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둘러싼 나무 이야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4월 18일 9:00 오전

책 속의 책

음악을 둘러싼

나무 이야기

식목일이 있는 4월, 생명의 기운이 봄과 함께 찾아오는 시간이다. 우리 삶에 가까이 있어 잘 몰랐던 나무와 숲을 둘러보며 나무가 음악 문화에 수혜한 정신과 물질의 문화사를 살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기획·총괄 임원빈

 

Part 1 작품┃나무를 담은 작곡가, 나무를 닮은 작품 _송현민
Part 2 악기┃목관악기 수리·제작자 박하나 & 국악기 제작자 박제준 _송현민
Part 3 악보┃종이로 태어나 액정 속으로 _임원빈
Part 4 서적┃책에 담긴 음악과 나무 _임원빈
Part 5 공간┃나무 사이로 자라난 공연장 _박찬미
Part 6 공연┃나무의 감수성으로 _임원빈

 

/ Part 1 / 나무와 작품 /

 

나무를 담은 작곡가, 나무를 닮은 작품

나무는 음악의 역사를 이룬 물질이자 정신이었다. 작품의 영감과 소재가 되고, 숲은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바흐는 1685년 독일 튀링겐 아이제나흐의 숲에서 태어났다(이를 기념하고자 튀링겐에는 바흐 페스티벌이 열린다). 튀링겐 사람들에게 나무가 우거진 숲은 부족의 신성을 관장하는 고향 같은 곳이자 기묘한 자연 현상의 근원이었다.

 

신화를 밴 나무 이야기가 노래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신적 존재가 나무에 얼마나 많이 서려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 속에서 인간은 거의 나무로 변신한다. 미르라는 나무가 되고 껍질을 가르며 아들 아도니스를 낳는다. 요정 다프네도 쫓아다니던 아폴론을 피해 신 페네이오스에게 다른 모습으로 변신시켜 달라고 간청하자 월계수가 된다. 나무에는 미신과 신화가 서려 있었고, 음악은 숲과 나무의 수호신을 달랬다. 음악이 발전한 나라에서 나무나 숲을 주제로 하여 전승된 민요가 많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무와 숲은 마을 사이의 경계를 위한 표지이자 표식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바흐 시대에 ‘나뭇잎’을 뜻하는 ‘Labu’는 나뭇잎뿐 아니라 ‘성역’이란 의미도 함축한다. 부족과 마을마다 전승되는 민요에는 표식과도 같은 나무에 관한 내용이 가사로 담겼고, 그 노래는 그들의 신분을 증명하는 증서와도 같았다. 바흐의 일생을 두터운 책에 담은 존 엘리엇 가디너는 저서(바흐-천상의 음악)에 이렇게 적고 있다. “15세가 된 바흐가 친구 게오르크 에르트만과 함께 튀링겐 고향을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파릇파릇한 소년 성가대원들에게 노래는 그들의 신원을 증명하는 여권이자 식권이었다.”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이러한 표식 같은 나무가 등장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어쨌든 바흐에게나 그의 시대 사람들에게 나무와 숲은 자연의 단순한 물질이 아닌 정령과 역사적 시간이 담긴 영목(靈木)이었다. ‘이제 쉬어라, 모든 숲들이여’ BWV756는 이러한 바흐가 사고했던 나무와의 물활론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 곡이다.

 

숲, 오페라 속 영웅의 무대

과거의 독일 문화권에서 나무의 문화력과 영향력은 크다. ‘그림 형제’로 불리는 야콥 그림(1785~1863)과 빌헬름 그림(1786~1859)이 남긴 동화 속 라푼첼, 백설 공주, 헨젤과 그레텔이 겪는 사건과 모험에서도 나무와 숲을 빼놓을 수 없다. 1800년대 초반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 각국은 자국의 문화와 예술로 ‘민족’을 돌아보았다. 이때 나무와 숲은 민족의 정신이자 문화적 상징물이었다. 독일의 위대한 전통이나 신화는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의 운명이 헨젤과 그레텔처럼 숲에서 단련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희곡을 근간으로 하는 오페라에 자주 나타난다. 베버(1786~1826)의 ‘마탄의 사수’, 훔퍼딩크(1854~1921)의 ‘헨젤과 그레텔’은 물론 바그너(1813~1883) 같은 독일 음악가들의 오페라에 숲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이들의 작품은 ‘민족’의 감성과 정신을 대변했다. 작품 속 숲의 공간은 주인공이 결국 찾아낼 평화·사랑·안정 같은 ‘빛’을 감추고 있는 ‘어둠’의 공간으로 초반에 설정된다. 그리고 숲에 잠긴 ‘어둠’을 거두고 이기는 자가 영웅이 되고 결국 ‘빛’을 거머쥔다.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에서도 남녀는 높은 떡갈나무로 된 추운 숲에 서 있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지만, 두 사람은 ‘밤’의 시간을 지나 용서와 이해라는 ‘빛’의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숲은 그들의 정신이 발현하고, 시련을 극복하여, 정반합의 승리 정신을 쟁취하는 곳이었다. 한편 극중 나무는 영웅을 보좌하는 신적 존재들이 기거하는 곳이자 영웅의 내적 심상을 반영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한스 작스가 숲의 라일락 나무 앞에서 “라일락 나무의 내음은 얼마나 부드럽고, 강하며, 그득한가! 나의 사지를 풀리게 하고 무엇인가를 말하게 하네”라는 대사를 읊는 이유다.

 

울퉁불퉁한 나무와 음악의 수학

나무에는 인간과 문명의 시간적 흐름이 압축되어 있었다. 뿌리로부터 기둥과 줄기, 잎과 열매로 생명이 전유되는 과정은 유년부터 노년의 인간사에 비유되었다. 이러한 ‘부분’들이 조화롭게 ‘전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수학자나 작곡가들은 나무로부터 수학적 원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음악사에 ‘대위법의 아버지’로 이름을 남긴 요한 타일레(1646~1724)는 ‘음악예술 논문집’에 조화의 나무(Harmonischer Baum)를 수록했다. 나무 형태로 10성부의 카논을 그린 것이다. 버르토크(1881~1945)는 작곡할 때 책상에 쌓아놓은 소나무 솔방울에서 영감을 받았다. 솔방울이 겹쳐져 만든 각도, 버드나무의 새순이 돋아나는 각도가 그에게는 예사로운 자연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무에 담긴 자연 현상에서 황금분할을 떠올렸다. 나무의 잎이나 울퉁불퉁한 자연에는 일정한 비율과 명징한 수치가 숨겨 있다는 피보나치 수열이 버르토크의 솔방울에서 작품으로 녹아들었다. 이러한 나무는 음악뿐만 아니라 ‘음향’에도 영향을 주었다. 바흐의 작품 대부분이 연주된 성 토마스 교회가 대표적이다. 성 토마스 교회의 음향적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아르농쿠르는 바흐 당시에 교회 내부가 보기 드물게 “나무로 처리되어 있어 거의 무지크페어라인에 견줄만한 잔향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라며, “대단히 좋은 잔향상태로 아주 빠른 템포로 연주해도 모든 것이 빠짐없이 잘 들리는 곳”이라고 말했다. 나무를 음향의 기제로 활용한 공간에 익숙했던 바흐는 자신이 짓는 작품 속 ‘음표’뿐만 아니라 ‘음향’적 상태를 고려하며 작품을 설계했을 것이다. 아르농쿠르는 바흐가 “활달한 템포를 선호하면서 빠른 화성변화를 허용했던 것은 그러한 음향조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나무가 음향에 일으킨 혁명은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트라디바리의 삶과 악기에서 알 수 있다.

