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오페라’의 기둥 국립오페라단의 60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2년 4월 18일 9:00 오전

ANNIVERSARY

PART1 HISTORY
한국 오페라 발전을 이끌다
글 이용숙

 

PART2 PREVIEW
새 시대를 준비하다
글 장혜선

 

PART3 REVIEW
‘왕자, 호동’
글 손수연

 

PART4 INTERVIEW
베이스 전승현
글 임원빈

 

PART5 OPINION
발전을 위한 제언
글 이용숙·박명기·탁계석

 

‘K-오페라’의 기둥
국립오페라단의 60년

 

 

 

 

 

 

 

 

 

 

 

지난 3월, 국립오페라단은 60년 만에 ‘왕자, 호동’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오페라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국립오페라단은 1962년 창단 기념작으로 당시 서른의 작곡가였던 장일남(1932~2006)의 ‘왕자, 호동’을 선택했다.
오페라 토착화를 위해 한국적 소재를 도입하고 젊은 국내 예술가들의 성장을 꾀하고자 함이었다.
창단 60주년을 맞아 국립오페라단은 당시의 도전 정신을 다시 한번 선보였다.
3월 12일에는 대한민국오페라단연합회와 함께 ‘2022 국립오페라단 창단 60주년 기념 대한민국 오페라 어워즈’를 개최했다. 한국의 오페라사(史)를 되돌아보고 오페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국립오페라단이 처음으로 마련한
축제의 장이다. 이날은 국내 오페라계의 빛나는 주역들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한국 오페라 발전이 점점 약해져 가는 이즈음, 국립오페라단의 지난 60년 역사를 촘촘히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어왔는지 되새기며,
국립오페라단이 앞으로 한국 오페라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기획·총괄 장혜선 기자 사진 국립오페라단

 

PART1 HISTORY

한국 오페라 발전을 이끌다

이용숙(음악평론가) 정리 장혜선 기자

① 

② 

 

 

 

 

 

 

 

오페라라는 서구의 낯선 예술형식은 해방 이후 어떻게 한국에 이식될 수 있었을까?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일제 치하의 활동 제약에서 벗어난 음악인들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이었던 테너 이인선은 개업의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오페라 운동을 시작했다. 조선오페라협회를 조직하고 국제오페라사(社)를 창단한 이인선은 1948년 1월 16일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춘희’라는 제목으로 명동 시공관 무대에 올렸다.
1950년 4월에 국립극장은 일제 때 부민관, 즉 1991년부터 지금의 서울시의회가 들어선 장소에 개관했고, 이곳에서 5월 20일부터 10일간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인 현제명 작곡 ‘춘향전’이 무대에 올랐다. 이 오페라 ‘춘향전’은 해외에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려는 뜻을 지니고 창작했다고 하니, 초기 오페라 제작자들은 이미 서구 문화의 일방적인 수용이 아닌 상호교류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오페라단이 아직 출범하기 전에도 국립극장은 지정공연 또는 직영공연의 형태로 민간오페라단을 후원하며 국립오페라단의 태동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부분 성악가들의 개인적인 열정이 모여 창단된 민간오페라단들이 오페라 제작비를 감당하고 수지균형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민간오페라단이 사적으로 조달한 경비가 아닌 국가 예산으로 오페라를 제작하게 되면서 당연히 공연 수준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19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과 함께 중요한 성악 인력이 국립오페라단으로 모였고, 이때부터 음악인들은 새 희망과 기대 속에 국립오페라단에 동참했다.
국립오페라단의 초대 단장으로 이인범(제1대 단장), 부단장으로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자경이 선출되었다. 김학근, 황병덕, 변성엽, 서영모, 안형일, 황영금, 이인영, 김복희 등 당시 여러 오페라 공연에 출연하던 성악가 24명이 단원으로 위촉되었다.

① ‘춘희’
이인선은 1948년 1월 16일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춘희’라는 제목으로 명동 시공관 무대에 올렸다.
② ‘왕자, 호동’
1962년 4월, 국립오페라단은 창단을 기념해 장일남의 창작오페라 ‘왕자, 호동’을 공연했다.

 

1962~
명동 국립극장 시대, 혹평의 연속

1962년 4월, 국립오페라단은 창단을 기념해 장일남의 창작오페라 ‘왕자, 호동’을 공연했다. 당시 공연 평들은 이 공연이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페라의 구성에 밀도 있는 긴장감이 결여되었다는 평도 있었다.
1962년 11월에 선보인 국립오페라단의 제2회 정기공연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로, 한국 초연작이었다. 지휘 임원식, 오화섭 연출로 시작했으나 오화섭이 이 작품의 연출을 그만두면서 성악가 이인영이 연출까지 하게 되었다. 김학근, 황병덕, 오현명, 양천종, 호진옥, 황영금, 이인범, 이우근, 김복희, 김영환, 김옥자, 민경자, 이인영, 서영모 등 당대 한국 최고의 성악가들이 총출동한 이 공연은 KBS에서 보관하고 있는 당시의 음원을 들어보더라도 성악적인 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뒀다.
제2대 국립오페라단장직은 테너 홍진표(제2대 단장)가 맡게 되었다. 1963년 5월에 국립오페라단은 임원식 지휘, 홍진표 연출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한국 초연했다. 1964년 6월에 국립오페라단은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한국 초연을 임원식 지휘, 홍진표 연출로 공연했다. 공연은 대성황을 기록했지만, 전문 연출가가 아닌 홍진표 단장의 연출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많았다.
1965년 5월에 임원식 지휘, 이진순 연출로 공연한 푸치니의 ‘라 보엠’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 공연에서도 호평을 받은 부분은 음악적 성과였고, 무대와 연출에 대해서는 그리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지 않았다. 11월에는 베르디의 ‘아이다’가 정재동 지휘, 이해랑 연출로 한국 초연을 기록했다. 그러나 빈약한 무대장치 때문에 ‘가난한 한국 축소판’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③ ‘라 보엠’
1965년 5월에 임원식 지휘, 이진순 연출로 공연한 푸치니의 ‘라 보엠’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973~
장충동 국립극장 시대,
연출의 전문성 부족

