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8인과 함께한 따뜻한 연말 파티

COVER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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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0년 12월 21일 9:00 오전

글 장혜선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 헤어&메이크업 도도아카데미 청량리캠퍼스 의상 라 실루엣 드 유제니 아트디렉터 지향미 소품 월스타일(070-8773-9999) 의자 라탈랑트(070-8623-4967)

20대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30대 피아니스트 김태형, 플루티스트 조성현

40대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 소프라노 임세경

50대 베이스 연광철, 작곡가 류재준

세대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

한 해가 갑니다. 여덟 명의 음악가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터를 지켜낸 여덟 그루의 나무입니다.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낸 나무는 고운 열매를 맺고,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렇게 나무는 몇 천 겹의 시간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한자리에 모인 8인의 음악가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선배는 뿌리를 내려 후배의 열매를 피워내고, 후배는 다시 선배가 되어 다음의 열매를 준비합니다. 그렇게 음악계의 성장은 나무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20대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꿈을 불어 넣다

두 청춘이 풍선을 들고 섰습니다. 이내 부끄러운지 말갛게 웃음을 터뜨리네요. 청량한 두 사람을 보면, 누군가는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떠난 유학, 이력서에 빼곡한 콩쿠르 경력이 지금의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데요. 10대에는 어땠을까요? 풍선을 불기 위해 체력을 키웠습니다. 송지원(1992~)은 열 살 때 미국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클리블랜드·커티스·뉴잉글랜드 음악원 예비학교를 거쳐, 2011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김한(1996~)은 예원학교 시절부터 ‘영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죠. 10대에 그는 영국 이튼 칼리지에서 대입을 준비했습니다. 호흡을 단련한 그들은 20대부터 본격적으로 풍선을 불었습니다. 날기 위해선 풍선이 커져야만 했죠. 송지원은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석사를 취득한 후,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합니다. 마침내 2016년 레오폴트 모차르트 콩쿠르 1위 소식을 전했죠.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국내 음악계에 송지원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 김한은 길드홀 음악연극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뤼베크 음대에서 자비네 마이어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2016년 자크 랑슬로 클라리넷 콩쿠르에서 1위, ARD 콩쿠르에서 준우승과 청중상을 수상합니다. 2018년부터는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의 부수석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때로는 숨이 가쁘기도 했고, 때로는 부풀지 않는 풍선을 보며 원망도 했을 겁니다. 지금부터 이들의 청춘 기록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김한 오히려 그 반대였어요. 예전에는 타고난 음악성을 믿고 느낌 가는 대로 연주했는데, 중고등학교 때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배우면서 나름의 해석을 만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송지원 어릴 때부터 ‘음악일기’를 꾸준히 써왔는데요. 10대와 20대의 기록들이 확연히 달라요. 10대에는 주로 음악을 테크닉적으로 찾아나가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표현하고 싶은 음악과 실제 연주의 차이점을 파악하여 분석을 담았어요. 현재는 연주 마인드, 연주 모니터 후기 등 실전에서 도움된 팁을 담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은사님에 대한 존경심을 여러 인터뷰에서 내비쳤는데요.

김한 자비네 마이어 선생님은 제 음악을 존중해 주셨어요. 어떻게 연주해야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셨죠. 그것을 통해 넓은 음악적 팔레트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가르침은 효율적인 연습 방법인데요. 오래 연습하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송지원 클리블랜드 음악원에서 만난 데이비드 세론 선생님은 창의력을 북돋아주셨죠. 저만의 카덴차를 작곡하게 하셨어요.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만난 도널드 와일러스타인 선생님은 감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강조하셨고요.

20대라고 하면 한창 커리어를 쌓을 나이죠. 해외 음악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권위 있는 콩쿠르에 이름을 올리는 게 수순인데요.

김한 저는 작년 9월, ARD 콩쿠르에 입상하며 첫 목표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더라고요. 연주자로서 어떤 방향성을 잡아야 할 텐데, 아직 확실치가 않습니다. 20대가 끝날 때까지는 정체성이 확실해지면 좋겠어요.

