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피아니스트 서형민
그리고, 남겨진 것들
국내 데뷔 독주회를 앞두고, 그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미국행 비행기에 탔을 적에 그는 고작 열 살이었다. 피아노에 소질을 보이는 아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싶던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소년은 매네스 음대 예비학교를 다녔고, 2001년에는 ‘뉴욕 필 영아티스트 오디션’에 우승하며 11세 나이에 쿠르트 마주어(1927~2015)가 지휘하는 뉴욕 필과 협연하기에 이른다.
20대에는 뭐가 그리 이겨내야 할 것이 많았을까. 그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존 제이 장학생(John Jay Scholar)으로 선발되어 고대 그리스·로마 역사를 공부했다. 컬럼비아 대학과 줄리아드 음악원의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이매뉴얼 액스(1949~), 마티 라이칼리오(1954~)를 만나게 됐다. 또래의 연주자처럼 콩쿠르에 전념하며 온전히 젊음을 바쳤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정형화된 ‘콩쿠르 피아니스트’가 될 순 없었다. 나만의 색깔을 찾으면서도, 콩쿠르에서도 통하는 스타일을 겸해야만 했다. 그러다 갑작스레 찾아온 손가락 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쓴 에너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남겨진 것들. 2016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과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우승, 2017년 빈 베토벤 콩쿠르 4위, 2018년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콩쿠르 우승, 2019년 비오티 콩쿠르 2위 등 프로필에 적힌 빼곡한 콩쿠르 경력이 지금의 그를 대변하고 있다.
30대가 된 그는 독일 하노버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다. 뜨거웠던 20대가 지나고, 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줄 알았는데 여전히 복잡한 것 투성이란다. 이제 막 서른의 길목에 선 서형민(1990~)과 나눈 일문일답.
30대는 좀 근사한가?
심적으로 변화가 생기긴 했다. ‘음악’이란 이름에는 즐길 ‘락(樂)’이 담겨있는데, 막상 그 부분을 등한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휩싸였다. 2018년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콩쿠르 우승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기점이 됐다. 그 콩쿠르에선 정말 오랜만에 고통 없는 연주를 했다. 30대에는 즐겁게 음악 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싶다. 그러면 좀 근사해지지 않겠나?
열 살에 한국을 떠나 국내에 연결고리가 많이 없다는 아쉬움을 전한 적이 있다. 지난해 대관령국제음악제 참여가 5년 만의 한국 공연이었다고.
2019년 비오티 콩쿠르 이후 현 소속사(해프닝피플) 대표가 나에게 손 내밀어 주었다. 그 기회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독일에서 홀로 전염병을 견디며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 한국에서 좋은 인연들과 함께하게 되어 즐겁다.
한동안 치명적인 손끝 통증 때문에 피아노 치기가 어려웠다고 들었다. 현재 건강 상태는 괜찮나?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갑자기 손끝에 염증이 생겼다. 손톱이 들리며 고름이 차올랐다. 미국에서의 병원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2015년에는 한국에 들어와 온갖 병원을 다녔지만 원인을 잘 모르겠다는 진단을 받았다. 2017년 빈에서의 베토벤 콩쿠르 이후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뉴욕에서 한 의사를 만났다. 들뜬 손톱을 잘라내고 염증으로 변형된 부분을 모조리 뽑아냈다. 수건을 입에 물고 치료할 정도로 너무 아팠다. 이후 한약으로 보신하면서 몸이 점차적으로 좋아졌다. 아직 완치된 건 아니지만 90퍼센트는 나은 것 같다. 일단 고통 없이 피아노를 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손가락 통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콩쿠르에 도전한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무리해서 입상한 콩쿠르 경력들이 연주 기회로도 이어졌는지?
이 질문을 받으니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2016)하고, 당시 김대진 심사위원이 한 말이 생각난다. 콩쿠르 이후 연주자들이 받아야 할 다양한 기회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어떤 콩쿠르는 우승했는데도 연주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고, 어떤 콩쿠르는 우승하지 못했는데도 몇 번이나 초청받은 적이 있다.
2018년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콩쿠르가 실질적인 수혜가 많았다고.
