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
파격적 손짓으로 클래식의 심장을 찌르다
쿠렌치스가 가는 길은 언제나 뜨겁다. ‘평범함’이란 단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음악과 행보에는 애매모호한 중간이란 없다. 그러니 결과 또한 양쪽으로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과연 그는 클래식 음악계의 이단아일까, 구원자일까?
파트 구성
1 쿠렌치스와 무지카 에테르나
2 디스코그래피
3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
4 지휘자가 창단한 오케스트라
5 쿠렌치스 2020년 상반기 주요일정
PART 1
ABOUT CONDUCTOR
테오도르 쿠렌치스 & 무지카 에테르나
유토피아를 꿈꾼 변방의 고수들
4월 7·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테오도르 쿠렌치스(1972~)가 이끄는 무지카 에테르나의 첫 내한이 예정됐다. 앨범으로 확인한 쿠렌치스의 실체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갈증이 크다. 그러나 한국에 이어 일본 공연이 연계되어 코로나 사태에 대처하는 현지 정부 대처가 미흡할 경우 올해 아시아 투어를 낙관할 수 없다. 지난해 일본 공연과 마찬가지로 이번 내한에도 쿠렌치스 측은 사전 인터뷰를 사절했다. 이래저래 쿠렌치스는 안개 뒤에 있다.
논란 속 성장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지휘자·연주자의 첫 출연 이후, 재초청을 정하는 투표를 시행한다. 2019년 11월 29·30일 일찌감치 유료 매진된 베르디 ‘레퀴엠’ 공연이 끝나고 쿠렌치스 역시 단원들의 찬반에 올랐다. 베를린 필 단원들의 의사가 어땠는지는 대외비지만 차차기 시즌 프로그래밍을 보면 표심을 유추할 수 있다. 베를린 필 단원 역시 쿠렌치스를 접한 청중처럼, 찬반 한쪽으로 표심이 완전히 기울 가능성은 크지 않다.
2010년대 내내 쿠렌치스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자신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 속에 성장했다. 2005년 11월,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내가 클래식 음악을 구원하겠다(I will save classical music)”라고 했을 때만 해도 돈키호테식 괴짜 이미지였다. 해당 발언은 2005년 쿠렌치스가 전열을 재정비한 앙상블 무지카 에테르나를 홍보하는 용도였다.
그러나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극장(2004~11), 페름 오페라 발레 극장(2011~19)에서 쿠렌치스가 감독으로 일군 성과는 철저히 본인을 엘리트로 놓고 단원의 노력을 ‘갈아 넣은’ 산물이다. 페름에선 최장 14시간 리허설을 진행했는데 자유 진영에선 냉전 시기에도 불가능한 일이다. “클래식 음악을 살리겠다”는 감독이 자신들을 도구로 삼고자 할 때, 무지카 에테르나와 페름 오페라는 가히 신앙 공동체 이상의 결속으로 리더를 떠받쳤다. 변방의 조직이 음악계의 중심부로 나가려는 의지를, 쿠렌치스는 본인의 이상 실현에 십분 활용한 셈이다.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 바덴바덴과 프라이부르크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의 합병체인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SWR Sinfonieorchester Baden-Baden und Freiburg, 이하 SWR)이 2018년 자신을 초대 수석지휘자로 들인 상황도 매한가지다. 러시아 국적의 그리스인이 성악가에게 독어 딕션을 교정하는 체계가 자리 잡은 독일 악단은 현재 SWR 뿐이다. 쿠렌치스가 감독으로 머무는 곳에선 익숙한 듯, 새로운 소리를 만드는 양식을 카리스마로 인정하고 음악적·상업적으로 존중한다.
지휘자의 탄생
쿠렌치스는 1972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경찰 경력의 부친과 피아노 교사 모친 사이에 자랐다. 네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그 시절에 “오케스트라 울림에 매료됐다”고 유아기를 회고한다. 정규 과정을 통해 바이올린·작곡·성악을 익혔지만 “다른 이의 악보를 읽는 느낌이 거북했다”고 밝힌다. 쿠렌치스의 감성은 음반이 배양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테이프를 들었고, 결국 자신에겐 “클래식 음악이 가장 호쾌한 음악”이라는 결론을 냈다. 1989년 쿠렌치스는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을 접했고, 현장을 찾아가 무너진 질서에서 문화가 어떻게 맥동하는지 봤다. 펑크와 히피가 뒤섞이고 생태주의자와 뮤지션들이 동독식 아파트와 클럽에 모여 자신들의 방법으로 구질서를 무너뜨렸다. 고향에서 맛볼 수 없던 극한의 자유가 10대 쿠렌치스 눈에는 음악과 문학으로 새벽을 밝히던 1920년대 파리로 비쳤다.