 

나무 ‘아래’서 태어난 가곡

음악가들의 노래는 나무 ‘아래’에서 많이 태어났다. 헨델(1685~ 1759)의 오페라 ‘세르세’에서 세르세는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나무 그늘이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며 축복 같은 휴식을 찬미한다. 슈만(1810~1956)의 가곡집 ‘미르테의 꽃’ Op.25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노래도 나무 ‘아래’서 흘러나왔다. 제3곡 ‘호두나무’다. 결혼을 앞둔 여인이 집 앞 호두나무 아래서 꽃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신랑을 맞이할 꿈에 부풀어 있다. “아가씨는 나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네. 그리워하고 상상하고 미소 짓다 잠들어 꿈을 꾸네.” 또 다른 가곡 ‘재스민 나무’도 봄날 초록빛 재스민 나무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얀 꽃을 피우는, 경이로운 생명 현상을 섬세한 시적 감성으로 노래한다. ‘겨울나그네’도 ‘보리수’(제4곡) 아래 머물며 회상에 젖는다. 나그네 앞의 나뭇가지들이 살랑거리는 모습을 자신에게 안정을 취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사(시)를 지은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상상력 때문이다. 나그네는 ‘마지막 희망’(제16곡)에서 나무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노래한다. “나는 희망을 걸고 잎사귀 하나를 지켜본다. 그 잎이 땅 위에 낙엽지면 내 희망도 따라 떨어진다.” 음악에 나무가 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시가 나무를 묘사했고, 그런 시를 음악가들이 작품 속으로 견인했기 때문이다. 상기한 뮐러(겨울나그네), 율리우스 모젠(호두나무), 뤼케르트(재스민 나무) 등이 활동한 시기는 낭만주의기였다. 낭만주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성적 눈보다 감성의 시선으로 사물과 풍경을 들여다보고, 머리보다 가슴으로 사유하던 시대였다. 시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예술의 이름으로 읽어내고 풀어냈다. 그런 시대에 나무는 외로운 이에겐 친구였고, 죽어가는 이에게는 생명의 상징이었다.

 

위로와 평화를 주는, 나무

모차르트는 1791년, 그러니까 죽는 해에 가곡 ‘봄의 동경’ K.596을 남긴다. “오라, 5월이여, 나무들을 다시 푸르게 하라. 나를 위해 제비꽃을 피워라”라는 오버벡(1755~1821)의 시를 가사로 썼다.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은 나무의 푸름과 대조된다. 음악가들에게 나무는 생명을 품은 고요한 상징이었다. 베토벤(1770~1827)은 정처없이 나무로 난 길들을 거닐었다. 그의 전기(傳記)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로맹 롤랑(1866~1944)은 나무로부터 느낀 베토벤의 심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 있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나무가 당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전원에 있으면 내 불행한 청각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거기서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나를 향해서 ‘신성하다, 신성하다’ 하고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1802년, 귀가 들리지 않던 베토벤이 도착한 하일리겐슈타트도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교외 마을이었다. 1804년 베토벤은 빈으로 가는데, 그곳은 칼렌베르크 숲이 있는 곳이었다. 나무로 난 길은 그에게 절대자유가 보장된, 나무가 일군 사유와 창작의 공간이었다. 1838년 11월, 쇼팽(1810~1849)은 건강을 회복하고자 스페인의 섬 마요르카로 여행을 떠난다. 여섯 살 연상의 작가 상드와의 사랑을 향한 세상의 따가운 눈길도 피할 겸 상드도 은신하듯 동행했다. 쇼팽은 이듬 해 2월까지 ‘바람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 머물렀다. 종려나무, 선인장, 올리브 나무, 오렌지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폰타나에게 보낸 편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경”이라고 적었던 쇼팽은 이곳에서 24개의 프렐류드 Op.28을 완성했다. 베르디(1813~1901)는 작품을 하나씩 올릴 때마다 산타 아가타에 위치한 자신의 빌라 정원에 기념수를 한그루씩 심었다. 그것들은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나 오늘날 높고 넓은 수목을 이루고 있다.

 

나무로부터 얻은 것과 배우는 것

나무는 여러 시대에 걸쳐 음악의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을 모아놓아도 아마 음악사에는 ‘소리의 수목원’이 생길 것이다. 그것을 일일이 나열할 순 없지만 작곡가마다 나무에 대한 묘사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사냥꾼이 들어선 숲의 입구부터 그 안에서 만나는 나무와 꽃의 풍경을 묘사한 슈만의 ‘숲의 정경’은 나무가 일군 공간에서 펼쳐지는 로드무비처럼 느껴진다. 드뷔시(1862~1918)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 목신이 졸고 있던 나무는 신화적 풍경의 한 조각처럼 다가온다. “하나의 교향곡은 곧 하나의 세계”라고 말했던 말러(1860~1911)는 교향곡 3번 도입부에서 숲과 대지의 울음을 묘사한다. 이는 숲의 정령들이 속삭이는 소리처럼 느껴진다.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를 작곡한 레스피기(1879~1936)의 눈에는 드높게 뻗은 소나무의 위상과 기개가 로마의 찬란했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나무가 음악에 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일단 그들의 시대는 지금과 달리 나무와 숲이 일상과 사유의 반경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공간을 살아가던 음악가들의 작품에 나무의 감성이 스며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더불어 자연에 대한 감수성도 지금과 달랐다. 역사가 점점 근대와 이성의 옷을 입어갔지만, 나무와 숲에 배어 있는 오랜 전통과 신화는 이성의 마름질로 닦아낼 수 없는 문화이자 유산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나무에게 배우는 지혜도 한결 같다. 나무는 자라면서 예기치 못한 악조건이나 환경적 위협이 자신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거기에 대응해서 자신의 살길을 찾아나서는 조용한 생명체다. 이러한 감내와 적응의 과정을 통해 나무는 ‘종(種)에 대한 약속’을 지켜내고 동시에 ‘자신만의 모양’을 만든다. 이러한 나무의 모습에서 음악가들은 위안 받았을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것도 결국 예술사(史)를 지키는 ‘종(種)에 대한 약속’이자, 동시에 ‘자신만의 모양(스타일)’을 만드는 일이지 않던가. 나무가 인간에게, 예술에게 주는 지혜다. 나무는 오늘날 도시 문명에 잊힌 생태학적 감수성을 재생시키는 자연물로 기능하고 있다. 신화보다 이성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력보다 가시적인 사물과 영상이 중요시되는 오늘날, 나무에 담긴 신화와 내면을 상상하게 하는 음악들을, 또 직각과 수직으로 마름질된 나무의 음향판으로 구성된 딱딱한 공연장에 숲의 정서와 영상을 끌어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참고문헌┃존 엘리엇 가디너 ‘천상의 음악’, 아르농쿠르 ‘바로크음악은 말한다’, 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캐서린 카우츠키 ‘드뷔시의 파리’, 양기승 ‘작곡가의 집’, 이성일 ‘슈만 평전’, 로맹 롤랑 ‘헨델’ ‘베토벤의 생애’, 이안 보스트리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 Part 2 / 나무와 악기 /