남산 국립극장의 1973년 개관은 대한민국 오페라 공연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현대적이고 규모가 큰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면서 국립오페라단 역시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극장 규모와 시설, 음향 등 여러 요소가 크게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국립교향악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이 국립극장 산하에 창단되어 오페라 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전속단원제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국립극장에 국립오페라단이 소속되어 있던 이 시기는 서구 선진국의 오페라극장들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고루 갖춘 극장이 존재했던 셈이다.
이해 11월에 국립오페라단은 남산 국립극장 개관을 기념해 베르디의 ‘아이다’를 공연했다. 홍연택 지휘, 오현명 연출로 규모나 인원 면에서 단연 대작이었던 이 공연은 호평을 받았다. 1974년 5월에 국립오페라단은 바그너 오페라의 한국 초연을 성사시켰다. 바그너의 초기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공연으로, 지휘는 홍연택, 연출은 오현명이 맡았다. 바그너 음악극을 공연하려면 바그너 연주 경험이 있는 전문적인 오케스트라와 바그너 전문가수들, 그리고 특별한 무대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래서 오페라 공연의 가장 높은 도전으로 꼽힌다. 지난 25년간 오페라 역사상 중요한 대표작들을 하나씩 소화해낸 한국오페라가 마침내 현대오페라로 넘어가기 위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1975년 11월에는 광복 30주년 기념공연으로 홍연택의 창작오페라 ‘논개’를 초연했다. 모윤숙의 원작을 토대로 김의경이 대본을 쓴 이 작품은 “창작오페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1977년 정기공연에서는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가 초연되었다. 이 공연의 리뷰를 통해 평론가 한상우는 오페라의 대중성과 상업적 본질을 숙고하며, 기획과 연출의 여전한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다.Ⓐ
1979년에 국립오페라단은 데니스 버크 지휘, 오현명 연출로 ‘토스카’를 공연했다. 이 공연에는 “오페라의 연출부재”라는 혹평이 등장했다. 서양 오페라 첫 공연 후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오페라 전문 연출가가 부재했음을 알 수 있다. 12월에 국립오페라단은 한스 하르트레프 연출로 ‘탄호이저’를 무대에 올렸고, 공연 준비 중에 10·26 사건이 일어나 사회가 불안정한 상황이었지만 이 공연은 “바그너 산맥은 정복될 수 있다”는 희망에 찬 평가를 얻었다.
1970년대는 오페라 발전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다. 1973년에 장충동에 넓은 무대와 객석을 갖춘 남산 국립극장이 들어선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같은 해에 국립합창단이 창단되어 국립극장 산하 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 역시 오페라 공연 수준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페라란 근본적으로 즐겁고 유쾌해야 한다. 내용이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간에 상업적 의미가 강하게 작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중이 오든 말든 연주하는 현대 전위음악과는 다른 것이며 그러기에 아주 작은 일로부터 구석구석까지 산뜻하고 짜임새 있는 기획과 내음이 풍겨야 할 것이다. (한상우)
– 공간(1977.6)

연기에 있어서는 좀 더 훈련이 있어야 하겠다. 오페라에서 연기를 빼면 극으로서의 성립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승학)
– 극장예술(1981.12)

 

1980~
소극장 운동, 오페라 관객층 확대

④ ‘처용’ 1987년 11월에 공연한 ‘처용’은 한국 창작오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바그너적 음악어법으로 크게 호평 받았다.

