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S NOTE
기자 공연수첩
KBS교향악단 제762회 정기연주회
우아한 봄날의 ‘라인’
안토니오 멘데스/KBS교향악단
(협연 스테판 피 재키브)
2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드센 바람이 불던 한겨울, 라인강 앞에 선 순간을 기억한다. 뒤셀도르프의 라인타워 인근, 강은 깊숙이 굽이져 더욱 맹렬히 흘렀다. 그 세찬 물결 위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부서져 반사되는 빛엔 에너지가 그득했다. ‘생기 있게’(1악장) 시작해 ‘장려하게’(4악장) 이어지는 슈만 ‘라인’ 교향곡의 태동을 몸소 체험한 경험이었다.
그날의 에너지를 품고 공연장을 찾았다. 스페인 출신의 지휘자 안토니오 멘데스(1984~)와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1985~)가 함께하는 KBS교향악단의 신년 첫 정기연주회다. 이날 공연은 슈만의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 Op.52, 교향곡 3번 ‘라인’, 그리고 슈만의 친한 동료였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채워졌다.
공연의 문을 연 슈만의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는 세 개 악장으로 구성돼 ‘작은 교향곡’이라 불린다. 규모는 작아도 그 안의 전개는 확실한데, 이것이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다소 미적지근했던 장내 공기를 단숨에 뜨겁게 달군 것은 스테판 피 재키브의 등장이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재키브가 열네 살 때 처음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남다른 의미의 작품이다. 아쉽게도 당시의 영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20대 초반의 연주는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때와 비교하더라도, 재키브의 멘델스존은 더욱 뜨겁고 날카로워졌다. 라인강의 맹렬한 에너지를 여기에서 발견했다. 비교적 빠른 템포 위에서 탄력적으로 뻗어나가는 보잉은 악보상 다이내믹의 효과와 작품의 낭만을 한껏 극대화했다. 뜨거운 감성에 매몰되지 않는 균형 잡힌 면모도 보였다. 속주에서도 모든 음이 높은 선명도로 전달됐다.
고조된 에너지의 배턴을 슈만의 ‘라인’이 받았다. 30대 신예 지휘자로 주목받으면서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등을 객원 지휘한 멘데스는 현악부의 밀도를 조금 덜어내고 무대 뒤편 관악부와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 초점을 뒀다. 그러나 이는 금관악기군의 삐걱거림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겼다.
가벼워진 오케스트라의 톤은 거센 물결을 달래듯 차분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한겨울 라인강의 벅찬 에너지를 그리며 찾은 공연에서 따뜻한 솔바람 부는 봄의 라인강을 만난 듯했다(KBS교향악단은 제764회 정기연주회를 3월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갖는다). 글 박찬미 기자
김동현 바이올린 리사이틀
그날이 오면
2월 4일 금호아트홀 연세
‘객석’에서 일한다고 하면 종종 ‘좋아하는 연주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 귀가 닳도록 들었던 연주자들을 떠올려본다. 노장 아티스트 정도는(?) 언급해야 할 것 같아서 괜히 이츠하크 펄먼이나 핀커스 주커만을 꼽지만, 사실 나의 영웅은 따로 있다. ‘장영주의 차이콥스키’를 들으며 자란 세대인데, 작은 체구의 그가 뽑아내던 굵은 음색은 그야말로 놀라움이었다. 어느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도, 그 시절의 장영주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김동현의 차이콥스키’를 듣기 전까지 말이다.
지난해 한 지인이 “이렇게 바이올린 잘 하는 사람은 오랜만에 본다”며 김동현의 콩쿠르 영상을 보내줬다. 그가 3위에 이름을 올린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영상이었다. ‘한 음 한 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이건가 싶었다.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 없는 기묘한 기운. 3악장을 마칠 때까지 멍하니 연주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김동현은 서울시향·코리안심포니·부천필 등 국내 주요 악단과 함께하며 호평을 받았다. 김동현(1999~)의 젊은 날을 엿보고 싶어 지난 2월, 금호아트홀 연세를 찾았다. 김동현은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1번,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이자이의 ‘슬픈 시’,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를 준비했다.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사랑받는 대표 작품들. 스물둘, 지금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레퍼토리였다.
