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 서는 유럽 무대의 별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 첼리스트 김두민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첼리스트 김두민
현장의 지식을, 교육의 지혜로
2022년, 독일을 거점으로 활약한 두 음악가 사무엘 윤과 김두민이 서울대 음대 전임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뛰어난 음악가’보다 ‘좋은 사람 되기’를 강조한 사무엘 윤,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앙상블을 중시한 김두민. 두 스승이 앞으로 우리나라 음악계에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리라 기대합니다. 두 사람의 삶과 음악을 다룬 인터뷰를 통해 미리 살펴볼까요. 음악가로서 이들의 ‘시작’과 성숙을 위한 ‘시간’, 중심을 세운 ‘기회’,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을 다뤘습니다. 이들과 같은 음악가가 되기를 꿈꾼다면 마지막 ‘꿀팁’까지 놓치지 마시길
글 박서정 기자 사진 황필주(studio79)
2022년 봄학기, 서울대 음대에 70년대생 두 교수님이 나란히 부임했습니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과 첼리스트 김두민입니다. 사무엘 윤은 201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무대에서 주역을 맡으며 화제를 모았죠. 김두민은 멘델스존과 슈만이 상임지휘자를 지낸 독일의 유서 깊은 악단 뒤셀도르프 심포니에서 2004년부터 첼로 수석으로 활동했습니다. 국내외에서 활약한 우리나라 음악가들의 최종 정착지가 대학 교단인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만큼 음악가의 삶이 불안하다는 방증이겠죠. 더구나 음악 시장이 작은 한국에서 온전히 음악가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테고요. 그렇다면 20여 년을 이미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대학교수로 고국에 정착한 두 사람은 성공한 음악가의 행보를 걷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성공한 음악가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이 있습니다. 타고난 재능 덕에 모든 게 수월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승승장구해서 어려움이라곤 모를 것이다, 그래서 실력이 부족한 학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르치는 데도 서툴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이들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죠. 시작은 캠퍼스를 밟던 푸릇한 대학 시절입니다.
‘윤태현’과 ‘김두민 군’의 ‘시작’
사무엘 윤, 아니 본명이 윤태현인 이 학생은 서울대 성악과 90학번입니다. 첫 학기, 학교 수업은 빠지기 일쑤였고 노래에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엄한 교수님의 수업 날이면 피해 다니기 바빴다나요? 혼날까 무서워서요. 믿기시나요?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무엘 윤의 모습을 아는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어렵네요.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무엘 윤은 고등학교 3학년, 그것도 정확하게는 그해 10월에 성악을 시작했습니다. 타고난 목소리 덕인지 덜컥 입시에 합격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준비 기간이 짧았던 만큼 부를 수 있는 곡도 몇 곡 없었고 일찍이 클래식 음악을 시작한 동기들 사이에 섞이기도 힘들었죠. 남들보다 뒤처져있다는 생각에 괴로울수록 노래에 대한 갈급함은 커졌습니다.
“제 목소리를 통해서 사람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끈기 있게 노력했어요. 부족한 만큼 남들보다 더 노력하려 했죠. 남들에게 박수 쳐주는 처지에 있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노래를 더 많이 듣게 됐어요. 공연장을 정말 많이 갔죠. 외국 유명 성악가의 내한공연이란 공연은 다 갔으니까요. 현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하나하나 내 안에 축적했습니다. 제가 색깔이 다양한 성악가가 된 건 그 시절 덕분입니다.”
‘김두민 군’은 대학 입학과 함께 신문에 이름이 났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1호 예술영재’로요. 때는 1995년, 입학 당시 나이는 만 16세였습니다. 예술영재 코스에서 앞서 2년간 합격자가 나오지 않았기에 그 역시 부담 없이 시험에 임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이뤄낸 합격 소식에 들뜰 법도 한데 예전 인터뷰를 찾아 읽어보니 의젓한 소감을 남겼습니다. “나이 많은 형, 누나들과 한 학급에서 공부하자니 솔직히 겁이 나긴 해요. 하지만 훌륭한 연주자가 되라고 뽑아주신 만큼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한 학기에 24학점씩 수료해 3년 만에 조기졸업을 해버립니다. 딱 만 18세였죠.