송지원 현재 몰두하는 것은 커리어를 쌓으며 경험을 습득하는 것이죠. 자양분을 다각도로 다져놓는 20대를 보내고 싶어요.

기억에 남는 콩쿠르 에피소드는?

김한 2016년 나갔던 자크 랑슬로 콩쿠르가 기억에 남아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악기를 도난당했거든요. 그 악기는 아직도 못 찾았고요…. 부랴부랴 파리에 있는 한 악기사에 전화해 새 악기를 구입했어요. 감사하게도 1위를 했네요. 그 악기사에서 학생들이 악기 탓을 하면, 저를 예로 든답니다. 장비 탓하면 안 된다고요.(웃음)

송지원 저는 중국에서 참여했던 콩쿠르들이 인상 깊어요. 한 번은 첸 강·허 잔하오의 바이올린 협주곡 ‘나비 연인’을 중국 바이올리니스트 유 리나에게 레슨받은 적이 있어요. 그 곡을 초연한 분이죠. 이후 작곡가에게 “중국인보다 중국 정서를 더 잘 이해한다”는 평을 받았어요.

콩쿠르에만 몰두하면 레퍼토리 폭을 넓히는 데 한계가 있을 듯합니다.

송지원 콩쿠르에 나가면서 고전과 낭만 작품 위주로 공부했어요. 아직 채워나가야 할 곡이 많습니다. 더불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곡들을 발굴하고 싶어요.

김한 악기 특성상 클라리넷은 방대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지 않아요. 웬만한 곡들은 다 연주해본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는 유명 레퍼토리를 나만의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에 몰두했는데, 저 역시 이제는 알려지지 않은 곡을 발굴하는 작업도 해보고 싶습니다.

지난 2018년, 김한 씨는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제2수석이 되셨죠. 지난 호 ‘객석’에 악단 대표인 투라 사로티에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소속된 한국인 연주자들(김한·함경·에즈라 우)에 대한 신뢰가 두텁던데요. 

김한 안 그래도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대표님이 단원들과 가깝게 지내는데, ‘객석’에서도 만나 뵈니 신기하더라고요. 관악기 특성상 오케스트라 입단이 어렵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오디션 소문만 들으면 늘 참가했습니다. 오디션을 갈 때마다 거의 같은 친구들이 오고요. 사실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은 상상도 못 해봤는데, 함경 형(오보에)의 추천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오디션은 파이널 라운드까지 블라인드 테스트로 진행됐습니다. 오디션인데도 편안했던 분위기가 잊히지 않네요. 상임지휘자 한누 린투를 비롯하여 에사 페카 살로넨, 사카리 오라모 등 핀란드의 명지휘자들과 함께 연주하고 있어요. 각자에게서 다른 매력이 나오더군요. 유연한 오케스트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작곡가들의 초연곡도 자주 연주하는데요. 그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보면 굉장히 재밌습니다. 지금 핀란드에서의 삶이 행복해요.

20대는 진로에 대한 방향성이 복잡하죠. 뭐든지 다 구체적이어야 될 시기니까요.

김한 솔리스트·오케스트라·실내악 셋 다 음악적으로 매력이 달라요. 악기 특성상 솔리스트로만 살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세 분야의 밸런스를 맞추는 거예요.

송지원  요즘은 SNS가 발달해 얼마든지 자신을 홍보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단지 연습을 착실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연습에만 몰두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결국 음악과 SNS의 공통점은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옵션이 아니라 음악의 일부분으로 인지하고 좀 더 열심히 청중과 소통하려고 합니다.

10년 뒤는 어떠한 모습이길 기대하나요?

김한 30대에는 다듬어진 모습이면 좋겠어요. ‘김한’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확실한 색깔을 가진 클라리네티스트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송지원 지금보다 성숙해진 모습으로 연륜을 쌓고 싶어요. 음악가로서의 사명감이 더 뚜렷해져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습니다.

지금의 자신을 한 단어로 정리해 주세요!

