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수첩
앙상블블랭크 & 이한나 리사이틀
현대음악 유행을 꿈꾸다
8월 5일 금호아트홀 연세
검은 슈트와 구두 차림의 지휘자. 그가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새빨간 양말이 드러났다. 앙상블블랭크와 비올리스트 이한나가 함께한 공연에는 ‘검은 정장에 빨간 양말’ 같은 재치가 이따금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무게감 있는 현대음악이 친근함을 입었다.
앙상블블랭크는 현대음악 단체다. 2017년 작곡가 겸 지휘자인 최재혁이 창단했다. 새빨간 양말의 주인공인 그는 지휘뿐 아니라 재치 있는 해설로 공연을 이끌어 나갔다. “비주류의 음악을 모았다”는 그의 자조 섞인 설명처럼, 프로그램은 국내에서 듣기 어려운 에런 코플런드(1900~1990), 사무엘 바버(1910~1981), 몰튼 펠트만(1926~1987), 스티브 라이히(1936~)의 작품들과, 최재혁(1994~), 그리고 만 스물셋의 작곡가 김혁재의 신작 두 편 등으로 꾸며졌다.
첫 곡, 코플런드의 ‘애팔래치아의 봄’에서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상쾌한 정취와 함께, 현대음악의 신선함이 객석으로 불어왔다. 더욱 높아진 기대감으로 나머지 레퍼토리들을 감상했는데, 최재혁과 김혁재의 초연 신작이 가장 흥미로웠다.
최재혁의 비올라와 타악기를 위한 ‘마이 라이프 인 비올라’는 두 악기가 시끄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듯한 작품. 최재혁은 연주를 맡은 이한나에게 자신의 비올라를 빌려줬다. 거친 연주법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올리스트의 활은 브릿지 가까이를 마구 긁어댔고, 퍼커셔니스트 한문경의 손톱은 나무 합판을 할퀴어 냈다. 여기에도 세밀함과 과격함 사이 다이내믹이 있었는데, 그 순간들을 연결해 나가며 나름의 ‘감상법’을 터득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라츠 음대에서 클라우스 랑을 사사하는 김혁재. 힙합과 록을 거쳐 작곡에 눈 떴다더니, 그 작품명에서부터 ‘분노’가 반짝인다. ‘Same New Shit’. 이 곡은 새로운 음악·음향·미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 뿐이라는 김혁재의 선언문이었다. 젊은 작곡가의 패기와, 세상에 대한 일침이 뒤섞여, 곡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 같은 형상이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음악제 ‘빈 모데른’을 창설해 운영했다. 당시 극장 총감독이었던 드레제의 증언에 따르면, 빈 모데른을 필두로 “현대음악을 접하려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를 미끄러지듯 오가는 프로그래밍, 김혁재와 같은 작곡가를 발굴하는 ‘눈과 귀’는 5년 차를 맞은 앙상블블랭크의 노련미를 암시했다. 그리고 꽉 들어찬 이날 공연장은 이에 대한 청중의 화답을 의미했다. 최재혁과 앙상블블랭크가 이 여세를 몰아 ‘비주류’의 설움을 풀고, 국내에 현대음악을 유행시키진 않을까. 긍정적인 예감이 든다.
글 박찬미 기자 사진 앙상블블랭크
박규희 클래식 기타 독주회
기타로 만난 바로크 정취
8월 11일 롯데콘서트홀
노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박규희(1985~)는 나폴레옹 코스테(1805~1883)의 ‘출발’ Op.31을 시작으로 프란시스코 타레가(1852~1909)의 ‘그랑 호타’, 망고레의 ‘훌리아 플로리다’ 등을 선보였다. 기자가 집중적으로 살펴본 연주는 기타곡으로 만나본 스카를라티의 건반 악기를 위한 소나타 K32·K322·K208과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샤콘’이었다.
