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4_글 장혜선, 송주호, 송준규, 이종호, 오미경, 임호준, 김주연
열정과 혁명의 스페인 예술사
한국·스페인 수교 70주년 기념
한국과 스페인은 2020년, 수교 70주년을 맞았다. 양국은 2020~2021년을 ‘한국-스페인 상호 방문의 해’로 지정해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19 영향으로 전 세계 공연예술계는 잠시 멈춰있는 상태다.
수교 70주년을 기리며 이번호 특집은 스페인 예술사를 살핀다. 스페인은 자국의 민속예술을 기반으로, 동시대 새로운 실험예술을 개척하고 있다. 음악과 무용, 영화, 연극까지 전 예술 장르가 그들의 치열한 문화사와 면밀히 맞닿아있다. 뜨거운 여름, 정열의 스페인 예술을 즐기고 싶은 독자들은 주목하길.
Music 민속과 민족의, 스페인 음악사
Dance 플라멩코의 생명력을 넘어
Movie 스페인적 미학,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
Theater 정확한 언어로 빚어내는, 후안 마요르가
Music
민속과 민족의, 스페인 음악사
지중해의 관문 이베리아반도, 이 넓은 땅에 스페인이 자리하고 있다. 한때 유럽의 바다를 지배했던 강대국이지만, 왠지 음악에서만큼은 외진 곳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바로크 기타의 원형인 비우엘라(vihuela)를 기반으로 독창적인 음악이 형성됐고 교회음악의 거장도 상당수 배출됐지만, 바로크 시대가 시작되자 지난 영광이 무색하리만큼 갑자기 암흑 속으로 빠져든 탓이다. 그러다 고전 시대에 이르러 외지 음악가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스페인 음악의 중흥을 준비했다.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는 18세에 마드리드에 입성한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도 스페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민족적인 유대감이 강해지다
외지 음악가들은 주로 궁정에서 활동하면서 귀족 문화를 선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대중은 반대급부로 공동체를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속음악의 저변을 탄탄하게 다져갔다. 그 결과, ‘플라멩코’ ‘판당고’ ‘볼레로’ ‘호타’ 등 격렬한 리듬과 자극적인 선율을 가진 민속음악이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악이 됐고, ‘사라수엘라(zarazuela)’라는 통속적인 음악극이 큰 인기를 끌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퇴출 위기에 놓였던 기타가 도리어 스페인에서는 주요 민속악기로 부상했다. 소르(Fernando Sor, 1778~1839) 등 기타음악 거장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으며, 오늘날까지 스페인은 기타음악의 종주국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19세기를 지나면서 민속음악과 기타음악이 스페인을 특징짓는 인상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특징은 사실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의 변방이 가진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영국도 르네상스 시대와 초기 바로크 시대에는 비올(viol) 패밀리를 중심으로 하는 콘소트(consort) 음악과 뛰어난 교회음악으로 꽃을 피웠지만, 18세기에 외국 음악가들의 무대로 바뀌면서 오히려 민속음악의 저변이 탄탄해졌다. 폴란드는 외세의 억압으로 민족적인 유대감이 강해지면서 민속음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고, 유럽 동남부는 열정적인 집시음악이 지역 음악문화의 사실상 대표자로 군림했다.
그래서 이러한 나라의 작곡가들은 클래식 음악 전통뿐만 아니라 자국의 민속음악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거의 기억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특징이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연구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 틈에 주요 작곡가들이 이들의 민속음악에 흥미를 느끼고 그 스타일로 작곡하는 일이 벌어졌다. 스페인 음악의 경우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 작곡가들의 연구대상이 됐다. 그래서 랄로(Édouard Lalo, 1823~1892)의 ‘스페인 교향곡’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카르멘’, 샤브리에(Emmanuel Chabrier, 1841~1894)의 ‘에스파냐’,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의 ‘르 시드’ 등 스페인 음악의 걸작은 프랑스 작곡가들에 의해 탄생했고, 이들을 통해 스페인 음악이 유럽 각국으로 알려졌다.
