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속 여인의 삶과 사랑_5 아르미다
아 /르/ 미/ 다
그녀는 정말 악당 마녀일까?
아르미다의 마법은 작곡가들에게도 성공을 가져다줬다
1994년 개봉한 영화 ‘파리넬리’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라는 아름다운 아리아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영화에선 전설적인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가 아리아를 부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 아리아는 십자군 기사 리날도의 연인인 알미레나가 부른다. 바로크 시대 오페라에서 줄거리는 레치타티보를 통해 설명되고 아리아는 가수의 기교를 만끽할 수 있다.
“무자비한 아르미다!
지옥의 힘으로 내 사랑과 행복으로부터
나를 이곳으로 납치해
영원히 고통받으며 살게 만들다니!”
오페라에서 알미레나는 왜 자신을 울게 내버려 달라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도대체 아르미다라는 여인은 누구이기에,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고 이렇게 고통을 주는 것인가. 이 여인은 기독교 세계에서 보면 이교도인 다마스쿠스의 공주이자, 압도적인 마법을 사용해 십자군을 무력화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1581년 출판된 이탈리아 시인 토르콰토 타소(1544~ 1595)의 대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에도 등장하는데, 이야기의 배경은 제1차 십자군 원정이다. 아르미다는 전쟁 중 리날도를 죽이려고 했지만 갑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고, 마법의 힘으로 그를 납치해 마법의 성으로 데려간다. 리날도는 향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동료 십자군 기사 카를로와 우발도가 그를 구출하러 와서 마법을 풀어준다. 리날도는 탈출에 성공하고 아르미다는 복수를 위해 십자군과 전투를 하지만 결국 패한다. 좌절한 아르미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순간 당도한 리날도는 그녀를 제지하며 기독교로 개종해달라고 애원한다. 아르미다가 동의하는 해피엔딩으로 타소의 원작은 끝을 맺는다.
용맹한 영웅을 마법으로 사로잡는 여인의 이야기는 비단 타소의 아르미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호머의 ‘오디세이아’에서 마법으로 사람을 짐승으로 변신시키는 내용이 나오고, 오디세우스를 1년 동안 자신의 섬에 붙들어 놓았던 키르케가 있다. 루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가 쓴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에 등장하는 마녀 알치나도 타소의 아르미다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다.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가진 이 여인들을 주제로 한 작품이 미술사에 즐비하듯이, 오페라 작곡가들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르미다를 다룬 작품만 해도 하이든·로시니·드보르자크 등이 쓴 50여 개의 오페라가 음악사에 기록되어 있다.
헨델의 런던 활동에 시금석이 되다
다시 헨델(1685~1759)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21세의 헨델은 로마를 방문했다. 이듬해 1707년, 헨델을 후원했던 로마의 귀족 루스폴리 남작은 자신의 프리마돈나인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두라스탄티(1700~1734)를 위해 ‘버림받은 아르미다’를 주제로 칸타타 작곡을 의뢰했다. 이 짧은 칸타타는 리날도가 떠나간 후 연인을 애타게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해 아르미다의 분노가 다양하게 담겼다. 두라스탄티는 이를 계기로 헨델과 훗날 런던까지 이어진 인연을 맺게 되었고, 헨델의 많은 작품을 노래했다.
1710년 말 런던으로 온 신인 작곡가 헨델은 아르미다와 리날도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다룬다. 이번에는 아르미다보다는 리날도의 드라마에 더 집중했다. 왜냐하면 25세의 젊은 작곡가는 당대 스타 카스트라토 니콜로 그리말디에게 리날도 역을 맡겨 그의 인기 덕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리날도의 연인으로 알미레나 역을 창조하는 바람에 타소 원작에서 그려진 아르미다와 리날도 사이의 농염한 감정은 밀도가 흐려졌고, 그저 복수심에 불타는 악당 마녀 정도로 그려졌다. 니콜로 그리말디가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작곡된 이 오페라는 화려한 볼거리에 힘입어 성공을 거두었고, 헨델의 런던 활동에 시금석이 되었다.
