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한 그루 나무의 성장기
바움 콰르텟
흔들리지 않는 현악 4중주단이 되기 위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실내악 황무지인 우리나라에서 ‘전문 실내악단’은 꽤 오랫동안 낯선 것이었다. 동시대 젊은 연주자들은 투철한 개척 정신으로 메마른 땅을 일구고 있다. 2007년 노부스 콰르텟 창단 이후 현악 4중주단에게도 일련의 방향성이 생겼다. 이후 아벨 콰르텟(2012년 창단), 에스메 콰르텟(2016년 창단) 등 젊은 현악 4중주단이 연이어 결성되며 한국 실내악계도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바움 콰르텟의 시작은 2016년 서울, 네 명이 처음 모여 악보를 읽은 날이 그들만의 창단일이 됐다. 이후 이들은 콩쿠르에 지속적으로 도전하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2017년 여름에는 창단 1년 만에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살리에리 지네티 실내악 콩쿠르에서 2등, 2018년 호주 멜버른 실내악 콩쿠르에서 청중상을 수상했다. 올해 1월에는 멘델스존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성과를 얻었고, 아트실비아 콩쿠르 특별상을 연이어 받으며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바움(Baum)’은 독일어로 ‘나무’를 뜻한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나무’ 같은 실내악단이 되고자 이름을 정했다. 나무에는 성장 법칙이 있다. 뿌리의 깊이가 곧 높이를 결정한다. 땅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뿌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실체를 정하는 것. 현재 바움 콰르텟은 높이 성장하기 위해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꿈만 같던 시작
시작은 퍽 낭만적이었다.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숨을 머금고 활을 긋자, 음악은 그들을 교감케 했다. 이후 한 달 동안 연습만 하면서 결과물을 녹음했다. 음원을 독일 니더작센 실내악 페스티벌에 제출했고, 그 기회로 창단 후 4개월 만에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성과를 이뤘다. 같은 해에는 노르웨이 트론헤임 실내악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아 파벨 하스 콰르텟에게 마스터클래스를 받았다. 이후 바움 콰르텟은 4년간 건재하며 젊은 현악 4중주단 대열에 새로이 이름을 올렸다.
조항오 “고등학교 동창인 한대규의 소개로 누나들을 처음 만났어요. 실내악에 관심 있는 네 명이 처음 모여 악보를 읽었죠. 여러 악보를 연주하면서 말보다는 악기로 교감했던 기억이 나네요.”
김온유 “네 명 모두 실내악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한국·독일·미국·싱가포르 등 각자 다른 곳에서 공부하던 네 명이 한 시점에 한곳에 모여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느꼈죠. 시험 삼아 페스티벌에 CD를 보냈는데 초대장이 와서 꿈만 같았어요.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콰르텟 세계를 경험한 시간이었습니다. 콰르텟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을 만나면서 음악의 무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신선 “니더작센 실내악 페스티벌에서 에버하르트 펠츠와의 첫 레슨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직 우리 팀의 레퍼토리가 있을 리 만무한데, 선생님은 우리가 연주해온 곡을 해보라고 하셨죠. 악보도 없는 상황이라 네 명이 정말 당황했어요.”
한대규 “본격적으로 콰르텟을 시작하기 전에는, 넷이 똑같은 소리를 내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초반에는 서로의 개성을 절제하고 중간 합의점을 찾는 연습에 집중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소리를 주고받는 법을 깨닫고 있어요.”
뿌리를 위한, 깊이
이들보다 앞서 한국 청년 실내악의 가능성을 보여준 노부스 콰르텟은 한 인터뷰에서 모차르트 콩쿠르 1위를 하며 커리어가 한 단계 도약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첫 국내 리사이틀을 선보인 에스메 콰르텟 역시 위그모어 홀 실내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내외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렇듯 해외 콩쿠르입상은 젊은 현악 4중주단에게 필수 양분이 됐다.
신선 “올해 멘델스존 콩쿠르 입상으로 인해 바움 콰르텟의 장기적인 계획이 세워진 셈이죠.”
한대규 “멘델스존 콩쿠르 1위는 큰 성과입니다. 이 콩쿠르에 우승하면서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 설 기회를 얻었거든요. 내년 1월에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연주할 예정이에요. 또한 여러 매체에 바움 콰르텟을 알리는 계기가 됐죠.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되긴 했지만 독일 히차커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았습니다.”
