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포장을 거두고 삶으로 들어온 음악가
세 살 무렵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처음 피아노를 만나고 열두 살에 혈혈단신 프랑스로 떠났다. 콩피에뉴 음악원을 5개월 만에 조기 졸업하고, 루앙 음악원에 진학한 지 3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고작 열다섯의 나이였다. 이듬해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했고, 역시 3년 반 만에 최우수로 졸업했다. 연주자로서의 커리어도 파격적이다. 2009년 스위스 바젤에서 쇼팽 연습곡 전곡과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전곡을 연주하고, 2010년 파리에서 8일에 걸쳐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선보였다. 바흐 평균율 전곡 연주는 그로부터 4년 뒤에 이뤄졌다. 데뷔 음반으로는 무려 베토벤 소나타 전곡집(EMI/2012)을 내놓았다.
언뜻 보면 꽃길만 걸은 듯한데, 그 안에 참 굴곡진 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꽃길은 사실 비포장도로라고. 어린 나이에 겪은 인종 차별은 태어나 처음 겪은 심한 상처였고, 당시 목표였던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합격하고는 허탈감에 출가(出家)도 고민했다. 존재에 대한 고민과 본질 탐구에 대한 열망을 쌓아가던 그때, 그 길 위에서 만난 베토벤이 그녀를 붙잡았다. 음악으로도 삶의 본질은 찾을 수 있는 거라고.
임현정(1986~)과의 만남을 앞두고 그녀의 에세이집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페이스메이커)를 펼쳤다. 자칭 ‘베토벤 스토커’인 그녀는 실제 만남에서도 온통 베토벤 생각뿐이었다.
새로운 에세이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가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했다. 당시에 앞으로 10년마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등 베토벤을 주제로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2020년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더라. 연주자 입장에서 인간 베토벤을 조명하고 싶었다. 베토벤의 가치관과 영성, 예술성, 경제관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찾고, 내 삶 속 일련의 사건들에 비춰봤다. 그는 항상 내게 많은 도움을 줬다. 아버지처럼, 친구처럼.
여러 베토벤의 모습 중에서 무엇이 가장 깊이 와닿았나? 프랑스 유학 시절 지속적으로 체류증을 갱신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겪는 인종차별이 상당했다. 기관은 9시에 문을 열지만, 워낙 대기인원이 많아 밤새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 유럽인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더라. 항의했더니 “그러게 왜 우리나라에 왔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돌아왔다. 당시 열일곱. 내가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나, 포기하고 돌아갈까 고민도 많고 힘들었다. 그때 책 속에서 만난 베토벤이 힘이 됐다.
그의 어떤 모습이 힘이 되었는가? 베토벤은 신분 차이가 큰 귀족에게도 쉽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한번은 자신을 후원해 주는 귀족이 무례한 부탁을 하자 “당신과 같은 귀족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당신은 태어난 걸로 그 신분을 얻었지만 나는 내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습니다. 귀족은 많지만 베토벤은 세상에 나 하나뿐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그의 자존감이 ‘나도 실력으로 극복하면 되겠다. 이 세상에 임현정은 나 하나뿐이니까’라는 마음을 주었다.
내겐 너무 인간적인 사람
이번에 새롭게 보게 된 베토벤의 얼굴이 있다면. 연약함. 예전에는 혁명적인 정신 등 대단한 모습들이 보였다면, 이제는 어린 나이에 그가 겪어야 했던 여러 아픔이 눈에 들어온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홀로 생계를 꾸려가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그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후원자나 출판사 등 경제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값어치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기억나는 사건이 있는가? 베토벤이 출판업자 F.A. 호프마이스터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가 직접 자기 작품에 값을 매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작품마다 가격을 매기고 그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달았다. 또한 극장 대표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예술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경제적 보상을 당당히 요구했다.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해선 연주회 3번 중 1번은 모든 수익이 온전히 내게 오도록 해야 한다”며 경제적 안정성이 예술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수단이라 말했다. 너무나 야무진 사람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음악가들에게도 필요한 모습이 아닐지. 예술가는 돈을 몰라야 한다? 말이 되지 않는다. 돈은 본질적으로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베토벤은 문학과 철학, 종교를 망라한 사람이자 굉장한 독서광이기도 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문학으로 치열하게 공부했다. 신적인 존재에 대한 의문, 창조주의 존재 등에 대해 고민했고, 철학적으로는 굉장히 바른길(正道)을 추구했다. 그의 일기장이나 유언장만 보아도 처음에는 자신이 처한 고통(베토벤은 자신의 장애를 ‘수치’라고 표현했다)에 대해 창조주를 저주하지만, 나중에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길을 찾아간다. 비극적인 상황을 디딤돌 삼아 미래의 영광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육체적 고통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같고, 정신적 고통은 롤모델을 통해 이겨낸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이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는 거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해 발버둥 친 것 같다. 그것이 영감이 된다.