비발디 스캔들을 불러오다
한편 ‘빨간 머리의 신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비발디(1678~1741)도 아르미다를 주제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비발디 역시 리날도와 아르미다의 사랑 이야기 대신 십자군 전쟁 이전 이집트를 배경으로 삼았다. 오페라 ‘이집트 전장의 아르미다’는 1718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됐다. 오페라의 성공으로 비발디는 만토바 총독의 눈에 띄어 궁정음악가로 3년 동안 일할 기회를 얻었다. 1738년에는 이 오페라를 개작해 베네치아에서 다시 올렸는데, 아르미다 역은 애정을 쏟았던 콘트랄토 가수 안나 지로(1710~1748)에게 주었다. 당시 비발디와 그녀의 관계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를 정도로 큰 스캔들이었다.
비발디와 안나 지로, 그리고 그녀의 이복언니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았기 때문에 소문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나이브(Naïve) 레이블에서 비발디 에디션 시리즈를 발간한 예술감독 수잔 오를란도는 2008년 ‘가디언’지에 기고하기를 “많은 이들이 붉은 머리 사제와 어린 오페라 가수 사이를 음란하게 상상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증거는 없고, 오히려 비발디가 얼마나 독실한 신앙인이었는지에 대한 증언만 발견될 뿐”이라고 언급했다. 비발디는 생전에 안나 지로와의 관계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그녀는 비발디가 1742년 빈에서 빈곤으로 사망했을 때까지 그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욤멜리와 글루크, 두 개의 방향성
아르미다는 1714년에 태어난 동갑내기 두 작곡가에게도 의미 있는 소재였다.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의 중심이었던 나폴리 악파의 마지막 세대 작곡가 니콜로 욤멜리(1714~1774)와 오페라 개혁을 부르짖었던 크리스토프 글루크(1714~1787). 두 사람은 오페라에 있어서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오페라는 스타 가수의 기교에 크게 의존했고, 가수들이 경쟁적으로 화려하게 만든 카덴차는 원곡의 멜로디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했다. 자연히 극의 개연성은 간과되기 십상이었고, 흥행이 될 만한 것들은 다 갖다 붙이는 일이 펼쳐졌다. 욤멜리와 글루크 모두 드라마에 집중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일치했지만 방향은 달랐다.
욤멜리는 비극을 몹시 사랑했다. 그는 27세에 이미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에서 회원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젊은 대가로 인정받았다. 39세가 됐을 때는 장대한 비극에 대한 자신의 로망을 채워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슈투트가르트의 뷔템베르크 칼 오이겐 공작 밑으로 들어갔다. 그의 오페라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극적인 호흡은 비대해졌다. 한 오페라 공연에 436명의 엑스트라와 86마리의 말이 등장할 정도로 스펙터클하고, 청중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비극적인 정서를 쏟아냈다. 칼 오이겐 공작과의 불화로 1769년에 나폴리로 귀향한 후, 이듬해 ‘버림받은 아르미다’라는 오페라를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했다. 당시 젊은 모차르트가 객석에 있었는데, 이 작품에 대해 “아름답지만 너무 진지하고 구식이다”라고 언급했다. 나폴리로 귀향한 후 그의 작품은 유행에 뒤떨어진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그중 이 오페라만큼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랑받았다고 한다.
글루크의 아르미다는 도발적이고 전복적이었다. 산림관리인의 아들이었던 평민 글루크는 젊은 시절 무수한 방랑과 고생의 시간을 보내며 작곡가로서 연마된 뒤, 42세에 교향 베네딕토 14세가 수여하는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성공에 마음껏 취해도 될 시점에 그는 새로운 어젠다를 꺼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한계를 지적하고 오페라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가수의 기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장식음을 배제하고,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을 무너뜨렸다. 서곡·합창·무용·무대장치 등 모든 것이 극적인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생각의 시작점은 “시는 음악 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종속된다”는 것에 있었다.