세 살 때 기타를 시작한 박규희는 도쿄 음대·빈 국립음대·알리칸테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그는 벨기에 프렝탕 기타 콩쿠르 우승(2008) 이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연주에 앞서, 박규희는 건반악기와 바이올린을 위해 작곡된 두 작품이 기타로 편곡된 것이 기타리스트들에게 얼마나 뜻깊은지 설명했다. 새로운 레퍼토리 확장을 넘어 건반과 바이올린 활의 기교와 감성을 비로소 기타 음색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커 보였다. 그래서 연주 시작 전 손을 주무르는 박규희의 모습은 사뭇 경건해 보였다.
먼저 만나본 스카를라티(1685~1757)의 작품에서는 기타의 나른한 음색이 작품에 퍽 어울렸다. 그 이유는 연주법에서 비롯된다. 하프시코드와 기타는 줄을 뜯어 소리 내는 원리가 비슷하다. 그래서 얼핏 비슷한 음색을 가진 듯하지만, 기타의 소리는 활이나 건반과 해머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모나지 않고 더 솔직하게 들린다. 연주법의 차이에서 오는 기타의 매력은 악상의 유연성에서 더 부각됐다. 기타의 소리는 손끝에서 빚어지기에 다이내믹 활용이 훨씬 자유롭다. 당대 연주에서는 금기시되는 페달링은 기타의 영역이 아니므로, 폭넓은 다이내믹의 운용은 오히려 기타에 유리한 연주였다.
연이어 만난 바흐(1685~1750)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중 ‘샤콘’ 또한 여러 버전으로 편곡되어 소개되고 있다. 기타의 음색으로 만난 ‘샤콘’은 비록 활시위의 화려함과 에너지는 없지만, 중반부에 정적에 이르는 파트에서 약음 된 소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지로 울리는 저음부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대위가 명확하지 않게 들린 것은 아쉬웠다.
기타의 음색으로 만난 두 작품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주제가 부각된 연주보다 말년의 너그러움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박규희의 연주는 대위를 구분해 주제를 잡기보다, 이미 흐르고 있는 시간 속에 음악을 통째로 흘려보내는 듯 자연스러웠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뮤직앤아트컴퍼니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일상판소리 십오분전’ &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가감’
전통음악은 완성품일까
7월 28·29일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8월 4·5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전통음악을 해체·조립한 두 편의 공연이 열렸다. 창작판소리와 동·서양 악기를 조립한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신작과 전승된 민속음악에 악·가·무를 더하고 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기획공연이다.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는 판소리 완창에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였다. 5명의 소리꾼은 유튜버 열풍, 불안과 폭식증, 중고거래 사기, 일상 속 공상, 반복적인 직장 생활을 소재로 각각 15분짜리 무대를 선보였다. 한 무대에 단 3명(소리꾼·고수·악기 연주자)이 오르는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옴니버스 음악극처럼 풍성했다. 무엇보다 젊은 소리꾼이 오늘날 선보이고픈 판소리의 매력을 떼어와, 다른 장르 및 악기와 결합해보는 실험의 장이었다. 소리꾼 김은경은 내용인 브이로그처럼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판소리를 만들어 보였다. 정지혜는 판소리의 비극미를 극대화하는 데 첼로의 구슬픈 음색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단 15분 만에 청중을 웃기고 울리며 판소리의 맛을 제대로 살린 무대로는 이승민의 ‘출입국 관리사의 일탈’을 꼽고 싶다.
