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로 향한 시선,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9월 13일 9:00 오전

INTERVIEW_글 박찬미 기자

사각지대로 향한 시선,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

그의 시선은 주목받지 못한 음악과 사람을 향한다

랜들 구스비(1996~)는 최근 미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다. 본지와 인터뷰를 며칠 앞두고는 두다멜/LA 필과 할리우드볼 데뷔를 치렀다. 지난해 10월에는 데카(Decca) 레이블과 전속계약도 맺었다. 계약서 서명이 마르기도 전에, 구스비는 자신의 데뷔 음반 콘셉트를 제안했다. 아프리카계 음악 유산을 조명하는 것, 도전적인 아이디어였다. 데카는 젊은 음악가의 뜻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탄생한 음반이 지난 6월 발매된 ‘뿌리(Roots)’(Decca)다. 
랜들 구스비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재일교포 한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뿌리’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터. 그는 “고립된 공간에서 연습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음악가에게는 더더욱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번 음반은 아프리카계 뿌리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아프리카계 작곡가들을 주목했다. F. 프라이스(1899~1952)의 ‘경배(Adoration)’, 윌리엄 그랜트 스틸(1895~1978)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875~1912)의 ‘딥 리버(Deep River)’ 등 흑인 최초로 자신의 작품을 메이저 악단과 오페라단에 올린 역사적 인물들을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문화가 클래식 음악에 녹아든 사례도 짚어낸다. 흑인의 삶을 다룬 거슈윈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야사 하이페츠 편곡 버전), 뉴욕에 머물던 드보르자크가 흑인 영가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소나티나’ 등이다. 
음반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수많은 이름이 거론됐다. 구스비는 “음악의 본질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이 음반은 한 개인의 뿌리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이를 만들어온 사람들, 이를 향유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두다멜/LA 필과의 데뷔 무대를 며칠 전 마쳤다! 그날 밤, 어땠나? 정신 없었다! 공연 직전까지 미국 동부 버몬트의 옐로우 반(Yellow Barn) 뮤직 페스티벌에 있었다. 이곳에서 5주 동안 여섯 개의 새로운 작품을 익혀 공연해야 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LA 필과 협연할 작품을 연습했다. 축제가 끝나자마자 LA로 향했고, 바로 그다음 날 할리우드 볼에서 리허설을 했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는 무대다. 규모도 엄청나고, 우상으로 여기던 음악가들이 서온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객석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고, LA 필 단원 중에 친분이 있는 사람도 여럿 있어 생각보다 편했다. 두다멜 역시 따뜻하게 날 맞아주었다.
프랑스의 작곡가 조제프 볼로뉴(1745~1799)의 바이올린 협주곡 9번을 선보였다. 흔치 않은 선곡인데. 그날 청중 대다수가 처음 듣는 작품이었을 거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작품을 다른 악단들과 협연할 기회가 많았다. LA 필 데뷔와 같은 큰 무대에서는 여러 번 연주한 경험이 있는 곡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았고, 볼로뉴의 것을 제안했다. 그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다.
데뷔 음반 ‘뿌리(Roots)’ 역시 주목받지 못한 ‘아프리카계 음악 유산’을 모은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나? 작년, 전미를 뒤흔든 흑인 인권 운동(Black Lives Matter)이었다. 팬데믹으로 집에 혼자 있는 와중에, 인종 차별 희생자에 관한 뉴스를 매일 접하니 무기력해지더라. 음악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 음반은 아프리카계 음악인으로서,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방법이었다.
플로렌스 프라이스, 윌리엄 그랜트 스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등 쉽게 만날 수 없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실었다. 이를 통해 전하려는 ‘우리의 이야기’란 무엇인가? 몇몇 수록곡은 세계초연 녹음이다. 작품에 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사실이었다. 음악가의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작곡가들의 경험을 상상해보고 자신을 이입하면, 작품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작곡가들은 피부색이 다르단 이유로 차별을 겪었지만, 음악으로 극복해갔다. 그 과정이 내게 영감이 됐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음반을 통해 전해지길 바랐다.