민족주의 음악 대유행기
19세기 말에 이르자 충분한 실력을 쌓은 변방의 작곡가들은 드디어 민족주의 음악의 대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민속음악을 세련되게 다듬어 전통적인 플랫폼에 싣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스페인 작곡가들도 물론 여기에 동참했다. 불세출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작곡가 타레가(Francisco Tárrega, 1852~1909)는 여기에 불을 지핀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사라사테는 연주자로서 더욱 명성을 얻었고, 그나마 히트작인 ‘치고이너바이젠’은 스페인이 아닌 집시 음악이었다. 그리고 타레가는 오직 기타에 몰두하여 스스로 한계를 두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 민족주의 음악의 삼총사 알베니스(Isaac Albéniz, 1860~1909),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가 스페인 음악의 빗장을 열고 세계로 뻗어 나간 진정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유학이나 음악 활동 등 다양한 목적으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각국의 음악가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으며, 스페인의 민속 춤곡의 거친 리듬과 농염한 선율이 고상하고 자극적으로 매만져진 음악으로 국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상주의 음악에 빠져있던 투리나(Joaquín Turina, 1882~1949)와 같은 후배들에게 스페인 음악을 쓰도록 합심하여 독려하기도 했다.
20세기에 이러한 민족주의 음악을 계승한 작곡가를 꼽는다면 단연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이다. 그는 특히 파야의 영향을 받았지만,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원색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스페인의 우아한 기품을 담았다. 스승이었던 뒤카스(Paul Dukas, 1865~1935)의 영향으로 그의 음악적 사고에는 고전이 깊이 뿌리내려있기 때문이었다. 기타 협주곡의 대명사 ‘아란후에스 협주곡’이 들려주는 서정미와 고전미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반면에 몸포우(Federico Mompou, 1893~1987)는 오로지 피아노에 스페인의 인상을 담았다. 그는 우아한 선율과 과장되지 않은 리듬, 서정적인 감성으로 스페인을 노래한 ‘스페인의 쇼팽’이었다.
스페인 현대음악의 시작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흐름과는 무관하게 20세기의 모더니즘을 따르며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는 작곡가들도 있었다. 카탈루냐 출신인 로베르트 제라르드(Robert Gerhard, 1896~1970)는 쇤베르크의 제자로, 스페인 모더니즘 음악의 선구자였다. 하지만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진행된 스페인 내전으로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 프랑코 정권 하에서 그의 곡은 연주가 금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적 사정으로 스페인의 현대음악은 중요한 주춧돌 하나를 잃었다.
이러한 가운데 알프테르(Cristóbal Halffter, 1930~)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마이크로 폴리포니’와 ‘마이크로 구조’ 등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권의 압력에 대해, 오히려 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내놓으며 저항을 표시했다. 프랑코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옛 음악을 인용하는 등, 더욱 다양한 음악언어로 자유롭게 작곡하고 있다. 이러한 알프테르의 용기 있는 도전과 자유로운 활동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다양한 시도를 감행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마린(Francisco Guerrero Marín, 1951~1997)이 눈에 띈다. 그는 수학적 모델로 작곡하여 스페인의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2~2001)라고 할 수 있지만, 때 이른 죽음으로 뜻을 충분히 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스페인에서 연주되며, 20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의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외에도 파블로(Luis de Pablo, 1930~), 이달고(Manuel Hildalgo, 1956~), 루에다(Rueda, 1962~), 베르두(Jose Maria Sanchez Verdu, 1968~) 등이 현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다.
오늘날 젊은 스페인 작곡가들도 이러한 선배들을 따르고 있다. 보이가스(Iván Caramés Bohigas, 1979~)의 경우는 스페인의 민속음악을 사용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그는 플라멩코 댄서와 플라멩코 가수, 플라멩코 기타, 카혼 등이 포함되는 흥미로운 작품들을 내놓으며 ‘플라멩코와 현대음악의 혼합’을 꾀한다. 그의 음악에서 플라멩코와 현대음악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반면에 멘도사(Elena Mendoza, 1973~)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모더니즘의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날의 스페인 음악은 자국의 민속음악과 유럽의 모더니즘을 자유롭게 공유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Dance
플라멩코의 생명력을 넘어
‘스페인 무용’ 하면 대부분 플라멩코를 떠올린다. 플라멩코야말로 투우와 함께 스페인 문화를 세계인에게 각인시킨 양대 상징이 아닐까. 하지만 플라멩코가 스페인 무용의 전부는 아니다. 스페인 문화의 아이콘이 된 플라멩코에 묻혀 정작 스페인의 다른 전통춤과 발레, 현대무용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줄기찬 생명력, 플라멩코
플라멩코는 18세기 안달루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집시 춤이다. 이후 스페인 전역은 물론 중남미에서도 인기를 구가하더니, 급기야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춤이 됐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정기적으로 플라멩코 축제가 열린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데, 플라멩코 학원이 스페인보다 더 많다는 흥미로운 통계도 있다.