 

나무가 노래할 수 있도록

나무의 아픔을 달래는 치료사, 악기로의 꿈을 이뤄주는 제작자들 이야기

 

목관악기 수리·제작자

하나우드윈드 대표 박하나

클라리넷·오보에·바순 같은 목관악기는 나무로 되어 있다. 겉에는 쇠로 된 키들이 달려 있지만, 인간의 숨을 음악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악기를 이루는 목성(木性)이다. 플루트는 쇠로 되었지만,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목재의 몸통을 갖고 있었다. 색소폰은 소리 내는 리드가 ‘나무’라는 이유로 목관악기에 속하고, 호른은 그 음색이 ‘나무’처럼 부드럽다 하여 목관 5중주에 함께 한다. 이처럼 나무는 목관악기의 몸통이자, 소리를 결정짓는 중추핵이다. 2010년 문을 연 하나우드윈드의 대표 박하나(1988~)는 목관악기들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악기점을 운영하는 부모의 어깨 너머로 어린 시절 악기 수리를 배웠고, 영국 뉴어크 칼리지에서 3년간 제작과 수리를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본인을 어떻게 소개하나요? 목관악기 전문가로 소개합니

다. 최근에는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의 의뢰로 국악기인 대(大)피리도 제작하면서 ‘제작자’라고도 소개하고요.

고장 난 악기를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단순히 부품을 교체하는 게 아니라, 특수한 아픔을 고쳐주는 것이죠. 이러한 과정을 공유하고자 오랫동안 블로그를 운영했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사례와 정보가 쌓였어요.

목관악기의 나무 종류와 특성은 무엇이고, 현악기 나무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목관악기의 나무가 ‘관’ 형태라면, 현악기는 ‘판’ 형태입니다. 관악기는 여러 소리를 내기 위해 고안된 키가 많이 달려 있어요. 키들은 쇠로 되어 있는데, 단단하게 고정하기 위해선 나무의 재질이 단단하고 밀도가 높아야 합니다. 따라서 현악기에 사용하는 메이플 나무로는 목관악기 제작이 까다롭죠. 악기를 불다보면 관 속으로 침이 흐르고, 습기가 생기고, 다시 건조되는 과정에서 나무가 보존하고 있던 유분도 같이 증발합니다. 그래서 단단하고 밀도 조직이 촘촘한 나무를 선호하죠. 아프리카에서 나는 흑단이나 모파인, 그레나딜라 등을 선호하는데 일명 ‘하드우드’라 불리는 것들입니다.

나무가 단단해 보이지만 금이 가기도 합니다. 보이는 것과 달리 강성(재료가 주어진 변형에 저항하는 정도)이 높지 않아 물리적 충격에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무엇보다도 온도와 습도 변화에 따라 크랙(틈새)이 생기는데요. 특히 여름과 겨울에 많아요. 우리나라의 특성상 여름과 겨울의 온·습도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생김새와 속성이 각자 다를테니 상처의 형태도 각양각색일 것 같습니다. 어떻게 치료하나요? 상처의 형태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머리카락처럼 생긴 ‘헤어라인 크랙’이 있는데, 실금 형태에요. 육안으로 간신히 보일 정도인데, 일단 실금이 생기면 주위 환경에 따라 점점 심해집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루로 만든 나무와 특수접착제를 반죽해 틈새를 미사하게 메웁니다. 다른 하나는 더 깊은 상처예요. 때로는 구멍에 걸쳐 생기기도 하는데 한 눈에 딱 보이죠. 이럴 때는 철심을 삽입합니다. 더 이상 갈라지지 않게 나무의 변질을 고정하는 것이죠. 크랙의 범위가 넓고 깊을 때의 방법이에요.

나무가 가장 많은 상처를 입을 때는 언젠가요? 7~9월이에요. 냉방 때문이죠. 덥고 습한 장마철에 나무관은 습도에 따라 팽창하고, 연주자는 더워서 냉방을 최대한으로 가동하다보니 나무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심화된 것이죠.

대부분 위와 같은 방법으로 나무를 치료하나요? 수리‘법’이라곤 하지만, 사실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많아요. 철심을 박는 작업도 크랙이 큰 상황일 때 진행해야 하는데요. 요새는 예방 차원에서 미리 박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죠.

치료를 받은 악기들은 소리가 달라지나요? 악기 특유의 음색을 상실하진 않아요. 하지만 악기 주인만 느낄 수 있는 주관적이고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데이터화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에요. 정말 주관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악기는 본연의 소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죠. 특히 관악기는 침이 스며들고 건조하는 과정에 노출되다 보니 그 어떤 악기보다도 수명이 짧습니다.

시대마다 작품이나 연주법이 달라진 것처럼, 수리법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보다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어떤 연주자들은 수리법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알아와 오히려 저에게 역으로 문의해올 때도 있어요.

이렇게 악기를 치료하다보면 나무와 교감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나무를 어루만질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악기들은 똑같은 재료와 제조 과정을 거친 공산품입니다. 이런 제조 과정을 생각해보면 악기마다 편차란 없어야 하고, 나무 그 자체로 보면 재생력을 상실한 사물에 가까워요. 하지만 악기마다 상황이 다릅니다. 주위 온도가 오르면 악기의 음정이 높아지고 추우면 낮아지고, 습하면 나무관이 팽창하는 것은 나무가 그만큼 외부와 교감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럴 때마다 나무가 살아 숨 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환경 변화에 따라 나무들이 다른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죠. 그래서 무생물이지만 쇠로 된 플루트나 색소폰보다 오보에나 클라리넷이 주는 생명체로서의 존재감이 더 확 다가오죠.

앞으로 나무들과 함께 할 계획이 궁금합니다. 서양의 관악기만 다루다가 최근 국립국악원 국악기개량 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어요. 서양 악기는 제작사와 수리 공방이 많아졌는데 국악기는 의외로 열악합니다. 국악기에도 나무가 많이 사용되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가질 예정입니다.