국립극장이 개관 30주년을 맞이한 1980년은 군부 쿠데타에 의한 전두환 정부의 출범, 5·18 민주화운동, 전국대학 휴교령 등으로 한국사회가 유례없는 분노와 불안과 혼란을 겪었던 시기였다. 오페라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오페라가 지난 30여 년의 역사를 거치며 오페라 역사의 주요 걸작 초연을 이뤄왔기 때문에 ‘초연작’은 점점 감소하게 된 시기다.
1981년 11월에는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이남수 지휘, 이인영 연출로 공연했다. 이 공연에서는 이인영의 연출, 합창, 오케스트라 연주가 모두 좋은 평을 받았지만, 연기에는 비평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극적인 면에서는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던 공연으로 보인다.Ⓑ 오페라 공연을 성악 위주로 감상하던 시대는 끝나고, 극과 연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982년에는 소극장 오페라 공연이 시작되면서 1980년대 오페라의 중요한 발전을 이끌어내기 시작한다. 국립오페라단의 정기공연은 대규모 공연이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국립오페라단은 실험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소극장 무대에 올렸다. 홍연택 지휘, 문호근 연출로 이루어진 메노티의 ‘무당’과 ‘전화’ 공연은 공개 오디션을 통한 주역 선발, 춘천, 대전, 광주, 전주의 순회공연이라는 점이 큰 의의였다.
1983년에 국립오페라단은 6월의 ‘라 보엠’ 공연으로 18년간의 오현명(제3대 단장) 시대를 마감하고 안형일(제4대 단장)이 운영을 맡는다. 안형일 단장 취임 후 첫 번째 공연은 9월에 소극장에서 열린 36회 정기공연으로, 박재열의 창작오페라 ‘초분’이었다. 박성은이 지휘하고 원작자인 오태석이 연출을 맡았다. 기존의 연극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었다는 새로운 시도가 눈길을 끌었다. 이해 10월에는 신축 국립극장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베르디의 ‘리골레토’ 원어 공연이 열렸다. 발터 길레젠 지휘, 조성진 연출의 이 공연은 호평을 받았다.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우리 오페라를 위해 정책적 지원과 전문 오페라극장의 필요를 역설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1986년은 한불수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국립오페라단은 4월에 45회 정기공연으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대에 올렸다. 이때 초청된 프랑스 지휘자 피에르 드보르와 연출가 앙드레 바티스는 섬세한 작업으로 수준 높은 프로덕션을 만들어냈다. 국립합창단의 뛰어난 기량도 호평을 받았다. 10월에는 김영태 대본, 백병동 작곡의 ‘이화부부’가 임헌정 지휘, 문호근 연출로 무대에 올랐다. 동상이몽 부부의 일상을 그린 이 코믹한 한국 오페라는 호평을 받으면서 현대오페라의 연극적 매력을 일깨웠다.Ⓓ
1987년에 국립오페라단은 중견단원 다수가 탈락하는 사태를 겪는다. 당시 국립오페라단 단원은 상근제가 아니라 위촉제였다. 11월에는 이영조의 창작오페라 ‘처용’이 최승한 지휘, 백의현 연출로 무대에 올랐다. 이전 한국 창작오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바그너적 음악어법으로 크게 호평받은 작품이다. 이 공연은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한국 창작오페라의 가능성 논의를 활성화했다.Ⓔ

서울올림픽의 해였던 1988년에 국립오페라단은 벨리니의 ‘노르마’, 장일남의 창작오페라 ‘불타는 탑’, 베르디의 ‘돈 카를로’를 공연했다. 이때 올림픽 축하행사로 ‘투란도트’ 등의 대형 해외 오페라 프로덕션이 소개되면서 국내 오페라계도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이즈음 자막 전광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관객이 내용을 모두 이해하며 오페라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1989년에는 테너 박성원(제5대 단장)이 국립오페라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박성원 단장은 정단원 외에 준단원제를 도입해 젊은 성악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려 했다. 10월에 국립오페라단은 박은성 지휘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그리고 최승한 지휘, 표재순 연출로 이영조의 ‘처용’을 격일제 공연해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선진국 오페라극장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레퍼토리 시스템을 부분적으로나마 도입해 보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이제는 우리의 문화정책도 극음악에 대한 태도를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고 끝에 얻어진 성악가들의 역량과 오케스트라의 능력 그리고 무대를 위한 그 모든 종합의 능력이 그 힘을 잃어 무용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첫 과제는 적당한 크기의 그러나 완전한 장비를 갖춘 오페라 좌를 갖는 일이다. (서우석)
– 한국일보(1989.10.28)

우리의 현실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보다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진다.(김춘미)
– 한국일보(1986.10.24.)

‘처용’은 뮤직드라마의 형태에 가까운 오페라로서 음악뿐 아니라 극의 진행을 함께 따라가며 즐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사전달이 더욱 중요한 사항이었으나 고음에 많은 말이 처리되어 대본 구성상 보다 프로페셔널한 작업이 아쉬웠다. 그러나 그랜드오페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오페라 ‘처용’은 우리 창작계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운 것만은 확실하다.
– 월간객석(1987.12)

 

