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가 추천하는 분야별 명반
공연장을 잃은 당신에게 추천하는 명음반·영상·희곡 36
피아니스트 송영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외
니콜라이 루간스키(1972~)가 드뷔시를 연주하는 영상물을 우연히 접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가 드뷔시를 과연 어떻게 표현할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런데 나의 관념을 철저히 깨부순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줬다. 이제 그가 연주하는 러시아 음악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은 것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이 담긴 이 음반이다. 그중 가장 추천하는 것은 협주곡 2번이다.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을 작곡한 후 심한 혹평을 받아 오랜 슬럼프에 빠졌다. 세상의 질타를 받다 정신병까지 얻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회복한 뒤 다시 펜을 잡고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곡은 3악장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경의 과정을 겪는다. 온갖 드라마를 겪고 난 후에야 말미에서 비로소 격정의 환희가 터져 나온다. 오늘의 우리도 혼란과 고난의 과정을 지나고 있다. 이는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고, 우리는 다시 일상의 기쁨을 되찾게 되리라는 것을 이 음악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곡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고된 현실을 잠시 잊게 만들기도 한다. 환상의 긍정적인 효과다. 음악에서 비롯된 희망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피아니스트 임주희
루빈스타인 쇼팽 컬렉션 녹턴&왈츠
아홉 살 때 러시아 백야 축제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는데, 연주가 끝나고 제일 먼저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남성 관객이 있었다. 알고 보니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에이드리언 브로디였다. 자연스럽게 그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영화에서 쇼팽이 청년기 시절에 작곡한 녹턴 20번이 나왔다. 우울하면서도 깊은 슬픔이 담긴 녹턴의 여운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녹턴’은 영국의 작곡가 존 필드(1782~1837)가 만든 음악 형식이다. 밤의 우울한 몽상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목가적 요소가 강하다. 쇼팽은 그 형식에 자신의 신비로운 감정을 첨가했다. ‘슬프지만 아름답다’는 역설적 표현이 어울린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1987~1982)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와 더불어 피아노 음악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라고 불린다. 그는 담백한 터치와 정갈한 분위기로 유명한 만큼 쇼팽 녹턴의 정수에 다가가는 연주자인 것 같다. 사실 곡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완벽해 누가 연주하든 깊은 감명을 주지만 말이다. 흔히 ‘치유’라고 하면 괜히 거창하게 들리는 것 같다. 쇼팽의 녹턴처럼 애잔한 선율에 마음이 아파도 자꾸만 듣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치유라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모차르트 현악 4중주곡 ‘사냥’ 외
영국 메뉴힌 음악학교를 다닐 때였다. 실내악 수업을 위해 한적한 시골로 향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아마데우스 콰르텟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사냥’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창밖 모든 환경이 아름답게 보였다. 음악 때문에 자연이 아름다운 건지, 자연 때문에 음악이 아름다운 건지 도저히 모르겠더라. ‘사냥’은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곡이다.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 중 노력의 흔적이 가장 잘 드러난 곡이기도 하다. 1악장은 공기를 마시듯 생동감이 가득하다. 2악장은 하이든스러운 우아함이 담겨 마치 실내 공간에 있는 것 같다. 3악장은 장조와 단조가 대조되면서 아련한 감성이 교차된다. 4악장은 다시 야외로 나가는 즐거운 분위기를 준다. 요즘 외출이 두려운 시기이니 이 곡을 통해 자연이 주는 행복감을 느끼면 좋겠다. 음반에는 하이든 현악 4중주곡 ‘황제’도 함께 담겨 두 작곡가의 스타일을 비교하며 즐길 수 있다. 아마데우스 콰르텟도 아픔을 겪은 후 탄생한 악단이었다. 많은 이들이 아마데우스 콰르텟을 영국 악단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단원 중 세 명은 빈에 뿌리를 두고 있다. 히틀러 때문에 영국에 왔지만 수용소에서 힘든 시절을 겪은 후 탄생한 악단이니 더욱 의미가 깊다.
비올리스트 이한나
비올라 부케
나의 스승 이마이 노부코(1943~)의 1994년도 음반이다.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후, 유학 시절 같은 클래스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음반이라 더욱 반가웠던 것 같다. 엘가 ‘사랑의 인사’, 크라이슬러 ‘아름다운 로즈마리’, 코다이 ‘아다지오’,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등의 소품으로 채워져 있다. 비올라를 위해 탄생한 작품들과 함께, 이 악기를 위해 편곡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비올라의 변화무쌍한 매력이 잘 드러나는데, 이건 이마이 노부코 스타일의 최대 강점이기도 하다. 수록곡들의 길이는 짧은 편이다. 하지만 각각 품은 감정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어떤 곡은 너무나 따뜻하고, 또 다른 곡은 애수가 짙다. 이마이 노부코의 음색으로 호소력이 배가됐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한때 내게 연주의 어려움을 준 작품이, 시간이 흐른 뒤엔 극도의 슬픔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그때 치유의 경험을 했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정을 충분히 느끼게 하고, 궁극적으로 치유의 시간을 선사하길 바란다.