 

국악기 제작자

궁중국악기 대표 박제준

박제준(1987~)의 부친이 물려준 것은 악기제작법과 기다림의 자세다. 악기제작자인 부친(박성기)은 아들이 태어나던 무렵 여러 나무를 모았고 건조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말린다는 것, 그것은 곧 오랫동안 나무를 비·바람·눈·햇볕에 노출시키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무는 악기의 꿈을 꾸고, 제작자는 악기로 태어날 나무들을 기다리며 지켜본다. 이제 아들은 서른이 넘었다. 부친은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건조해온 나무들을 골라 ‘이제야’ 국악기를 만든다고 한다. 박제준 대표도 30여 년 뒤를 생각하며 전국에서 나무들을 골라 건조 중이다.

 

좋은 국악기가 태어나는 데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지는 몰랐습니다. 말리고 삭히면서 쓸 놈들을 고르는 시간입니다. 그러다보니 기다림은 국악기 제작자의 기술이자 능력입니다.

건조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비와 바람을 맞히고 햇볕도 쬐는 자연건조입니다. 삭히고 삭혀, 버틸 만큼 버틴 나무가 악기가 되는 것이에요. 이 과정 없이 생목으로 악기를 만들면 곰팡이가 피고 썩습니다. 현재 건조장은 전북 장수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입니다.

악기 제작자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국악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대금을 전공했는데, 솔직히 재능이 없었습니다. 군대 전역 후 아버지를 자연스레 도와드리다가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조달하고 옮기는 등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죠.

국악기에 사용하는 나무의 종류와 특성은 무엇인가요? 한 대의 악기에 여러 나무를 사용해요. 악기를 둘러보면 작은 식물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동나무, 밤나무, 장미나무, 벚나무, 소나무, 호두나무 등. 현악기의 앞판은 대부분 오동나무를 쓰고, 뒤판은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섞고, 줄을 받치는 현침은 장미나무입니다.

가야금의 안족

한국의 소리를 내기 위한 악기인만큼 나무들은 한국산이겠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은 나무가 하나의 성질로만 자랄 수 없는 곳입니다. 러시아처럼 연중 춥고 서늘하다면 이러한 기운이 나무의 단일한 성질이 되겠죠. 그리고 한국의 나무들은 꼬불꼬불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넓은 원목 테이블이 대부분 수입목을 쓰는 것처럼, 국악기의 나무도 외국산이 많습니다.

악기에서 큰 역할을 도맡은 나무가 있다면? 앞판의 오동나무는 굉장히 중요해요. 나무를 얇게 켠 판의 형태인데, 그렇다보니 손으로 눌러도 쉽게 깨집니다. 대신 얇을수록 공명감이 좋기에 얇은 두께를 지향하죠.

나무들이 겪는 아픔은 무엇인가요? 이것도 오동나무로 된 앞판에서 많이 일어나요. 앞판에 안족(현을 받치는 다리)이 세워지고 그 위에 현을 겁니다. 그런데 안족에 걸린 현의 팽팽한 장력이 앞판을 계속 누르다보니 둥그런 앞판은 납작해질 정도로 점점 주저앉아요. 육안으로 보았을 때 납작해지면 수명을 다 한 겁니다. 그렇다고 앞판을 두껍게 켜면 울림이 안 좋고. 좋은 소리를 위해 나무가 희생하는 거죠.

현의 장력은 현악기의 필수적인 힘이지만, 결국 이 힘으로 인해 나무의 수명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군요. 나무에겐 ‘양날의 검’인 거죠. 연주하면서 안족을 조금씩 움직이는데, 안족의 밑바닥이 상당히 까칠까칠합니다. 그래서 앞판(오동나무)을 긁고 조금씩 상처를 내다가 결국 구멍이 납니다. 안족은 주로 벚나무인데, 어떻게 보면 벚나무와 오동나무의 싸움인 셈이죠. 그래서 가야금 앞판의 나무는 소모품이라 할 수 있어요.

상처 입은 악기는 어떻게 수리하나요? 인두질을 해요. 쇠를 달궈 지지면 나무가 수축되며 틈새가 메워집니다. 남아 있는 곰팡이나 습기도 제거되고요. 하지만 큰 수술을 받으니 그만큼 수명은 단축되죠.

대금이나 피리의 나무는 어떤가요? 대금의 대나무는 평생 쓸 수 있습니다. 관 속으로 침이 흐르지만, 나무에 스미는 것을 방지하고자 내부에 페인트칠을 합니다. 하지만 피리 주자들이 입으로 무는 ‘서’로 태어나는 대나무는 사정이 달라요. 자연 그대로 사용하기에 침에 의해 삭습니다. 또 현악기는 몇 대를 연주해보고 있기에 고를 수 있지만, 관악기는 침이 나무에 곧장 닿기에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 악기와 ‘운명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나무를 만질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제가 다듬은 나무가 악기가 되어, 누군가는 이 악기로 입시를 치르고, 누군가는 직장을 잡고, 누군가에게는 생업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나무를 만지다보면 막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악기가 누구의 손으로 들어가 어떻게 연주되다가 어떻게 운명을 마무리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주위에 거친 도구들도 많이 보이는데요. 제작 과정에 고충이 있다면? 국악을 본격적으로 전공하고 악기 제작에 뛰어든 제작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이십대부터 이 일을 시작했고요. 그래서 전직 전공자이자 일찍 도맡았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껴요. 하지만 나무를 다룬다는 것은 톱밥 먹으며 몸을 써야하는 육체노동입니다. 그렇다보니 고된 노동으로 분류되는데, 그래도 많은 사람이 관심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사진 하나우드윈드·궁중국악기

 

 

 

 

 

 

 

/ Part 3 / 나무와 악보 /

 

종이로 태어나 액정 속으로

음악사에 종이로 존재해온 악보의 역사가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바뀌고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의 친필 악보

 

최근 무대에는 종이 악보 대신 태블릿PC가 올라간다. 몇몇 연주자들은 넓은 하드보드지에 연주할 악보를 순서대로 붙여 종이를 펄럭이며 입장하기도 하는데, 간편하게 한 손에 태블릿PC를 들고 입장하는 최근의 풍경도 청중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생긴 변화로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의 발 아래, 악보를 원격으로 넘길 수 있는 전자페달이 놓인 것. 피아니스트에게는 제4의 페달이 생긴 셈이다. 연주 도중 악보를 넘겨야 하는 불편함과 낱장의 악보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가져온 변화이다. 음악이 기록되기 시작한 때부터 종이는 작곡가와 음악가에게 중요한 표현 수단이었다. 이어지는 지면에서는 기보와 종이 악보의 역사를 살펴보고 기술의 변화가 가져온 출판업과 음악가들의 작업 방식을 살펴본다.

