 악단과 맞닿아 있나. 독일 오케스트라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방송교향악단, 콘서트 오케스트라, 오페라 오케스트라, 체임버 오케스트라이다. 제일 큰 차이는 방송교향악단과 오페라 오케스트라인 것 같다. 방송교향악단은 녹음과 녹화를 많이 하기 때문에 정확성과 완벽성을 중요시한다. 타이밍이 정확해야 하니 소리 색깔도 명확한 것 같다.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매일 다른 지휘자와 성악가들과 오페라 연주를 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유연하다. 지휘자의 비트보다 늦게 반응하는 것도 대부분 오페라 오케스트라다. 여러 오케스트라를 경험하며 나만의 취향이 생겼다. 게반트하우스는 유연하게 연주할 수 있지만 보수적인 악단이다. 출근하면 모두가 친근하게 악수하며 상냥히 인사를 나누지만, 오케스트라 전통과 맞지 않는다면 지휘자와 거침없이 싸우는 우직한 곳이다. 그런 것들이 좋았다.

스스로 ‘게반트하우스’ 사운드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게반트하우스는 어둡고 따뜻한 소리가 특징이다. 무엇보다 작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악단이다. 들리지 않을 정도의 피아니시시모보다 더 작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다.

수석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브라운슈바이크보다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계속 봤지만 낙방했다. 게반트하우스는 오디션을 세 번이나 봤고, 총 열네 번째 오디션 만에 합격했다. 게반트하우스 오디션 방식은 정말 살 떨린다. 특히 본선 오케스트라 엑섭 라운드에서 모든 후보들이 무대에 올라 같은 엑섭을 차례대로 연주한다. 나는 예선 없이 본선으로 바로 올라왔는데 후보가 나밖에 없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혼자 보는 오디션이었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텐데. 많은 단원들이 나만 보려고 일부러 출근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연주하려고 노력했다.

규모가 상당히 큰 오케스트라이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악단에서 다섯 명의 수석은 각자 무슨 역할을 하는가. 단원이 총 185명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오케스트라 중 하나다. 비올라 수석만 다섯 명이다. 이 오케스트라는 세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심포니 연주와 오페라 연주, 교회 연주가 매주 동시에 돌아간다. 나는 오페라 연주의 수석을 맡는다. 심포니를 할 때에는 부수석을 한다. 서열로 따지면 수석들 중 가장 입단이 늦은 막내다. 리드도 하고 보좌도 하면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비올리스트 김사라’가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누구인가.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신 미하엘 포글러는 야생마 같은 나를 독일 이론을 중심으로 연구하도록 이끄셨다. 비올리스트 프리데만 바이글레는 두 악기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하르트무트 로데는 악보에 충실하도록, 닐스 묀케마이어는 진짜 비올라 소리를 찾도록 도와줬다.

그렇다면 ‘비올리스트 김사라’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나. 2015년 여름, 첫 비올라 스승인 프리데만 바이글레가 돌아가셨다. 독일에서 아버지처럼 따르던 분이었다. 그분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가야겠다는 사명감이 들더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즐겁게 연주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고, 음악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지 고민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독일에서의 삶은 만족하는가. 유럽의 나라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개인주의가 강해서 남의 시선은 별로 중요치 않다. 교수들은 에코백을 매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나 역시 날이 좋으면 자전거를 타거나 가족과 산책한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한식을 요리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아들 백일잔치여서 30인분 한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안주하는 걸 경계한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끊임없이 배우고자 한다. 현재 뮌헨 음대에서 겸임교수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언젠가 정교수가 되고 싶은 꿈도 있다. 학생들이 나를 통해 음악의 즐거움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싶다. 내가 선생님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글 장혜선 기자

 

김세준(1988~)은 바이올린 전공으로 예원학교 및 한국예술종합학교(김남윤 사사)을 졸업했다. 동 대학원 재학 중 비올라로 전향했고,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타베아 치머만을 사사한 후 현재 하노버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다. 2018년 도쿄 콩쿠르에서 2위 입상 등 솔리스트로서의 활약뿐 아니라 아벨 콰르텟(바이올리니스트 윤은솔·박수현, 비올리스트 김세준, 첼리스트 조형준) 멤버로 2016년 제네바 콩쿠르 현악 4중주 부문에서 3위를 기록했다.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은 1920년 니더작센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창단했고, 현재 앤드류 맨츠가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 수석 김세준
성장을 넘어 성숙으로

음악가에게 도전이란 무엇일까. 레퍼토리를 넓혀가는 것?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것? 세계 유수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온 비올리스트 김세준에게 도전은 저명한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2014년 힌데미트 콩쿠르 1위없는 2위, 2015년 막스 로스탈 콩쿠르 3위에 이어 2018년 도쿄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2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관심을 두던 차, 4라운드에 걸친 긴 오디션 끝에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의 비올라 수석 자리를 꿰찼다. 해당 악단의 수석이라는 자리, 꽤 무거울 수 있겠으나 서면으로 만나 본 그는 책임감만큼이나 설렘을 함께 품고 있는 듯했다.