첼리스트 이상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2번
지난 2월, 코로나 19 사태로 첫 내한이 좌절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아쉬움을 달래보기 좋은 음반이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56~)과 세이지 오자와(1935~)가 함께 해 더욱 특별하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2번이 음반에 실렸다. 각각 1997년, 2000년에 녹음한 것이다. 화려한 기교를 정확하고 깔끔히 해내는 지메르만의 연주에 탄성이 절로 나오며 전율하게 된다. 음반을 발매하며 인터뷰를 가진 지메르만은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음반에서 영향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대답이 아주 재밌다. 라흐마니노프가 연주한 협주곡 1번 음반에는 작품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지만, 협주곡 2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 지메르만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루토스와프스키(1913~1994)와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을 작업하면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작곡가로서 연주자들에게 더 아름답게 연주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메르만은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녹음한 협주곡 2번 음반에 그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녹음한 것과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이 음반을 비교해 들어본다면 더욱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플루티스트 최나경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1·2번
이 음반은 ‘카멜레온’ 같다. 언제 들어도 나의 색깔을 맞춰주면서 그대로의 나를 품어준다. 기분 좋을 때면 즐거운 대로, 힘들 때면 힘든 대로, 음악이 있는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며 위로해 준다. 두 연주자의 스타일에선 자연의 냄새가 난다. 새로 지어진 고층 건물이 아닌, 숲속 꽃과 나무를 보는 느낌이랄까. 포레의 곡으로만 채워진 일관성도 매력이다. 요즘 음원 사이트는 각각 상황에 따른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그렇게 듣다 보면 각 트랙마다 연주자가 달라져 오히려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플레이리스트는 하나의 완성된 음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는 게 이 음반이다. 소나타 1번으로 시작해서 로망스와 안단테를 거쳐 소나타 2번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음반 전체가 마치 하나의 곡을 듣는 것 같다. 오래전 미국에서 활동할 때 음악가가 된다는 것에 회의감이 온 적 있다. 다른 직업에 비해 음악가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못 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몇 개월을 괴로워했는데 문득 좋아하는 곡을 듣다가 음악이란 존재가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깨달았다. 언어로는 설명되거나 치유되지 않는 깊숙한 부분이 음악으로 해결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지친 마음이 이 음반으로 잠시나마 쉬어가길.
클라리네티스트 김우연
판타지아
대학 시절 사사했던 자비네 마이어(1959~)가 신보 발매를 앞두고 작은 하우스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때 공연을 관람하고 선물 받은 음반이다. 자비네 마이어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였던 카라얀에게 발탁되어 악단 최초의 여성 단원으로 발탁됐으나, 보수적인 단체 내 분위기로 수습 기간 이후로 연주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에피소드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독주자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현존 최고의 클라리네티스트’로 거듭났다. 실내악에도 높은 관심을 두고 있는 자비네 마이어는 색소폰 앙상블 알리아쥬 5중주단과 리코딩을 진행했다. 그 결과물인 이 음반의 수록곡 대부분은 오케스트라 작품을 편곡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 ‘불새’, 번스타인 오페라 ‘캔디드’ 등의 대편성 작품이 클라리넷, 네 대의 색소폰,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새로 태어났다. 우리에게 익숙한 선율이 익숙하지 않은 편성으로 연주된다는 매력! 음색의 조합이 묘하게 아름다운데, 이를 훌륭하게 표현한 음반이기도 하다. 특히 마이어와 알리아쥬 5중주 단원 다니엘 고티에가 함께 고음을 연주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차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바수니스트 유성권
슈베르트를 연주하다
2013년, 내가 수석으로 활동하고 있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에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1945~)가 협연자로 초청됐다. 당시는 이 악단과 함께한 지 4년 차가 되던 해로, 개인적으로 여러 고민이 많았던 때다. 그날 루푸와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던 과정에서 큰 치유를 받았다. 음악을 통한 치유라는 것은 대부분 편안한 소리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루푸의 음색은 바로 그런 치유의 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피아노 음반을 구매하게 됐는데, 바로 이 음반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루푸의 슈베르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슈베르트 3대 피아노 소나타’로 일컬어지는 19·20·21번을 포함해, 후기 소나타 작품이 음반의 주를 이룬다. 베토벤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슈베르트가 피아노 음악에 큰 공을 들인 베토벤의 혼을 계승해 완성한 걸작들로 평가받는다.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유사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명상조의 악상이 특징적이다. 진정한 치유는 내면을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루푸의 음색은 그 시간을 갖도록 이끈다. 한때 날 일으켜준 그의 음악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치유받길 바란다.