 

계명창의 등장과 기보의 시작

기록 이전의 음악은 음악가들에게 구전되어 왔다. 단선율로 불린 그레고리안 성가는 성부가 점점 넓어짐에 따라 구전에 한계가 생겼고, 중세 종교 음악가들은 방대한 양의 성가를 정리하기 위해 교회선법을 개발하였다. 교회선법은 곧 서양음악의 음계의 기초가 되었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악보로 표기되기 시작한 건 9세기경이다. 가사 바로 위에 보표 없이 한 줄에 그려져 음의 높고 낮은 정도만 알 수 있었던 부호인 ‘네우마’를 사용하였다. 기록을 위한 기보가 아닌 기억을 위한 기보인 것이다. 이후 귀도 다레초(991~1050)가 계명창을 개발함에 따라 6음 체계(Hexachord System)를 갖게 되었다. 성 요셉 찬미가 구절의 첫음절에서 계이름을 따 ‘ut-re-mi-fa-sol-la’로 음을 명명하게 되었고, 이것이 지금의 8음계의 기초가 되었다. 귀도의 등장 이후 하나의 선만 그어져 있던 1선지 악보는 2선, 4선으로 점차 확장되었고, 11세기에 들어 음의 기준점을 ‘선’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5선 악보가 등장한 건 14세기이다. 기보법이 보편화 되고 악보가 형식을 갖추면서 다성 음악은 더욱 정교해졌다. 하지만 인쇄술 발전 이전에는 음악을 전달하기 위해 종이나 양피지(소·양·새끼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재료)에 손으로 직접 필사해야 했기에 필사자에 의해 원곡이 훼손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1440년경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발명으로 성서를 비롯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1457년 구텐베르크의 동료인 요한 푸스트와 페터 쉐퍼에 의해 목판 활자를 이용한 전례용 ‘시편집’ 악보가 처음 등장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목판 활자는 보관과 제작의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여 오타피아노 페트루치는 이동식 활판을 이용한 악보 인쇄술을 개발했다. 1501년 출판된 악보집 ‘오데카돈’은 100여 곡의 다성음악을 최초로 활자 인쇄한 악보집으로 기록 되었다.

 

출판 기술이 가져온 변화

바로크 시대 이전의 인쇄술이 종교음악의 보편화를 위해 사용되었다면, 1700년대 인쇄는 출판을 위해 사용되었다. 상업의 발전으로 귀족층의 전유물이던 음악을 중산층도 향유하게 되면서 악보 보급에 박차가 가해졌다. 당시의 출판 과정은 작곡가가 작곡한 악보를 전담 필사가가 출판 가능한 악보로 새로 필사하였고, 필사한 악보를 작곡가가 최종 교정을 본 뒤, 출판사로 넘겨졌다.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작곡가들의 작품도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전에는 작곡가가 임의로 작품 번호를 부여하거나 출판되지 않아 번호가 없었던 것에 비해, 17세기 이후 출판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출판 순서에 따라 작품 번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번호 앞에는 작품을 뜻하는 라틴어 Opus의 약자인 ‘Op’가 붙는다. 작품의 흥행을 위해 출판사에서 임의로 출판 날짜를 미루기도 해 작품번호가 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 이전 세대인 바로크와 초기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에는 별도의 작품번호 표기를 한다. 바흐의 작품을 정리했던 독일의 음악학자 볼프강 슈미더는 바흐가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판한 적 없었기에 ‘바흐(Bach) 작품(Werke) 목록(Verzeichnis)’의 앞 글자를 따 ‘BWV’로 바흐의 작품 번호를 표기하였다. 모차르트의 작품 역시 그의 작품을 정리한 오스트리아 음악학자 루드비히 폰 쾨헬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K’ 또는 ‘KV’ 즉 ‘쾨헬(Köchel) 목록(Verzeichnis)’이라고 표기했다. 간혹 작품번호가 없는 작품은 ‘작품 번호 없음’을 뜻하는 WoO(Werk ohne Opuszahl)를 붙여 표기하고, 작곡가 사후에 발견된 작품이거나 유작은 Op.Posth로 표기한다. 하이든의 작품처럼 작곡된 시기와 출판된 시기가 달라 두 가지로 병행해 표기하기도 한다. 출판된 순서에 따라 Op를 붙이되, 작곡된 순서에 따라 ‘Hob’을 붙이는 것. 하이든의 작품을 장르별로 정리한 이탈리아 학자 호보켄(Hoboken)의 이름에서 따왔다.

 

21세기의 다양한 악보 출판의 생태계

무엇보다 출판 과정에서 과도한 편집과 수식으로 작곡가의 의도가 왜곡되기도 한다. 베토벤은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출판업자는 상업성을 고려하여 제목을 붙였다. 일례로 봄과 어울린다 하여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을 ‘봄’이라 칭한 경우다. 그뿐만 아니라 때론 작곡가가 의도하지 않은 프레이징이나 페달 등이 표기되어있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연주자들은 작품을 연주할 때 필사본과 친필 악보를 참고한다. 출판사의 편집을 거치기 전 작곡가의 의도가 온전히 담긴 필사본과 친필 악보에는 작곡가의 낙서나 메모가 남겨져 있는가 하면, 편집과정에서 삭제되거나 누락된 악상들이 표기되어 있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작곡가들의 친필 악보나 작품의 필사본은 박물관, 도서관이나 작곡가의 생가 등에서 소장 및 보관하거나 전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베토벤 하우스➊의 멘토링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베토벤의 자필 악보들을 직접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화제를 모았다. 최근에는 각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을 스캔해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베토벤의 생가이자 그의 유품과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는 베토벤 본 하우스는 홈페이지를 통해 베토벤의 필사본과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➋ 디지털 아카이브는 헨델과 멘델스존 외 프랑스 작곡가들의 친필 악보와 필사본을 공개하고 있으며,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➌에서는 기관에서 소장한 필사본을 검색하여 볼 수 있다. 줄리아드 음악원➍은 필사본 컬렉션을 통해 소장된 악보를 정리하였고, 베토벤 교향곡 9번,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마지막 장 필사본 등을 대중에게 오픈했다. 작곡가가 출판하거나 가장 원형에 가까운 악보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오늘날에도 연주자들에게 단연 선호된다. 작곡가와 연주하는 작품의 시대에 따라 출판사를 선별하기도 한다. 출판사 헨레(Henle)는 피아니스트들에게 사랑받는다. 피아니스트였던 귄터 헨레에 의해 설립되어 독일 뮌헨에 본사를 둔 헨레는 ‘원형의 복원’을 목표로 원전 악보만을 출판하고 있다. 명확한 표기와 넓은 여백으로 가독성 좋은 악보로 손꼽힌다. 베렌라이터(Bärenreiter)는 관현악 작품들의 원전악보를 출판하여 지휘자들이 꾸준히 찾는 출판사이다. 이 외에도 오늘날의 연주법과 기보에 맞춘 출판사 치메르만, 동시대 음악을 출판하는 부지 앤드 호크스 등도 있다. 저작권과 판권이 만료된 작품은 국제악보도서관프로젝트(IMSLP·International Music Score Library Project)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만날 수 있다.

➊ 베토벤 본 하우스

➋ 프랑스 국립 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➌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

 

 

 

 

 

 

 

 

➊ 출판사 헨레는 1999년 이전까지 쇠판에 악보를 찍는 전통방식을 이용해 악보를 만들었다.