1990년 만 18세에 당시 아테네에 근거한 무지카 에테르나 앙상블의 수석지휘자가 됐다. 1994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건너간 그는 테미르카노프·비치코프·게르기예프를 가르친 일리야 무신(1903~99) 문하에 5년간 있었다. 악단과 양방향으로 교류하기보다, 비타협 성향으로 음악을 종결하는 자세는 무신 제자들 공통의 성향이다.
쿠렌치스가 유학 기간 목격한 소련 붕괴 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가관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 자본주의에 저항하며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진지가 됐던 도시는, 5년도 지나지 않아 군부와 결탁한 신흥재벌이 장악했다. 극단적인 빈부 격차, 공산 시절보다 더한 관료제, 변화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민의 좌절, 이때다 싶어 취약 계층을 파고드는 옴진리교까지, 레닌 없는 도시에 또 하나의 혁명이 절실히 요구됐다.
클래식 위의 개혁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에서 테미르카노프(1938~)의 조수 자리가 나와도, 마린스키와 모스크바 헬리콘 극장 지휘 기회가 와도 러시아의 대도시에선 쿠렌치스가 개혁할 여지가 없었다. 2003년부터 5년간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았지만, 모스크바를 바꾼 건 없다. 베를린의 자유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환멸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려면 쿠렌치스에겐 전권을 행사할 감독급 자리가 필요했다.
2003년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발레 극장이 쿠렌치스를 불렀다. 처음엔 스트라빈스키 발레 ‘요정의 키스’를 지휘했고, 이듬해에는 베르디 ‘아이다’를 맡겼다. 이 작품이 러시아 공연계 최고 권위의 골든마스크상을 극장에 안겼다. 2004년 노보시비르스크 극장 감독에 오르며 쿠렌치스의 개혁은 무지카 에테르나와 노보시비르스크 극장 두 갈래로 병진했다.
쿠렌치스가 거점을 시베리아의 오지로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제도화된 흥행 틀에서 안주하는 클래식 음악계를 바꾸려면, 기존 시스템이 굳어지지 않은 소도시에서 훗날을 도모하는 전략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이다. 특히 무지카 에테르나와는 밤새 연습하고 녹음할 자유를 단원들에게 확보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알파(Alpha)에서 출반한 퍼셀 ‘디도와 에네아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4번의 사운드는 귀기와 영성이 충만하다.
우선, 알파 녹음에서 고전을 대하는 쿠렌치스의 태도는 기존 전문가들과 다르다. 바로크 당대를 살피거나 사회주의 시절의 기록을 더듬는 수고는 없다. 활의 스크래칭이나 소리를 증폭하는 방법 역시 해당 분야 권위자들의 교과서적 접근과 다르다. 비브라토 대신 어떻게 정확을 기할지, 기악 주자들은 각자의 주관을 버리고 지도자를 따르라는 명이다. 쿠렌치스는 고전주의 레퍼토리에서 관악기는 당대 악기를 쓰고, 첼로를 뺀 주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하곤 하는데, 그런 방식의 효율이 무엇인가 외부에 부연하지 않는다.
쿠렌치스의 발톱이 드러난 건 2007년 베르디 ‘레퀴엠’부터다. 성악·기악 구분 없이 정밀 기계가 최대한의 성능을 발휘하듯, 연주 내내 솔리스트와 무지카 에테르나를 몰아쳤다. 소련 시대에도 비정한 해석은 많았지만 작품 뒤에도 인간미가 그려지지 않는, 바싹 마른 결정체는 찾기 어려웠다. 쿠렌치스호는 엄청난 스피드를 내달리다 느닷없이 급감하면서, 에너지가 분산되는 순간의 디테일마저 슈퍼 슬로 카메라의 영상처럼 살렸다. 0.7배속에서 1.5배속을 수시로 오가는 ‘레퀴엠’은 무티의 그것에 없는, 말초 감각의 절정을 보였다.
지휘를 보다 보면, 쿠렌치스는 무신의 제자 게르기예프와 자연스레 비교된다. 양자는 총체적인 형태의 쾌감이 아니라, 통제된 상태에서 정확성에 집중하는 방식이 빼닮았다. 지휘자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텍스처를 담아내는 핑거링 역시 흡사하다. 그렇게 빚어진 관현악의 집단 기교는 놀랍지만,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거대한 감동과 거리가 먼 것도 비슷하다.