“그때 당시에 뭐가 그리 급했던지.(웃음) 대학을 다니긴 했지만, 일반 고등학생처럼 공부하고 생활했던 것 같아요. 영재 제도가 어린 학생을 조기에 발굴해서 교육하는 거잖아요. 그럼 생활이 악기와 음악으로만 치우칠 수가 있어요. 물론 이점도 있죠. 저 같은 경우엔 빠르게 배움의 과정을 밟았어요. 반면 평범한 학창 생활은 놓친 부분이죠. 그래서 이런 영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다양한 경험이 결국 음악 생활하는 데 중요하다는 거예요.”
음악가를 완성하는 ‘시간’
스스로 ‘늦된 학생’이었다는 사무엘 윤. 그런 그가 바이로이트의 ‘영웅’이 되기까지는 세 가지 만남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신앙, 그리고 이인영(1929~2019) 서울대 교수와의 만남입니다. 대학 시절 아내를 만나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무엘 윤은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았습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법을 배운 겁니다. 그러면서 앞서 언급한 ‘엄한 교수님’, 바로 이인영 교수 앞에 설 엄두도 내게 됩니다.
“스승님은 저를 계속 기다려주셨던 것 같아요. 저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했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에 교수님을 찾아뵙질 못했어요. 레슨을 안 가면 낙제를 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으시고 이따금 “태현이는 잘 지내고 있니” 하셨대요. 4학년 1학기 때는 선생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중앙콩쿠르에 나갔어요. 그런데 본선까지 올라간 거예요. 학교가 발칵 뒤집혔죠. 그제야 교수님께서 “너는 내 제자인데 이 상태로는 안 된다” 그러시면서 저를 부르셨어요. 1학년 때 받아야 했을 수업을 그때 다 받았어요.(웃음) 그때까지 저를 믿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거죠. 안타까운 건 교수님께서 제가 서울대 교수로 오게 된 걸 못 보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거예요. 그게 제일 죄송스러워요.”
시간을 앞서간 김두민도 때를 기다려야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무리한 연습량 탓에 손가락 부상을 당한 겁니다. 아무 문제 없던 넷째, 다섯째 손가락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콩쿠르 출전 중이었고 불편한 손으로 끝까지 콩쿠르를 마쳤습니다. 미련하다고요? 어린 나이었기에 몸을 챙기는 법을 몰랐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검사를 받아봤지만 명확한 진단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6개월의 공백기를 보냈습니다.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도 활을 잡고 연주하는 건 불가능했죠. 그런 와중에도 김두민은 대학 졸업 시험을 준비하고 독일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팔을 못 쓰게 됐는데도 어떻게든 내 소리를 되찾아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무모하기도, 신기하기도 해요. 그 상황에서도 첼로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서양 의학, 한의학 할 것 없이 온갖 치료법을 찾아다녔고 재활을 위해 운동도 했죠. 무엇보다 부상당한 몸에 맞는 새로운 연주법을 개발해야 했어요. 테크닉을 찾고 내 몸에 맞는지 알아가고 다시 고치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하기를 반복했어요. 어떤 시도는 1~2개월 만에 잘못된 걸 알아차리기도 하지만 어떤 건 1년 넘게 하다가 이게 잘못됐구나 깨닫고 고치기도 했죠. 몇 년 전에야 저에게 맞는 방법을 찾았어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저는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더 많은 도구를 갖게 됐어요.”
중심을 세울 ‘기회’
이제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쾰른 오퍼 종신 가수 사무엘 윤과 뒤셀도르프 심포니 첼로 수석 김두민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 여기서 잠깐.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형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두 사람은 삶의 터전이나 다름없던 독일 극장과 오케스트라에서 얼마 전 퇴직했습니다. 국립 대학인 서울대는 전임교수의 겸직을 제한적으로 허가하기 때문입니다. 임용 결정과 봄학기 개강까지 기간이 짧아서, 두 사람 다 20여 년간 일하던 직장을 갑작스레 떠나는 바람에 마음이 정말 복잡했다고 합니다.