송지원 ‘도전’이요! 20대의 많은 시간을 콩쿠르에 참가하며 보냈죠. 남은 20대에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 경험을 꿈꿉니다.

김한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나라에 살았어요. 싱가포르부터 시작해 영국·독일·스위스·핀란드까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에서 살지 궁금해요. ‘모험가’라는 단어가 지금 저에게 가장 잘 맞는 단어가 아닐까 싶어요!

두 사람은 힘껏 부풀린 풍선을 들고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불어오는 바람결을 살피며, 어느 곳으로 몸을 띄울지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부풀어 오른 풍선이 이들을 어디로 데려갈까요? 팔을 뻗은 두 사람이 훨훨 날기를 바랍니다.

 

30대
플루티스트 조성현 &피아니스트 김태형
새로운 전략을 세우다

미국의 초대 정치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생은 체스와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체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세 가지 덕목을 꼽았는데요. 미래를 예상하는 통찰력, 상황을 분석하는 관찰력, 성급한 판단을 방지하는 주의력을 강조했습니다. 체스는 중반전으로 갈수록 말들이 뒤섞여 어지러운 전투를 치릅니다. 지난 10대, 김태형과 조성현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이동 경로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20대, 전쟁터 한 가운데서 앞을 내다보면서 전략을 다듬었죠.

여기서 잠시, 그들이 지난 20대 동안 판 위에 배치했던 ‘말’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김태형(1985~)은 2008년 뮌헨 음대로 유학을 떠나 비르살라제를 사사했어요. 201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해 5위를 했으며, 콩쿠르 직후 바인슈타트 매니지먼트와 계약했죠. 201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진학하고, 2015년에 트리오 가온을 결성한 그는 다시 뮌헨으로 돌아왔어요.  조성현(1990~)은 김태형보다 조금 더 일찍 해외 생활을 경험합니다. 예원학교 재학 중 미국 오벌린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후 하노버 음대에 진학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카라얀 아카데미에 입단했죠. 이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쾰른 필하모닉 수석 주자로 활동합니다.

각자 ‘모스크바’와 ‘베를린’에서의 기억이 강렬할 것 같네요.

김태형 2010년 봄이었어요. 비르살라제 선생님이 ‘너도 모스크바를 꼭 봤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러시아 음악을 자주 연주하는데, 러시아 작곡가들은 뭘 보고 느꼈기에 이런 음악을 만들었을까…. 그때부터 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생겼어요. 러시아 유학 이후 주변에서 ‘색채가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결과적으로 러시아 유학이 저를 찾게 해준 소중한 2년이었죠.

조성현 저도 카라얀 아카데미에 입단했던 시기에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시야가 넓어졌죠.

촬영 현장에 먼저 얼굴을 비춘 건 ‘착한 남자’ 김태형입니다. 5년 만에 만났는데도 그는 참 여전합니다. 현장 스태프에게 먼저 다가가 다정한 인사를 건넵니다. “프로코피예프를 ‘못되게’ 치고 싶다”던 20대의 김태형이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죠.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변하게 된다는 말인데요. 이 말이 부정적으로 적용된 사람들을 많이 봐온 터라, 그 역시 조금 변했을까 염려됐던 모양입니다. 2018년부터 김태형은 경희대에 임용되어 ‘교수’라는 직함을 더했습니다.

김태형에 이어 조성현이 촬영장에 들어옵니다. “왜 이렇게 멋지게 하고 왔냐”는 ‘착한 남자’ 김태형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조성현은 순식간에 ‘멋진 남자’가 됩니다. 조성현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네요. 지난해 조성현은 연세대 조교수 임용 소식을 전했습니다. 쾰른 필 종신 수석으로 활동하며 연주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고국행을 결심한 건데요.

20대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된 것인데요.

조성현 벌써 3학기 째 학교에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어요. 사실 안정적인 것과는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연주자로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책임감이 커졌죠. 같은 음악가이지만 교육자와 연주자의 시간을 분배하는 게 어려워요. 시간이 지나면 여러 노하우가 생기겠지만, 지금의 저는 연습 시간을 만드는 게 예전보다 어려워져서 심적으로 편하진 않습니다.