‘마린스키의 차르’ 게르기예프가 오페라 전막에서 네트렙코 같은 슈퍼스타를 기용하는 반면, ‘페름의 차르’ 쿠렌치스는 앙상블의 베테랑이나 무명 실력자를 중용한다. 전막에서 세계적 가수가 쿠렌치스를 가리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가수에 쉴 틈을 주지 않고 밀고 나갈 때, 성악가는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결국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2019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함께한 바르톨리(1966~)에게 개인의 어질리티를 허용한 사례가 예외다. 전체적으로 쿠렌치스의 협연자 풀은 협소하다. 4월 도쿄 ‘합창’ 공연에 테너 김우경이 캐스팅됐지만, 한국 연주자와의 특별한 인연이 없고 아시아계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자신감으로 무장한 음악
2011년부터 시작된 페름 시대는 업그레이드된 ‘2기 노보시비르스크 시대’다. 그를 따라 무지카 에테르나도 터전을 옮겼다. 페름 정부는 이전보다 더 많은 자금과 운영의 자율성을 쿠렌치스에게 부여했다. 우랄 산맥 기슭의 퇴락한 공업 도시는 쿠렌치스에게 세상에서 더 멀어진 느낌을 줬고 그래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펼치기에 용이했다.
페름에서 리허설 강도는 이전보다 세졌다. 100퍼센트 지휘자가 만족할 때까지 진행됐다. 이전까지 고정 레퍼토리에 물렸던 단원들도 지휘자가 안내하는 시대악기 주법에 접근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을 들일수록 음악이 좋아진다는 점에 공감했고, 이는 과거 사이먼 래틀이 무명에 머물던 버밍엄 심포니를 조련하던 방법이다.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지시한 쿠렌치스의 지도를 따르다 보면, 원래 연주했던 고전이 사실은 이랬다는 느낌을 자각한다.
그러나 쿠렌치스 이전에 아르농쿠르(1929~ 2016)가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에서, 요즘은 프랑수아 자비에 로트(1971~)가 레 시에클에서 추진하는 개념과 큰 차이는 없다. 이준형(음악 칼럼니스트)의 견해처럼 쿠렌치스는 르네 야콥스가 주저했던 ‘최후의 선’을 넘어, 원작을 바꾸면서 음악을 휘몰아친다. 쿠렌치스는 자신이 뭔가를 창조해낸다는 느낌에 몰입한다.
포디움 위의 존재는 텍스트를 읽는 역할이지만, 나와 내 조직원이 음악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발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물은 원작자 의도와 다를 수 있다는 지적에 두려움이 없다. 스스로를 선대 작곡가의 심사를 정관할 자질이 있고, 그래서 자신은 포디움 위에서 읽는 존재일 뿐 아니라 ‘제2의 작곡가’라는 입장이다. 남들은 못 보는 걸 본다는 선민의식이 팽배하다.
기존 고음악의 대가들이 일관된 학적 흐름을 유의하는 반면, 쿠렌치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노선에 기존의 학적 토대를 이기적으로 참고하는 수준이다. 겉으로는 교조주의지만, 내용상으로 후계자나 후대를 기약하기 어렵다. 쿠렌치스의 연주는 컬트적이지만, 영화 장르에서 컬트 무비가 어떻게 쇠락했는지는 음악가와 그 주변이 살필 만하다.
‘최후의 선’을 넘어, 원작을 바꾸면서 음악을 휘몰아친다.
쿠렌치스는 자신이 뭔가를 창조해낸다는 느낌에 몰입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페름 시절의 후반기, 쿠렌치스는 모차르트와 이탈리아 오페라에 집중했다. 다분히 유년 시절에 함양한 펑크와 록 영향이 작품에 묻었고, 기인적인 연주가 튀어나올 때의 탄성이 투어에 이어졌다. 런던을 비롯해 연주 여행을 나간 곳에서 카라얀(1908~89)과 푸르트뱅글러(1886~1954)의 기억이 소환됐고, 쿠렌치스가 후속 리코딩으로 실증적인 대답을 이어나간 형식도 카라얀을 닮았다. 공연의 라이브 녹음으로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추세에, 쿠렌치스는 스튜디오 편집을 통해 음반물에 환상을 심고, 공연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음반 제작에선 철저히 거장 지휘자 시대의 관습을 답습하지만, 클래식 음악에선 복고가 결국 혁신이라는 주장이다.