사무엘 윤은 23년 동안 쾰른 오퍼에서 근속했습니다. 1999년 오펀스튜디오 오디션을 통해 입단했고 이듬해 정단원이 됐죠. 보통 독일 극장 전속 가수의 정년은 15년입니다. 그때가 되면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퇴직하거나 극장의 제안으로 종신 가수가 되는 것입니다. 종신 가수 타이틀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가수에 대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음악적인 기량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에서도요. 사무엘 윤은 2015년 극장으로부터 종신 가수 계약서를 받습니다. 2012년 독일 최대의 바그너 페스티벌인 바이로이트의 주역으로 승승장구할 때도 극장을 옮기지 않고 동고동락하며 쌓인 믿음의 결과였죠. 사무엘 윤은 극장의 호의를 고국의 후배들과 나눴습니다. 한국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해 선발된 1인이 쾰른 오퍼의 오펀스튜디오에서 한 시즌 동안 활동할 기회를 만든 것이죠. 이처럼 오랜 추억이 있는 쾰른 오퍼에서 사무엘 윤의 남은 임기는 올해 7월까지였습니다.
“만약 극장에서 절대 안 된다, 무조건 임기를 다 채우라고 했다면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임용을 연기했겠죠. 그런데 제가 3월에 학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서류부터 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니까 극장 측에서 배려해준 거죠. 제가 무대에 서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것에 대한 비전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 독일 정부에서 캄머쟁어(궁정가수)로 선정됐어요. 보통 수여식은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을 할 때 이뤄지는데, 퇴직하는 바람에 그 시점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김두민 역시 2004년 첼로 수석으로 입단한 뒤셀도르프 심포니에서 쭉 일했습니다. 그런데! 김두민의 독일 활동을 얘기하기 전, 먼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1963~)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음악가로서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손을 다치고 다시 연주자로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던 때입니다. 부상도 숨기고 어렵게 독일 유학을 하던 2000년, 김두민은 젊은 음악가를 후원하는 안네 조피 무터 재단의 오디션을 봅니다. 심사위원은 오직 한 명, 안네 조피 무터. 그는 준비해간 곡 대신 김두민에게 이것저것 다른 곡을 시켰다고 합니다. 먼 길을 기차까지 타고 갔는데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고… “할 수 있습니다!” 외친 뒤 연주해 보였다네요. 결과는 합격. 그렇게 후원받게 된 악기(Jean Baptiste Vuillaume)보다 값진 건 안네 조피 무터와 함께한 실내악 연주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선보인 연주였지만 무터는 그의 표현을 인정해주고 그 가능성에 대해 연주로 화답했습니다. 김두민은 뒤셀도르프 심포니 단원들에게도 고마웠던 기억을 꺼내놓았습니다. ‘초보 수석’을 탓하거나 흉보지 않고 기다려주었다는 데 대한 고마움입니다. 독일의 오케스트라는 보통 시립 오페라단의 반주도 맡습니다. 워낙 공연 횟수가 많아 대다수 오페라를 리허설도 없이 공연하죠. 반면 한국의 김두민은 독일 유학을 거쳤어도 오페라에 익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입단 후 첫 공연이 하필이면 익숙한 오페라도 아닌 베르디의 ‘맥베스’였던 겁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오페라를 바로 무대에서 연주하려니 어땠겠어요. 수석으로 이끌기는커녕 이상한 짓이라도 안 하면 다행이었죠. 그러니까 저는 첫해에 수석의 기능을 거의 해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단원들은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오디션과 오케스트라 독주 때 음악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보았으니 다른 건 기다려주는 거예요. 사실 그들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거든요. 그런데 기다려주고, 오히려 도움을 주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어요.”
다음을 위한 ‘귀환’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아니, 한국에는 왜 돌아왔지?’라며 의아해 할 겁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두 사람은 가르치는 데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음악가의 선한 영향력”을 믿는 사무엘 윤은 잘 알려진 대로 세계 곳곳에서 연주회가 잡히면 그곳에 도착한 뒤, 남은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학생부터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게릴라처럼 수업을 열었죠. 그렇게 15년 넘는 시간 동안 만난 학생의 수가 수백 명에 달합니다.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는 김두민은 독일에서 입학시험이나 졸업시험을 앞둔 학생을 꾸준히 도왔습니다. 평창대관령음악제 같은 페스티벌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기도 했죠. 그에게 가르침의 시간은 또 다른 배움의 시간입니다.