김태형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독주회나 협연, 트리오 가온(피아노 김태형·바이올린 이지혜·첼로 사무엘 루츠커) 활동까지 병행해 더 바빠진 삶을 살고 있어요. 물론 오랫동안 프리랜서 음악가로 살았던 저에게 학교라는 울타리가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긴 하죠.

사실 음악가라는 직업은 대부분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음악인으로서의 나’를 지키게 해준 것들은 무엇이었나요?

김태형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전 ‘인내’와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피아노 앞에 있을 수밖에 없었죠. 지독한 인내심이 필요했어요. 무엇을 해보겠다고 요행을 부리면, 결국은 음악에서 드러났거든요.

조성현 음악에 대한 열정입니다. 아직도 시간이 생기면 음반을 사고 음악회를 다녀요. 연습도 중요하지만, 아이디어를 가지려면 실내악·오케스트라·오페라 등 여러 경험을 쌓길 바랍니다.두 음악청년은 어느덧 누군가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둘 역시 누군가를 스승으로 둔 시절이 있었죠.

지난 20대, 그들에게 가장 결정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재밌게도 두 사람 모두 ‘영원한 멘토’를 만난 것을 꼽네요. 김태형은 스승 비르살라제(1942~)를 언급합니다. 비르살라제는 정년퇴임제가 없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둥지를 옮겼고, 2011년 김태형 역시 스승을 따라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조성현의 영웅이 누군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죠? 소년 시절, 조성현은 베를린 필의 수석 에마뉘엘 파위(1970~)의 연주를 보고 플루티스트를 꿈꿨습니다. 지난 2013년, 베를린 필 카라얀 아카데미 오디션에 도전한 이유도 파위의 옆자리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죠.

20대의 시간은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잖아요.

 조성현 입시 위주의 음악 교육을 받다 보니 전공 악기에 한정된 좁은 시야를 갖게 되는데요. 여러 악기와 다양한 장르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호기심으로 여러 음악에 접근한다면 ‘나의 연주’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김태형 결국 음악에는 내 세계가 담겨서 나와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작곡가가 어떤 말을 건네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하고요. 많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스펙트럼은 넓어지지 않아요. 다양한 상상을 해야 하죠. 그리고 내가 노래하는 음들이 정말 ‘노래되어지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해요.

혹시 ‘90년대생이 온다’(임홍택 저)라는 책 아세요? 기성세대 관점에서 90년대생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있잖아요. 대학생들을 보며 “와 나 때와는 좀 다르구나” 하는 것들이 있나요? 

김태형 요즘은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쉽게 지나가 버립니다. 손에 다 쥘 수 없으니 놓아버리는 것도 쉬워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예술은 자신과 혹독하게 싸워야 하는 것이기에 단시간에 결과를 얻기는 힘듭니다. 이 세상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너무 느릴 수 있죠. 자신의 속도가 느리다고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면 좋겠어요.

조성현 요즘 친구들은 솔직해요. 표현에도 거리낌이 없죠. 음악에도 그런 면이 녹아나면서 개성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고요. 이런 부분이 더 보완된다면 음악에도 좋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의 나에게 중요한 것들은 뭔가요?

김태형 늘 똑같아요. ‘피아노를 어떻게 하면 잘 칠 수 있을까?’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20대에는 ‘내 커리어가 이렇게 연결되면 좋겠다’는 고민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자신에 대한 고찰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조성현 돌이켜보면 20대에는 많은 해외 콩쿠르와 오디션, 학업까지…. 음악적 커리어를 위해 에너지 넘치게 살았던 것 같네요. 30대의 시작점에 서있는데요. 따뜻한 위로의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면, 사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새삼 깨닫곤 합니다. 그 낯선 느낌이 섭섭하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여전히 그대로인 두 연주자들이 참 반가웠습니다. 남이 보았을 때는 치열한 게임을 끝낸 듯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달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움직임을 위한 준비동작부터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앞에 보이는 성과를 좇으며 통찰력과 관찰력, 주의력을 습득했죠. 예술적인 전략을 익힌 김태형과 조성현이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갈지 궁금하지 않나요?