플라멩코의 생명력은 단지 전통춤의 차원을 넘어, 현대무용 분야에서도 독특한 영역을 구축했다. 1980년대 이후 데 루시아(Paco de Lucia, 1947~2014)나 포베다(Miguel Poveda, 1973~) 등 개성 넘치는 음악가들에 의해 ‘신플라멩코(El Nuevo flamenco) 음악’이 시작됐듯이, 춤에서도 발레·현대무용 등 다른 장르와 결합된 ‘신플라멩코 무용’이 태동했다. 아마 세계 민속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플라멩코와 탱고가 아닐까 싶은데, 탱고가 창작탱고·현대탱고 장르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반면, 플라멩코는 현대무용으로서도 상당한 위상을 구축하고 있다.
여기에는 가데스(Antonio Gades, 1936~2004) 같은 걸출한 안무가들의 공이 크다. 이후 본격 현대 플라멩코의 원조인 갈반(Israel Galván, 1973~), 플라멩코와 현대무용의 독특한 조합을 빚어내고 있는 몰리나(Rocío Molina, 1984~), 마린(Andrés Marín, 1969~) 등 쟁쟁한 창작자들이 플라멩코의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
한편 플라멩코 무용가들은 출연료가 상당히 비싸다. 전통과 창작 모두 플라멩코는 값비싼 예술이라는 인식을 세계 곳곳에 심어놓았다. 예술성과 상업성 모두에서 성공한 보기 드문 예이다.
양대 국립무용단, BNE와 CND
플라멩코 말고도 스페인은 무용 분야에서 자랑할 게 많다. 국립발레단(Ballet Nacional de España, 이하 BNE)과 국립무용단(Compañia Nacional de Danza, 이하 CND)이 그것이다. 두 단체 모두 1970년대 말에 창설돼, 각각 전통무용과 발레의 발전을 담당하고 있다.
1978년 가데스를 초대 예술감독으로 출범한 BNE는 명칭에 ‘발레’라는 말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플라멩코를 포함한 스페인 전통춤의 보존과 창작이다(참고로 서양에서는 ‘발레’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좁은 의미의 발레에서부터 일반적 의미의 춤이라는 뜻까지 경우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이런 원칙은 무용 작품을 만들 때 국민주의 성향의 음악을 선호한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스페인은 근대 초기까지는 클래식 음악 수준이 높지 않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아랍의 문화유산을 반영한 독특한 국민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 투리나(Joaquín Turina, 1882~1949),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 알프테르(Ernesto Halffter, 1905~1989), 알베니스(Isaac Albéniz, 1860~1909) 등은 BNE가 선호하는 작곡가들이다. BNE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참가, 큰 갈채를 받은 바 있다.
정작 발레를 하는 단체는 CND이다. 예술감독의 취향에 따라 현대발레에 치중할 때도 있고 고전 레퍼토리에 쏠릴 때도 있지만, 이 단체가 가장 빛나던 시기는 아마도 나초 두아토(Nacho Duato, 1957~) 예술감독 시절이었을 것이다. 1979년 ‘국립 클래식 발레(Ballet Nacional Clásico)’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이 단체는 몇 차례 변화를 겪었지만, 초대 예술감독 우야테(Victor Ullate, 1947~)부터 러시아의 유명 발레리나 출신 감독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 1925~2015)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고전발레 및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이나 튜더(Antony Tudor, 1908~1987) 등 신고전주의 성향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했다. 그러나 두아토의 입성과 함께 명칭을 지금처럼 바꾸면서 스페인 현대발레·현대무용의 역사는 단숨에 바뀌고 만다.