트럼피터 성재창
카니발
트럼펫을 처음 시작할 때,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 이 음반을 알려주셨다. 1번 트랙인 ‘베네치아의 사육제’는 테크닉이 두드러진 곡이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트럼펫으로 어떻게 연주하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곡이 대학 입시곡으로 나왔다. 음악보다는 이 음반이 가진 의미에서 치유의 키워드를 생각해 봤다. 윈튼 마살리스(1961~)가 학생들과 함께 만든 앨범이다. 녹음에 참여한 학생들에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이 후에 음악가가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일반 대중에게 협주곡이라고 하면 대개 피아노·바이올린·첼로와 오케스트라의 조합을 생각할 테다. 이 앨범엔 트럼펫이라는, 다소 클래식 음악에서 조명 받지 못한 악기가 독주를 하고 관악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는다. 관악의 매력을 잘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음악은 직접적인 치유보다는 위로에 강하다.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의 가사를 통해 직접적인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기악의 아름다움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다. 작곡가들이 곡을 쓸 때의 사회·개인적 상황에 대해서도 공부한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더 깊게 마주할 것이다.
퍼커셔니스트 한문경
셀러브레이팅 존 윌리엄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어려서 듣던 음악을 찾게 된다. 대중가요·팝송·재즈·영화음악 등 즐겨 듣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머릿속이 환기되면서 나를 울적하게 만들던 요소들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지난해 3월, 두다멜/LA 필의 내한공연 ‘존 윌리엄스 영화음악 콘서트’를 관람했다. 어릴 때 영화관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한 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동을 음반 ‘셀레브레이팅 존 윌리엄스’로도 느껴볼 수 있다. 2019년 LA 필은 악단 설립 100년 역사를 기념하며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두다멜의 지휘로 존 윌리엄스의 영화음악들을 연주했다. 실황 앨범은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전 세계 발매됐다. 존 윌리엄스는 영화음악을 작곡할 때, 전자음의 사용을 지양하고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를 주로 활용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타악기의 매력을 잘 표현한다. 음반에서는 LA 필의 대규모 편성으로 작품의 매력이 배가됐다. 내한공연 때 아홉 명의 타악기 연주자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아홉 개의 타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지휘자 두다멜의 열정과 에너지도 존 윌리엄스 음악 특유의 짜릿함을 증폭시킨다.
지휘자 정나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외
유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음반이다. 듣자마자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움에 빠져 며칠간 계속해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를 떠올리면 이 음반을 처음 들었던 공간까지 생생히 그려진다. 음악을 하며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 음반은 1988년부터 2005년까지 17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베를린 필 등 무려 여덟 개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다. 지휘봉은 얀손스(1943~2019)가 잡았다. 이 음반을 통해 얀손스의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어떤 작품을 연구할 때 그의 음반부터 검색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정도다. 얀손스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취임한 아버지를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지휘를 공부했다. 1971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상임지휘자였던 므라빈스키(1903~1988)는 얀손스를 부지휘자로 선임했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음악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 시기 동안 얀손스는 쇼스타코비치와 직접 녹음 작업을 한 경험이 있는 므라빈스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같은 작품을 담은 므라빈스키 음반과 비교하며 듣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겠다.
지휘자 지중배
아르보 패르트 트리뷰트
길을 가다가 어디에선가 들리는 선율을 접할 때가 있다. 무의식적으로 소리 앞에 멈추는 순간 잠시나마 감동을 받으며 복잡했던 일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길을 걷다가 마주하는 음악은 보통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들이다. 그러나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음악도 만나게 된다. 2015년 9월의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는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1935~)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페스티벌이 도시 곳곳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그의 ‘보편적이지 않은’ 음악을 길거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작은종의 울림(Tintinnabuli)’은 패르트의 독창적인 음악 언어다. 그는 자신만의 음악 언어를 이용해 복잡한 현대사회 속 인간 내면, 자연의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순결함을 주어 쌓인 피로를 치유해 준다. 사람의 마음을 잘 어루만지는 악기는 결국은 온화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닐까. 이 음반은 패르트 70주년 생일을 맞아 지휘자 힐리어가 그동안 녹음해온 패르트 작품과 새로 녹음한 종교 합창곡을 수록했다. 사람의 목소리로 만드는 신비롭고, 아름답고, 아련한 음악은 잠시나마 우리의 정신을 치유하도록 한다.