지난해 여름 페름 오페라 발레 극장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쿠렌치스는 SWR에 집중한다. 무자카 에테르나와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 확실히 SWR에서 쿠렌치스는 러시아에서 보다 여러 행동이 조심스럽다. 2010년대부터 꾸준히 독일권 오페라 극장문을 두드렸고 ‘오페른벨트’지가 여러 차례 ‘올해의 지휘자상’을 몰아줘 독어권에서 그의 명성을 높였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베를린 필하모닉이 쿠렌치스를 접했지만, 아직 빈 필과 바이로이트는 별 관심이 없다. 영웅을 대접할 줄 아는 미국 시장이 활짝 열렸지만, 아직 쿠렌치스의 기호에 맞는 현지 악단과 합을 맞추긴 어렵다.
쿠렌치스는 어디로 갈 것인가? 본인이 꿈꾸는 이상향을 어디에 구축하느냐에 따라 행로가 정해질 것이다. 결국 1920년대 예술가들이 파리에서 누린 예술지향과 베를린 붕괴 직후의 자유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기 손으로 펼칠 순간을 기다리지 않을까? 푸틴은 자신의 지시로 쿠렌치스에 러시아 시민권을 부여했다. 손쉽게 클래식 음악의 위기를 단정하고, 메시아도 편리하게 찾아보려는 시대의 게으름은 ‘가짜 베토벤’ 행세를 한 사모라고치 마모루(佐村河內守, 1963~) 사건(‘일본의 베토벤’이라 불리던 그가 대리 작곡가를 기용해왔단 사실이 밝혀지며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을 낳았다. 무엇이 다른지 숙고하지 않고 정통과 이단, 사이비를 구획하면 늘 쿠렌치스는 열광 아니면 혐오의 존재에 머무른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
테오도르 쿠렌치스/무지카 에테르나 협연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
4월 7·8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족, 교향곡 5·7번
PART 2
RECORD
쿠렌치스/무지카 에테르나 디스코그래피
틀 깨고 화제의 중심이 되다
클래식 음악을 구원하겠다는 당찬 포부와 함께 음악계에 파란을 일으키며 등장한 테오도르 쿠렌치스와 그의 수족 무지카 에테르나의 음반들은 그 가짓수가 이제 열 손가락을 겨우 넘을 정도이지만, 음반 하나하나가 가져온 파괴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토스카니니 이후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던 악보 제일주의를 가볍게 무시하고,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하겠다는 완고한 훈고학에서 탈피, 지휘자와 연주자의 직관, 청중의 재미를 최우선으로 하는 음악관이 충실히 반영된 쿠렌치스/무지카 에테르나의 음반들은 이제 이들의 안티들에게도 “한 번 들어볼 가치는 있다”라는 평을 끌어낼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신보가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화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알파 3부작
알파(Alpha)에서 이들의 첫 녹음인 퍼셀 ‘디도와 에네아스’(2008년)❶가 나왔을 때, 대부분의 평론가는 이 분야에서는 생소한 러시아 변방의 시대악기 앙상블이 하나 더 추가된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어떤 이는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으나 몇몇은 냉담했고, 사실 대다수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2011년 모차르트 ‘레퀴엠’❷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4번 음반❸이 출시되자 이들이 여타의 시대악기 앙상블이 아님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 시대악기 앙상블이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가 있을 수 없었으니, 이들은 필요에 따라 악기를 바꿔가며 연주할 수 있고, 게다가 해석의 방향도 기성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하는 것뿐이었다.
알파에서 출시한 음반 중에서 특히 기괴한 연주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발매 당시부터 쿠렌치스의 명성이 최고조로 올라온 지금까지도 이 앨범이 주는 충격의 강도는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그의 경배자를 자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코파친스카야는 “숨 막힐 정도로 훌륭한 모차르트”라고 평했지만, 어떤 지휘자는 “내가 그를 아무리 존경하더라도, 그의 모차르트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열렬한 추종자와 매서운 반대파들로 완전히 분열된 시기는 아마도 이 ‘레퀴엠’이 등장한 이후일 것이다.
