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상 앞에 빛나는 양심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고립을 선택한 이유
인터뷰를 위해, 런던의 한 호텔 로비에서 기돈 크레머(1947~)를 처음 만났다. 그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불쑥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바렌보임에게 가버렸네요. 제게 누구 소개라도 시켜주시겠습니까?”
예술가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평론가는 그것을 조명하는 평범한 인터뷰와는 꽤 거리가 먼 이야기였던 지라, 이후의 인터뷰에 대한 기억은 없고 인터뷰 결과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보다 내 기억에 남은 것은 그 후로 수년간 보게 된 크레머가 가진 용기와 이상의 핵심, ‘청렴결백한 정직’과 ‘혹독한 고통’에 대한 인상이다.
지난달, 기돈 크레머는 조용하게 75번째 생일을 맞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앙상블 리더이지만, 그가 종종 ‘부패의 온상’이라 칭했던 음악계에서 온 생일 축하 카드는 찾기 어려웠다. 나부끼는 국기 또한 찾을 수 없었는데, 이는 크레머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라트비아 출생의 반(半)유대인이자 반(半)독일인인 그는 생의 대부분을 여행 가방과 함께 떠돌았으며,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머릿속의 이동식 책장’과 함께 방랑했다.
25년 전, 크레머는 독자성 및 공연 수입이 필요한 지역 음악가들과 함께 현악 오케스트라 ‘크레메라타 발티카(Kremerata Baltica)’를 창단했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다양한 음악가들을 기반으로 삼아 현지 작곡가들의 새로운 음악을 선보인다. 일반적인 연주 프로그램과 달라, 크레머는 더욱 돋보인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존재하는 추잡한 타협을 피하고, 자신의 고립을 ‘긍지의 휘장’처럼 두른 채 항상 다른 이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하자 크레머는 자신이 의뢰했던 3중협주곡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를 내게 보내왔다. 이런 식의 진부한 표현은 대체로 피해왔던 그가 이제는 신중한 메시지로 이렇게 말했다. “미친 사람들이 실제로는 매우 똑똑할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살인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비극이며, 오늘날 일부 정치가들이 이러한 행태를 보입니다.”
음악이 무얼 할 수 있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답했다. “음악이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줄 수는 있죠.” 한계는 분명하나 달성 가능한 그의 목표. 이는 전쟁과 평화에 한 마디 얹으려는 음악계의 입만 산 다른 모든 이들과 크레머 자신을 구분 짓는다.
체제에 반(反)하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쉽사리 내색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라트비아 리가의 한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단원이었다. 최근 도이치 벨레(Deutsche Welle) 방송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삶은 아버지의 두 번째 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에서 많이 고통받으셨어요. 리가 게토(Ghetto)에서 아내와 한 살배기 딸을 포함해 서른다섯 명의 친인척을 잃으셨습니다.”(편집자주_ ‘게토’는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을 뜻한다) 크레머는 평생 만난 적 없는 누나의 그늘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는 독일인이었다. 크레머는 이렇게 덧붙인다. “저는 제가 경험한 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낍니다.”
모스크바에서 보낸 십 대 시절, 그는 저명한 다비트 오이스트라흐를 사사했으나, 해외로 나갈 수는 없었다. 크레머는 러시아 당 기관원의 비위를 맞추기보다는 반정부 인사였던 작곡가 알프레트 시닛케(1934~1998)와 교제하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의 곡을 연주했다. 폴란드에서 망명한 또 다른 모스크바의 외톨이 작곡가,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1919~1996)를 놓친 것도 후회하고 있다. 러시아를 떠날 수 있게 되자, 크레머는 아르헨티나 작곡가인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행복하고도 눈물겨운 탱고 음악과도 조우한다. 잘츠부르크에서 루체른까지 여름 페스티벌을 휩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삼십여 년간 오스트리아의 로켄하우스에서 소박한 ‘반(反) 페스티벌’을 이어간다. 은행의 자금력을 기반으로 하는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 잠시나마 마음을 빼앗겼던 크레머는 이내 부패한 스타덤 체계를 북돋는 행사를 비난한다.
십 년 뒤 그의 맹비난은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저에게 남아있는 질문은 이런 겁니다. ‘내가 이 오래되고 또 새롭게 형성되는 ‘명성’이란 꼭대기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저는 이미 ‘클래식 음악’으로 자리 잡은 곡들과, 제가 연주하기 위해 수십 년간 애써온 레퍼토리와 음악, 작곡가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이제 선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 속 일원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화려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제가 옳다고,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지점이 아닙니다.”
무대와 관객에게 존재하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분위기가 스타 마케팅에 대한 크레머의 혐오감을 뒷받침한다. 크레머는 “선정주의와 일그러진 가치로 가득한 공기를 더는 마시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베르비에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현 음악 감독은 푸틴의 지휘자로 알려진 발레리 게르기예프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뿐이다.(편집자주_현재 게르기예프는 베르비에 페스티벌 음악감독직에서 사임한 상태이다)
‘음악’이라는 국가의 도덕률
크레머는 푸틴이 벌인 모든 전쟁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해왔다. 2014년 크림반도 사태에 대해 그는 이렇게 언급했다. “저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시국과 정치적 위협을 지지하는 몇몇 동료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푸틴 정부의 정치범 석방에 대해 자주 호소해왔고, 캐나다 체류 당시에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재소자들을 위해 연주를 했다. 75세의 나이에도 그의 연주는 기술적으로 나무랄 데 없고 재기가 번득이며 절대 알랑거리지 않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크레머만의 고유한 특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굽히지 않는 삶 속의 이러한 파편들은 기돈 크레머가 홀로 고립된 이유를 말해준다. 그는 분명 무리에서 떨어지기는 원하지 않으며 자신을 떠나 바렌보임과 결혼한 엘레나 바시키로바(1958~)와 화해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그의 이분법적 지각은 확고한 판단으로 그를 몰고 간다. 대부분의 이들이 짊어지기 두려워하는 판단으로 말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그는 음악을 위해서 홀로 서 있다.