1990~
레퍼토리의 확장과 심화된 작품 해석

1990년대에 국립오페라단은 서구 오페라극장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레퍼토리 시스템의 본격적인 도입을 시도했다. 그 첫 예로 같은 해 4월에 데니스 버크 지휘, 피에르 상바르톨로메 연출의 ‘라 보엠’ ‘사랑의 묘약’이 3일 간격으로 공연되었다. 음악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무대와 연기를 보는 시각적 즐거움까지 선사했다.
1991년에는 이강백의 희곡을 토대로 한 박영근의 창작오페라 ‘보석과 여인’이 안재성 지휘, 장수동 연출로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오페라 음악과 대본의 상관관계에 관련해 다양한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이 해에는 단원 재임용 탈락의 파문으로 시작된 문제가 운영 전반에 관한 문제로 확대되면서, 국립오페라단 시스템 개혁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그래서 국립오페라단은 ‘부작용 많았던 단원 정원제를 철폐하고 문호를 개방한다’는 원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때 기자간담회에서 발표한 국립오페라단의 ‘6개 항 원칙’ 중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둘째, 91, 92년 공연계획을 확정, 공연별 지휘자 연출자 출연자를 사전 확보한다’라는 항목이다. 선진국 오페라극장에 비해 언제나 너무 늦게 지휘자, 연출가, 출연진을 선정하는 국립오페라단의 고질적인 병폐가 이때부터 이미 문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항목에는 ‘공개 오디션을 통한 출연자 선정’도 포함되어 있다. 월급단원제를 고려해 단원을 20명으로 제한했던 원칙은 ‘오페라단원 전원 무급 비상근’으로 바뀌면서 사라졌고, 단원 수는 이에 따라 50명 선으로 늘릴 방침이었다.
1992년 4월에는 국립오페라단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인 도니체티의 ‘라 파보리타’가 이루어졌다. 11월에는 홍연택 지휘, 한스 노이게바우어 연출로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했다. 이 공연은 극도로 절제된 연기와 단순한 무대 및 조명을 통해 성공한 연출이라는 평을 받았다.Ⓖ
1993년에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가 개관하면서 드디어 전문 오페라 공연장이 탄생했다. 개관기념 공연은 홍연택의 ‘시집가는 날’이었다. 9월에 국립오페라단은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최승한 지휘, 볼프람 메링 연출로 한국 초연했다. 1991년 말에 소비에트 연합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일어난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러시아 오페라의 공연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11월에 국립오페라단은 금노상 지휘, 장수동 연출로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를 무대에 올렸다. 이 무렵 국립오페라단은 단원제를 폐지했다. 대신 오페라 한 편을 제작할 때마다 단장이 스태프와 출연진을 결정해 자문위원회의 의견수렴을 거치는 것으로 제작방식을 바꿨다.
1995년에는 박성원 단장 후임으로 박수길(제6대 단장)이 취임했다. 연출가 장수동과 함께 소극장 운동의 활성화에 진력해온 박수길 단장은 ‘오페라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신인 성악가들을 선발해 메노티의 ‘무당’, 모차르트의 ‘바스티앙 군과 바스티엔 양’, 파사티에리의 ‘델루조 아저씨’를 공연했다. 공연 전에는 심포지엄을 열어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국립오페라단은 이해 10월 카를로 팔레스키 지휘, 구니아키 이다 연출로 벨리니의 ‘청교도’를 초연했다.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박정원과 테너 신동호는 완벽에 가까운 가창으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1997년에 예기치 않게 불어닥친 IMF 사태는 국내 오페라 계에도 엄청난 타격이 되었다. 이 해는 유럽 오페라 탄생 400주년 기념의 해여서 국내에서도 다수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결국 상당수 공연이 취소되었다. 4월에 장윤성 지휘, 이소영 연출로 공연된 로시니의 희극 오페라 ‘결혼청구서’는 막 활동을 시작한 젊은 연출가 이소영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였던 공연이다. 8월에는 브리튼의 오페라를 번안한 ‘섬진강 나루’, 11월에는 최병철의 창작오페라 ‘아라리 공주’를 공연하며 소극장 오페라와 창작오페라에 대한 지원 의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99년 2월에 시작한 제1회 소극장 오페라 축제에는 국립오페라단과 민간 소극장오페라단 여섯 단체가 한 달간 합동으로 참여했다. 국립오페라단 참가작은 박영근의 ‘보석과 여인’ 및 도니체티의 ‘초인종’이었다. 4월에는 프란시스 풀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티레지아스의 유방’을 공연했고, 11월에는 차범석 원작 ‘산불’이 정회갑 작곡의 창작오페라로 선보였다. 대작들도 있었지만 짧고 가벼운 작품들도 많아 이전보다 젊은 관객들의 관극 빈도가 증가한 시기였다.


대본이 음악적인 고려를 결여하고 있음에도 대본에 충실하고 관객에 충실한 음악을 쓰려고 한 작곡가의 의도는 앞으로의 소극장 오페라 운동의 한 방향으로 정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홍승찬)
– 월간객석(1991.10)

피델리오는 국립극장으로서는 발레단의 레퀴엠과 브라보 휘가로의 개가에 이어서 일반적으로 흥미가 덜한 독일 오페라를 오페라 청중들에게 접근시킴으로써 공연 자체의 수준을 높임과 아울러서 새 청중을 개발시킨 뜻깊은 일들을 감행하였다. 국립오페라단은 1992년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 분명한 개가를 올렸다. (이상만)– 문화예술(1992.12)

 

⑤ ‘라 보엠’ ‘사랑의 묘약’ 1990년 4월에 데니스 버크 지휘, 피에르 상바르톨로메 연출의 ‘라 보엠’과 ‘사랑의 묘약’이3일 간격으로 공연되었다.

⑥ ‘결혼청구서’ 1997년 4월에 장윤성 지휘, 이소영 연출로 공연된 로시니의 희극 오페라 ‘결혼청구서’는 젊은 연출가 이소영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공연이다.

 

 

 

 