➋ 지난해 5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에스메 콰르텟 무대에 악보를 원격으로 넘기는 페달 네 개와 태블릿PC가 보면대에 놓여 있다

 

 

 

오늘날 예술가들의 악보

기술의 발전으로 연주자들의 두 손은 가벼워졌다. 필사본을 온라인으로 만나고 무거운 종이 악보를 더 이상 번거롭게 들고 다니지 않고 수십 장의 악보를 스캔해

태블릿PC에 저장한다. 태블릿PC에서는 악보를 넘길 때 원격 페달로 넘겨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나거나 악보가 떨어질 염려가 없다. 이러한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는 페이지터너가 함께 했다. 페이지터너와는 긴밀한 호흡을 요하기 때문에 가끔 맞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요즘은 태블릿PC의 등장으로 연주자가 두 손 뿐만 아니라 마음의 짐도 덜었다. 그 일화 중 하나로 2019년 9년 만에 내한한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페이지터너의 서투른 판단으로 곤욕을 치렀다. 아르헤리치는 아직 넘길 때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페이지터너가 악보를 넘긴 것. 결국 연주 도중 악보를 다시 펼쳐야 했고, 무대를 보는 청중 또한 가슴을 졸여야 했다. 이와 같은 위험부담을 기술은 덜어준다. 기술의 발전은 작곡가들의 작업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작곡가들은 연필과 오선지가 아닌 컴퓨터 사보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이러한 미디(MIDI) 기술력을 통해 상상에만 머물던 음악을 가상의 악기로 발현시킨다.새로운 음향에 대한 탐구는 새로운 기보법으로 이어진다. 작곡가들은 14세기에 적립된 5선 악보의 개념을 흔들어 악보의 개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음표 대신, 기호와 작곡가만의 음악적 언어로 악보를 표기함으로서 개성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작곡가들 중에는 오선지에서 벗어날 때 개인의 음악적 뉘앙스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임원빈 기자

 

최초의 활자 인쇄된 다성 음악 악보집 ‘오데카돈’

오타피아노 페르투치

 

 

 

 

 

 

/ Part 4 / 나무와 서적 /

 

책에 담긴 음악과 나무

나이테에 새겨진 나무의 언어는 악기제작자와 작가에 의해 책에 담겼다

 

➊ 가문비나무의 노래

➋ 천상의 바이올린

➌ 세상의 나무

 

 

 

 

 

 

➍ 스타인웨이 만들기

➎ 첼로 노래하는 나무

 

 

 

 

 

 

숲은 나무를 길러내고 나무는 숲의 풍경과 시간을 눈매(나이테)에 새긴다. 많은 계절을 난 나무일수록 눈매는 더 촘촘하다. 촘촘한 눈매의 나무는 변형이 덜하고 안정적이어서 악기를 위한 나무로 쓰인다. 이러한 나무의 생애는 오랜 시간 악기를 제작해온 악기 제작자들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책 ‘가문비나무의 노래’(마틴 슐레스케 저/유영미 역)➊ ‘천상의 바이올린’(진찬형 저/이정환 역)➋은 두 명의 악기 제작자가 만난 나무를 통해 담아낸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독일의 바이올린 제작자 마틴 슐레스케(1965~)는 고지대에서 비바람을 이기고 단단하게 자란 나무로 악기를 만든다. 그는 “울림은 자기 삶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때 생긴다”라고 이야기하며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한편 바이올린 제작자 진창형(1929~2012)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바이올린을 배우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는 별칭을 얻으며 세계에 다섯 명밖에 없는 ‘무감사 마스터메이커’의 명예를 얻었다. 그는 이미 경지에 이른 후에도 “아직 발전 중”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나무의 나이테 밀도는 악기로 만드는 좋은 나무를 분별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나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발레리 트루에 저/조은영 역)란 책에는 나이테에 생장 연도를 부여하고 나이테에 저장된 다양한 환경 정보를 읽는 연륜연대학자 발레리 트루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다 빈치’의 진품 여부를 나이테로 감별한 이야기부터 나이테에 기록된 자연재해와 과거의 시간들을 글로 기록했다.

일상에서 만나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의 나무’(라인하르트 오스테로트 저/이수영 역)➌에서 만날 수 있다. 저자는 나무 한 그루가 어떻게 우리 일상에 녹아드는지 이야기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의 성장과 숲 생태계의 섭리를 포함해 가구와 악기가 되는 나무들의 이야기를 친절한 말투로 전한다.

스타인웨이는 많은 피아니스트에게 사랑받는 피아노이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사람과 사람들이 있듯, 스타인웨이와 피아노들이 있다”라고 이야기하며 스타인웨이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 악기도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에서 역사가 시작된다. ‘뉴욕 타임스’의 기자 제임스 배런은 책 ‘스타인웨이 만들기’(제임스 배런 저/이석호 역)➍에 11개월 동안 관찰한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제작 과정을 담았다. 세대를 잇는 제작자들을 만나고 이들의 오랜 전통 제작 방식을 면밀히 살핀다. 한편, 콘서트용 피아노를 낳은 수십 년간의 디자인 혁신과 피아노 산업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과 음악계의 변화를 추적한다. 1853년 독일에서 미국 뉴욕에 이민 온 피아노 제작자 스타인웨이는 맨해튼의 골방에서 스타인웨이를 설립했다. ‘첼로 노래하는 나무’(이세 히데코 저/김소연 역)➎에도 사람과 나무의 생애가 들어있다. 책에는 한 소년이 나온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숲에서 나무를 키우고, 아버지는 그 나무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만들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만든 첼로의 소리를 들을 때면, 첼로가 나무일 때부터 숲에서 보고 들은 기억과 시간을 생각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만든 첼로로 연주하는 파블로의 연주를 듣고 소년은 온 마음을 뺏겼다. 아버지는 소년을 위해 직접 만든 첼로를 생일 선물로 주고 소리 내는 법을 가르쳐 준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첼로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고, 아버지의 첼로는 여전히 사람들의 품에서 나무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의 시선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소년으로, 그리고 숲에서 나무, 나무에서 악기, 악기가 연주하는 음악으로 이어진다. “나무로 가득해진 스케치북에서 어느 날 음악이 들려 왔습니다”. 저자는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 그 노래를 온 마음으로 받아 안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뭉클하도록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임원빈 기자

 

/ Part 5 / 나무와 공간 /

 

나무 사이로 자라난 공연장

새의 지저귐과 계절의 소리가 음악과 어우러지는 숲 속 음악공간

 

숲과 공연장은 서로 닮았다. 공간에 들어서면 세월을 품은 갈색 빛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특별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점도 비슷하다.

프랑스 예술가 피에르 위그(1962~)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천 그루의 나무를 들여놓고 그 사이를 관객이 거닐게 한 설치작품 ‘선들의 나무(A Forest of Lines)’를 만든 적 있다. 그는 숲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이면서도, “신화와 동화의 공간”이라고 했다. 공연장 역시 연주되는 음악에 따라 다른 세계로 변화를 거듭한다.