파격의 정점,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그러나 쿠렌치스의 음반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2016년 초입에 발매된 쿠렌치스와 코파친스카야 콤비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Sony Classical/2016)❹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이 작품이 도대체 어떤 형체를 취하고 있었는지 헷갈리게 할 정도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 연주였다. 앞서 발매되었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Sony Classical/2015)❺이 ‘그라모폰’ 지에서 ‘에디터스 초이스’로 선정될 정도로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커플링 된 스트라빈스키 ‘결혼(Les Noces)’에도 호평이 주를 이루었지만, 러시아의 통속적인 민속 음악처럼 연주된 차이콥스키에 대해선 어떤 평을 하기에 앞서 당혹감이 밀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음반은 쿠렌치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더더욱 절대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교향곡 6번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뒤를 이어 발매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Sony Classical/2017)❻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제 모두 쿠렌치스의 예술관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격은 사라지고 대신 통일된 비전으로 작품 전체를 통제하면서 명료한 사운드의 쾌감을 직접적으로 청자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말러 교향곡 6번(Sony Classical/2018)❼ 역시 이러한 기조에는 변함이 없으나, 고전적 형식미와 해머로 대표되는 기괴한 사운드의 밸런스가 오히려 밋밋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쿠렌치스다운 파격을 기대한 팬들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다. 그들의 다음 음반인 베토벤 교향곡 5번에서는 과연 파격으로 돌아설지 아니면 ‘비창’과 말러 교향곡의 해석처럼 명료한 사운드와 통일성을 중시할지, 벌써 그 결과물이 몹시 궁금하다.
모차르트 ‘다 폰테 3부작’
알파를 떠나 소니 클래시컬로 둥지를 옮긴 쿠렌치스는 이제 자신의 국제적인 명성을 모차르트 ‘다 폰테’ 시리즈로 확고히 하게 된다. 2014년 발매된 ‘피가로의 결혼’❽에 대한 평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들어볼 가치는 있지만, 계시적이거나 획기적이거나 아니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나? 아니!”(리처드 로렌스/그라모폰) “피가로 리코딩은 완전 포화상태지만, 쿠렌치스 버전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앤드류 클락/파이낸셜 타임스)
다국적 가수들은 훌륭하지만, 쿠렌치스의 지나친 다이내믹의 대비와 악보를 무시하는 경향은 지속적으로 평론가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러나 일반 오페라 애호가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마침 비슷한 시기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시작된 세겡의 신세대 모차르트가 초호화 가수진들을 거느리고 전통과 혁신 속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내려 했던 것에 비해, 쿠렌치스의 모차르트는 한 발짝이 아니라 두 발짝 나간 것이었다. 애호가들은 이것을 전통과 관습의 먼지가 겹겹이 쌓여 그 어떤 새로운 시도도 불가능해 보였던 ‘피가로’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것으로 받아들였다. 입소문을 타고 이들에 대한 관심과 후속작들에 대한 기대도 함께 커지게 되었다. 뒤를 이어 발매된 ‘코지 판 투테’❾와 ‘돈 조반니’❿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평론가들은 합의를 보지 못했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전의 연주 관습을 깨끗하게 청소해 버리자 드러난 결과는 가히 계시적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따뜻한 욕조에서 목욕을 즐기는 안락한 경험을 기대하지 마라. 대신 신선한 새로운 통찰력을 온몸에 맞는 샤워를 즐겨라.”(BBC 뮤직 매거진)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PART 3
ABOUT THE VIOLINIST
내한공연 협연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
맨발로 누리는 자유
쿠렌치스와 무지카 에테르나의 이번 내한공연의 또 다른 주역인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1977~)는 몰도바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다. 직업 음악가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6세에 바이올린 공부를 시작했다. 1989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족 모두가 이주했고 17세 때 빈 국립음대에 입학했지만, 학업은 스위스 베른 음악원에서 끝마쳤다. 그곳에서 신경정신과 의사 남편을 만나 딸과 함께 현재 베른에서 살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개인 이력이지만, 음악인으로서의 코파친스카야는 ‘맨발의 연주자’라는 범상치 않은 무대 매너와 고전과 현대, 크로스오버와 민속 음악을 넘나드는 방대한 레퍼토리, 선입견으로 인해 만들어진 타인의 시선과 사소한 연주상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독특한 연주 스타일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깨끗하게 다듬어진 외관에 너무 신경을 쓴다. 그들은 이미 잘 만들어진 완성된 케이크가 무대 위에 올라오는 걸 좋아하지만, 나는 재료를 가져와 무대 위에서 요리한다. 잘못될 수도 있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야만 한다. 실수를 통해 다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니 꼭 필요하다.”