 

40대
소프라노 임세경 &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
인생의 중반전에서

모두의 손에 빼빼로가 쥐어집니다. 빼빼로 데이라며 서슴없이 과자를 돌리는 백주영 덕분에 현장의 분위기는 화목해졌습니다. 11월 11일, 촬영장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든 두 사람은 임세경(1975~)과 백주영(1976~)입니다. 둘은 이날이 초면이라고 하는데요. 첫 만남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둘은 금세 친해집니다. 서로에게 어울리는 드레스와 주얼리를 골라주면서 말이죠. 중년의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성공의 달콤함과 실패의 쓰라림을 어느 정도 체험한 나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인지 마흔이라고 하면 으레 ‘위기’라는 단어가 뒤따르죠. 2005년, 백주영의 서울대 교수 취임은 화제를 낳았습니다. 당시 나이는 스물아홉. 주변에선 연주에 전념하길 바라며 우려의 시선을 던졌습니다. 새내기 교수 시절, 조언을 준 사람은 먼저 그 길을 걸었던 피아니스트 백혜선입니다. 백혜선 역시 29세 나이로 서울대 임용되며 화제를 낳은 바 있죠. 당시 백혜선은 백주영에게 “연주 실력을 키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의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소프라노 임세경은 정반대의 행보를 보입니다. 유럽 무대를 활보하며 경력을 쌓았죠. 특히 2015년부터 해외에서 기념비적인 공연을 시작합니다. 빈 국립 오페라에서 푸치니 ‘나비부인’의 초초상으로 데뷔했죠. 이후 유럽 주요 극장에 초청되어 전성기를 누리던 그는 올해 중앙대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유럽에서 동양인 여성으로 홀로 정상에 서기까지 수많은 시련을 겪었기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많은 고민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바이올리니스트는 20대 후반, 소프라노는 40대가 전성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치 챘을 테지만, 두 연주자는 모두 전성기에 교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죠. 연구실에서 편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겠는데요.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무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울러 미래 연주자들을 위한 음악 생태계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먼저 어린 시절을 회고해 볼까요. 

임세경 한양대 재학 시절이었어요. 곽신형 교수님의 제자 음악회를 한 적이 있는데요. 음악회 팸플릿에 저만 이력이 단 한 줄이더라고요. ‘한양대 재학 중’. 처음으로 무언가에 샘이 났어요. 1년 안에 이력 세 줄을 추가하겠다고 결심했죠.

 백주영 저는 예원학교 명예교장이던 임원식 선생님이 떠올라요. 졸업식 때 재학생 대표로 연주를 했는데요. 며칠 후 임원식 선생님이 저를 교무실로 부르셨어요. 떨리는 마음으로 교무실에 갔는데, 저에게 솔리스트로 해외 투어를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16세의 첫 연주 여행은 음악가로 도약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어요.

제 생각에 바이올리니스트는 20대 후반, 소프라노는 40대가 전성기인 것 같아요. 한창 연주자로 활약할 시기에 두 분 모두 교수라는 직함을 얻게 되었는데요. 

백주영 20대 초반에 여러 콩쿠르에 입상한 후 뉴욕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어 4~5년 동안 세계를 활보하다가 갑자기 한국에 오게 됐는데요, 사실 멋모르고 일찍 귀국했던 것 같아요. 어린 교수였기에 모범생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학교생활을 했어요. 아무래도 젊었기에 학생들과의 교감이 좀 더 쉬웠고요. 하지만 학사 일정 때문에 해외 활동에 제약이 많았죠.

임세경 저는 교육자로서는 새내기여서 올해는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에 많은 비중을 뒀어요. ‘꼰대’라는 말을 들을까 벌써부터 조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사실 젊은 친구들과 정신연령이 비슷하답니다.(웃음)

백주영 신세대 음악가들은 정말 달라요. 저는 스승님은 무조건 하늘처럼 모시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께 한 마디도 건네기가 어려웠죠. 젊은 친구들은 선생님이라고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해요. 기본적인 예의만 갖춘다면 편하게 지내는 것이 좋고, 함께 연주할 때도 음악을 만들기가 쉽죠.