그 시너지로 숲속 공연장의 신비함은 배가 된다. 같은 음악도 이곳에선 다른 감각과 의미를 자아낸다. 꽤 길고 복잡한 여정이지만 사람들은 그 특별함을 찾아 기꺼이 발걸음을 옮긴다. 세계의 숲속 공연장을 살펴보며 다음 여행의 목적지를 꿈꿔보는 건 어떨까?

박찬미(독일 통신원)

 

 

에스토니아 | 아르보 패르트 센터

수도 탈린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소나무가 빼곡한 라울라스마 반도가 있다. 주차장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산책로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면, 아르보 패르트 센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길을 걸으며 느낀 숭고함은 이곳에서 더욱 증폭된다. 중세 종교음악을 바탕으로 해 명상조가 짙은 패르트의 음악이 늘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이러한 패르트의 음악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150석 규모 홀은 유리 통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패르트 부부가 소장하던 책들로 꾸며진 도서관에는 타닥타닥 평화로운 소리를 더하는 벽난로가 놓였다.

 

 

라트비아 | 내추럴 콘서트홀

라트비아 곳곳의 숲에는 매해 새로운 무대가 자라난다. 가우야 국립공원에는 초원의 삐죽삐죽한 형상을 닮은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무대가, 드비에트와 부르트니키 범람원 목초지에는 땅 아래 생명체들이 일군 서식지의 형태에서 모티브를 얻은 4층 무대가 설치됐다. 예술을 따라 이곳에 초대된 방문객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넘어, 각 서식지의 특별한 생물 종을 발견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배운다. 작곡가들에겐 장소 특정적 작품을 쓰고 발표할 기회가, 과학자들에게는 환경 관련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나눌 자리가 주어진다. 다양한 생명체의 서식지가 되는 한 그루 나무처럼, 내추럴 콘서트홀은 자연과 과학, 예술의 공생지대가 되고 있다.

 

독일 | 발트뷔네

베를린 필하모닉이 매해 6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다. ‘숲의 무대’라는 뜻을 품은 2만 석 규모의 발트뷔네는 베를린 서쪽 올림피아 공원에 위치한다. 1936년, 공원이 면해 있는 무렐렌 산의 골짜기 경사면에 계단식 객석이 놓이면서 고대 원형 극장의 모습을 얻었다. 조개껍질 형태를 한 무대와 둥지를 닮은 텐트 지붕은 화려하진 않지만 좋은 음향을 즐기기에 더없이 충분하다. 그 가치를 인정받기 전까지는 베를린 영화제 등이 개최되는 야외 영화관, 권투 경기장으로도 사용됐다.

 

 

스웨덴 | 달할라

북유럽 신화에서 전사한 영웅들의 영혼은 전투여신 발키리에 의해 낙원 발할라로 인도됐다.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 속 신들의 궁전 모티브로 삼은 그곳이다. 그 풍경은 어땠을까? 19세기 독일 화가 마르크스 브뤼크너는 발할라를 깊은 숲속, 절벽 사이에 자리한 것으로 묘사했다. ‘발할라’의 이름을 딴 스웨덴의 야외극장 달할라는 그림 속 풍경을 자아낸다. 3억 8천만 년 전 이곳에 떨어진 운석은 지름 400m의 분화구를 남겼는데,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이 지은 공연장이 됐다. 수직에 가까운 석회암 절벽은 최적의 잔향을 유지하는 일등공신.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달할라는 여름마다 달할라 오페라 페스티벌과 뮤지컬·대중음악·재즈 등을 아우르는 20~25회의 공연을 연다.

 

헝가리 | 헝가리안 하우스 오브 뮤직

키 큰 나무 아래, 공기는 서늘하지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이따금 온기를 전한다. 그 감각은 헝가리안 하우스 오브 뮤직 지붕 아래에서도 느낄 수 있다. 건물 외벽은 반투명 유리로 둘러 있고, 천정에는 햇빛을 투과하는 100여 개 구멍이 유기적인 모양새로 나 있다. 실내에서도 나무 아래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지난 1월 부다페스트 시민 공원 한가운데 개관한 9천 제곱미터 규모의 헝가리안 하우스 오브 뮤직은 실내외 공연장과 헝가리와 유럽의 음악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 도서관 등으로 꾸며졌다. 그중 60석 규모의 반구형 사운드 돔은 360도 서라운드 음향으로 완전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프랑스 |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파리의 허파’라 불리는 1800헥타르 규모 블로뉴 숲 한가운데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반영하기 위해, 시간과 빛에 따라 진화하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건축가 프랑크 게리는 문화예술로 세계라는 바다를 항해한다는 의미에서 선박의 형태를 떠올렸고, 이를 12개의 거대한 유리 돛으로 감쌌다. 유리 돛은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풍경을 반사하는 동시에, 실내로 품는다. 무대는 양쪽 창을 통해 노을 지는 블로뉴 숲으로 확장된다. 공연장과 전시관에 채워지는 작품들은 더욱 넓은 세계의 변화 역시 부지런히 반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 안겔리카 코프먼 홀

잘츠부르크를 낀 북부 석회암 알프스산맥은 오스트리아 동쪽 끝 브레겐츠까지 이어진다. 브레겐츠 숲의 풍경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떠오르는 이유다. 브레겐츠 숲의 음악은 안겔리카 코프먼 홀이 책임진다. 나무를 주 소재로 한 홀은 “악기 속에 앉아 있는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는다. 이곳의 명물은 6월 중순에서 8월 말까지 열리는 ‘슈베르티아데’. 세계 곳곳에서 ‘슈베르티아데’ 열리고 있지만, 이곳 행사가 가장 국제적 명성을 지녔다. 축제는 50~80여 회의 가곡 리사이틀, 피아노 독주, 실내악 등을 열며 매해 3~4만의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 그라페넥 볼켄투름

‘그라페넥 미드썸머 나이트 갈라’는 이곳 풍광을 가늠하기 좋은 영상물이다(C Major). 그라페넥 성과 정원, 인근 과수원과 숲을 탐스럽게 담아냈다. 빈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그라페넥은 2천 그루가 넘는 각종 침엽수와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가운데 첨단시설을 갖춘 야외공연장 ‘볼켄투름(구름탑)’이 있다. 2,700여 석 규모 객석을 갖춘 이곳에선 여름마다 그라페넥 페스티벌이 열린다. 공연은 일몰 시각에 맞춰 시작되는데, 그전까지 객석으로 떨어지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무대 옆 26m 상공에 대형 풍선을 띄우기도 한다.