2000~
재단법인 출범 이후

1999년 12월에 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국립오페라단은 기관장에게 최대한 재량권을 주되 경영의 책임을 묻는 책임운영기관이 되었다. 국립극장 및 예술의전당과의 3자 계약에 의해 국립오페라단은 독립적인 지위로 예술의전당에 입주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이처럼 경쟁에 내몰린 국립오페라단은 당초의 우려에 비해서는 초기 대응에 뛰어났고 새로운 환경에 비교적 훌륭하게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2월 1일에 새롭게 출발한 재단법인 국립오페라단(단장 박수길)은 ‘오페라의 전문화와 대중화’라는, 사실은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목표의 추구를 지속하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박수길 단장은 1회 연임으로 6년 간 재임했고, 국립오페라단이 국립극장에서 이관된 어렵고 중요한 시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며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발전을 이뤘다. 2002년에 국립오페라단 최초의 여성 단장으로 선임된 정은숙(제7대 단장)은 주요 오페라 무대에서 기량을 입증해온 소프라노로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4월에는 조르지오 모란디 지휘, 울리세 산티키 연출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투란도트’를 공연해 유럽 유수의 극장 프로덕션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10월에는 최승한 지휘, 울리세 산티키 연출로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을 제작해 이 해에 개관한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올렸고, 상근단원제를 도입해 오미선, 박현재, 함석헌 등의 상근단원들에게 주역을 맡겼다. ‘투란도트’와 ‘사랑의 묘약’ 공연에 국립오페라단은 ‘2003~2004 시즌공연’이라는 타이틀을 걸었다. 이제까지의 정기공연 시스템 대신 시즌제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며, 이 두 작품으로 국립오페라단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⑦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2007년 ‘라 보엠’ 공연 중 무대에서 발생한 화제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1년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2008년 4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오랜만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정은숙 단장 체제의 국립오페라단은 오페라 아카데미 스튜디오 연수 제도로 오페라 인재를 키우고, 오픈 리허설 시스템으로 청소년들이 낮은 가격으로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게 했으며, 국립오페라합창단을 조직해 오페라 공연에 더욱 활력을 불어넣었다. 연간 공연 일정이 촘촘한 국립합창단이 국립오페라단 공연에 참여할 경우 음악적 수준은 보장되지만 리허설 시간이 부족해 완벽한 연습이 어렵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2007년 국립오페라단의 송년 오페라 ‘라 보엠’ 공연 중 무대에서 발생한 화재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1년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6년 간 국립오페라단을 크게 발전시킨 공로로 재연임이 결정되었던 정은숙 단장은 정권교체와 함께 이루어진 문화단체 기관장들에 대한 사퇴 요구 및 화재사고에 대한 책임 등으로 결국 2008년 6월에 사임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이 해 4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을 오랜만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렸다.

 


(국립오페라단의 재단법인화는) 외환위기와 경쟁력 강화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된 조치로, 예술단체에 경제 논리를 적용시킨다는 반대와 더욱 열악해진 환경 속에서 오페라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재단법인으로 바뀐 국립오페라단은 이내 그 우려를 기우로 바꾸어 놓았다. (민경찬)
– 한국오페라 10년사 1998-2007

국립오페라단 역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민경찬)
– 한국오페라 10년사 1998-2007

 

2008~
연출가 출신의 단장 시대

유럽 오페라극장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국립오페라단 창단 이래 줄곧 단장 즉 예술감독직을 성악가가 맡아왔다. 한국에 서양 오페라를 이식하고 발전시킨 주체가 성악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은숙 단장 사임 후 국립오페라단 역사상 처음으로 현역 오페라 연출가에게 단장직이 맡겨졌다. 신임 단장 이소영(제8대 단장)은 “돌보고 포용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오페라를 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소영 단장 재임 기간 동안 관객들은 ‘국립오페라단 프로덕션이라면 무조건 믿고 본다’는 신뢰를 보였으며, 정은숙 단장 재임기간에 이어 오페라 장르의 인기는 최고로 상승했다. 그러나 임기 초부터 전임 정은숙 단장 때 결성된 국립오페라합창단을 해단하는 문제로 극심한 마찰이 있었고 이 문제는 아직까지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⑧ ‘노르마’
2009년 국립오페라단 최고의 화제작은 파올로 바이오코 연출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벨리니의 ‘노르마’였다.

2009년 국립오페라단 최고의 화제작은 파올로 바이오코 연출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벨리니의 ‘노르마’였다. 무대의 색감과 조명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했고, 데뷔 30년을 넘기고도 완벽한 성량과 테크닉으로 고난도의 타이틀 롤을 소화해낸 소프라노 김영미가 특히 화제였다.
이소영 단장 취임 이후 국립오페라단의 공연 작품 수가 늘어나고 예산이 증액되자, 국가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민간 오페라단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에 따라 ‘제작 능력을 갖춘 민간 오페라단 지원 및 공연 활성화’를 목표로 대한민국오페라단연합회와 국립오페라단이 주최하는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주최 측은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모든 단체들이 제작 노하우를 공유할 것이며, 단체 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함께 화합하며 작업하도록 할 것’이라는 페스티벌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며 이 페스티벌을 통해 한국 오페라계가 더욱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질 것을 예고했다.
그러나 1회 페스티벌에서 이런 이상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참여한 민간 오페라단 대부분이 ‘카르멘’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등 흥행의 성공이 보장된 익숙한 작품만을 공연했고, 제작 과정에 있어 단체 간의 협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2회 페스티벌에서는 1회와는 다른 다양한 작품 선정이 눈에 띄었다. 벨리니의 ‘청교도’, 생상스의 ‘삼손과 데릴라’처럼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공연되었고, 국립오페라단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압축하고 개작한 ‘지크프리트의 검’을 공연해 호평을 받았다. 국립오페라단은 해마다 이 페스티벌에 참여해 전체적인 페스티벌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10~
현대오페라 적극 소개