전통의 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그녀는 고정된 이미지에 속박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자신을 하나의 범주로 정의 내리기 힘들다고 말한다.
“나를 누구라고 콕 집어서 말하기는 힘들다. 몰도바 사람인지 스위스 사람인지 오스트리아 사람인지, 어쩌면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이다.”
코파친스카야는 일찍부터 프로 연주자의 세계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빈으로 이주한 직후 돈이 궁했기 때문에 13세에 이미 생계를 어느 정도 책임져야만 했다. 식당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결혼 등기소에서 전자 오르간을 치기도 하고, 심지어 거리에서 깡통을 놓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이 그녀의 방대한 레퍼토리에 도움을 준 것은 물론이고, 청중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누구보다도 능한 것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레퍼토리의 확장, 음악을 넓히다
독주자로서, 그리고 실내악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그녀가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은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의 음악감독으로도 유명한 작곡가 페테르 외트뵈시와 헝가리 작곡가들의 바이올린 협주곡집(Naïve/2012)❶을 녹음하면서부터다. 앨범은 2013년 그라모폰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버르토크의 걸작 2번 협주곡과 현대 아방가르드 바이올린 협주곡의 대표 격인 리게티의 작품, 여기에다 컬럼비아호 우주인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를 담은 외트뵈시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일곱’(2006)까지, 그녀는 거의 한 시간 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집중력을 전혀 잃지 않으면서 난잡하다면 난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난곡들을 능수능란하게 헤집으며 파고든다.
이 음반의 성공으로 후속작 격인 러시아 작곡가들의 바이올린 협주곡집(Naïve/2013)❷이 뒤를 이었는데, 평단의 반응은 전작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꽤 호의적이었다. 이 음반을 끝으로 코파친스카야는 나이브(Naïve)를 떠났고, ECM을 새로운 녹음 파트너로 삼아 세 장의 현대음악 음반을 취입했다. 이 음반 중에서도 만수리안(1939~)이 1978년에 작곡한 ‘바이올린과 첼로, 현악 앙상블을 위한 이중 협주곡’에 추가된 악장 ‘로망스’는 코파친스카야에게 헌정된 곡이다.(ECM/2014)❸
창작과 연주의 경계를 넘나들다
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한 코파친스카야는 친구들과 자신의 작품을 재미삼아 연주하곤 했지만, 작곡으로 성공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스승들은 작곡가로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사하라 사막에서 우산을 팔려고 시도하는 것과 진배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음악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변함이 없었다. 특히 동시대의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일은 그녀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신명나는 일이기도 하다.
“작곡가와 함께 일하는 것이 최고 중에 최고다. 작곡가가 나를 위한 작품을 쓸 때면 아무런 제안을 하지 않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곡가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과제는 해석의 방법을 찾아내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지, 내 편리를 위해 작품을 수정하는 게 아니다.”
데뷔 초기부터 여러 실내악단과 함께한 코파친스카야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관을 펼쳐 보였으며, 이것은 지금도 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ECM에서 기야 칸첼리(1935~2019)의 ‘황혼’(2004)을 그녀와 함께 녹음하기도 한 기돈 크레머와 유사한 점이다.(ECM/2015)❹
2014~2018년 세인트폴 체임버 오케스트라 예술 파트너로 활동한 그녀는 2016년 악단과 함께 ‘죽음과 소녀’(Alpha/2016)❺를 발매했다. 2017년 그래미상을 받은 이 음반은 슈베르트의 동명의 현악 4중주곡을 코파친스카야가 직접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버전으로 편곡한 것이다. 악장 사이사이에 죽음과 관련된 작품을 껴 넣어 독특한 음악적 체험을 제공한다.
2018년 가을부터 카메라타 베른의 음악감독이 된 그녀는 이듬해 9월 프로젝트 음반인 ‘시간과 영원’(Alpha/2019)❻을 발매했다. ‘죽음과 소녀’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신보는 상처받은 영혼의 치유라는 테마에 따라 중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실로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들을 담고 있다.
물론 그녀가 이처럼 하나의 테마에 따라 진행되는 다소 개인적이라 볼 수 있는 단발성 프로젝트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여타의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여러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지휘자들의 개성과 요구 사항에 자신을 기꺼이 맞추어 주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지휘자들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지휘자에 따라 어떨 때는 엄격하게 연주하기도 하고, 어떨 땐 아주 자유롭게 연주하기도 한다. 일종의 인간관계랄까.”