그런 이들이 본격적으로 교단에 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무엘 윤은 “그동안 제 음악 인생에서 무대에 서는 순간이 가르치는 순간보다 중요했다가, 대등해졌다면 이제는 교육에 더 중점을 두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이제부터는 후학 양성에 더 의미를 두는 시간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김두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 학생은 저에게 오지 않아요. 주어진 시간에 빨리 실력을 늘려야 하는 학생들이 찾아오죠. 그러다 보니까 제 수업을 열고 한 학생을 오랜 시간 보고 가르치고 싶은 바람이 생겼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으로 각각 진행했는데요. 놀랍게도 두 사람 사이엔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우선… 두 분 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각각 두 시간씩 통화했거든요), 그리고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들을 향한 진심 말이지요. 그 진심은 학생을 단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
“성악가로서 완숙함에 이르는 건 30대 중반 이후예요. 20대 때의 편차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남들의 기준에 따라 성급하게 욕심낼 필요가 없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모차르트밖에 못 불러도 지금 내가 가진 역량 안에서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곡을 하면 돼요. 요즘은 너무 이른 시기에 대중매체에 얼굴을 알리려는 학생들도 있어요. 얼른 성공하고 싶은 그 마음은 저도 이해하지만, 학생 때는 학생의 본분을 다해서 공부하기를 바라요. 그래도 ‘네가 이루고 싶은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제가 계속 심어줄 겁니다.” (사무엘 윤)
“저는 학생이 ‘그 순간’을 경험할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치는 편이에요. 어떻게 보면 느릴 수 있지만 직접 경험한 건 오래 남죠. 콩쿠르를 앞두거나 아무리 다급한 학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결과는 나오겠지만 결과가 사람을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력이 사람을 만들죠. 당장 시험을 잘 못 보더라도 첼로와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면 그 사람은 잘 될 수밖에 없어요.” (김두민)
이번 인터뷰를 마치면서 우리나라 음악 교육이 전환기를 맞이했다는 예감이 듭니다. 그간 우리 음악계는 솔리스트 양성을 목표로 엘리트 키우기에 급급했죠. 대학 교수진도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솔리스트를 모셔왔습니다. 이렇게 교육받은 학생의 해외 콩쿠르 우승 소식은 곧 국내 음악 교육의 성취로 치환됐고요. 그러나 어디 모두가 빛나는 단 한 명의 승자가 될 수 있나요? 많은 수의 학생이 좌절감을 느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선한 영향력”을 강조하는 오페라 가수와 앙상블을 중시하는 오케스트라 출신 첼리스트는 제 예상을 뒷받침하듯, 각자의 음악 교육 비전을 공유해줬습니다. 사무엘 윤은 세계 유수의 극장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서울대 음대 오페라연구소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김두민은 뒤셀도르프 심포니에서 쌓은 비법을 전수하고 싶다고 귀띔했고요. 최근 작고한 이어령(1934~2022) 초대 문화부 장관의 말이 떠오릅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뛰면 1등이 한 명뿐이지만, 360도로 뛰면 360명이 1등을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이들이 무대를 포기한 것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사무엘 윤은 교직 생활을 우선순위에 두고, 김두민은 연주자와 교육자의 비중을 반반으로 병행할 예정입니다. 자신과 같은, 음악가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두 교수님의 아주 실용적인 조언이 뒤에서 이어집니다.
사무엘 윤이 재직한 쾰른 오퍼는 어디?
쾰른은 독일 서부에 있는 대도시로, 쾰른 오퍼는 베를린·뮌헨·함부르크·드레스덴 극장과 함께 독일에서 명성 높은 오페라극장이다. 2012년에는 유럽 비평가들이 뽑은 최고의 오페라극장으로 선정됐다. 쾰른 오퍼의 시초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쾰른 시내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던 오페라단을 1904년 쾰른 시가 인수하면서 탄생했다. 에리히 코른골트 ‘죽은 도시’(1920), 지크프리트 바그너 ‘이교도의 왕’(1933), 볼프강 포르트너 ‘피의 결혼식’(1957) 등을 쾰른 오퍼가 세계 초연했다. 오페라 반주는 쾰른 필이 담당한다. 2021/22 시즌에는 12개의 새로운 오페라와 어린이 오페라 프로덕션을 선보인다. 이 중 세 작품은 세계 초연, 두 작품은 독일 초연이다. 현재 쾰른 오퍼가 상주한 극장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공연장이 무너진 뒤 1957년 지어진 건물. 2012년 시작된 극장 개보수 공사가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김두민이 재직한 뒤셀도르프 심포니는 어디?