건실한, 건설적인 연주였다. 그의 차이콥스키 협주곡에 왜 그리 넋 놓고 매료됐는지 이제야 알았다. 보통 프레이즈를 나눈 것이 청각적으로 들리면 노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각 프레이즈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왔는데, 김동현의 프레이징은 그 숨결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다음 프레이즈는 이렇게 연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김동현은 그대로 음을 낸다. 이는 무대에서 한 곡을 연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해석이 필요한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했다. 아직은 ‘느린 악장의 호소력’보다는, ‘빠른 악장에서의 순발력’이 조금 더 눈에 띈다. 청순한 그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1번 2악장이 10년 뒤에는 어찌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시간을 새기며 자연스레 무르익을 테지. 그때가 오면, ‘김동현의 차이콥스키’를 영웅 삼았던 다음 세대 연주자가 나오려나. 글 장혜선 기자
COLUMN
변화 당면한 전통 상설공연
국립국악원·서울남산국악당·정동극장
전통 상설공연잇따라 축소·폐지
국립국악원·서울남산국악당·정동극장이 전통예술의 상설공연을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있다. 그간 국공립극장 주도로 전통 공연 상설화가 이뤄진 만큼, 변화의 여파가 클 것으로 보인다. 전통 상설공연이 없어지는 이유를 살펴보고, 원점으로 돌아가 그 취지와 효용을 되짚어볼 때다.
전통 상설공연은 전통예술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엔 수요보다는 공급의 논리가 작용한다. 일단 무대를 많이 공급해서 관객층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로 공급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닥쳤다.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자, 국립국악원은 2015년 도입한 주중 상설공연 ‘수요춤전’ ‘목요풍류’ ‘금요공감’을 2021년에는 폐지한다고 밝혔다.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외부 공모를 진행하고, 공연 횟수를 줄여도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말 못 할 속사정도 있었다. 매주 색다른 무대를 꾸밀 만큼 전통예술인의 풀이 넓지 않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결국 장르별로 통합한 기획공연으로 대체될 예정이다. 다만, 1979년부터 소속 연주단체의 무대를 선보여온 ‘토요명품공연’과 미래의 관객인 어린이를 위한 ‘토요국악동화’는 그대로 진행한다.
문화예술이 관광자원으로 인식되면서 전통 상설공연은 관광상품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동극장이다. 한국적 정취가 느껴지는 서울 정동길에 위치하며, 문화체육관광부가 2010년 전통 상설전용극장으로 지정하면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해외 단체 관광객을 겨냥해 2010년에 선보인 ‘미소’는 26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공연관광업계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시장이다. ‘미소’는 단체관광에서 개별관광으로 트렌드가 바뀌면서 2016년에 막을 내렸다. 궤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개관 25주년을 맞은 지난해, 정동극장 대표이사 김희철은 “관광시장 환경 변화와 공공극장 역할에 대한 정체성 재확립에 따라 전통 상설공연을 종료한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창작 레퍼토리로 공연 장르를 확대하는 동시에 새롭게 출범하는 정동극장 예술단이 전통 공연의 맥을 이어갈 예정이다.
다시, 전통 상설공연의 취지를 떠올려보자. 관객이 원하는 때 전통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자. 왜? 전통예술의 매력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그렇다. 핵심목표는 어느 때고 전통예술을 접하게 해 널리 알리는 것이다. 같은 취지의 극장 콘텐츠가 접근성과 전파력이 높은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이유다. 서울남산국악당은 상설공연을 없애고, 아카이브 영상을 중계하는 ‘상설상영’으로 노선을 틀었다. 국립극장은 전통예술교육 영상인 ‘오예’ ‘레츠 국악’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극장 전속단체 단원들이 직접 출연해 전통예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줘 반응이 좋다.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양으로 승부하는 건 시대착오적 전략이다. 이제 오프라인 공연은 더 매력적으로 관객을 사로잡아야 한다. 극장은 관객, 즉 수요를 고려한 전통 공연물을 적극적으로 고심할 필요가 있다. 글 박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