1761년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1767년에 ‘알체스테’를 발표하지만 당시로서는 다소 생경한 시도였다. 그런데 그의 노력은 뜻밖에도 프랑스에서 열매를 맺었다. 빈 황실에서 글루크가 가르치던 공주가 1770년 프랑스 왕비가 됐는데, 바로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였다. 그녀는 자신의 옛 음악 스승을 파리로 모셔와 여섯 개의 오페라를 올리는 계약을 맺었다. 글루크의 등장은 20여 년 전의 부퐁 논쟁(1752년 프랑스 오페라 지지측과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는 측의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파리에 큰 논란을 가져왔다. 기존의 나폴리 오페라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니콜로 피치니(1728~1800)를 데려와서 글루크와 경쟁을 붙였다. 두 작곡가는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라는 동명 오페라를 작곡함으로 실력을 겨루게 되었고, 현재 피치니의 오페라는 잊히고 글루크의 이름은 남았다. 역사는 글루크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이어서 글루크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와 ‘알체스테’의 프랑스어 개정판을 발표하였고, 1777년 ‘아르미드’라는 오페라를 내놓으면서 그동안 끓어올랐던 논쟁은 정점을 찍었다.
글루크는 이 오페라를 위해 일부러 필리프 키노(1635~ 1688)가 쓴 대본을 사용했다. 이는 1686년에 발표된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7)의 ‘아르미드’에 사용된 그것이었다. 전통적인 프랑스 드라마 요소에 발레, 새로운 형태의 레치타티보를 결합한 ‘서정 비극’이라는 륄리 특유의 스타일이 집약된 오페라다. 1752년 부퐁 논쟁에서 화두는 페르골레시의 이탈리아 오페라와 륄리로 대표되는 프랑스적 서정 비극의 대립이었다. 프랑스 파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륄리 오페라와 같은 대본을 사용하여 근 100년간 지속된 프랑스 오페라 관행에 도전했다.
비록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은 아니지만 작곡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타소 원작의 해피엔딩을 따랐다면 나폴리 오페라 부파가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필리프 키노는 리날도가 오로지 마법의 힘에 의해서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아르미다의 고통을 부각시켰고, 아르미다의 마법에서 깨어난 리날도가 분노하며 탈출하는 것으로 극을 마무리했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통신원)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과 마인츠에서 오페라를 전공했다. 마인츠 극장에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로 데뷔한 후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노래하고 있다
추천음반
글루크·헨델·욤멜리 ‘아르미다’
아네트 다쉬(소프라노)
아르미다를 주제로 여러 작곡가들의 아리아를 담은 앨범이다. 독일 소프라노 다쉬는 바로크부터 모차르트를 거쳐 바그너까지 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히 음원이 귀한 욤멜리의 ‘아르미다’를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유연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헨델 ‘아르미다’
에바 메이(소프라노)
메이는 언제나 믿고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다. 그녀가 부르는 ‘아르미다’의 애절한 아리아(Ah! Crudele e pur ten vai)를 들으면 완벽한 기교와 선을 넘지 않는 충만한 감정 표현에 소름이 돋을 것이다.
글루크 ‘아르미드’
찰스 워크맨(바리톤) 외
고전파의 문을 연 글루크의 오페라들은 자칫하면 장엄하다 못해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연주된다. 글루크가 애용했던 음역대 때문인지, 아니면 비극에 너무 몰입한 덕분인지, 가수들까지 너무 어둡게 노래하면 그야말로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 음반은 마치 모차르트를 듣는 것처럼 날렵하고 경쾌하다. 생전 글루크가 원했던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을까?
헨델 ‘리날도’ (DVD)
데이비드 다니엘스(테너)/해리 비켓(지휘)/바이에른 주립 오케스트라 외
현대적인 연출에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으나 일단 지루하지 않게 시청할 수 있어서 추천한다. 카운터테너 데이비드 다니엘스는 카스트라토를 위해 쓰인 타이틀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해리 비켓이 이끄는 바이에른 주립 오케스트라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