두아토는 CND를 클래식 발레를 어느 정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는 무용단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런던과 브뤼셀, 뉴욕에서 무용을 배운 뒤 스웨덴 쿨베리 발레와 네덜란드 단스 테아터(NDT)에서 무용수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킬리안(Jiri Kylian, 1947~), 판 마넨(Hans van Manen, 1932~)과 같은 전설적 거장과 나란히 NDT의 상주 안무가가 됐다. 그는 1990년부터 2011년까지 CND 감독으로 있으면서 이 단체의 명성을 단박에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존재감이 국지적 수준에 머물렀던 CND가 뛰어난 한 안무가의 등장으로 단번에 엄청난 국제적 명성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두아토는 불화와 구설수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스페인을 떠나 러시아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 후 베를린 슈타츠오퍼 발레 총감독으로 영입돼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일했다. 그가 떠난 뒤부터 CND는 과거 스타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술감독의 취향에 따라 창작 스타일이 계속 변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두아토 시절의 영광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현대무용의 슈퍼파워, 카탈루냐
스페인 동북부에 위치한 카탈루냐는 스페인 현대무용의 요람이자, 세계 현대무용계 전체에서도 정상급 수준을 자랑한다. 수도 마드리드를 품은 카스티야를 포함, 갈리시아, 바스크 등 나머지 모든 지역을 다 합쳐도 카탈루냐를 이길 수 없다. 벨기에·이스라엘·한국·대만 등 현대무용 강국은 대개 분단이나 주변국들의 위협, 극심한 정치사회적 갈등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이 심한 경향이 있는데, 카탈루냐 역시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독자적 왕국의 지위를 빼앗기고 스페인의 일부가 된 그들의 역사에서는 지금도 분리독립 운동을 비롯해 사사건건 마드리드 중앙정부와 충돌하는 모습이 자주 목도된다. 카탈루냐인들의 태도는 1992년 올림픽 개최지가 바르셀로나로 결정됐을 때, “무엇을 도와줄까”라는 중앙정부의 제의에 대해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1920~2010)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카탈루냐 출신)이 내뱉은 한 마디에 잘 드러난다. “도와줄 것 없어. 우리끼리 할 테니 당신들은 때 되면 구경이나 하러 와.”
카탈루냐 하면 가우디(Antonio Gaudi, 1852~1926), 카살스(Pablo Casals, 1876~1973), 카바예(Montserrat Caballe, 1933~2018), 카레라스(Jose Carreras, 1946~), 사발(Jordi Savall, 1941~),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등 기라성 같은 화가·건축가·음악가들을 떠올리겠지만, 현대무용도 그에 못지않다. 젤라베르트(Cesc Gelabert, 1953~), 올리반(Roberto Olivan, 1972~), 피코(Sol Picó, 1967~), 모라우(Marcos Morau, 1982~), 아이과데(Lali Ayguadé, 1980~), 파우라(Pere Faura, 1980~) 등 원로에서 신진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된 실력파들이 세계 전역에서 맹활약 중이다. 게다가 나데르(Guy Nader, 레바논), 토머스 눈(Thomas Noone, 영국) 등 유능한 외국인 안무가들까지 옮겨와 카탈루냐의 현대무용은 더더욱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스페인 유일의 무용 전문 극장인 바르셀로나 꽃시장극장(Mercat de les Flors)의 든든한 지원도 큰 힘이 된다.
현재까지 아시아에는 스페인 현대무용의 다양한 면모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적 현대무용’이라는 화두로 ‘한국적 정체성과 서구식 현대무용의 조화’를 고민하는 우리 안무가들에게 스페인 현대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 이종호(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예술감독·무용평론가)
사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Movie
스페인적 미학,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
반도의 역사는 처절하다. 대륙과 해양으로부터 몰려오는 세력들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베리아반도는 유럽의 현관으로서 아프리카 대륙을 코앞에 두고 있고, 고대 문명의 각축장이었던 지중해에 면해 있기 때문에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어야 했다. 유럽 중심부의 신교도 세력, 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온 이슬람 세력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내부 결속을 위해 종교재판소를 통해 많은 이교도를 처형했으며 아메리카에서는 많은 원주민을 죽였다. 근대에 와서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었다. 이렇게 스페인의 역사는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스페인 예술에서 피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하다. 대표적으로 화가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는 잔혹과 광기가 지배하는 현실을 괴기스럽게 재현했고, 극작가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9~1936)는 전통 스페인 사회의 억압을 죽음의 이미지로 형상화 했다.