40대 연주자는 젊은 세대와 노장 세대를 잇는, 허리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음악계를 지켜보며 그동안 아쉬웠던 점은?

백주영 뛰어난 연주자들은 많은데,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체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어요. 좋은 음향의 공연장도 부족하고요. 하지만 최근 5~6년 사이에 훌륭한 공연 시설이 늘어났고, 그에 따른 공연 인프라와 관람 문화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네요.

임세경 저 역시 오페라 전문 극장이 없는 게 늘 아쉽죠. 이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한국인 가수가 없으면 극장이 돌아갈 수가 없어요. 한국에 질 좋은 극장 시스템이 생겨서 이들을 더 많이 흡수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국내 공연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두 연주자는 다소 우울한 한 해를 보냈다고 합니다.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 때문인데요. 백주영은 서울대 근속 14년 만에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냈습니다. 원래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리며 미국과 유럽에서 다양한 연주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임세경 역시 예정됐던 해외 오페라 프로덕션이 대부분 취소되고야 말았고요. 이집트와 빈, 독일의 주요 극장에서 새로운 오페라에 데뷔할 기회가 생겼는데, 모두 취소되어 아쉬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올해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인가요?백주영 육아휴직을 내고 처음 학교 업무에서 쉴 수 있었어요. 마침 베토벤의 250번째 생일이었죠. 해외 연주 계획이 있는데, 바이러스 때문에 결국 다 무산됐습니다. 그래도 2020년에 목표했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녹음’을 무사히 마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베토벤의 해에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을 마친 것, 서울국제음악제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대면 연주로 관객에게 선보인 것이 큰 감동으로 남아요.임세경 올해 중앙대에 임용된 게 저에게는 큰 변화죠.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코로나로 인해 학생들과 학교를 알아갈 시간이 부족했어요.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음악이 더욱 깊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 젊을 때에 비하면 체력 관리가 더욱 필수적일 것 같은데요. 

임세경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요. 연주전에는 목소리를 보호해야 해서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아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죠.

백주영 30대에는 체력이 좋았어요. 작년 둘째 출산 이후 체력이 예전만 못해요. 살림과 부모님 모시기, 연주 생활까지 병행하니 개인 시간은 엄두도 못 냅니다. 새해에는 운동을 목표로 해볼까 해요. 그래도 30대에는 입에도 안 대던 영양제를 좀 챙겨 먹고 있기는 합니다.(웃음)

남은 40대는 무엇으로 채우고 싶나요?

백주영 지금 몰두하고 있는 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음반 홍보죠. 그동안 둘째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아이가 빨리 안 생겨서 몸 관리를 해야 했어요. 작년에 드디어 둘째 프로젝트(?)에 성공해서 바로 베토벤 소나타 음반 계획을 세웠습니다! 지난 십여 년은 학교와 가정을 다져나가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다시금 음악가로 도약하는 40대가 되길 바랍니다.

임세경 저는 반대로 지금까지 무대만을 위해 달려 왔어요. 공연 기회를 얻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40대는 건강을 잘 챙겨서 장수하는 가수가 될 거예요. 앞만 보고 막 달리는 건 그만할 생각입니다. 지금의 저는 ‘맥주’라고 할 수 있죠.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지만, 탄산이 빠지기 전에 빨리 마셔야 하는! 저를 많이 불러주세요. 시원하게 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웃음)

교육자와 연주자, 모두 다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드릴게요.갈수록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세상에서 40대는 어떤 의미일까요? 아직 반이나 남은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인생의 중반전에 뛰어든 두 연주자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50대
베이스 연광철 &작곡가 류재준
숙성의 시간