 

 

 

 

 

 

 

 

 

 

 

 

지난해 7월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 오디션의 최종 2인에 올랐고, 객원으로 파이널 라운드인 프로젝트 연주를 거쳐 최종 수석으로 선발됐다. 오디션 과정에서의 에피소드가 궁금하다.

2차 오디션에서 한 참가자가 당일 다른 도시에서의 연주가 있다며 결과 발표 전에 파이널 연주를 하고 가겠다고 했다. 이후 파이널 라운드에 혼자 올라가게 되어 부담 없이 연주하고 나왔는데, 2차에서 먼저 자리를 떠난 그 연주자와 나 이렇게 둘에게 각각 객원 수석으로서의 프로젝트 연주를 시켜보고서 최종 결정을 하겠다고 하더라. 조금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웃음)

다른 한 연주자는 어떠한 사람이었나? 이분 역시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에서 활동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과 바이에른 오페라 오케스트라 부수석으로 활동한 바 있는 연주자였다.

비올라 수석으로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는가? 수석은 해당 파트의 단원들을 이끌어야 하므로 소리나 제스처 등에 확신을 가지고 연주해야 한다. 지휘자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하는 능력도 필요하고, 다른 파트의 수석들과도 컨택을 잘해야 하기 때문에 음악적인 유연함도 함께 요구된다. 단원들 역시 수석이 카리스마 있게 리드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단원들과의 사이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동양인 연주자나 객원 출신 연주자에 대한 텃세 같은 것은 없나? 나 또한 그 부분이 제일 걱정됐는데, 다들 열린 마음으로 지지해줘서 힘을 얻고 있다. 보통 리허설 한 시간 전, 혼자 연습하고 있을 때마다 먼저 인사도 해주고 안부도 물을 만큼 살가운 분위기다. 몇몇 단원들은 크고 작은 실내악 팀을 결성해서 일 년에 여섯 번 정도 연주회를 여는데, 다음 시즌에 벌써 세 팀이 함께 하자고 제안이 왔다!

살가운 분위기의 오케스트라라는 말이 따뜻하다. 그 외에도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이 갖는 독특한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현재 상임지휘자로 계신 앤드류 맨츠는 유명한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의 지휘자다. 그래서 현악 연주자들에게 상당히 실용적이고 센스 있는 제안을 많이 해주신다. 단원들 역시 두 달에 한 번씩 바로크 곡들로 구성된 연주회를 가질 만큼 바로크 음악에 대한 관심이 크다. 각 파트의 수석들은 앙상블이나 디테일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며 리허설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전체적인 악단의 분위기로는 철저한 분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느꼈다.

유럽 전역에서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에 대해 가진 인식도 궁금하다. 이후 북독일방송(NDR)의 지원을 받으면서 명칭이 바뀌었지만, 1920년 니더작센(하노버를 포함한 주 이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창단된 유서 있는 오케스트라다.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는 하노버 요제프 요아힘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의 반주를 맡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바이올린으로부터 시작해 비올라로 악기를 전향한 케이스다. 누구보다 두 악기를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가장 큰 차이점을 꼽는다면? 바이올린에 비해 밸런스 적인 측면을 많이 고려하게 되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바이올린은 보통 반주보다 높은 음역대에 위치하지만, 비올라는 반주 음역대 안에 들어가 있거나 더 낮은 음역대에 속할 때도 많다. 따라서 홀에서 다른 악기나 성부를 뚫고서 소리가 나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된다.

이제껏 악기의 매력에 대해 탐구했다면, 연주자 김세준의 매력 역시 궁금하다. 유럽에서 보내는 일상은 어떠한가? 같이 활동하고 있는 아벨 콰르텟과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공연하는 것이 내게는 연주이자 곧 여행이다. 올해만 해도 이들과 함께 핀란드와 루마니아를 처음 가봤는데, 새롭고 즐거웠다. 연주가 없을 때는 보통 커피나 와인을 즐기며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커피에 관심이 생겨서 카페에서 원두를 산 후 집에서 직접 내려 마시기도 한다. 사람들을 초대해 내가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것 역시 소소한 즐거움이다.

꽤 멋진 모습으로 성장해 온 것 같다. 본인에게 있어 ‘성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음악가의 숙명이자 음악을 하는 한 계속 함께 가야 할 것 같은 단어다. 이제부터는 성장보다는 성숙이 더욱 필요할 수도 있겠다.

2020년,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만나볼 김세준의 연주가 기대된다. 1월 신년음악회부터 오케스트라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 연주회에는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협연한다. 1월 중순에는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첼리스트였던 발렌틴 베린스키 추모 음악회에 아벨 콰르텟으로 초청받아 연주한다. 한국에서는 5월 21일, 역시 아벨 콰르텟과 베토벤 초기, 중기 그리고 후기 콰르텟을 한 곡씩 연주할 예정이다.

글 권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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