베토벤에 관한 오해와 진실
베토벤은 정말 다양한 표정을 지닌 인간적인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왜 많은 대중은 그를 심각하고 진지한 음악가로만 기억할까? 우선 초상화 때문일지도.(웃음) 우리는 전통적으로 베토벤의 음악을 너무 위엄 있게만 연주하려고 했다. 그런데 과연 베토벤이 이 모습을 좋아할까? 그는 인류 평등을 주장한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음악이 전해지길 바라며 곡을 썼다. 그런데 지금 그의 음악이 엘리트 코스가 되고, 턱시도를 입어야만 연주할 수 있게 되다니! 베토벤 음악의 본질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셈이다.
그의 음악이 왜곡되었단 말인가? 지휘자 로저 노링턴(1934~)이 해준 말이 있다. “존중받으려는 자태는 음악의 적이다(respectability is the enemy of music).” 베토벤의 음악을 신격화하고, 또 그걸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다 보니 왜곡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베토벤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없을까? 소나타 29번 ‘해머클라비어’나 교향곡 ‘영웅’은 혁명적인 정신이 가득한, 천지창조 같은 음악이다. 그는 이런 혁명적 아이디어로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사람인데, 우리가 그를 ‘고전 음악가’라는 틀에 가둬둔 것 같다. 물론 시대적으로 나눈 개념도 포함되어 있겠다만, 그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다.
음악적 해석, 특히 템포에서도 많은 논란이 오가는데. 그의 교향곡에는 악장마다 템포 지시가 있다. 그런데 많은 지휘자가 지시된 것보다 두세 배 느리게 연주한다. 예를 들어 10분 정도면 끝날 음악이 20분으로 느는 거다. 그러면 갑자기 10분가량의 없던 음악이 생긴다. 1970년대부터 생긴 전통, 아니 ‘유행’이다. 이후 로저 노링턴이나 엘리엇 가디너가 제 템포를 찾아가긴 했으나 “미쳤다”는 평가가 뒤따랐었다. ‘해머클라비어’는 소나타 중 유일하게 메트로놈 지시가 있는 곡이다. 그래서 그 템포대로 연주했는데, 나보고 혁명적인 연주를 한다더라. 명시된 템포에서 조금 빨라지고 느려지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경계를 너무 벗어나 버리면 음악의 성격이 바뀌어 버린다. 천지창조, 빅뱅을 설명하는 소나타가 갑자기 군대음악이 되어버릴 수 있는 거고, 영화로 치면 시나리오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거다.
베토벤을 실제로 만난다면? 제발 그의 피아노 연주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걸 녹음해서 2020년으로 다시 가져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베토벤도 이 템포로 연주하잖아요! 뭐가 전통이죠?”(웃음)
마지막으로 베토벤을 ‘스토킹’한 후 내린 결론이 궁금하다. 말 그대로 나는 베토벤 스토커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일기장은 건들지 않는데 그의 일기는 물론 연애편지까지 다 찾아 읽었으니.(웃음) 그런데 혹시 베토벤이 자신의 기록들을 훗날 읽어주기 바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불태워버릴 수도 있었는데 다 남기고 갔으니 말이다. 아무튼 인간적으로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
글 이미라 기자 사진 봄아트프로젝트
임현정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페이스메이커, 240쪽, 2020년)
“현재 이 순간의 선택에 따라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해진다. 베토벤이 고결하고 완전무결한 성인(聖人)이어서 우리에게 불멸의 영감으로 남은 것일까? 아니다. 그는 그저 고난 앞에 굴하지 않고 똑같이 주어진 선택의 순간에 충실했을 따름이다.”(237쪽)
자칭 ‘베토벤 스토커’인 임현정이 연주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베토벤. 낭만적인 포장을 벗고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베토벤의 영성과 예술성, 사랑, 작품에 담긴 여성성 등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가 총 4장 구성으로 그려졌다. 책 곳곳을 채운 QR코드를 따라가면 저자의 연주도 직접 들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