지휘자 진솔
모차르트 ‘레퀴엠’ K626
바로크와 초기 고전 음악은 길이도 적당하고 산뜻하게 들을 수 있다. 그중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학생 때 합창단에서 불러보기도 하고, 총보를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이다. 특히 쿠렌치스(1972~)와 무지카 에테르나의 ‘레퀴엠’은 신세대적인 해석으로 현대인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조금 과장된 해석도 등장하고, 합창 발성에 부적합하게 연주된 부분도 있다. ‘디아스 이레’의 경우, 자연스러운 셈여림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크레셴도를 추가했다. 처음엔 의아할 수 있지만 듣다 보면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택한 효과적이고 참신한 방법이라는 것을 체감한다. 또 비브라토를 최대한 절제하고 두텁지 않게 표현한 합창 사운드가 곡의 성스러운 느낌을 배가했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쿠렌치스는 특별한 존재다. 단순히 색다른 시도를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닦아 온 인물이다. 그의 예술관을 묵묵히 믿고 따르는 무지카 에테르나와의 조합으로, 이 음반에서는 이들의 결속력이 묻어 나온다. 잔잔한 음악만이 치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음반을 들으며 가사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더욱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수 있다.
지휘자 홍석원
헨델 콘체르토 그로소 op.6 외
대학 시절, 서양음악사 강의를 들을 때 헨델의 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연주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 과제를 수행하면서 헨델 곡에 크게 매료됐다. 그 계기로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라는 특별한 단체도 알게 됐다. 그 후 이 악단의 음반을 심취해 들었다. 바로크 음악을 들으면 음악의 순수성을 통해 영혼이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깨끗한 느낌 말이다. 음악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음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바로크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어루만지게 된다. 이 음반은 그중에 가장 많이 들었다. 세 장의 CD로 구성되어 헨델의 다양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으니 좋다. 콘체르토 그로소 12곡은 각각 개성이 다르면서도 통일감이 있어서, 1번부터 12번까지 연결해서 들으면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당장 많은 연주가 취소되어 아쉽지만, 다시 공연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히 준비해서 오랜 시간 기다린 관객에게 훌륭한 연주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음악 또한 인간의 감정과 함께 가는 분야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나아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치유가 아닐까?
소프라노 홍혜란
라 트라비아타
1955년 라 스칼라에서 공연한 ‘라 트라비아타’ 실황 음반이다.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와 테너 주세피 디 스테파노(1921~2008)가 참여한 이 음반은 오페라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반으로 통한다. 실황이기에 깨끗한 소리를 들을 순 없다. 그런데도 듣고 있노라면 눈앞에서 무대가 그려지는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1955년은 칼라스의 전성기이다. 그는 목소리가 많이 발전된 상태에서 비올레타 역을 맡았다. 1막을 듣다 보면 이전까지 칼라스가 고음에서 라이트한 사운드를 갖지 못했는데, 이 음반에서는 고음도 유려하고 중음도 풍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2막에서는 비올레타와 제르몽의 이중창이 특히나 인상 깊다. 연약한 한 명의 여자가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선명하다. 목소리로만 들어도 눈앞에 비올레타의 연기가 보이는 것 같다. 3막은 칼라스가 오페라 가수처럼 부르지 않고 속삭이는 부분이 많다. 칼라스의 연기적인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에는 비올레타가 죽음을 맞지만, 이상하게 이 음반을 다 듣고 나면 삶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마음이 든다. 다 끝나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는 음반이니 요즘 같은 상황에 잘 어울릴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 이 음반을 들으며 나 역시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테너 최원휘
사랑의 묘약
대학 시절에 함께 학교를 다니던 지금의 아내(홍혜란)가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역으로 공연에 올랐다. 학교 공연이었고, 나는 스태프로 그 공연에 참여했다. ‘사랑의 묘약’ 여러 음반을 들었는데, 이 음반이 제일 마음에 와닿아서 당시 백 번도 넘게 들은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추억이 담긴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은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1965~)와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1963~)가 세기의 부부로 활동했을 때, 그러니까 각자가 전성기였던 시절에 녹음됐다. 두 성악가 기량에 화학반응이 더해져 재미가 배가된다. 순박한 시골 청년 네모리노가 도도한 여성 아디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이용한 힘은 ‘순수한 사랑’이었다. 물론 약장수 둘카마라에게 속아 사랑의 묘약을 마시지만, 끝으로 갈수록 아디나를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이 전달된다. 아디나는 결국 네모리노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준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향한 순수한 마음, 즉 사랑이 아닐까. 더욱이 이 오페라에는 밝은 분위기가 감돌아 마지막까지 웃으며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하는 사랑의 승리! 지금은 사랑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 음반을 들으며 함께 웃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