스페인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카를로스 사우라(Carlos Saura, 1932~)는 영화 분야에서 피·죽음·폭력과 결부된 스페인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한 감독이다. 그는 유년기에 스페인 내전(1936~1939)을 겪었는데 어린 나이에 목격한 전쟁의 참상은 사우라에게 큰 충격을 남긴다. 그의 아버지는 공화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사우라의 가족은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와 화가였던 형에 둘러싸여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사우라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자질을 보였고, 청년기에는 사진에 탐닉하다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학교를 졸업한 그는 프랑코 독재 하에서 일그러진 스페인 사회를 고발하는 것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첫 장편인 ‘건달들(Los Golfos)’(1960)은 마드리드 영세민 구역을 배경으로 건달들의 비행과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충격적인 숏으로 표현한다. ‘사냥(La caza)’(1966)에서는 그때까지 검열에 의해 금지됐던 스페인 내전을 처음으로 다루어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사우라는 내전의 광기와 트라우마로 일그러진 전후 스페인 사회의 병리적 상태를 드러낸다. 프랑코가 병상에 있을 때 제작되기 시작하여 그의 사망 직후에 개봉된 ‘까마귀 기르기(Cría cuervos)’(1976)에서는 어린 소녀가 아버지를 독살하는 엽기적인 서사를 통해 독재자에 대한 스페인 국민의 상징적 해원(解冤)을 실현하고 있다. 사우라의 작품은 주로 폭력과 살인으로 치닫는 가족·연인·친구 사이의 기이한 관계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기형성을 폭로한다. 지속적으로 문제작을 발표한 사우라는 호세 루이스 보라우(Jose Luis Borau, 1929~), 빅토르 에리세(Víctor Erice Aras, 1940~) 등과 함께 안일함에 젖어있던 스페인 영화를 개혁하여 새로운 스페인 영화(New Spanish Cinema)의 기수로 일컬어진다.
프랑코 사망 이후 스페인이 민주화 되자 사우라는 정치적인 주제를 떠나 스페인의 민속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플라멩코 삼부작
스페인의 전통장르인 플라멩코·세비야나·집시·투우 등은 19세기 유럽 낭만주의자들이 신비화한 이래로 에스파뇰라다(españolada)라고 불리며 정형화되어 소비되고 있었다. 이런 점을 문제적으로 보고 있던 사우라에게 제작자 에밀리아 피에드라(Emiliano Piedra, 1931~1991)는 당시 스페인 국립발레단(Ballet Nacional de España)의 예술감독이자 플라멩코 춤의 대가였던 안토니오 가데스(Antonio Gades, 1936~2004)를 소개, 그를 기용해 플라멩코 영화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사우라는 처음엔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가데스의 공연을 본 후 생각을 바꾼다. 가데스가 플라멩코의 표피적 아름다움 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안달루시아의 민중적 애환과 비장미의 심오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와 함께 스페인의 민속성을 재해석한 이른바 ‘플라멩코 삼부작’이 세상에 나온다. ‘피의 결혼식(Bodas de sangre)’(1981), ‘카르멘(Carmen)’(1984), ‘사랑의 마법(El amor brujo)’(1986) 순으로 만들어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렇다고 해서 사우라가 가데스의 춤을 단순히 스펙터클로서 전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우라는 세 작품에 자기 반영적인 구조를 설치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스페인 민속성을 관조하게 만든다. 가령, 극작가 로르카의 비극 ‘피의 결혼식’을 각색한 작품에서 사우라는 작품을 공연하는 가데스 무용단이 분장실에 들어오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분장을 하고, 악기를 조율하고, 목을 푸는 단원들의 어수선한 모습을 담는다. 이윽고 가데스와 단원들은 리허설을 하는데 이 광경이 ‘피의 결혼식’이 된다.
관객은 단원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함께 공연에 몰입했을 때 그들의 광기어린 열정을 보게 된다. 또한 ‘카르멘’에서는 비제의 유명한 오페라에 맞춰 플라멩코를 추려는 가데스를 등장시켜 신화화된 스페인의 민속성에 자기 도취된 예술가들과 대중을 풍자한다. ‘사랑의 마법’에서는 원작과 달리 마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장면을 여러 차례 삽입해 민속예술은 생활 속에서 향유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플라멩코 삼부작’ 이후에도 사우라는 플라멩코에 관해 여러 작품을 만드는데, 그가 매료된 것은 플라멩코에 서린 죽음과 피의 이미지였다.