2010년에 국립오페라단은 창작 한국오페라와 현대오페라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이는 민간오페라단이 예산 문제로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과제로, 국립오페라단이 택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1년 반의 창작과 수정 작업을 거쳐 이해 12월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식 초연된 황호준의 ‘아랑’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공식 초연 전에 이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명동예술극장, 국립극장에서 쇼케이스 형식의 40분 또는 60분 버전으로 선보인 이 작품이 긴장과 생동감 넘치는 90분 버전으로 완성돼 무대에 올랐다. 과거의 한국 창작오페라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대본과 음악이 특히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점이 큰 찬사를 받았다.
2011년 1월, 국립오페라단은 중국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China NCPA Orchestra)와 합창단을 초청해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공연했다. 리신차오가 지휘하고 첸신이가 연출을 맡은 본격 중국 프로덕션으로, 무대, 의상, 조명도 모두 중국의 크리에이티브 팀이 맡았다. 오페라계에서 이 해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국립오페라단이 3월에 공연한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파우스트’였다. 이소영 단장이 연출을 맡은 이 프로덕션에서는 무엇보다 로익 티에노의 무대가 객석을 압도했다. 5월에 아시아 초연으로 무대에 오른 풀랑크의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는 음악사의 주요 현대오페라를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하려는 국립오페라단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소중한 성과였다. 티켓 판매의 어려움 때문에 민간오페라단이 공연하기 어려운 현대오페라들을 소개하는 것은 국립오페라단의 당연한 의무지만, 특히 2010년과 2011년간에는 현대오페라의 주요 작품들이 풍성하게 초연되었다.
한편 국립오페라단 역사상 연간 가장 많은 작품 편수가 무대에 올랐고 가장 많은 작품의 한국 초연이 이루어진 시기가 이소영 단장 재임기간이었다. 오페라 애호가들이 현재까지도 작품의 다양성과 공연 수준면에서는 국립오페라단의 최전성기로 꼽는 시기다. 임기 말에 연임이 거론되었으나 경력 및 예산집행과 관련된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연임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단장의 임기가 끝난 뒤 운영과 행정의 달인으로 꼽히는 김의준(제9대 단장)이 2011년 하반기부터 예술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김의준 단장은 조직의 재정비 및 화합, 그리고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화재로 인한 국립오페라단의 부채 청산에 큰 힘을 쏟았다.
2013년은 19세기 오페라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베르디와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국립오페라단 역시 2013년 시즌을 베르디 최후의 걸작 ‘팔스타프’로 시작했다. 4월의 무대는 역시 베르디의 후기작인 ‘돈 카를로’였다. 이 프로덕션은 이해 10월에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이듬해 5월에는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되었다.
2013년 국립오페라단 최고의 화제작은 바그너 최후의 역작 ‘파르지팔’이었다. 바이로이트에서 ‘탄호이저’를 연출한 프랑스 연출가 필립 아를로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빙해’를 모티프로 매혹적인 색감의 무대를 만들었다. 난해하고 무거운 이 작품을 처음 만나는 한국 관객들이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만든 친절한 무대였다. 이 공연은 바이로이트 현지의 공연과 비교해도 수준이 처지지 않을 만큼 모든 면에서 탁월했다.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던 2014년을 국립오페라단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로 출발했다. 희극 오페라에 남다른 감각을 지닌 연출가 정선영의 프로덕션으로, 모차르트 오페라의 규모에 적합한 토월극장에서 3월에 공연했다. 김의준 단장의 임기는 2014년 여름까지였으나 이 ‘돈 조반니’를 끝으로 김의준 단장은 국립오페라단을 떠났다. 김의준 단장의 조기 사임에 따라 이 해 말까지 최영석 단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었다.
국립오페라단은 셰익스피어 원작 오페라 두 편을 이해 가을에 연달아 새 프로덕션으로 올렸다. 줄리안 코바체프 지휘, 일라이저 모신스키 연출로 10월에 공연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2014년 국립오페라단 공연 중 가장 돋보인 새 프로덕션이었다. 단순하고 미니멀하지만 색상 대비가 뚜렷한 리처드 허드슨의 무대와 의상은 5막의 긴 작품 길이에도 관객의 시선을 쉴 새 없이 무대에 고정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11월에는 역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를 토대로 한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가 스티븐 로리스 연출로 공연되었다.
2014년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탄생 150주년 기념 해이기도 했다. 국립오페라단 전년도 자문회의에서 슈트라우스의 국내 초연작을 공연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적절한 작품 선정에 의견을 모으지 못해 무산되었고, 이에 대해 오페라 애호가들은 국립오페라단에 큰 아쉬움을 표했다. 이 해에 국내 오페라 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오페라단(단장 박기현)만이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전막으로 공연했다. 2005년에 국립오페라단이 ‘살로메’를 공연한 이후 처음으로 이 작품에 도전한 것이다.

⑨ ‘지크프리트의 검’
2011년 국립오페라단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압축하고 개작한 ‘지크프리트의 검’을 공연해 호평을 받았다.
⑩ ‘투란도트’
2011년 1월, 중국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초청해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공연했다.
⑪ ‘파우스트’
2011년 오페라계에서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국립오페라단이 3월에 공연한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파우스트’였다.
⑫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2011년 5월 풀랑크의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가 아시아 초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⑬ ‘돈 카를로’
2013년 4월에 선보인
‘돈 카를로’는 10월에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이듬해 5월에는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되었다.
⑭ ‘돈 조반니’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던 2014년을 국립오페라단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로 출발했다.

