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S NOTE
기자 공연수첩
생명줄이 필요한 창작오페라
제19회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김부장의 죽음’
4월 6·10·1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김부장의 죽음’은 한국 젊은 작곡가의 분투가 담긴 족적이기에 의미가 깊다. 2020년에 초연된 창작오페라 ‘김부장의 죽음’(작곡 오예승, 대본 신영선)이 지난 4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재연 무대를 가졌다. 곡을 쓴 오예승(1976~)은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본 후 작곡의 길로 들어섰다. 뉴욕대와 UCLA에서 공부한 그는 현재 극콘서트 프로젝트 그룹 판이오에서 활동 중이다. 오예승은 언젠가 “극음악을 올리고 싶었지만 그 첫 길을 쉽사리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먼저, ‘김부장의 죽음’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오예승은 다짜고짜 대학로 아마추어 뮤지컬단에 연락해 곡을 써주겠다고 했다. 뭐라도 던져야지 파동이 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인력 육성 지원사업인 ‘오페라 아카데미’를 수료했고, 지난해 2월에 ‘창작산실’ 신작으로 ‘김부장의 죽음’을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
올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태어난 작품은 제19회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에 올라 생명줄이 연장 됐다.
‘김부장의 죽음’은 동시대 오페라가 지닌 과제를 해소하고자 노력한 집적체이다. 러시아어를 전공한 신영선 작가는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소재로 택했다. 이 작품을 고른 건 오늘날의 한국으로 불러올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판사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다 죽음을 마주한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1965년생 평범한 중년 가장이자 대기업의 부장인 김영호로 변용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몇 명의 성악가를 제외하곤 제작진이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봄봄’이나 ‘양촌리 러브스캔들’ 등 소극장 오페라에서 역량을 발휘해온 연출가 정선영이 합세해 힘을 더했다. 오페라 연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음악을 느끼도록 하는 것’일 테다. ‘김부장의 죽음’은 무대 위 오브제를 간결하게 덜어내어 오히려 작품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천장에 걸린 밧줄과 그물은 도망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인간을 옭아매는 올무 같았다. 그로테스크한 조명은 발버둥 치는 김부장의 통증과 닿아 있었다. 인간의 삶을 형상화한 나무 역시 쓸쓸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연극이 중심인 오페라였다. 아리아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없었기에, 성악가들의 연기 역량이 더 눈에 들어왔다. 작년 공연에서 노래를 드러냈던 부분은 대거 삭제해 극적인 측면에 집중했다. 음악은 극본을, 연출은 음악을 배려해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동안 일회성 공연으로 끝나는 창작오페라의 삶이 안타까웠다. 작품 속 김부장처럼 죽음을 목전에 둔 창작오페라는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그 과정이 때로는 억울하기도 원망스럽기도 할 테다. 2017년 이후 4년 만에 관객을 찾은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 앞으로는 매해 개최되어 수명이 짧은 창작오페라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기를.
글 장혜선
COLUMN
이 시대 독주곡의 쓰임새
독주곡이라는, 어떻게 보면 독립을 자처한 음악은 여럿의 몫을 혼자 해내며 탁월한 음악성을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비자발적 고립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독주자의 모습은 어딘지 좀 애처로울 때도 있다. 독주곡은 격리 중인 연주자의 홈레코딩(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의 ‘Solace’), 여럿이 모일 수 없는 앙상블의 대안(클랑포룸 빈의 프로젝트 앨범 ‘SOLO’)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상황이야 어쨌든 음악사 속에서 기악 독주곡은 본래 최첨단 기술의 음악이었다. 악기의 개량과 개발에 따라 작곡됐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악기인 성악곡에 대등한 장르로 자리 잡은 것도 오늘날 사용되는 악기 대부분이 만들어진 바로크 시대부터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자신을 시험하듯 ‘도전’하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6개의 소나타와 파르티타도 이 시기에 작곡
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오는 5월 25일~6월 1일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연주회를 연다. 관련 기사는 78쪽으로.)
여러 악기로 내던 소리를 단 한 대의 악기로 표현한다는 것은 작곡가는 물론, 악기의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피아노가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쳄발로를 제치고 건반악기를 대표할 수 있었던 것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탁월한 피아노곡 덕분이다. 그 자신이 대단한 연주력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은 피아노의 ‘업데이트 된 기능’을 실험적으로 활용한 작품을 남겼다. 베토벤이 30여 년에 걸쳐 쓴 32개 피아노 소나타에는 피아노의 발달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독주곡은 작곡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단순함은 곧 무한한 가능성을 뜻한다. 음악미학연구회는 비평집(‘독주곡: 사고와 신념의 상’)에서 기악 독주곡을 다음처럼 정의한 바 있다.
‘가사나 극에 국한되지 않는 기악음악, 그중에서도 편성에 구애받지 않고 실용적인 기능과 목적에도 얽매이지 않는 장르’. 피아노와 바이올린처럼 대중에게 가까워지고 싶은 소수 악기 연주자들은 작곡가들에게 자신의 악기를 위한 독주곡을 적극적으로 위촉했다. 모든 동력을 안고 독주곡은 변모를 거듭하며 깊어지고 넓어졌다.
