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PARKJUNG-EUN
작곡가 박정은
음악으로 일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박정은(1986~)은 동네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교회에서 다양한 변주로 피아노를 치는데 흥미를 느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결심한 그는 동네 교회에 매일 놀러 가 피아노와 드럼을 쳤다. 어머니는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아버지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라고 응원해 주었다. 10대의 끝자락,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음악 전공을 결심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화성학과 시창·청음, 피아노 등 음대 진학을 위해 차곡차곡 준비했다.
이후 추계예술대 작곡과(김연수·김혜자 사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양대 작곡과(임종우 사사)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독일 하노버 음대(레베카 손더스 사사)와 뒤셀도르프 음대(호세 마리아 산체스 베르두 사사)를 졸업했다. 오스트리아 클랑포룸 빈 임펄스 콩쿠르, 독일 지그부르크 작곡 콩쿠르와 슈투트가르트 작곡 콩쿠르 등에서 입상했으며, 독일비텐 현대실내악음악제와 독일방송(DLF)현대음악 포럼, ISCM 등에서 그의 곡이 연주됐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음악가의 길
음악 공부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 대학에서의 학업은 무리가 없었나?
창작 위주의 과목이 재미있었다. 당시에는 현대음악에 미쳐있었다. 학우들과 술자리를 할 때면 몰래 이어폰을 끼고 피에르 불레즈(1925~2016)의 음악을 듣기도 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독일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참석한 것이 큰 자극이 됐다. 그곳에서 베아트 푸러(1954~)·헬무트 라헨만(1935~)·마크 앙드레(1964~) 등의 초연작을 듣고 세미나에 참석했다. 음악제가 끝나고 ‘귀의 수준’은 높아졌지만, 이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작곡 능력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경험이 독일 유학으로 이끈 것인가?
다름슈타트에서의 경험도 있었고 하노버에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독일로 향했다. 그런데 마침 레베카 손더스(1967~)가 교수로 부임했다. 손더스는 현재 유럽의 여성 작곡가로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오디션 때부터 그분은 내게 큰 관심을 보이셨다.
국내 교육과 비교했을 때 음악에 대한 접근이 달랐나?
추계예대와 한양대에서는 음악의 절대적인 것, 즉 논리와 구조에 집중하는 작업을 했다. 레베카 손더스는 내 작업이 여기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고 봤는지, 이보다는 직관적인 시각을 강조했다. 특히 “네가 진정 사랑하는 소리를 찾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누구나 아는 소리가 아닌, 보다 특별한 소리를 찾기를 원했다. 예컨대 바이올린이라면 ‘어느 현에서’ ‘어느 하모닉스에서’ ‘어느 동작으로 하는 트릴’을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직관적으로 곡을 쓰도록 요구했다.
당시 레베카 손더스는 하노버 음대 작곡과의 유일한 여성 교수였는데.
나 역시 입학한 해에 학생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는 나에게 늘 여성으로서 어떤 시각을 가졌는지 물었다. 그런데 손더스가 나의 졸업과 함께 교수 활동을 중단했다. 우리의 만남이 참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전자음악을 가르치던 요아힘 하인츠(1961~)는 어떤 스승이었나?
인간적으로 따뜻한 분이었다. 살아가면서 어떤 음악을 써야 하는지 차분하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이어서 뒤셀도르프 음대에서 공부를 이어간 이유는?
스승인 호세 마리아 산체스 베르두(1968~)와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언젠가 한국에 방문해 다양한 특징이 공존하는 서울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의 음악적 다양성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빠르게 많은 작품을 쓰고자 했는데, 손을 멈추고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천천히 쓰라고 강조했다.
수상 경력이 화려한 편이다. 주요 콩쿠르에서 성과를 얻어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음악제의 작품 공모에도 응모했고 그 결과 나의 작품들이 다양한 곳에서 연주됐다. 사실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 특히 쾰른에 있는 독일 라디오 방송(DLF)의 ‘현대음악포럼(Forum neuer Musik)’에 참여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 레베카 손더스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연주된 나의 ‘또 다른 자아’ 곡을 듣고, 2014년 ‘현대음악포럼’의 위촉작곡가로 추천해 줬다. 유학을 와서 불과 한 학기 지났을 뿐이었는데 위촉료는 자그마치 4,000유로나 됐다.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이 주제여서 한국이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때 쓴 곡이 금관 5중주 ‘전쟁’이다.
쾰른의 장크트 페터 성당에서의 상주작곡가 기회는 어떻게 얻은 것인지?
