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ET THE ARTIST
플루티스트 최나경이 만난 세계의 음악인 ③
피아니스트 조성진
바람과 함께 나타난 방랑자, 음악과 함께 사라지다
누구에게나 특별히 좋아하고 존경하는 음악가가 있다. 그들의 공연에 가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고, 그 음악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경우에 따라 생애 최고의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늘 우러러보던 음악적 우상들이 많았는데, 여러 무대에 서면서 그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도 많아졌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이 빚어내는 마법 같은 음악과 인간적인 면이 항상 맞물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좋아하는 마음만큼 실망도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는 존경하는 음악가일수록 무대 밖에서의 만남을 피하는 버릇까지 생기고 말았다. 그러면 그에 대한 환상만큼은 깨지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성진(1994~)은 정말 고맙고, 또 귀한 연주자다. 대중음악 가수까지 합쳐도 그 인기가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큰 사랑을 받는 피아니스트이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음악가이기 이전에 참 온유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훌륭한 성품까지 기대하면 안 되는 거라고 단정 지었던 나의 얕은 생각에 기분 좋게 찬물을 끼얹어준 연주자다.
팬데믹이 만들어 준 타이밍
여름과 가을의 문턱. 날씨도 코로나도, 그리고 내 마음도 갈팡질팡하던 어느 일요일. 원래대로였다면 그날은 독일 코블렌츠에서 라이니쉬 필하모닉과 모차르트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작품을 협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주 때 마스크를 쓸 수 없는 관악기 연주자들은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시의 결정에 따라 공연이 갑자기 내년으로 연기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서는 코로나 상황을 고려해 그날 예정되어 있던 마린 알솝/빈 방송교향악단 공연이 피아노 독주회(9.20/브레겐츠 페스티벌하우스)로 급히 교체되었다. 벌써 7년째 거주 중인 브레겐츠는 오스트리아·스위스·독일을 이어주는 큰 호수인 ‘보덴제’ 위에서 열리는 오페라로 유명하지만, 인구는 3만 명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시다. 한국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전부이고, 브레겐츠 주변 도시까지 다 합쳐도 네 명밖에 안 된다. 이런 곳에 예고도 없이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심지어 전 세계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는 조성진이라니! 그날 나는 독일 공연이 취소된 것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방랑자의 영혼으로
“가장 위대한 예술은 ‘나’를 내려놓는 일”이라고 류시화 시인은 말했다. 이날 분명 조성진을 보러 공연장을 찾았건만, 정작 연주가 시작되자 내가 보러 온 그 연주자는 서서히 음악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슈만, 슈베르트, 쇼팽의 언어가 지극히 순수한 형태로 시공간을 가득 채워갔다. 깔끔하면서 화려한 쇼팽 연주로 가장 잘 알려진 조성진이지만, 최근에 음반으로도 발매한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DG)은 그야말로 듣는 이의 가슴을 후려치는 흔치 않은 연주였다. 또한 영롱함과 아기자기한 색감이 돋보인 슈만의 해석은 잔잔하면서도 깊은 위로를 전해주었다. 흥미롭게도 조성진은 그날 처음으로 슈만의 소나타 ‘숲의 정경’을 연주했다고 했다. 코로나 안전수칙에 준해 인터미션 없는 65분의 프로그램을 하루에 두 번 연주해야 했던 조성진은 “장단점이 있지만 연주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게 우선 기쁘다”며 웃어 보였다. “지난 몇 달 동안 베를린 집에 머물면서 사실 많이 힘들었다. 당장의 연주가 없으니 연습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그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00주년 공연이 취소되었을 때보다 지난 7월에 예정되었던 한국 투어가 취소되었을 때에 더 상심이 컸다고 했다. 조성진은 브레겐츠 페스티벌하우스 특유의 건조한 음향을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숨을 곳이 없는 좋은 음향보다는 더 마음이 편하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공연장 바로 옆 호텔이 다 차서 꽤나 걸어가야 하는 호텔에 머물면서도 불평 하나 없었다. 혼신을 다한 두 번의 연주를 마친 후, 마스크를 쓴 채 커다란 배낭과 팬들에게 받은 선물 꾸러미, 연주복, 연주 구두까지 짊어지고 홀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그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에 와락 눈물이 날 뻔했다. 그를 응원하는 팬으로서는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그림이었으나, 늘 혼자 연습하고, 홀로 리사이틀 무대에 서고, 또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그에겐 어쩌면 더 익숙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리안 파워의 리더
팬데믹이 확산되기 시작했을 무렵 오스트리아에서는 장을 보러 가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락다운(lockdown)’이 두 달 이상 지속되었다. 갈수록 센티해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많은 영상 중 플루트로 편곡한 ‘애국가’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을 비롯해 박세리, 손흥민 같은 스포츠 스타는 물론, 한국인의 이미지를 새롭게 다져준 가수 싸이, BTS, 그리고 영화 ‘기생충’ 등을 영상에 담았다. 클래식 음악인으로는 유일하게 조성진을 넣었는데, 그만큼 그는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럽게 만들어준 아이콘이다. 그의 풍성한 음악은 지금도,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힘을 실어줄 테다. 그가 오래오래 음악가로서의 삶을 영위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지난 9월 브레겐츠에서 만난 조성진은 올해 10월과 11월, 그리고 2021년 4월과 8월, 10월에 한국을 다시 찾는다고 전했다. 코로나만 무사히 사라져 준다면 한국 팬들에게 정말 기쁜 한 해가 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브레겐츠를 찾은 조성진과 나눈 짧은 대화를 남긴다.
최나경 파리에 살다가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두 도시가 음악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요.
조성진 베를린에는 수많은 음악가가 살고 있고, 상주 오케스트라도 너무 많아서 좋아요. 반면, 상대적으로 외부 연주자들의 공연은 많지 않죠. 그런 관점에서는 파리에 살 때 더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나경 쇼팽 콩쿠르 당시에도 그렇고 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고르던데요.
조성진 스타인웨이가 지닌 음색이 좋아요. 제가 원하는 것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 좋고요. 쇼팽 콩쿠르 때 참가한 많은 피아니스트 중에 스타인웨이가 아닌 다른 레이블의 피아노를 고른 피아니스트가 딱 한 명 있었는데요, 콩쿠르 동안 혼자 그 피아노를 온종일 차지해 연습하는 것을 보며 조금 부럽긴 하더라고요.
최나경 코로나 이후 클래식 음악계가 많이 바뀌었어요. 이전처럼 청중이 마음 놓고 공연장을 찾는 날은 언제가 될까요?
조성진 안타깝게도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최나경 연습을 쉬어가는 날도 있나요?
조성진 물론이죠. 쉬는 날도 있어야 해요. 일주일에 5~6일 정도 연습하고 있어요.
최나경 항상 정갈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앞머리에는 웨이브를 넣던데, 그 웨이브는 어떻게 만드나요?
조성진 뭘 특별히 하진 않아요. 웨이브가 생긴다면, 아마 연주할 때 생기는 땀 때문일 거예요.
글 최나경
플루티스트 최나경은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 1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커티스 음악원·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했다. 신시내티 심포니 부수석, 빈 심포니 수석을 역임했으며, 현재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 머물며 솔리스트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유튜브 채널 ‘플루트 최나경’를 비롯해 다양한 SNS 채널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
10월 28일 오후 3시·7시 30분 광주문화예술회관
10월 30일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11월 1일 오후 3·7시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11월 3일 오후 7시 창원 315아트센터
11월 4일 3시·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1월 9일 오후 7시 30분 춘천문화예술회관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슈만 ‘유머레스크’ op.20, 시마노프스키 ‘마스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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