와인은 스스로를 걸러내는 힘으로 숙성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와인은 더욱 원숙한 맛을 내지요. 50대는 인생의 멋진 마무리를 고민하는 시기입니다. 내 안에 쌓인 침전물이 나를 혼탁 시키고 있는지, 내면을 면밀히 들여다볼 때죠.오십 중반에 들어선 연광철(1965~)은 삶의 답을 찾은 듯 보입니다. 2010년 서울대에 임용된 그는 이듬해부터 강단에 섰습니다. 불가리아 소피아 음대·베를린 음대에서 유학한 뒤, 1993년 도밍고 오페랄리아 콩쿠르에서 우승해 이름을 알린 그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주역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1996년부터는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단골로 출연했죠. 그런 그가 서울대 임용 소식을 전했을 때 많은 이들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데 또래 중견들이 교직에 몸을 담고 안정감을 느낄 때, 그는 다시금 오페라 무대로 뛰어듭니다. 지난 2017년, 그가 교수직을 사임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는데요.

 

결국 연광철의 삶의 현장은 ‘무대’였던 건가요?

연광철

맞아요.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죠. 교육자가 연주자로도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2018년 6월에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궁정가수(카머쟁어)’ 칭호를 받았습니다. 당시 플라시도 도밍고는 축하송을 불렀고,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를 했는데요.

연광철 특별한 두 분과 함께하여 기뻤습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은사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요.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고, 더 좋은 음악을 들려줘야겠다는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작곡가 류재준(1970~)은 이제 막 오십에 들어섰습니다. 올해 그에게는 갑작스러운 상실의 먹구름이 드리웠습니다. 지금의 류재준을 있게 해준 두 스승의 타계 소식이 이어졌는데요. 서울대 음대에서 강석희(1934~2020)를 사사한 그는 1994년 폴란드로 유학을 떠나 펜데레츠키(1933~2020)의 제자가 됐습니다. 

두 스승의 죽음 이후 남은 감정의 잔여물이 궁금합니다. 

류재준 강석희 선생님은 음악을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바라보는 방법, 펜데레츠키 선생님은 머리뿐 아닌 마음으로 음악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어요. 두 분이 작고하신 후 약간의 인지장애가 왔습니다. 두 분의 악보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악보 사이에 숨어있더군요. 음악가는 음악으로 남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심적으로, 또 코로나로 어수선한 와중에도 서울국제음악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류재준 마지막 공연이 끝날 때 한 청중이 “고맙습니다”를 외치더군요. 오히려 우리가 그분에게 이 공연을 보러 와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청중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사무치게 느꼈습니다.

세계 주요 공연장이 문을 닫으며, 의도치 않은 휴식기를 가졌을 것 같은데요.

연광철 30년 넘게 무대에 서 오면서 처음으로 휴식을 가졌습니다. 2021년 상반기까지 잡혀있던 약 60회의 일정이 취소됐습니다.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성악적인 역량을 확인해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피아노를 잘 연주해보려고 시간을 많이 할애했는데, 생각보다 진전이 없어서 자책하는 시간도 있었죠….

류재준 코로나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실 미국 대선도 코로나 영향으로 판도가 바뀌었으니까요.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문제는 음악예술의 본질인 청중과의 만남이 비대면 공연으로 대체되면서, 음악인들보다 기획자들의 아이디어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 필요한 작업이지만 그것이 강조되면 큰 문제점이 나타날 거예요.

두 분 모두 인문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읽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연광철 독서를 다양하게 하는 편입니다. 최근에는 인디언 연설문집을 읽고 있는데요. 자연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간혹 노장사상과 흡사한 대목들을 접할 때에는, 인간이 살아가야 할 많은 좌표들을 엿볼 수 있었어요.

류재준 인류에겐 너무 많은 과제가 있습니다. 기아, 종교와 인종 전쟁까지. 우리가 처한 현실이 과연 코로나뿐일까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1732년에 태어난 하이든은 무려 77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같은 후배 작곡가들은 하이든을 의지했습니다. 하이든이 젊은 음악가들에게 존경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하이든이 말년에 이르러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합니다. 그는 다음 세대 음악가들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집 지면을 내어주었고, 자신의 오페라 대신 후배의 오페라를 상연하길 요청했습니다. 연광철과 류재준 역시 그동안 쌓아온 삶의 연륜을 미래의 음악가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여러 고민이 많아 보입니다.