뿌리(Roots) 
랜들 구스비(바이올린)/주 왕(피아노)/
자비에르 폴리(더블베이스)
Decca 4851664

이야기의 주인공들
작업 과정에서 영감을 준 인물이 있나? 피아니스트 미셸 켄이 프라이스 작품 연구에 도움을 줬다. 프라이스 전문가인 그와 논의하며 작품 속 디테일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하이페츠 편곡 버전의 ‘포기와 베스’를 연구할 때는,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케 아구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하이페츠가 생전 마지막 15년을 함께한 동료였다. 하이페츠와 직접 이 곡을 연주한 경험이 있는 아구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이페츠의 연결된 듯한 느낌도 받았다. 한편, 콜리지 테일러 퍼킨슨(1932~2004)은 그의 ‘Blue/s Forms’를 흑인 최초로 뉴욕 필에 입단한 바이올리니스트 샌포드 앨런에게 헌정했다. 앨런에게 퍼킨슨과의 작업기가 어떠했는지 자문도 구했다. 국가예술기관인 ‘스핑크스’가 이들과의 접점을 마련해주었다. 스핑크스는 한국에 생소한데,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가? 최근 이 단체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던데. 스핑크스는 클래식 음악계의 다양성을 넓히는 데 주력한다. 최근 받은 ‘골드 메달 엑설런스’도 유색인종 예술가를 대상으로 고무적인 리더십을 보여준 이에게 수여된다. 10여 년 전, 스핑크스 주최 콩쿠르에 참여하면서 단체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스핑크스를 통해 여러 악단과의 협연 기회를 얻어, 프로 음악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스핑크스가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학교, 양로원에 찾아가 내 이야기와 음악을 나눈 것이었다. 십 대였던 나는 누가 내 이야기와 음악에 관심을 보일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청중이 입을 떡 벌리고 귀 기울여주는 것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클래식 음악이 ‘주류’는 아니지만, 누구나 이것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부터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특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커뮤니티로 이 음악을 전하고 싶어졌다.
스핑크스에서 만난 또 다른 인연인 자비에르 폴리는 수록곡 ‘셸터 아일랜드(Shelter Island)’를 썼다. 셸터 아일랜드는 펄먼 뮤직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장소다. 그곳에서 키운 폴리와 나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 ‘셸터 아일랜드’다. 여기엔 블루그래스, 대중가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등의 요소가 모두 녹아 있다. 다른 수록곡들도 마찬가지다. 여러 시대와 세계로부터 받은 영향이 스며있다.
이 음반은 한 개인 음악가의 성취물이기도 하면서, 클래식 음악의 오늘을 새긴 기록물이다. 당신의 음반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아프리카계 음악인의 존재를 ‘기념’하는 음반. 한편으로, 요새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으니 음반을 들으며 긴장을 풀면 좋겠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 열린다면, 잘 몰랐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길 바란다.
어머니는 재일교포 한국인이다. 당신 뿌리의 일부가 아시아로도 향해 있는 셈이다. 아시아의 클래식 음악을 조명할 계획도 있나? 어머니는 일본어를 제1언어로 쓰셨고, 나도 자라면서 그 언어를 배웠다. 내 조상 중 한국인이 있으면서도, 일본 문화를 향유했다는 점은 굉장히 흥미롭다. 물론 아시아의 음악 유산에도 관심이 많다. 이미 어떤 프로젝트를 시도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다! 

REPORT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
2016년 미국 오케스트라 연합(LAO)은 미국 악단·지휘자·사무국 직원 등의 인종·민족·성별 구성 비율을 분석한 보고서 ‘오케스트라계 인종, 민족, 성별 다양성(Racial/Ethnic and Gender Diversity in the Orchestra Field’을 발표했다.  2014년, 악단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비(非)백인의 약 6배였다. 10명 중 비백인은 약 1.4명, 그마저도 아프리칸, 히스패닉, 아시안 등으로 나누어져야 하는 셈이다.
랜들 구스비는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변화의 속도가 훨씬 더디다”라고 털어놨다. 실제로 최근 발표된 미국의 인구총조사(2020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미국 내 인종 다양성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2020년 백인 인구와 그 외 모든 인종을 합한 인구의 비율이 1대1에 가까워졌을 정도다.
느리지만 분명히, 클래식 음악계에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1980년에서 2014년, 악단 내 비백인 음악가 비율은 4배 증가했고, 지휘자와 음악감독직에도 다양한 출신의 인물이 선발돼 2016년에는 그 비율이 21%에 달했다. 
세계적으로, 아프리카계 음악인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 세쿠 카네 메이슨(첼로)과 이사타 카네 메이슨(피아노)은 데카 레이블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고, 피에르 불레즈와 페테르 외트뵈시를 사사한 케빈 존 에두세이(지휘)는 뮌헨 심포니를, 조나단 헤이워드(지휘)는 북서독일 필하모니를 이끌고 있다. 웨인 마샬(피아노·오르간·지휘)은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신포니카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와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WDR)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글 박찬미 기자 사진 유니버설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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