지난 2월, 새로운 예술감독을 맞은 민속악단은 기획력이 돋보이는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지기학 예술감독은 전통의 어법으로 전통예술 공연물을 창작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번 공연에서는 한국음악에서의 ‘더늠’과 ‘덜이’를 변주에 활용했다. 민속악단은 경기민요 ‘창부타령’과 서도민요 ‘산염불’을 성악을 덜어낸 기악곡으로 재구성하고, 가야금병창과 잡가에 색다른 악기를 더했다. 또한 ‘태평무(太平舞)’를 춤 없이 무대에 올렸다. 이러한 ‘편곡’의 묘는 첫날 공연된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에서 발휘됐다. 가야금병창에서 장구를 북으로 대체하고, 퉁소를 더했다.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듯한 북소리, 낮고 구성진 퉁소의 음색이 어우러져 “음악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와닿았다. 반면, 가야금병창에 같은 현악기가 더해지자, 다른 노래가 나오는 이어폰을 한쪽씩 낀 것처럼 두 악기의 선율과 소리, 장단이 섞여 오히려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전통음악은 완성품일까? 전통음악의 요소를 모듈처럼 활용한 두 공연의 의의를 전통은 박제된 무언가라는 고정관념을 덜어내고, 생명력을 더한 데서 찾고 싶다. 청중이 듣기에 더 좋다면, 오늘날 선보인 ‘일상판소리 십오분전’과 ‘가야금병창에 퉁소를 더늠’이 후대의 전통이 될 수 있을 테니.
글 박서정 기자 사진 국립국악원·판소리공장 바닥소리
뮤지컬 ‘비틀쥬스’
과연, 성공적인 초연이었나?
7월 6일~8월 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만약 당신이 뮤지컬 ‘비틀쥬스’에 관심을 가졌다면, 무엇 때문인지 묻고 싶다. ‘비틀쥬스’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올린 지 2년도 안 되어 한국에 상륙했다. 브로드웨이 현 뮤지컬 경향이 궁금한 많은 이들이 대거 공연장을 찾았다. 기자는 팀 버튼(1958~)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호기심이 생겼다.
각별한 주목을 끈 만큼이나 실망의 목소리도 컸다. 개막부터 순탄치 않았다. 무대 기술 문제로 개막을 두 번이나 연기한 것. 그런데 이러한 이슈는 오히려 ‘비틀쥬스’ 무대 스케일에 대한 상상을 증폭시켰다. 6월 19일 개막 예정이던 뮤지컬은 7월 6일에 막이 올랐다. 브로드웨이의 최신 기술이 세종문화회관에 어떻게 구현될지 더욱 궁금해졌다.
1초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비틀쥬스’는 2019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마법 같은 비주얼로 인해 오로지 입소문만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거대한 집 형태의 무대 세트를 중심으로 다양한 특수효과를 더했다. 이번 공연도 오리지널 프로덕션 버전을 공수해 다채로운 소·대도구가 등장했다. 공중부양·불꽃과 같은 다양한 특수효과는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게 했다. 총 18번의 전환을 거치는 무대는 그야말로 ‘유령의 집’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정말 팀 버튼의 세계관을 뜻하는 ‘버트네스크(Burtonesque)’를 완벽히 구현해냈는지에 대해선 물음표가 생긴다. 팀 버튼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드러나는 권선징악은, 어쩌면 현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지루한 주제이다. 그 지루함을 팀 버튼은 침울하면서도 유머가 담긴 특유의 괴이함으로 치환시킨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그로테스크 미장센이 각 캐릭터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뮤지컬에서도 현실에 없는 캐릭터들을 표현하기 위해 분장과 의상에 많은 신경을 쓴 듯 보였다. 주인공 비틀쥬스만 해도 스트라이프 의상을 네 종류, 가발을 6회 변경한다. 그러나 시종일관 지속된 화려한 볼거리는 놀이동산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주었지만, 은근하면서도 기묘한 팀 버튼의 세계관과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작품 전반에 녹아든 미국식 블랙 코미디 대사들이 한국인 정서와 잘 맞도록 번역이 되었는지도 의심이 든다. 비틀쥬스(유준상)는 관객과 소통하며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을 펼쳤지만, 능청스러운 연기에 녹아들지 않는 어색한 대사가 내심 아쉬웠다. 그러나 코로나 시국에 새로운 대형 뮤지컬을 그리워하던 관객에겐 기분 좋은 자극이었을 테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