코파친스카야의 이러한 자세는 음반을 통해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헤레베헤와 녹음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Naïve/2009)❼에서는 시대악기 연주 스타일에 따라 날아갈 듯 가벼운 사운드를 추구했고, 쿠렌치스와 함께 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Sony Classical/2016)❽에서는 마치 러시아 토속음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우 생소한 리듬과 사운드를 선보였다. 특히 쿠렌치스와의 협연에서는 전통과 관습을 감옥 같은 것이라 여기는 코파친스카야의 음악관과 쿠렌치스의 개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더욱 기괴한 음악으로 탈바꿈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 있어 쿠렌치스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코파친스카야는 그와 같이 더욱 논쟁적이고, 뜨거운 머리를 가진 음악가들이 필요하다 변호했는데, 이 말은 다음과 같이 그녀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코파친스카야와 같은 더욱 논쟁적이고, 뜨거운 머리를 가진 음악가들이 필요하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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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ORCHESTRA STORY
지휘자가 창단한 오케스트라의 과거·현재·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지휘자와 악단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창립자와 단원, 그리고 연주회장이라는 3요소에 따라 설립되고 운영된다. 창립자는 과거에는 주로 예술 후원자나 집단, 또는 작곡가인 경우가 많았으나, 20세기 이후 도시나 국가가 예술 후원자의 역할을 넘겨받았다. 또한 작곡가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이들 대신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나 연주자가 창립자가 되는 경우가 대세다. 현대의 일반적인 오케스트라 운영 형태인 시립 오케스트라도 그 출발은 유명 지휘자의 주도로 이루어진 경우가 상당히 많으며 사실 이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휘자가 창단하고, 현재에도 그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단체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❶ 네빌 매리너/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아카데미
1958년 창단된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아카데미는 런던 심포니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네빌 매리너(1924~2016)가 영국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실내 앙상블 단체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창립했다. 초기에는 규모가 작은 바로크 음악에 집중했으나, 필요에 따라 단원들을 탄력 있게 구성하여 대편성 작품들도 자주 연주한다.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찍부터 리코딩에 주력하여 실로 수많은 음반을 만들었으며 그 숫자는 5백종을 훌쩍 넘길 정도이다. 2011년 네빌 매리너의 뒤를 이어 조슈아 벨(1967~)이 새로운 음악감독이 되었다.
❷ 존 엘리엇 가디너/잉글리시 바로크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는 존 엘리엇 가디너(1943~)가 1968년 결성한 몬테베르디 오케스트라를 발전시켜 1978년 현재의 이름으로 재창설한 시대악기 연주단체다. 몬테베르디 오케스트라는 원래 현대악기를 사용했고, 가디너가 창단한 몬테베르디 합창단의 반주를 주로 맡았으나 시대악기 단체로 변모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창단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리코딩 작업에 뛰어들었고, 필립스에서 녹음한 헨델의 메시아 전곡판(2003)을 통해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르히프(Archiv), 필립스 레이블에서 수많은 명반을 만들었으며 현재는 자체 레이블(SDG)을 통해 음반을 출시하고 있다.
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빈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 심포니의 첼리스트였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가 그의 부인 알리체 아르농쿠르와 함께 바로크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하기 위해 창단한 빈 콘첸투스 무지쿠스는 시대악기 연주 운동의 태동을 이끈 단체이다. 창단 연도는 1953년이지만, 시대악기 연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리허설을 준비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공식적인 데뷔 연주회는 1957년에야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빈의 슈바르첸베르크 궁을 연주회장으로 사용하다가 빈 콘체르트하우스를 거쳐 현재는 무지크페라인을 주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역시 리코딩 작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1962년 퍼셀의 작품들을 텔레풍켄(Telefunken) 레이블에서 취입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고음악을 남겼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면 고음악계의 ‘네덜란드 악파’를 이끌어온 구스타브 레온하르트(1928~2012)와 함께 한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일 것이다. 2016년 아르농쿠르의 타계와 알리체 여사의 은퇴 이후에는 에리히 회바르트(1956~)가 앙상블의 리더, 슈테판 고트프리트(1971~)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❹ 클라우디오 아바도/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 오케스트라 모차르트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 ~2014)는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창단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그의 주도와 영향력 아래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다. 유럽연합 청소년 관현악단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1981년 창립한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구스타프 말러 유겐트 오케스트라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그리고 오케스트라 모차르트 등은 모두 아바도가 창단하거나 직접 관여한 단체들이다. 특히 1997년 창단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이탈리아의 페라라 극장의 상주 오케스트라이자, 여름에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모체가 되기 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창단한 모차르트 오케스트라는 볼로냐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며 말년의 아바도가 가장 자주 지휘한 오케스트라이다. 아바도 사후 존속 여부가 불투명하기도 했으나 현재 다니엘레 가티(1961~)가 예술 자문을 맡으면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❺ 피에르 불레즈/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프랑스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피에르 불레즈(1925~2016)가 1976년에 창단한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은 현대음악의 연주와 육성이라는 목적으로 구성된 현대음악 전문 실내악 단체로 단원들이 모두 전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총 31명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파리 음악의 전당(Cité de la Musique in Paris)의 상주단체였다가 2015년 필하모니 드 파리로 무대를 옮겼다. 불레즈는 1979년 페테르 외트뵈시(1944~)를 첫 번째 음악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데이비드 로버트슨(1958~), 조너선 노트(1962~) 등을 거쳐 현재 마티아스 핀처(1971~)가 감독직을 맡고 있다.
