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변화의 옷을 입고 포디엄에 서다
성시연/서울시향(협연 선우예권)
1월 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난해 1월 서울시향과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8번을 현악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선보였던 성시연의 무대를 기억한다. 여전히 귀에 선명한 현의 진동과 그의 힘찬 비팅은 홀을 무너뜨릴 듯 강렬한 사운드를 선사했다. 기자가 기억하는 성시연의 마지막 무대이다. 올해 1월, 성시연은 다시 한번 서울시향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지난해 11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성공적인 데뷔를 마쳤고, 오는 7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데뷔도 앞두고 있다(1월호 인터뷰 수록). 이 무대에 건 기대는 1년 동안 그에게 생긴 많은 ‘변화’가 녹아든 음악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글린카의 ‘루스란과 류드밀라’ 서곡과 선우예권의 협연으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고,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의 화려한 팡파르로 국내 복귀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는 유럽의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교감하면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이번 무대에서 보여준 그 ‘자유로움’은 자아를 드러내기보다 오케스트라 고유의 음색을 존중하며 본인의 해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발현됐다.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은 서울시향이 가지고 있는 현의 간결하고 민첩한 움직임이 돋보였다. 하지만 서곡 특유의 재치와 리듬의 탄성은 둔한 금관과 목관에 의해 지체된 듯했다. 연이어 선보인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는 비틀거리는 듯한 리듬과 시차를 두는 타건, 밀고 당기는 속도로 정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선우예권의 독특한 해석이 인상 깊었다. 그의 땀에 젖은 연주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의 반응은 건조했다. 금관의 불안정한 균형, 중저음의 부재, 결속되지 못한 현 파트로 인해 밀도 있어야 할 곳이 비어 보이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서울시향 이전의 무대들에서 저음역을 부각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2부에서 선보인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에서는 성시연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시향이 가진 빛나는 현의 음색과 차분한 목관의 소리가 무대에 가득 찼다. 그럼에도 비장함이 결여된 금관의 도입부나 균형, 산만한 현의 피치카토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강인함 만큼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성시연이 너그러운 모습으로 변한 것이 퍽 서운하다. 하지만 이 ‘변화’가 그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음악의 방향이라면 지휘자 성시연을 아끼던 한 사람으로서 그 유연함을 새로움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서울시향
질문하자, 신의 부재에 대하여
연극 ‘라스트 세션’
1월 7일~3월 6일 대학로 TOM (티오엠) 1관
2020년 한국 초연 후, 2년 만에 다시 개막한 연극 ‘라스트 세션’ (연출 오경택)이 연일 화제다. 평생 연극 무대에서 활약해온 배우 오영수가 드라마 ‘오징어 게임’ 흥행 이후 다시 선 첫 연극이었기에 이미 주목을 받았지만, 개막 이후 지난 9일 그가 골든글로브에서 한국인 최초로 남우 조연상을 받으며 관심이 폭발했다. 1월 공연의 매진 행렬이 계속되는 중 기자는 11일, 오영수·이상윤 캐스팅으로 관극.
‘깐부 할아버지’를 보러온 관객이 만나게 될 것은 고집스러운 비관에 가득 차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한 할아버지다. 정신분석학의 시초이자 무신론자인 프로이트 역을 맡은 오영수는 깊게 팬 주름 속에 속내를 감추고 젊은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를 맞이한다. 이상윤이 맡은 이 역할은 유신론의 입장에서 대화를 이끌어나간다.
니콜라이의 저서 ‘프로이트 vs 루이스’에서 착안한 이 2인극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프로이트의 서재로 찾아온 루이스를 가정한다. 실제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지만, 각각의 신론에서 정교한 논리를 펼친 학자들이었던 만큼 이 가상의 대화는 소재가 끊이지 않는다. 인간에게 도덕률이란 존재하는가.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사랑은, 또 기쁨은 무엇이며, 삶과 죽음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지만, 연극의 생동감은 인물의 실제 삶에서 촘촘하게 끄집어 올린 대사에 있다. 우리는 딸과 손자를 잃고, 구강암으로 입의 반쪽을 잘라내다시피 한 말년의 프로이트의 외침에 공감한다. 모든 것에 신의 뜻과 이유가 있다면, 대체 내게 일어난 이 고통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
두 배우의 서로 다른 표현도 흥미롭다. 극의 초반, 프로이트는 과장된 움직임이나 발성이 없지만, 루이스는 시종일관 무대를 걸어 다니며 적극적으로 관객과 시선을 맞춘다. 양극단의 위치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연기가 대화의 절정에서 톤의 온도를 맞추고, 그제야 그 주제가 관객의 마음속에도 화두가 된다. 프로이트는 그만 철없는 생각에서 벗어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소리친다. 루이스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려는 프로이트를 이기적이라며 몰아세운다.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 사람인가. 선택하지 못한 채 앉아 있는 관객은 모든 다그침에 부끄럽다.