피와 죽음에 대한 찬미
박제된 민속성에 대한 무분별한 탐닉을 비판하고 민중적 향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우라의 작업은 플라멩코를 넘어 더욱 확장된다. 2005년에 연출한 ‘이베리아’에서는 작곡가 알베니스(Isaac Albeniz, 1860~1909)의 ‘이베리아’에서 영감을 받아 스페인 각 지방의 지역적 정감을 다양한 음악과 안무로 표현하여 공연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다.
스페인의 국가성에 대한 탐구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져 화가 고야의 말년을 다룬 ‘보르도의 고야’(1999), 자신이 존경했던 영화감독 부뉴엘(Luis Buñuel, 1900~1983)의 젊은 시절을 극화한 ‘부뉴엘과 솔로몬 왕의 탁자’(2001) 등을 만들기도 했다. 사우라는 고야로부터 뒤틀린 현실을 고발하는 그로테스크 미학을, 부뉴엘로부터 위선을 비웃는 싸늘한 이성을 배웠음이 틀림없다.
이처럼 평생의 영화작업을 통해 사우라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며, 스페인성(Spanishness)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에게 민속성이란 외국인을 매료시키는 이국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수많은 전쟁 속에서 살아 온 스페인 사람들의 혼과 애환이 담긴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피와 죽음에 대한 찬미가 스페인 예술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미학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국가적 삶에 충실한 치열한 작가정신 덕분에 카를로스 사우라는 고야와 로르카를 잇는 가장 스페인적인 예술인으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글 임호준(영화평론가)
BOOK
스페인 영화(작가주의 전통과 국가 정체성의 재현)
임호준 | 문학과지성사 | 2014
저자 임호준은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 문학박사 과정을 마친 후, 뉴욕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상이론을 공부했다. 저자는 스페인 영화를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로 ‘국가정체성’과 ‘작가주의’를 설정한다.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1900~1983)부터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Alejandro Amenabar, 1972~)까지 12명의 스페인 감독들의 영화세계를 살펴본다. 작가주의 영화들이 스페인 내전, 프랑코 독재, 민주화 시대 등을 거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사회적 맥락을 스페인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해나간다. 스페인 영화 개론서일 뿐 아니라, 스페인의 역사와 정치, 문화에 대한 충실한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프랑코 시대 동안 스페인적인 것으로 적극적으로 홍보된 풍속적인 이미지 또한 반체제 작가들에게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던 프랑코 정권은 해외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낭만주의적 스페인의 이미지를 스페인적인 것의 전형으로 세계에 홍보했다. 따라서 프랑코 시대의 TV 프로그램이나 상업영화에는 플라멩코, 세비야나, 투우 등 안달루시아의 풍 속 이미지가 자주 등장했다. 스페인 신新영화 감독들은 이러한 날조된 이미지에 반감을 품었고, 오히려 이러한 문화적 아이콘과 정형성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쪽)
Theater
정확한 언어로 빚어내는,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
대서양과 맞닿은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은 남국의 뜨거운 태양과 그만큼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을 지닌 나라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대항해 시대의 황금기를 이끌고,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교차로가 되기도 했다. 스페인 도시 곳곳은 지금도 다채롭고 이국적인 예술 흔적이 오롯이 아로새겨져 있다.
16~17세기,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화려하고 풍요로운 부흥기를 맞았던 ‘황금 세기(Siglo de Oro)’ 이후 스페인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 베가(Lope de Vega, 1562~1635), 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 1600~1681),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9~1936) 등 시대를 앞선 고민과 남다른 사유를 담아낸 위대한 극작가들을 꾸준히 배출해왔다.
특히 괴테가 “셰익스피어가 포도송이라면 칼데론은 포도즙이다”라고 평가할 만큼 깊고 심오한 극 세계를 펼쳐낸 칼데론(Pedro Calderón de la Barca, 1600~1681)이나 안달루시아의 뜨거운 혼을 강렬하고 시적인 언어로 담아낸 로르카 같은 경우, 서양 연극과 극작 역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장들이다.
마요르가, 스페인 극작가 계보를 잇다
1965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현재 공연 현장과 교육 양쪽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 1965~)는 바로 이 위대한 스페인 극작의 계보를 이으며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 중 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마요르가는 1997년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고, 졸업 후 마드리드 근교의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전공 덕분에 수학처럼 정확한 극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담은 희곡을 쓴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마요르가의 작품은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언어와 명료한 주제의식이 특징이며, 현대 사회에 내재하는 다양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든다.