이후 포럼의 담당자였던 프랑크 켐퍼는 쾰른의 장크트 페터 성당의 상주작곡가로 나를 추천했다. 2015년에도 ‘현대음악포럼’을 위해 작품을 위촉해 주었고.
유럽에서 가장 큰 현대음악제 중 하나인 비텐현대실내악음악제(Wittener Tage für neue Kammermusik)의 공모에도 당선됐다.
당선되어 ‘비인과적 잔향’이 무지크 파브릭 앙상블에 의해 연주되었던 것도 잊을 수 없다. 2017년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진은숙과 김희라 작곡가의 추천으로 ‘춤추는 상자들’을 발표했다. 우승에 해당하는 괴테상과 청중상을 받았다.
독일에서 활동할 기회가 많았을 것 같은데 일찍 귀국한 이유는?
서울시향에서 오케스트라 리딩 기회가 있어서 잠시 귀국했는데 다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과감하고 당돌하게, 음악 만들기
반복과 소음, 특징적인 제스처를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편이다.
동적인 것을 추구해왔다.
나이가 들면서 영감을 받는 폭이 더욱 넓어질 것 같은데.
세상의 이상한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화도 많이 났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행위를 제한받은 것이 큰 자극이 됐다. 우리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감금되기도 했다. 죽어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움직이고 싶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움직임을 통해 사운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중독’을 무용수와 작업하고, ‘사랑(Liebe)’에는 영상을 결합했다. ‘타자의 소리’에서는 더블베이스를 절반으로 잘라 그 안에 스피커와 드릴을 넣어 움직이게 했고, 평창비엔날레에서는 큰 도르래 장치를 넣는 등의 작업을 하면서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연(Pil-yoen)’과 ‘북(Buk)’은 연주자의 연주 동작을 고려하여 작곡되었고, ‘소란’에서는 소음을 내는 스피커에 철통을 씌웠으며, ‘사랑’은 연주자의 동선을 지정했다.
나는 음악의 소재를 곡을 쓰기 위해 찾기보다는, 주로 평범한 일상에서 찾는 편이다. ‘춤추는 상자들’은 분리수거 일에 쌓여있는 상자들이 옮겨지는 모습이 마치 춤추는 것처럼 보였고 그 이미지가 음악의 소재가 됐다. 그렇다 보니 내 음악이 자연스럽게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사랑’에 사용된 영상은 사실 이전에 작업한 전자음악 영상이었는데, ‘사랑’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지난 12월 작곡 발표회에서 연주와 함께 상영했다.
‘타자의 소리’와 ‘사랑’은 사람의 관계에 집중한다. ‘소란’은 랩의 리듬을 넣으면서 정치적인 상황을 그렸다. “사실에 대한 표현이 중요하다”는 과거 본인의 언급이 이러한 특징을 잘 요약한 것 같다.
과거에는 소리에 더욱 집중하면서도 나 자신을 소재로 해왔다. 그러다 ‘소란’ 이후 외부와의 관계를 바라보게 됐다. 예술가는 사회와 정치적인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8~2019년에는 발표한 작품이 매우 적다. 슬럼프였나?
이상하게도 2018년 중반부터 작업이 잘되지 않았다. 2017년에 너무 많은 작업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2019년 2월에 크랑포룸 빈(Klangforum Wien)이 초연하는 큰 공연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2019년에는 ‘북’ 한 곡밖에 쓰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썼는데 만족하는 곡 중 하나다. 작곡가들의 슬럼프는 사건 사고가 없기 때문에 오는 것 같다. 더 이상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이 없는 것. 굳이 할 말이 없는데 무슨 곡을 쓰겠는가? 그러다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이라는 책을 읽고 다시 쓸 말이 생겨났다.
‘타자의 추방’을 읽고 작곡한 ‘타자의 소리’를 두고 “나의 작곡 두 번째 분기”라고 말했다. 어떠한 의미인가?
이전의 내 음악은 나 자신에 집중됐다면, 두 번째 분기는 밖으로 향한 관심을 의미한다. 나의 작품 목록 첫 곡이 ‘자아’였고, 두 번째 분기의 첫 곡은 ‘타자의 소리’였다. 이 두 작품의 제목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후 2020년에만 일곱 곡을 썼고, 그해 12월 14일에 작곡 발표회도 가졌다. 하지만 올해 2월 ‘차세대 열전 2020!’ 공연을 위한 작업을 마치면 상반기까지 예정된 일은 없다. 곡을 너무 많이 쓰면 쉬어야 한다. 일단 쉬고 싶다.