 

 

이탈리아 | 벨베데레 디 빌라 루폴로

라벨로 지역 아말피 해안 절벽은 정원으로 수놓아져 있다. 빌라 루폴로도 그중 하나. 1880년, 이곳을 방문한 바그너는 “클링조르(‘파르지팔’에 등장하는 마법사)의 정원을 찾았다!”라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큰 영감을 얻은 그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내며 ‘파르지팔’의 2막을 완성했다. 바그너의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1936년 라벨로 페스티벌이 첫발을 뗐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벨베데레 디 빌라 루폴로에서 열린다. 정원과 푸른 바다, 숲이 무성한 곶이 빚어내는 풍광은 음악의 일부가 된다.

 

미국 | 탱글우드

매사추세츠주 서부, 버크셔 산악지대에 자리 잡았다. 2백만 제곱미터 규모의 탱글우드 캠퍼스는 30여 종 1,100여 그루의 나무로 메워져 있다. 이곳 풍광은 인근 숲 너머로 보이는 머키낵 호수와 모뉴먼트 산의 광활함이 완성한다. 1937년 이래 보스턴 심포니는 탱글우드 음악제에 참여하며 여름을 난다. 쿠세비츠키 뮤직 쉐드와 오자와 세이지 홀 두 공연장은 실내에서 야외로 객석이 이어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일본 | 삿포로 예술 공원 야외공연장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이곳에서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마지막 지휘를 했다. 1990년이었다. 그는 일본 삿포로에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을 창설했고, 그해 축제 폐막 공연에 섰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축제는 30여 년 동안 번스타인의 뜻을 이어 꾸준히 개최됐다. 특히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된 삿포로 예술 공원 야외공연장에서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피크닉 콘서트’가 열린다. 푸른 숲과 음악 외에도 공원 곳곳의 야외 조각품과 미술관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 | 서울 어린이대공원 능동 숲속의무대

‘한국의 발트뷔네’를 꿈꾸며 2009년 어린이날에 개관했다. 어린이대공원 중앙에 8천 석 규모로 지어진 숲속의무대는 매해 5월 다채로운 공연으로 채워진다. 유니버설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등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고, 어린이 오페라와 뮤지컬 등도 가족단위 관객과 만났다. 발트뷔네에 베를린 필이 있다면, 능동 숲속의무대에는 서울시향이 있다. 개관기념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과 올라 동요 메들리와 차이콥스키 교향곡을 선보인 이래, 5월마다 이곳을 찾고 있다.

 

한국 | 대전 보문산 숲속공연장

보문산 숲속공연장은 대전의 자랑거리다. 보문산 녹음은 대전팔경의 하나로 꼽히고, 2013년부터 개최되어온 ‘숲속의 열린음악회’는 2회 연속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역대표공연예술제로 선정됐다. 무더위에 지친 대전 시민들은 이곳에서 자연과 음악이 주는 쉼을 만끽한다. 2017년엔 1만 5천여 명이 함께했다. 축제의 중심엔 대전시립예술단이 있다. 덕분에 클래식 음악과 국악, 대중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지역축제로 거듭났다.

 

 

미국 | 제럴드 R 포드 원형극장

콜로라도주 베일 지역, 장엄한 로키산맥 골짜기에 숨어 있다. 브라보! 베일 밸리 음악제와 베일 무용제가 1980년대 후반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특히 6~9월 사이 열리는 음악제의 명성이 높다. 뉴욕 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세인트 마틴 필드 아카데미 등이 참여하고 매해 6만 명의 관중을 맞는다. 1,300석 규모 객석도 마련돼 있지만 방문객들은 객석보다 공연장 인근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기를 추천한다. 베일 밸리 재단의 회장은 2000년 즈음까지만 해도 “누가 공연 보러 여기까지 오나?”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무려 6만 명이 온다!

 

 

 

 

/ Part 6 / 나무와 공연 /

 

나무의 감수성으로

김태형과 김세준에게 영감을 준 나무와의 교감

김태형 ©금호문화재단

김세준 ©Kyutai Shim

 

 

 

공연 실황

 

 

 

 

피아니스트 김태형(1985~)에게 숲은 공연 기획의 영감이 되었다. 그는 지난해 8월 ‘세상의 작은 소리’를 주제로 공연(금호아트홀 연세)을 선보였다. 프랑스에서 직접 영상으로 담아온 일렁이는 나무와 해 질 녘의 바닷가 풍경을 무대의 세 벽면을 비추었고, 공연 전 직접 녹음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틀어 마치 자연 속에 들어온 것처럼 연출했다. 그는 그해 여름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열리는 라 로크 당테롱 피아노 페스티벌에 다녀오며 그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고 한다. “백 년이 넘은 가로수를 따라 들어가면 공연장이 나와요. 숲속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음악을 듣는답니다.”

그는 평소 새소리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지난 공연에서 라모의 ‘새들의 지저귐’ ‘뮤즈의 대화’ 등 새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는 “새가 지저귀는 숲속에서 들려드리는 연주가 하고 싶었어요. 자연에서 누리는 진정한 휴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었습니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한편, 비올리스트 김세준(1988~)에게 나무는 쉼이다. 현재 독일 하노버 NDR 라디오 필하모닉의 수석 단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오는 4월 피아니스트 박종해와 함께 ‘나무의 계절 변화’를 주제로 공연을 펼친다. 그는 “독일에서 살다 보니 도심 공원이나 숲이 조성된 공간을 자주 만난다”며 자연스럽게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들에 관심이 갔다고 한다.

이번 무대에서 바흐의 ‘샤콘’과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브람스의 비올라 소나타 1번을 선보인다. 각각의 작품은 명확한 대비를 이루며 사계절의 풍경을 대변한다.

“바흐의 ‘샤콘’은 나무의 깊은 뿌리와 같은 작품이고, 슈만의 작품은 모진 겨울바람을 이겨내려는 나무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프로코피예프의 ‘어린 소녀 줄리엣’에서는 싱그럽게 돋아나는 새싹이, 브람스의 소나타는 가을의 농익은 색채가 떠오릅니다.”

그가 자연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노버 NDR 라디오 필은 ‘변화의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의 환경보호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해 마다가스카르의 국립공원에 나무를 심고 환경보호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과 방안을 모색하는 단체인데요. 이미 독일의 많은 오케스트라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는 ‘숲’을 이름으로 한 발트앙상블의 단원이기도 하다. 악단을 이끄는 비올리스트 최경환은 발트앙상블을 “다양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숲을 만들 듯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 젊은 연주자들의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공연에서는 프로그램 북 대신, QR코드를 통해 간편하게 곡에 대한 설명과 연주자들의 프로필 등을 확인할 수 있게 했습니다. 환경을 위한 작은 시도였죠. 앞으로도 환경을 위해 실천해 나갈 예정입니다.”

끝으로 그에게, 본인은 어떤 나무와 같은 음악가인가 물었다. “비올라는 중음을 담당하고 음색을 조화롭게 하기에 계절이 흘러도 변함없는 소나무처럼 푸른빛을 잃지 않는 음악가가 되고 싶습니다.” 글 임원빈 기자

Performance information

김세준·박종해 듀오 리사이틀

4월 21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연세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BWV1004 중 ‘샤콘’,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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