최근 크레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음악이 되는 것’ 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몸을 섞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 간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는 밤낮없이 온 마음을 다해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 세계적인 스타들과 그를 구분하는 것은 바로 크레머가 항상 ‘음악이라는 국가’의 도덕적 양심 그 자체였으며, 여전히 그렇다는 사실이다. 번역 evener
노먼 레브레히트 칼럼의 영어 원문을 함께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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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time I met Gidon Kremer, for an interview in a London hotel lobby, he broke in after a few minutes to say: ‘My wife has left me for Barenboim. Do you know anyone for me?’ This was so far outside the normal encounter, where an artist plugs a project and the journalist creates an angle, that I have no further recollection of the interview and probably made a complete hash of it. What endures is an impression of raw honesty and searing pain, twin drivers that I came to recognize down the years as the keys to Kremer’s impressive courage and idealism.
Gidon Kremer turned 75 last month without much fuss. Although he is one of the world’s most admired violinists and ensemble leaders, there was barely a birthday card from the music business, which he often calls out for corruption. Nor was there much waving of national flags, probably because he is a nowhere man. Latvian by birth, half-Jewish and half-German, he lives mostly out of a suitcase or, as he puts it, out of a mobile bookcase in his head.
Quarter of a century ago he created the Kremerata Baltica with regional musicians in need of income and identity. The Kremerata plays a different menu from anyone else, much of it by local composers. It stands outside regular concert routines, and Kremer stands still further out. When you see him with the players he is always a foot apart, wearing his isolation as a badge of pride, keeping his head above the dirty compromises of an artist’s life. When Putin invaded Ukraine, he sent me a triple concerto he had commissioned titled ‘This too shall pass.’ On the whole, he shuns such cliches. ‘Insane people may in fact be very smart,’ he tells me now in a measured message. ‘It is tragic if power is used for murder. These days it relates to certain politicians.’
What can music do? I ask. ‘Music will not save the world,’ he replies, ‘but it can smooth the pain of all those who suffer.’ His limited, achievable aim draws the line between the thoughtful Kremer and all the other musical megaphones who speak in war-and-peace soundbites.
Kremer does not speak readily of his suffering. His father was an orchestral violinist in Riga. In a recent Deutsche Welle film, Kremer said: ‘I am – so to speak – my father’s second life. He suffered so much in the War. Thirty-five of his relatives – including his wife and his one-and-a-half year-old daughter – were murdered in the Riga ghetto.’ Kremer is shadowed by a sister he never knew. His father’s second wife was German. ‘I feel obligated to pass on what I have experienced,’ he says.
As a teenager he studied in Moscow with the illustrious David Oistrakh, but was not let out abroad. Rather than appeasing the apparatchiks, he befriended the dissident composer Alfred Schnittke and performed his music at every opportunity. He regrets missing out on another marginal Moscow composer, the Polish exile Mieczyslaw Weinberg. Once he could leave Russia, he connected with the happy-weepy tangos of the Argentine composer, Astor Piazzolla.
Although he could have milked summer festivals from Salzburg to Lucerne, Kremer ran a modest ‘anti-festival’ with friends for 30 years in the Austrian village of Lockenhaus. Lured briefly by a bank-funded Swiss festival at Verbier he soon excoriated the event for fuelling a corrosive star system. His denunciation resonates powerfully a decade later: ‘The question to myself remains: what am I personally doing on this summit of “names” and both old and new celebrities? Having all my life served music and composers, a repertoire which is established as “classic” and one which, for decades I had to fight for to be heard, I now feel that I need to make a choice. I simply do not want any more to be part of “parties for the sake of parties”. To be one of a group of so many splendid artists is not something that I want to justify or confirm.’
His revulsion at stardom is founded on a loathing of elites, on stage and in the audience, and a disgust at the atmosphere they foster. ‘I simply do not want to breath the air, which is filled by sensationalism and distorted values,’ he said. He has never returned to Verbier (and nor have I). The festival’s present music director is Valery Gergiev, Putin’s conductor. That’s all you need to know.
Kremer has spoken out against all of Putin’s wars. ‘I fail to understand some of my colleagues, who (for their own convenience) support the state of affairs and its political intimidation,’ he said of Crimea in 2014. He has appealed often for the release of Putin’s political prisoners. When in Canada, he takes time out to perform for prisoners in British Columbia. At 75 his playing has lost none of its unique character – technically immaculate, slightly astringent, never ingratiating, always gripping.
These fragments from an unwieldy life may help indicate why Gidon Kremer stand alone. He does not want to be an outlier and he has long since made his peace with Elena Bashkirova who left him to marry Barenboim, but his binary sense of right and wrong forces him into strong judgements that he cannot resist and which most others fear to share. He does it, he says, for the sake of music.
‘There is a difference,’ he told me recently, ‘between “making music” and “being music” — just as there is between making love and loving.’ He loves music, day and night, heart and soul. What sets him apart from the international star trek is simply this: Gidon Kremer is, and always has been, the moral conscience of the musical nation.
글 노먼 레브레히트
영국의 음악⋅문화 평론가이자 소설가. ‘텔레그래프’지, ‘스텐더즈’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음악계 뉴스를 발 빠르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