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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발견한 자아 피아니스트 김혜진
음반 ‘거울(Miroirs)’ 발매 기념 독주회를 앞두다
어느 날, 한 거울 앞에 섰다. 필연이었던 것처럼 거울 속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 만 열일 곱에 부소니 콩쿠르에 입상했을 때는 열심을 더한 승부욕이 비쳤다. 많이 웃고 울며 고민을 거치고 다시 거울 앞에 섰을 때는 단단해진 자신의 내면도 보였다. 새로운 문화의 햇빛과 바람을 잔뜩 쐬고 나니 눈에는 진취적인 생명력이 반짝거렸다. 음악이라는 거울에 비친 한 예술가의 모습. 피아니스트 김혜진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가고 있는 과정이다.
‘자아를 찾았다’는 것은 ‘찾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라는 말로도 해석된다. 음악인으로서,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끝없는 숙제다. 고뇌와 노력의 시간이 동반되지만, 음악에 대한 절실함과 인내,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하려고 노력해왔다. 시간과 경험이 쌓이며 자연적으로 극복되는 것들도 있고.
이번 음반 제목은 ‘거울(Miroirs)’이다. 오랜 독일 유학 후, 로스앤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겪은 영감이 반영되었다고. 환경의 변화가 영향을 주었다. 미국 음악과 문화, 그리고 이국적 색깔이 짙은 음악과 현대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학업을 마치고 교육이 내 직업의 중요한 일부가 된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독일과 미국의 음악적 환경은 많이 달랐을 텐데, 결정의 계기는 무엇이었나. 스승에 대한 음악적 신뢰도가 계기의 밑바탕이다. 2015년 독일에서 학업을 마치고 전문 연주자로 준비하던 중, 스승인 파비오 비디니(1968~)가 미국 콜번 음대 교수진으로 취임하며 기회가 주어졌다. 오랜 유럽 생활을 뒤로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새로운 삶의 경험을 위해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스승인 파비오 비디니로부터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음악에 대한 무한한 경의와 사랑. 매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으로 음악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삶이 영감을 준 것은 어떤 것들인가.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간단한 예로 날씨를 들 수 있다. 흐리고 어둑한 계절의 독일에서는 단조의 작품을 더 찾고 공부했다면, 햇빛이 쨍하고 맑은 하늘이 주를 이루는 도시에 있다 보니, 장조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다문화가 공존하다 보니 음악뿐 아니라 삶에서도 진취적이고 자유로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기본을 다진 독일에서의 시기가 없었더라면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색깔은 확연히 다르지만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을 창조하는 두 지역에서 문화를 체득하는 것은 내 삶의 행운이다.
그래서인지 음반 목록에 미국적 색채가 담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가 있다. 더불어 스페인 색채를 담은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일부도 들어있는데. 특히 이 작품들은 특유의 음악적 특징을 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랩소디 인 블루’는 즉흥성과 재즈적 요소가 주를 이루며, ‘고예스카스’에는 특유의 낭만성에 스페인 민속 리듬과 멜로디가 바탕이 되었다. 두 나라를 방문 및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를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환상을 펼쳐보려고 노력했다.
음반 명과 동명의 라벨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라벨의 ‘거울’은 명확한 오브제 또는 특정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제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관찰을 통해 적합한 소리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궁극적으로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 인간의 삶과 심리를 반영하는 거울처럼 인생철학을 담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의미를 소리로 승화하기 위해 많은 연구 시간이 필요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파보 예르비, 힐러리 한 등과 작업하며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던 필립 트라우곳이 녹음에 참여했다. 출중한 프로듀서임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다. 녹음을 5일간 진행했는데, 늘 일과 끝에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눠 녹음 과정이 재미있으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단순한 디렉팅을 넘어 음악적 스타일을 빠르고 깊이 이해해주었다. ‘라 발스’를 녹음할 때는 오케스트라 총보까지 챙겨오는 준비성에 놀랐다.
3월 한국에서 있을 음반 발매 기념 독주회에는 음반에 없는 클레멘티(1752~1832) 소나타의 목록도 보인다. 하반기에는 클레멘티 소나타 초기 작품 음반도 발매한다고. 이번 독주회에 연주할 곡은 음반에 수록된 곡은 아니다. 음반은 낙소스와 콜번 음대의 협업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클레멘티의 작품번호 1번의 세 개의 소나타를 포함한 초기 작품들로, 숨은 보석 같은 곡들이다. 천진난만하다가 우수에 차기도 하고, 서정적인 악장부터 극적인 악장까지 대조적인 면모도 있다. 동시대 작품보다 낭만적인 요소도 돋보인다. 현대 피아노 악기에 맞게 재해석하려 집중했다. 클레멘티의 음악이 한 번 더 조명되는 계기이길 바란다.
앞으로 한국에서의 활동 계획은. 독주회를 기점으로 한국 관객을 더욱 자주 만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국내에서 8월 ‘랑데부 디 무지크’ 실내악 축제의 예술감독으로서 동료 연주자들과 함께하고, 11월 함신익/심포니 송과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는 등 국내외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연주가이자 교육자로서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발전해 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스테이지원
김혜진(1987~)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콜번 음대에서 아티스트 디플로마 과정을 마쳤다. 부소니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으며, 현재 콜번 음대 교수, 오렌지카운티 예술 예비학교 피아노과 감독으로 후학을 양성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김혜진 피아노 독주회 3월 10일 롯데콘서트홀 라벨의 ‘거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