40대 초반의 성악가 출신인 한예진 단장이 2015년 1월 임명됐을 때는 당시 내정 단계부터 같은 성악계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반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야권 등 정치권까지 나서 “젊은 성악가가 임명된 배경에 권력 실세가 있다.”는 비판이 일었고, 한 단장은 결국 53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안석)
– 서울신문(2019.5.26)

 

 

 

 

 

 

 

 

 

 

 

 

 

 

 

 

2015~
안정과 불안정 사이에서

최초의 행정가 출신 단장이었던 김의준 단장은 인품과 행정력으로 국립오페라단 조직의 재정비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러나 임기를 마치기 전에 사임하게 되어 이후 약 10개월간 국립오페라단 단장직에 공백이 있었고, 2015년 초에 임명된 한예진 단장(제10대 단장)은 취임 후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이른바 ‘한예진 단장 사태’였다.Ⓙ
당시 비상대책위원회에서는 “오페라계에서는 이영조 작곡가가 임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11월 말 위(청와대)에서 소프라노 한예진을 임명하라고 했다. 문체부 관계자도 “우리 손을 떠났다”고 말했다”며, 한 단장이 경험과 경력 면에서 단장 자격이 없고 오페라계에 공헌한 바도 없다고 강조했다. 소위 청와대의 ‘낙하산 인사’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인사검증 시스템 등이 심각하게 지적되었던 이 사태는 한 단장의 사퇴로 일단락되었지만, 국립오페라단장직은 다시 공백으로 돌아갔다.
한예진 단장 사퇴로 인한 수장 공백 중에도 국립오페라단은 2015년 3월에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로 화려하게 시즌을 열었다. 명 지휘자 다니엘레 칼레가리가 국립심포니(구 코리안심포니)를 이끈 이 프로덕션의 최고 화제는 이탈리아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의 개성 넘치는 연출이었다.
2015년 7월, 김학민(제11대 단장)이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이소영 단장에 이어 연출가로서는 두 번째 단장이다. ‘국민 모두와 함께 하는 국립오페라단’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업무를 시작한 김 단장은 가을 오페라 시즌이 시작된 10월에 비제의 ‘진주조개잡이’ 한국 초연으로 첫 공연을 올렸다. 주세페 핀치가 프라임필을 지휘하고 국립합창단이 출연한 이 공연은 장 루이 그린다의 연출과 함께 헤수스 레온, 나탈리 만프리노의 열연이 관객을 감동시켰던 프로덕션이었다.

 

2015년 국립오페라단 최고의 화제작은 11월에 공연한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었다. 1974년 5월, 국내 첫 바그너 오페라로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지 41년 만에 독일어 원어 공연으로는 처음으로 국립오페라단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린 것이다. 2013년, 2015년에 바그너 공연으로 전석 매진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한 국립오페라단은 2016년에 바그너의 ‘로엔그린’으로 다시 한번 흥행 신화에 도전했다. 그러나 13억의 예산을 들인 이 공연의 흥행 성적은 대단히 빈곤했다. 예산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국립오페라단의 방만한 경영이 질타를 받았던 대표적인 공연이었다.

 

 

 

 

 

 

 

2017년 4월에 국립오페라단은 또 하나의 대작을 무대에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오페라’라고 불리는 러시아 작곡가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였다. 소재도 배경도 무겁고 어두운 작품이어서 오페라계의 우려가 컸으나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는 이번에도 한국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김학민 단장은 2018년 2월에 개최될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야외오페라 공연 ‘동백꽃아가씨’(라 트라비아타)를 준비하던 2017년 7월에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향후 3년간 한국 창작오페라 제작 지원 예산을 받아 새 오페라를 위촉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이었지만, 임기 1년을 남겨두고 단장직에서 물러나 교수직으로 돌아갔다.
2018년 3월, 긴 공백 끝에 새 예술감독 윤호근(제12대 단장)이 임명되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단장이 성악가 출신이었고 연출가가 단장이 된 경우가 두 번이었다. 신임 윤호근 단장은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오래 활동해온 지휘자 출신의 첫 예술감독이었다. 윤 단장은 유럽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오페라 드라마투르기를 임기 초부터 국립오페라단에 도입해 프로덕션과 관객 간의 원활한 소통을 도모했다.
국립오페라단은 새 예술감독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에 마스네의 ‘마농’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렸다. 세계적인 연출가 뱅상 부사르의 섬세하고 의미심장한 연출 또한 몰입도를 최고로 높였다. 그러나 국립오페라단이 연출가를 찾을 때 해당 작품을 최근에 연출한 적 있는 연출가를 골라 섭외한다는 점은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연출가들이 어떤 작품을 최근에 연출했을 경우, 자신이 연출한 프로덕션의 아이디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국립오페라단에 온전히 새로운 연출 콘셉트를 제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3월에 토월극장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새 프로덕션을 크리스티안 파데 연출로 공연한 국립오페라단은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의도로 스위스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로시니의 오페라 ‘윌리엄 텔’을 한국 초연으로 기획했다. 7월에는 또 한 편의 한국초연작이 관객과 만났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의 역사적 협업으로 유명한 20세기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안성수 단장이 연출을 맡아 이제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브레히트를 선보였다. 이 역사적인 해의 정점을 찍은 작품은 최우정의 신작 오페라 ‘1945’였다. 이미 연극으로 공연되어 호평받은 극본을 토대로 배삼식 작가 자신이 오페라 대본을 쓴 작품이다.
‘마농’ ‘윌리엄 텔’ ‘1945’ 등 재직 중에 큰 호평을 받은 성공작들을 제작했지만, 윤호근 단장은 ‘채용비리’ 판정으로 해임되었다. 이와 관련해 언론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진사퇴하거나 해임된 국립오페라단의 예술감독의 사례들을 일제히 기사화하며 그 심각성을 지적했다.Ⓚ
윤호근 단장은 해임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에서도 해임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조정을 시도했으나 문체부와 윤호근 단장 양자가 다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조정은 결렬되었다. 문체부는 10월 1일에 박형식(제13대 단장)을 국립오페라단 새 예술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윤호근 단장은 법원 판결에 따라 형식상 단장직에 복귀했고 며칠 후 정식 이임식을 거쳐 자진 사임했다.
본 원고는 ‘국립극장 70년사’에 수록된 국립오페라단 역사(이용숙 저)에서 요약·발췌했다.