마요르가의 대표작으로는 ‘일곱 명의 선한 사람들’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천국으로 가는 길’ ‘하멜른’ ‘맨 끝줄 소년’ ‘다윈의 거북이’ ‘영원한 평화’ ‘비평가’ ‘눈송이의 유언’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故) 김동현 연출이 ‘다윈의 거북이’ ‘영원한 평화’ ‘천국으로 가는 길’ ‘맨 끝줄 소년’ 등 마요르가 작품의 여러 편을 무대에 올린 바 있는데, 그중 다수 재공연 된 ‘다윈의 거북이’와 ‘맨 끝줄 소년’을 소개한다.
무엇이 진화이고 퇴보인가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는 인간으로 진화한 거북이를 통해 유럽 현대사를 패러디하고, 현대 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블랙코미디이다. 이 작품은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이 1835년 갈라파고스 섬을 떠나면서 데리고 나온 거북이 해리엇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간으로 진화해 한 교수를 찾아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무려 200년을 살아온 거북이 해리엇은 교수가 저술한 유럽 현대사의 주요 대목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자신이 그것을 고쳐줄 테니 고향 갈라파고스 섬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로 인해 교수와 거북이 해리엇 간의 은밀한 거래가 성립된다. 이후 이야기는 자신이 지켜본 유럽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에 대한 해리엇의 증언, 기존의 역사 관점에 어긋나는 해리엇의 증언에 이의를 제기하는 교수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대화 속에서 인간과 역사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 마요르가의 관점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점이다.
‘다윈의 거북이’는 ‘지구가 자전을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진화론’에 대해 역설적인 비판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200년간 살면서 자연스레 인간으로 진화한 거북이 해리엇인데, ‘인간으로 진화한 거북이’라는 것은 ‘인간이 원숭이(유인원)로부터 진화한 존재’라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하나의 패러디 설정이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이론이지만, 적어도 문학적으로는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다면 거북이도 진화할 수 있다는 은유를 가정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인간으로 진화되었는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진화’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진화(進化)’의 사전적 의미가 ‘더 나은 상태로 점점 더 발전하는 것’이라 할 때, 이 작품에서 진화는 분명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거북이 해리엇은 처음 갈라파고스 섬에서 나와 세상을 두루 구경하면서 인간이 이루어낸 눈부신 문명에 감탄하고,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을 확신한다. 하지만 이후 200년간 그 진화의 결정체인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전쟁과 폭력, 테러와 학살 등을 목격하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본 뒤에는 인간이 진화한다는 생각에 회의를 품는다.
해리엇 난 그때부터 새로운 걸 본 게 없어요. 보스니아, 르완다, 쌍둥이 빌딩, 이라크, 레바논… 다 똑같이 무시무시해요. 진화는 인간 폭탄에서 절정을 이루죠. … 난 당신들한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살 거예요. 모든 동물 중에 인간이 가장 어리석고 해롭죠.
‘다윈의 거북이’, 후안 마요르가 저, 김재선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200년을 통틀어 난 인류가 뭔가를 배우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라는 해리엇의 단정은 인류가 진화의 가장 마지막 단계라는 이론에 대해 명백한 이의를 제기한다. 진화의 초기 단계인 파충류(거북이)가 진화의 최종 단계인 인간에게 가하는 따끔한 일침은, 이 작품의 역설적 비판 의식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말을 진화론을 처음 주창한 ‘다윈’의 거북이가 한다는 점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더욱 코믹하게 강조한다.
윤리와 예술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프랑수아 오종 감독에 의해 영화 ‘인 더 하우스’(2013)로 만들어진 바 있는 마요르가의 ‘맨 끝줄 소년’. 한 문학교사와 제자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나아가 ‘예술하는 것’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고등학교 문학교사인 헤르만은 고만고만한 학생들의 작문 과제에 지칠 무렵, 늘 맨 끝줄에 앉아있던 학생 클라우디오의 작문에서 번뜩이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후 그의 재능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클라우디오의 글은 같은 반 친구인 라파 가족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은밀한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으나, 헤르만은 그 글에서 묘한 매력을 느낀다. 헤르만은 더욱 완성도 있는 글로 발전시키기 위해 클라우디오를 자극하고, 클라우디오의 관찰과 행동은 점점 도를 지나치며 위험한 상황에 빠져든다.