17개 악기의 독주곡 37곡. 현대음악 앙상블 클랑포룸 빈이 2020년 발매한 프로젝트 앨범 ‘솔로(SOLO)’에 수록된 작품의 개수다. 격리로 인해 모일 수 없게 되자, 흩어진 앙상블 단원들이 따로따로 녹음한 독주곡을 모은 것이다. 작품의 주제는 ‘극단적 고독’. 도시오 호소카와(1955~), 올가 노이비르트(1968~) 등 앨범에 참여한 5명의 작곡가가 격리 중 느낀 감정을 담아 쓴 신작 5곡도 포함됐다. 퍼커션이나 호른처럼 클래식 음악에서는 독주곡에 드물게 쓰이는 악기가 포함된 점이 흥미롭다. 독주곡을 통해 ‘음악으로 연결됨’을 표현한 것도 전에 없던 발상이다.
“새로운 음악과 작품을 접하는 데 망설이지 마세요. 이 가운데 일부는 먼 훗날 제2의 ‘운명’ 교향곡이 될지 모릅니다.” 클랑포룸 빈 대표 피터 폴카인라드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독주곡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전염병으로 인한 긴긴 고립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변이 된 바이러스가 또다시 인류를 침투할 때, 21세기 클래식 음악의 고전은 독주곡으로 남게되지 않을까? (참고문헌 민은기·신혜승, ‘서양음악의 이해’)
글 박서정
COLUMN
현대무용, 대중음악의 몸이 되다
한국 대중음악의 퍼포먼스는 소위 ‘칼군무’에 지배되어 왔다. 2000년대 초반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 같은 대형 아이돌 그룹이 줄지어 등장해, 흐트러짐 없는 대형, 팔을 뻗는 각도까지 완벽히 맞춘 ‘각 잡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돈된 안무를 연출하는 게 그간의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내년이면 벌써 데뷔 10주년을 맞는 BTS는 어떨까? 그들의 초창기 작업물도 역동적인 ‘칼군무’가 주를 이룬다. 스트리트 댄스의 움직임을 차용한 고난도 안무가 특징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들의 ‘몸의 언어’에 변화가 생겼다.
‘Lie’ ‘봄날’ ‘블랙스완’ 등의 작품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읽힌다. 서정성으로 가득한 문학적인 가사를 표현하기 위해, 보다 부드럽고, 보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안무에 적용한 것이다.
특히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예술가로서의 자기 고백이 담긴 ‘블랙스완’에는 현대무용을 전면 배치했다. 이 곡은 나탈리 포트먼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와 발레 명작 ‘백조의 호수’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BTS 멤버들은 발레에서 차용한 안무를 선보이는 한편, 슬로베니아의 현대무용단 MN컴퍼니와 협업해 아트필름을 제작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에 거점을 둔 MN컴퍼니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댄스 아카데미 출신인 미할 리니아와 나스탸 브레메츠 리니아에 의해 2008년에 창단됐다. 그간 ‘혁신’을 표방해온 MN컴퍼니는 BTS의 컬래버레이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들은 ‘블랙스완’에 담긴 가사를 현대무용으로 풀어냈다. 곡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는 ‘예술가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이다. 이를 묘사한 가사에 따
라, 무용수의 몸으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뒀다. 그 결과물에는 “신체를 끊임없이 접촉시킴으로써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내고(‘The Myth’, 2012)” “공간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무대장치 앞에서 멈추지 않고 꾸준한 움직임을 일궈내는(‘De-Set’, 2019)” MN컴퍼니의 기존 어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세계적 명망의 안무가들도 대중음악과의 협업에 적극적이다. 여러 차례 내한으로 한국 관객에게 친숙한 아크람 칸(1974~)도 대중음악과의 협업물을 여럿 남겼다. 특히 영국 인디밴드인 플로렌스 앤 더 머신과의 ‘빅 갓’ 협업이 주목할 만하다. ‘빅 갓’의 뮤직비디오에는 아크람 칸이 안무한 동양의 의식무용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돋보인다. 방글라데시계 양친을 두어 인도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아크람 칸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그의 현대무용 안무작은 주로 동서양 문화의 이질성, 이민 2세대가 겪는 혼란을 소재로 해왔다.
아크람 칸과 함께 영국 무용계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웨인 맥그리거(1970~) 역시 라디오 헤드의 ‘로투스 플라워’, 더 케미컬 브라더스의 ‘와이드 오픈’을 함께 작업했다. 특히 ‘와이드 오픈’에서는 맥그리거 고유의 유연한 춤선, 포스트 휴머니즘에 관한 관심사가 뚜렷이 반영됐다.
동시대 대중음악은 현대무용의 신체를 빌려 표현의 폭을 점점 더 넓히고 있다. 앞으로의 한국 대중음악 퍼포먼스가 얼마나 더 유연해질지 기대해볼 만하다. 글 박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