우승을 하니 생활비가 단숨에 해결될 정도로 많은 상금을 주더라. 여러 번의 해외 오케스트라 협연이 주어졌고, 각종 독주회, 음반 발매까지 이어졌다. 사실 기억에 남는 콩쿠르는 정말 많다. 2013년 센다이 콩쿠르에서 2위 했을 땐 군대 문제가 해결되어 안도감을 느꼈고, 2016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손 통증 때문에 코르티코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며 준비했다. 그 시기 우여곡절 끝에 윤이상콩쿠르에 참여했다. 결선에서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치며 은근히 우승을 예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갖가지 감정들이 밀려왔다. 연주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가자마자 화장실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놓고 펑펑 울었다.
이번 11월 독주회를 앞둔 기대감은?
주로 해외에서 활동했기에 국내 관객에겐 나의 주력 레퍼토리를 보여준 적이 없다. 이번 독주회 레퍼토리는 해외 콩쿠르에서 주로 선보였던 곡 중에서 골랐다. 온전히 나의 음악을 선보이는 기회가 될 것 같아 기대된다.
베토벤 작품으로 독주회의 첫 문을 연다. 몇몇 언론에선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명명했던데, 이러한 별칭이 붙은 이유를 스스로 예측해본다면?
최근 내가 여덟 살 때 출연한 ‘주병진쇼’ 영상을 봤다. 당시 나에게 어떤 작곡가를 좋아하냐고 물었는데, 베토벤이라고 대답하더라. 어릴 때부터 베토벤 사랑이 남달랐다.(웃음) 스승 이매뉴얼 액스 역시 베토벤의 계보를 잇는 연주자라 더 애착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베토벤이 역경을 딛고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구축해 나간 것도 와닿는다.
이번 무대에서 선보일 프레데릭 제프스키(1938~)의 ‘단결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에서는 카덴차 부분을 즉흥연주로 채울 예정인데.
곡명을 보면 의미심장한 데다가 느낌표까지 붙어있다! 요즘 시국에 어울리는 곡인 것 같아서 프로그램에 넣었다. 1시간에 달하는 전곡을 치기도 좀 그렇고, 3분 정도 주요 테마만 칠 수도 없어서, 카덴차로 시작해 마지막 테마로 이어지게 재구성했다. 이미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빗이 이렇게 연주한 적 있다.
한 인터뷰에서 이번 독주회에서 선보이는 드뷔시 ‘달빛’에서는 “즉흥성에 포커스를 맞추겠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즉흥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악보는 정형화되어있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작곡가의 숨결을 끌어내는 것이 연주자들의 몫이라고 본다. 그 행위 자체에도 즉흥성이 들어가 있다. 특히 드뷔시의 ‘달빛’은 그 즉흥성이 극에 달한 곡이다.
지난해 더하우스콘서트에서 주최한 공연에서는 윤이상(1917~1995), 이영조(1943~), 이병우(1965~) 등의 현대 작곡가 작품을 선보였다. 원래부터 현대 작곡가에 대한 관심이 깊었나?
어릴 적에는 불협화음에 대한 거부감이 꽤 심했다. 스승님인 이매뉴얼 액스가 버르토크 소나타를 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안 하겠다고 몇 달을 버텼는데 결국 나중에는 콩쿠르에서 즐겨 치는 곡이 됐다. 현대음악이 가진 매력이란…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어본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까?
어릴 때부터 작곡에 소질을 보여 왔다. 작년 더하우스콘서트 공연에선 직접 작곡한 작품을 치기도 했는데. 작곡가로서 더 활발히 활동할 계획은 없는지?
작곡을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일단은 피아니스트라는 나의 본분에 충실한 뒤, 다른 분야에 신경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본격적인 한국 활동을 앞두고 있는데, 대중에게 듣고 싶은 평은?
지금껏 살면서 느낀 점은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순 없다는 것이다. 대중이 나에게 건네는 평이면 뭐든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해프닝피플
서형민 피아노 독주회 11월 12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제806회 더하우스콘서트 서형민(피아노), 박규민(바이올린), 윤태영(비올라) 외
11월 16일 오후 8시 예술가의집
베토벤 시리즈5 – 피아노의 세계 11월 17일 오전 11시 소월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