헤르만과 클라우디오는 모두 ‘맨 끝줄’, 즉 자신은 보이지 않으면서 남을 지켜볼 수 있는 위치를 선호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맨 끝줄에 앉아 다른 사람의 인생, 다른 사람의 행위를 지켜보고는 그들의 시선은 사실 은밀한 결핍과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살아가는 클라우디오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라파를 바라보며 자신이 지니지 못한 행복을 욕망하고, 일찍이 작가를 꿈꿨으나 재능이 부족해 교사를 하고 있는 헤르만은 제자 클라우디오의 글을 통해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 작가의 꿈을 대리 충족한다. 내부의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이들의 은밀한 욕망은 결국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뒤틀린 양상으로 드러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본래 글을 쓴다는 것은 남의 인생을 자기 삶보다 더 세밀히 관찰해야 가능한 작업이며, 글을 읽는다는 것 또한 문자화된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자신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이야기의, 나아가 모든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출발이라 할 수 있다. ‘맨 끝줄 소년’은 이처럼 윤리와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헤르만과 클라우디오를 통해 쓰기와 읽기의 힘, 현실과 허구의 경계, 예술의 본질 등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로서 마요르가의 윤리적 고민과 철학적 사유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BOOK
후안 마요르가 희곡집
국내 일곱 권 번역·출간 (김재선 역 | 지만지드라마|)
정리 장혜선 기자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1999) 소련의 작가 불가코프는 자신의 작품을 소련 내에서 공연할 수 없게 되자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민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 하지만 어떤 회신도 받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 불가코프는 이제 대중이 아닌 스탈린 단 한 사람을 위한 글을 쓴다. 진정한 작가는 누구를 위한 글을 써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불가코프 : 여러 해 동안 자먀틴은 저와 함께 악마의 편지를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단어들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제가 잘못한 게 뭡니까?
볼로디아 : 인간에 대한 연극, 인간과 인간의 신비로움을 위한 연극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텅 빈 것과 작은 신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연극은 없는 걸까요?
천국으로 가는 길(200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감행했던 포로수용소를 소재로 한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이 비극을 통해 마요르가는 심도 깊은 상상력을 풀어낸다.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을 연극적으로 상상하며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들춘다.
하멜린(2005)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전설을 소재로 우리가 당면해 있는 ‘아동 성범죄’의 책임을 구명했다. 연극은 열린 구조로 상연된다. 지문은 해설자를 통해 발화되고, 무대장치는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진다. 해설자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관객이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도록 만든다.
몬테로 :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하멜린 사람들은 도시가 쥐 떼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쥐들은 이미 집 안에도 들어와 있었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맨 끝줄 소년(2006) 맨 끝줄을 택한 소년과 그의 작문에 빠져드는 문학 교사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즐거움, 상상하는 행위 자체를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헤르만 : 지난 주말, 작성자 클라우디오 가르시아. 토요일에 난 라파엘 아르톨라 집에 공부하러 갔다. 그 아이디어는 내 머리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난 그 집에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오후마다 난 공원에 가서 그 집을 바라보곤 했다.
다윈의 거북이(2008) 한 노파가 저명한 역사학자를 찾아와 그가 쓴 책이 오류투성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경험한 역사 이면의 진실을 털어놓는다. 사실과 허구를 오가는 진술은 현대사를 보기 좋게 비튼다.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는 가볍지 않은 고민거리들을 떠안게 된다.
해리엇 : 살기 위해서는 잊어야 해요. 많이 살았다는 건 잊어야 할 것도 많다는 거죠. 내 기억은 내 등껍질처럼 너무 딱딱해요, 그리고 너무 무거워요. 과거의 무게가 내 곱사등처럼 날 짓누르네요.
영원한 평화(2008) 테러에 대항하는 전쟁이 우리 시대의 표징으로 떠오른 때, 마요르가는 이 작품을 통해 독자와 관객에게 ‘필요악’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비평가(2012)/눈송이의 유언(2008) ‘비평가’에서는 극작가와 비평가가 연극에 대해 뜨겁게 이야기한다. 이들의 대화는 마치 권투 시합 같다. ‘눈송이의 유언’은 한때 바르셀로나의 상징이었던 흰색 고릴라 눈송이의 임종 순간을 그린 우화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