뒤셀도르프는 독일 서부에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수도이다. 작곡가 슈만과 시인 하이네가 태어난 곳으로도 알려졌다. 뒤셀도르프 심포니는 뒤셀도르프 톤할레의 상주 오케스트라다. 4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악단으로 독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시립 오케스트라다. 악단이 전성기를 보내던 19세기에는 멘델스존(1809~ 1847)과 슈만(1810~1856)이 음악감독을 지내며 자신의 곡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현재 뒤셀도르프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는 아담 피셔(1949~)로 2015/16 시즌부터 악단을 이끌고 있다. 2020년에는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 프로젝트(AVI)를 완수했다. 2019년 말러 교향곡 1번으로 ‘BBC 뮤직 매거진상’을 받았다. 뒤셀도르프 심포니는 사회 공헌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학생을 위한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지도 교사를 맡고 아카데미 학생들로 꾸려진 유스 오케스트라의 멘토로 활동한다.
음악가를 꿈꾸는 당신을 위한 Q&A
‘다른 직업의 세계에서처럼 음악의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틈새, 우리에게 적합한 자리를 찾아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슈만은 젊은 음악가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남겼고, 그런 그의 말들은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에 의해 책으로도 출판됐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선 음악가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을 위한 실용적인 내용을 물었습니다. 다음의 간단한 질문에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히 조언해주었습니다.
Q. 클래식 음악, 유학은 필수일까?
사무엘 윤 그렇다. 클래식 음악이란 게 유럽의 문화이고 우리는 그 문화에 존중심을 갖고 공부한다. 아무리 미디어가 발달했어도 한국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게 있다. 내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위한 유학 지원과 해외 활동 후원에 힘썼던 이유다. 유럽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봐야 한다. 유학 중에는 언어나 발성 연습에만 급급하지 말고, 현지 문화를 체험하며 현지인과 같이 삶을 살 것! 미리 영어를 배워두면 좋다. 영어만 잘하면 나중에 어느 곳을 유학지로 선택하든 부담이 없기 때문. 성악가로서 음정·박자·발음 공부는 기본이겠지.
김두민 유학 그 자체가 필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외국 어느 음대의 누구한테 배워서 첼로 연주가 얼마나 나아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유럽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느끼고 이해한 경험이 내가 음악을 표현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됐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들을 만나는 것,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하는지, 또 유럽인들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은 어떠한지 말이다. 지금 유학을 고려하고 있다면 우선 배우고 싶은 선생님을 확실히 하기를. 유학의 기본 동기는 일단 악기를 잘 연주하기 위함이다. 문화의 습득 같은 건 자연스레 따라온다. 선생님을 정할 때는 들려오는 소문 말고, 직접 마스터클래스나 캠프에 참가해보는 걸 추천한다.
Q. 독일에서 음악가 되려면?
사무엘 윤 독일은 예술가를 위한 정부 제도가 잘 마련돼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예술가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책이다. 비싼 돈을 들이지 않고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으니까. 도시마다 자체 제작 극장화가 다 돼 있고 나라에서 후원해준다. 독일 오페라극장 오디션은 보통 에이전시를 통한다. 오펀스튜디오라고 해서 일종의 인턴 제도도 있는데 보통 공개채용 한다. 2년 과정이고 극장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정단원으로 채용한다. 그런데 오디션에서 뽑히는 건 특히 한국인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졸업장보다 무섭게 작용하는 게 편견이다. 독일어 대사를 잘 소화하지 못할 거라는 우려가 늘 따른다.
김두민 독일은 음악가에게 천국이다. 특히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더더욱 천국인 나라다. 근무 환경도 물론 좋지만, 오케스트라에 대한 시민의 사랑이 남다르다. 거리를 걷다 보면 나를 알아보고 “저번 연주 정말 좋았다”라고 말해준다. 힘이 날 수밖에 없다. 뒤셀도르프 심포니 퇴단 전 마지막 연주에서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첼로 독주도 없는 브람스 교향곡 3번을 연주했는데 말이다. 독일 오케스트라에 입단하려면 오디션을 치러야 한다. 보통 1차는 고전 협주곡, 2차는 낭만 협주곡, 3차는 오케스트라 발췌곡 시험을 본다. 좋은 오케스트라일수록, 또 악장이나 수석 같이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자리일수록 실내악 오디션도 본다. 뒤셀도르프 심포니의 경우 오디션 심사는 외부 초청 없이 전적으로 오케스트라 단원에 의해 다수결로 이뤄진다.