피아노곡 ‘재료들’은 굿거리장단이 중심에 있으며, 피아노곡 ‘끊임없이 돌아가는’은 한국전통춤인 태평무의 음악적 재해석이다. 전통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전통음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8년 우란문화재단의 위촉으로 ‘춘앵전’ 작업을 하면서다. 조선의 음악서 ‘악학궤범’에 시적 표현으로 기록된 안무 텍스트를 가지고 재해석한 작품이다. 2월 공연에서 연주될 피리와 국악타악기를 위한 ‘re-MU(霧): 다시, 날다’는 ‘춘앵전’의 기악 버전이다. 전통은 더 이상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취하고 싶은 부분을 취해서 굴절시켜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다.
작품을 보면 기존의 익숙한 방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익숙한 직관을 비인과적인 방법으로 나열하고자 한다. 익숙하다는 것은 예상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음향의 충격이 있으면 잔향이 예상된다. 나는 자연스러운 것이 재미가 없다. 세상을 살면서 자연스러운 일이 너무 많은데, 음악까지 자연스러워야 하는가? 나는 이것을 피하고 싶다.
오늘날 현대음악은 감상자가 많지 않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다. 우리 시대에 현대음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오르간곡 ‘필연’에는 제목과 달리 우연적인 요소가 많다. 그럼에도 제목을 ‘필연’이라고 한 이유는 우연으로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들어야만 하는 소리라는 생각으로 작업했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의 존재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집필과 해설, 공연기획 등 다양한 접점으로 우리시대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 ‘콘미공’ 진행자,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정보
피아니스트 윤혜성 독주회
1월 26일 일신홀
피아노를 위한 ‘몸짓들’
차세대 열전 2020!
2월 4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피리와 국악타악기를 위한
‘re-MU(霧): 다시, 날다’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과정
8월 독일 다름슈타트
피아노를 위한 ‘끊임없이 돌아가는’
박정은을 더 알고 싶다면! jung-eun-park.github.iosoundcloud.com/park-jungeun
주요 작품 리스트
중독(2013) 길이 약 8분 | 편성 테이프(두 명의 무용수)
필연(2015)* 길이 약 18분 | 편성 오르간
소란(2017) | 길이 약 13분 | 편성 베이스 클라리넷(+클라리넷), 알토 색소폰, 타악기,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북(2019) | 길이 약 10분 | 편성 아코디언
타자의 소리(2020)** | 길이 약 18분 | 편성 국악타악기, 아코디언, 인스톨드 인스트루먼트(installed instrument)
사랑(2020) 길이 약 14분 | 편성 대금, 아쟁, 피아노 • 있었음(2020) 길이 약 9분 | 편성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필연*
박정은의 첫 오르간 솔로 작품이다. 독일 라디오(DLF)의 위촉으로 작곡됐다. 쾰른 한가운데 있는 장크트 페터 교회 안에 있는 현대 오르간으로 연주된다. ‘공간감’은 이 곡의 중요한 요소다. 길게 뻗어있는 교회의 울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자의 소리**
한병철의 책 ‘타자의 추방’에서 영감을 받고 만든 곡이다. 박정은은 자가 복제에 익숙한 자신의 작업을 돌아보며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그 시간 동안 한병철의 책을 읽어나가며 다시금 사유를 했다. ‘타자의 소리’는 박정은의 두 번째 분기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음반 소개
The 5th Album project21AND
project21AND 5th ALBUM 2017
수록곡 소란
작품을 구상했던 시점은 2017년 초였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시끄러웠던 상황이었다. 박정은 이 소란스러운 상황을 ‘랩’과 ‘소음’을 활용하여 표현했다. 거침없이 내뱉는 랩에서 자유로움을 느꼈기에 이를 기악적으로 전환해 보려 했으며, 리듬을 분절하여 때로는 횡적으로 때로는 종적으로 재배치했다. 박정은이 적극적으로 활용한 또 다른 음악 소재는 백색 소음이다. 철통 안에 스피커가 숨겨져 있으며, 작품의 중반부터 적극적으로 백색 소음을 발생시킨다. 상징하는 의미는 힘 있는 자들의 강압적인 권력의 잠식이다.
악보 출판
재료들(2016) Helbling Verlag
2016년 제9회 슈투트가르트 음악제에서 열린 작곡 콩쿠르 입상작이다.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클러스터 사운드와 같은 현대적 작곡 기법과 한국 민속 음악의 요소를 결합했다.
북(2019) Edition Avantus
아코디언을 위한 작품이다. 박정은은 연주자의 팔 모양과 몸의 움직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화성과 선율을 소리 내기보다 몸의 움직임, 즉 다양한 제스처로 소리들을 실험했고, 아코디언은 마치 한국의 전통악기 ‘북’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