김온유 “하노버, 함부르크, 베를린에서도 연주 계획이 있었지만 대부분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된 상황입니다. 매니지먼트 제안도 들어오고 있는데요. 아직 성장하는 단계여서 어떤 결정을 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운 시기라고 봐요. 아직은 콩쿠르에 더 도전하게 될 것 같아요. 파올로 보르치아니 콩쿠르와 ARD 콩쿠르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대규 “도전했던 모든 콩쿠르 하나하나가 ‘너무 치열했다’는 기억이 있어요. 그래도 콩쿠르를 위해 방문한 모든 나라가 아름다워서 ‘내가 콰르텟을 하지 않았다면 이곳에도 없었겠지?’라며 위로를 했죠. 멤버들과 이탈리아에서 비를 맞으며 콩쿠르 결과를 들었던 일, 폴란드에서 다 함께 먹은 초밥, 호주행 비행기에서 함께 월드컵을 관람했던 기억들이 생각나네요. 이런 사소한 추억들이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김온유 “각 나라의 특성이 콩쿠르 분위기에 묻어 나오는 경험은 참 흥미롭죠. 일례로 호주의 콩쿠르는 다인종이 함께 사는 만큼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음악 축제를 즐기는 느낌이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화려한 나라라는 이미지만큼 연주에서도 다채로운 표현이 요구됐고요.”
깊이가 곧 높이로, 열매로
저명한 콩쿠르에 이름을 새긴다고 곧바로 생명력을 얻는 건 아니다. 특히 콰르텟은 네 단원의 합(合)이 무르익는 과정이 중요하기에, 유럽 음악계에선 젊은 실내악단에 관한 불신이 두텁다. 더욱이 ‘동양인’이라는 클리셰가 겹쳐지기도. 그럴수록 ‘우리는 음악으로만 말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단원 넷이 그리는 음악적 목표가 일치해야 올곧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테다.
한대규 “하고 싶은 곡이 너무 많습니다. 고전과 낭만 레퍼토리가 적은 비올리스트에게 콰르텟 연주자로 산다는 건 큰 축복이죠. 우리 팀은 기본기를 확실히 하기 위해 그동안 고전 레퍼토리에 집중했습니다. 이제는 폭을 조금씩 넓혀서 드보르자크나 시벨리우스 작품을 연주하고 싶어요. 스승님이신 알반베르크 콰르텟의 귄터 피힐러는 동시대 현대음악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죠.”
조항오 “확실히 고전음악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콰르텟 실력 자체가 향상되는 것 같아요. 지금 기본에 충실하면 앞으로의 연주활동이 수월할 거라고 봅니다.”
신선 “초창기에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번갈아가면서 연주했는데요. 둘의 자리가 바뀔 때마다 비올리스트와 첼리스트가 그에 맞춰 밸런스를 조율해야 하는 복잡함이 있더라고요.”
김온유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이 담당하는 역할이 많이 달라요. 각자의 역할을 최상으로 소화하면서 최선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좋은 실내악의 필수 조건은 ‘조화’라고 생각해요. 각 연주자 고유의 색을 보이는 동시에, 함께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야 하죠.”
신선 “실내악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하는 장르죠. 함께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있을 지요.”
조항오 “심지어 멤버 중 한 명이 컨디션이 안 좋아도, 나머지 셋이 에너지를 끌어내 좋은 기운을 형성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던 것 같아요.”
한대규 “이해가 안 되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모두가 행복한 멋진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행복해야지만 좋은 실내악단이죠!
글 장혜선 기자 사진 바움 콰르텟
바움 콰르텟 youtube
버르토크 현악 4중주 2번
“버르토크(1881~1945)의 현악 4중주 2번은 화성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면 푹 빠져드는 곡이에요. 1악장에는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슬픈 헝가리 민속음악이 녹아있어요. 2악장은 경쾌하면서도 미치광이 같은 악마의 칼춤이 떠오르고, 3악장은 음산하여 어두운 장송곡을 생각나게 합니다.”
슈베르트 현악 4중주
‘크바르테트자츠’ D703
“우리 팀이 결성되고 처음으로 연습했던 곡이에요. 네 명 모두에게 어려운 테크닉과 음악적인 이해가 필요했죠. 4년이 지닌 지금도 참 어려운 곡이지만, 서정적인 선율은 마치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 곡을 미워할 수가 없죠. 비바람을 연상시키는 도입부는 슈베르트(1797~1828)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엿볼 수 있는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