❻ 윌리엄 크리스티/레자르 플로리상
레자르 플로리상은 미국 출신의 하프시코드 연주자 겸 지휘자인 윌리엄 크리스티(1944~)가 1979년 창단한 시대악기 연주 단체이자 합창단으로 프랑스 캉(Caen) 극장을 주 무대로 삼고 있다. 이름의 유래는 샤르팡티에(1643~1704)의 동명 오페라이며, 이들이 1982년 첫 공연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 취지는 아니었으나 레자르 플로리상은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 연주에 매진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작품들은 다른 오페라 극장에서 리바이벌하는 등,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 부활의 첨병 역할을 했다. 거의 매년 바로크 오페라 무대를 제작해 공연하고 이를 음반 녹음했기 때문에 다른 시대악기 연주 단체들보다 특히 오페라 앨범이 많은 편이다.
❼ 이반 피셰르/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이반 피셰르(1951~)와 졸탄 코치시(1952~)가 헝가리의 젊은 연주자들을 모집하여 1983년 창단한 오케스트라로 부다페스트에 국제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새로운 관현악단을 설립하겠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창립 초기에는 부다페스트시 당국과 오케스트라 재단에 의해 운영되었다. 음반 작업에 적극적이었던 이반 피셰르의 열정적인 활동에 힘입어 수많은 음반을 출시했으며, 이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❽ 마르크 민코프스키/루브르의 음악가들
지휘자 마르크 민코프스키(1962~)가 창단한 시대악기 연주 단체다. 레자르 플로리상의 멤버였던 마르크 민코프스키는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 연주에 특화된 시대악기 연주 단체를 구상하여 창단한 단체로, 초기에는 파리를 근거지로 두었으나 1996부터는 프랑스 남동부인 그르노블로 이전했다. 륄리(1632~1687)와 샤르팡티에(1643~1704) 등의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는 물론이고 특히 헨델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작품들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펜바흐·베를리오즈·비제의 작품도 중요한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 민코스프키는 오는 3월 서울시향과 함께 하이든 교향곡 59번 등을 연주한다.(p.66 참조)
❾ 미하일 플레트뇨프/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미하일 플레트뇨프(1957~)에 의해 1990년에 창단된 정규 오케스트라다. 본거지는 모스크바지만 창단 후부터 지금까지 사립 재단의 형태를 고수하고 있으며 오케스트라의 운영비는 개인과 기업 후원금으로 충당하여 이를 통해 운영의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다. 창립 초기부터 음반 녹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버진 클래식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2001)을 녹음했으며, 도이치그라모폰과 베토벤·라흐마니노프·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을 취입했다. 현재는 펜타톤 레이블에서 음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❿ 다니엘 바렌보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1942~)과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가 1999년에 창단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과 팔레스타인 지역과 아랍의 젊은이들을 모아 만든 단체다. 창단 후부터 지금까지 바렌보임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긴장과 갈등상태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이해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로 여름 축제 기간에 활동하며 잘츠부르크 축제, BBC 프롬스 등의 단골손님이다. 2011년 8월 15일, 국내에 첫 동반 내한한 이들은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베토벤 ‘합창’으로 평화의 연주를 전한 바 있다.
PART 5
SCHEDULE
테오도르 쿠렌치스 2020년 상반기 주요 일정
*2020년 하반기 일정은 추후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 www.teodor-currentzis.com
정리 이미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