요즘 친구들의 남다른 점은요?

연광철 무엇보다 인터넷 발달로 어제 뉴욕에서, 베를린에서 어떤 공연이 있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죠. 여러 가지 면에서 젊은 세대에게는 훨씬 많은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류재준 제가 20대에 쓴 작품을 보면, 지금은 그때처럼 못쓰겠단 생각이 들어요. 젊은이들만의 언어와 경험으로 음악을 만드는 거죠. 있는 그대로 그들을 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특히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방파제가 되어줘야겠지요. 우리 문제점을 다음 세대로 전가하면 안 됩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도 있을 텐데요. 최근에는 ‘팬텀싱어’라는 방송이 화제가 되면서 성악계에 새로운 이슈가 생겼습니다. ‘성악의 대중화’같은 표현도 언급되었고요.

연광철 현대인들은 스크린에 보이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청각만으로 음악을 즐기는 시대는 지났지만, 청각보다 시각에 의지하여 이뤄지는 음악은 결국 그 수준을 낮추는데 한몫을 하죠. 무대예술은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을 때 관객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잘 해내지도 못하면서, 그것으로 대중화에 기여하겠다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지 않고, 그 제품을 유통하겠다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관객은 그들이 성악예술의 최고봉인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고, 작가나 프로듀서들은 전문 지식 없이 단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를 꾸며서, 재능 있는 젊은이들의 앞길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전문시장에서 단지 그들을 내세워 가시적인 예매율을 높이는 데만 집중한다면, 우리의 예술세계는 점점 그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노래하는 젊은이들이 부디 그것을 토대로, 원하고 꿈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음악가가 되기까지 꼭 필요했던 것들을 알려주세요.

연광철 아내는 제가 음악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게 배려해 줬습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를 나와 프리랜서의 삶을 결정할 때도, 교직에 몸담을 때도, 그 직함을 내려놓을 때에도 늘 옆에서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줬죠.

류재준 “저는 ‘국경없는의사회’에서 봉사한 것입니다. 깨끗한 물 한 병 구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음악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고민했습니다. 요즘은 처음으로 저를 위해 작곡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회와 환경을 반추해왔다면, 지금부터는 제 자신의 색이 드러나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을 겁니다. 연광철과 류재준을 마주하니 삶의 주도권을 강하게 붙잡으려면 ‘모험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씁쓸한 침전물을 걷어낸 그들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30대는 자신에 대한 고찰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 김태형

 

20대가 끝날 때까지는 정체성이 확실해지면 좋겠어요 – 김한

 

40대는 건강을 잘 챙겨서 장수하는 가수가 될 거예요 – 임세경

 

젊은이들이 원하고 꿈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연광철

 

이제는 다시금 연주자로 도약하는 40대가 되길 바랍니다 – 백주영

 

후배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방파제가 되어줘야겠지요 – 류재준

 

자양분을 다각도로 다져놓는 20대를 보내고 싶어요 – 송지원

 

많은 이들에게 위로의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 조성현

 

여덟 명 음악가의 성장은 나무의 열매 맺기와 닮았습니다. 20대의 송지원과 김한은 싹을 틔웁니다. 30대의 김태형과 조성현은 기다란 꽃줄기를 올리고 있습니다. 꽃을 피운 40대의 임세경과 백주영은 열매를 맺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냅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은 50대의 연광철과 류재준은 사람들에게 당도 높은 과즙을 선사합니다. 그렇게 제 능력을 다한 나무는 낙엽을 떨궈 다시 거름이 됩니다. 이 순환의 고리가 한국 음악계에 새 생명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고난의 시간을 감내하다 보면 음악계에도 어느덧 새봄이 오겠지요. 각자의 역할에 온힘을 다하고 있는 8인의 음악가에게 응원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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