Q. 가장 궁금한 오디션 팁!
사무엘 윤 오디션에서 유리한 곡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 오페라극장 같은 경우에는 레퍼토리가 화려해야 한다. 독일어권 극장은 독일어 아리아가 필수다. 이외에도 프랑스어 아리아, 영어 아리아 등 최대한 다양하게 준비해가는 게 좋다. 오디션장에서 보통 3~5곡 부르기 때문이다. 결정권은 극장장과 캐스팅 매니저에게 있다. 학생들에게 무대 위에서는 나밖에 없는 것처럼 이기적으로 임하라고 강조한다. 특히 오디션은 짧은 시간 안에 자기가 가진 최고의 것을 보여줘야 한다. 가장 이기적이어야 할 시간이다.
김두민 오케스트라 오디션 심사기준은 악기마다, 직위마다 다 다르다. 첼로 평단원을 뽑을 때와 첼로 수석을 뽑을 때의 기준이 같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단원 오디션에선 이 사람이 오케스트라에 들어와서 하나가 된 소리를 낼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춘다. 훌륭한 연주자라도 연주가 너무 특이하면 입단이 어려울 수 있다. 반면 같은 사람이 수석 오디션을 본다면 합격할 수도 있다. 연주에 설득력이 있다면 우리 오케스트라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겠다는 기대감으로 뽑는 것이다. 수석은 두 자리가 있는데 보통 서로 대비되는 개성을 가진 연주자들이 자리해 있다.
Q. 음악가도 직업이다!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위하여
사무엘 윤 슬기롭다는 건 영리한 것과는 다르다.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건 정말 위험하다. 특히 음악계에서는. 이쪽 업계는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23년간 극장 생활하면서 연습 때 반주를 맡은 친구가 지금은 어디 극장의 상임지휘자로 가 있다거나, 연출보조로 무거운 장비를 옮기던 친구가 극장장이 되는 경우를 정말 많이 봤다. 음악과 사람을 대하는 진실함이 일관된 게 중요하다.
김두민 배려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이 배려라는 게 내가 듣기만 해서도, 말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예컨대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수석으로 직장 생활을 할 때 악장에게 어떻게든 맞추려고만 노력한다면 그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내 기능과 위치에서 필요한 신호를 등대처럼 계속 보내줘야 효과적이고 화목한 직장 생활이 되더라.
Q. 음악가를 꿈꾸는 당신에게
사무엘 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나조차도 나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때 버팀목이 되어준 성경 구절이다. 자신의 꿈에 대해 믿음을 갖고 계속해나간다면 결국 그대로 된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희망 고문’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내가 만났던 학생 중에는 결국 ‘유명한 성악가’가 되지 않은 친구들도 많다. 그렇지만 자기가 처음 음악가를 꿈꾼 이유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면, 결코 돈을 잘 번다거나 유명한 무대에 서는 것은 아니었을 거다. 내 꿈이 선하면 그 기도는 분명히 이뤄진다.
김두민 음악을 잘하려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음악의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거다. 나는 그게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음악가의 삶이 그렇게 평탄치는 않다. 소위 말하는 재능부터 해서 여러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음악의 이러한 요소와 색깔이 정말 좋아서 나는 내려놓을 수 없다’하는 사람이라면 음악가의 길을 가라고 한다.
사무엘 윤(1971~) 서울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과 독일 쾰른 음대에서 수학했다. 201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개막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타이틀롤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런던 코번트 가든·베를린 도이치 오퍼·파리 바스티유 극장 등 세계 주요 극장에서 활동했다. 2022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 전임교수로 임용되며 1999년부터 소속됐던 쾰른 오퍼에서 종신 가수로 퇴직했다.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캄머쟁어(궁정가수)로 선정됐다.
김두민(1979~) 예원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독일 하노버 음대와 쾰른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아스펜 협주곡 콩쿠르에서 우승(1994)했고 유럽문화재단에서 차세대 예술가상을 받았다. 2000년부터 안네 조피 무터 재단의 후원을 받으며 무터 비르투오지 앙상블로 활동했다. 2004년부터 2022년까지 뒤셀도르프 심포니 첼로 수석으로 재직했다. 2022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 전임교수로 임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