첨예한 대립을 멈추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에서 닥쳐온 두려움이다. 라디오에서는 전쟁의 시작과 사망자 수를 읊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공습경보에 두 사람은 방독면을 뒤집어써야만 한다. 신의 뜻을 믿는다던 루이스도, 죽음의 두려움이 없다던 프로이트도 이 거대한 재앙 앞의 한계를 자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렇다고 생각을 접는 것은 더 미친 짓이지.”
재앙 앞에서 우리는 상황을 이해해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재앙이란 사실 없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고, 사방에서 목숨을 잃는다. 어쩐지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있음에 안도하는 나날. 홀로 앉은 방안에는 그 와중에도 나만은 무사하길 비는 듣기 거북한 이기적인 속마음만 들려온다. 재앙의 형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연극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남긴다. 그럼에도 질문하라고. 목숨을 위협하는 포탄의 소리가 들려와도 삶을 이해하기 위한 서로의 소리를 듣자고. 그것이 우리를 치유할 ‘라스트 세션’일 것이라고.
글 허서현 기자 사진 파크컴퍼니
극장이 더 그리워지는
국립극단 ‘스카팽’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
극립극단은 지난해 ‘온라인 극장’을 열었다. 온라인 극장은 국립극단의 작품을 유료로 제공하는 OTT 플랫폼. 국내 연극 단체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첫 온라인 극장이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현재 명동예술극장·백성희장민호극장·소극장 판을 운영하는 국립극단은 “오프라인 극장들에 이은 네 번째 극장 개관”이라 칭했다. 정식 극장으로 칭한 만큼 온라인 극장을 앞으로 체계적으로 운영할 거라는 포부가 느껴졌다. 현재 온라인 극장에는 ‘파우스트 엔딩’ ‘X의 비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스카팽’이 올라와 있다. 모두 코로나 시기의 작품으로, 국립극단은 온라인 상영을 위해 공연 기간 중 별도로 촬영을 진행했다.
방구석 1열에서 노트북으로 온라인 극장을 관람해보았다. 무엇을 볼까 고민하던 중 ‘인기순’ 정렬을 누르니, ‘스카팽’이 1위,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2위에 올라와 있다. ‘스카팽’은 배리어프리(화면해설/수어통역) 버전,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연출가의 시점으로 촬영·편집한 디렉터스컷이 별도로 준비됐다. 국립극단의 명불허전 인기 레퍼토리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보다 ‘스카팽’이 온라인 극장에서 더 인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기존 국립극단 애호가들이 온라인 극장을 더 많이 찾는다는 뜻일 테다. 기자는 ‘스카팽’을 관람하기 위해 결제를 시도했다. 온라인 관람료는 한 편에 9,900원. 결제 후 7일 이내 재생할 수 있고, 최초 재생 후 3일 안에 관람해야 한다.
‘스카팽’이 온라인 극장에 적합한 작품은 아니었다. 극장에 녹아드는 숨결로 완결성을 띠는 연극이었다. 2019년 초연한 ‘스카팽’ (원작 몰리에르/연출·각색 임도완)은 이미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연출과 각색을 맡은 임도완은 동시대성이 떨어진 17세기 작품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새롭게 개조한 웃음코드, ‘신체극의 대가’라는 평을 받고 있는 임도완이 구상한 배우들의 독보적인 몸짓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영상을 통해 실제 객석에서의 웃음소리가 생생히 전달됐다. 보고 있으니 한동안 방문이 뜸했던 극장이 아련히 그리워졌다.
이 연극은 기본적으로 극중극 형태다. 특히 해설자 몰리에르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소개하기도 하고, 촘촘하게 짜인 대사, 만화를 찢고 나온 듯 통통 튀는 배우들의 움직임까지 모두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장치다. 객석에서 즐겼으면 한바탕 크게 소리 내어 웃을만한 장면들을 안방에서 감상하니 그저 씁쓰레한 미소만 지어졌다.
좋았던 점은 ‘자막’이었다. ‘스카팽’에서 배우들은 빠르게, 때로는 속사포 랩처럼 대사를 내뱉는다. 실연에서는 놓칠 수 있는 대사들이 자막을 통해 뇌리에 명확히 박혔고, 잘 각색된 작품이라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오감을 간지럽히는 다양한 효과음,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앙상블이 오래도록 잔상에 남아 실제 무대를 찾을 것 같다. 역시나 ‘온라인 극장’은 ‘극장’의 대체제일 뿐일까. ‘온라인 극장’만의 정체성 찾기는 여전히 외롭고 위태롭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