⑮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안 코바체프 지휘, 일라이저 모신스키 연출로 10월에 공연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2014년 국립오페라단 공연 중 가장 돋보인 새 프로덕션이었다.
⑯ ‘안드레아 셰니에’
한예진 단장 사퇴로 인한 수장 공백 중에도 국립오페라단은 2015년 3월에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로 화려하게 시즌을 열었다.
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2015년 국립오페라단 최고의 화제작은 11월에 공연한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었다.
⑱ ‘마술피리’
2019년 3월에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새 프로덕션을 크리스티안 파데 연출로 공연했다.
⑲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국립현대무용단 안성수 단장이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⑳ ‘1945’
이미 연극으로 공연되어 호평받은 배삼식 작가의 극본을 토대로 최우정이 작곡했다.

윤호근 단장이 해임되면 국립오페라단은 다시 한번 장기 공백 사태를 맞을 전망이다. 지난 10년간 국립오페라단을 이끈 수장 4명 중 3년 임기를 모두 채운 감독은 제8대 이소영 예술감독(2008년 7월~2011년 7월) 뿐이다. 이 감독도 재직 당시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 결정으로 논란을 빚었고, 허위경력 기재 의혹까지 있었다. 다른 감독들은 여타 이유로 경질되거나 자진사퇴 형식으로 자리를 떠났다. 제9대 김의준 감독(2011년 8월~2014년 3월), 한예진 감독(2015년 1~2월), 김학민 감독(2015년 8월~2017년 7월) 등이다. (김시균)
– 매일경제(2019.5.15)

 

PART2 PREVIEW

새 시대를 준비하다 

장혜선 기자

 

크노마이오페라

국립오페라단 성악콩쿠르

KNO스튜디오(김영미소프라노마스터클래스)

2020년에는 코로나가 공연계를 강타했다. 국립오페라단(단장 박형식)은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새롭게 진행했다. 영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공연 프로그램을 신설해 침체된 국내 공연 예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였다. 국립오페라단 박형식 단장은 “공연을 계속 중단하기 보다는 최소한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이 문화예술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한다”고 밝혔다.
국립오페라단은 영상화 사업을 통해 성악가들에 대한 긴급 구호 작전에 나섰다. ‘오페라 하이라이트 콘서트’의 출연자들을 선발하는 오디션을 개최해 신진 성악가들을 대거 기용했다. 이 외에도 지역순회공연에 참여할 출연자도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다.
공연 영상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보통 2~3시간에 이르는 오페라를 감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국립오페라단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을 위해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 동안 평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오페라의 전막 감상에 도전할 것을 제안했다. 세련된 미장센과 출연진들의 뛰어난 기량으로 화제를 모았던 뱅상 부사르 연출의 ‘호프만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스테파노 포다가 연출한 ‘보리스 고두노프’ 등 국립오페라단 걸작들을 2개월간 매주 1편씩 유튜브 채널을 통해 선보였다.
2021년에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크노마이오페라(KNOmyOpera)를 공개했다. 실시간 오페라 생중계는 물론 지난 공연을 VOD로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 다시 한번 오페라의 새로운 확장을 도모했다. 박 단장은 “관객이 처음 접하는 초연 작품과 혁신적인 연출의 공연을 현장과 국립오페라단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동시에 선보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2021년에는 오페라 전문인력을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제20회 국립오페라단 성악콩쿠르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본선 무대는 크노마이오페라를 통해서도 무료 생중계했다. 아울러 차세대 오페라 인재양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국립오페라 스튜디오를 개설, 교육생 선발 오디션을 개최했다. 국립오페라 스튜디오는 급증하는 오페라 전문 교육에 대한 수요에 발맞춰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오페라 인재를 배출해 내는 역할에 중점을 둔다. 박 단장은 “새롭게 시작하는 국립오페라 스튜디오가 오페라 분야 인재 양성을 통해 한국 오페라 제작 토양을 굳건히 다질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
이외에도 오페라를 통해 대중에게 통합적인 음악교육을 제공하고자 오페라 아카데미(KNO스튜디오) 일반과정을 신설하고 수강생을 모집했다. KNO스튜디오 일반과정은 오페라에 대한 시민들의 친밀도를 높이고 음악·연기·인문학 등 통합예술교육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마련됐다. KNO스튜디오는 성인과 어린이 대상 과정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2022년 창단 60주년을 맞은 국립오페라단은 60년의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의 역사를 열어나간다. 올해 국립오페라단은 ‘오페라 갈라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총 6편의 특별한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1962년 창단 기념 작품이었던 ‘왕자, 호동’(3.11~12, 국립극장 해오름)을 다시 선보였고, ‘아틸라’(4.7~10,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와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6.2~5,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를 국내 초연하여 새 시도를 이어나간다. 이외에도 높은 작품성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원한 오페라의 명작 ‘호프만의 이야기’(9.29~ 10.2,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와 ‘라 보엠’(12.1~4,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선보일 예정이다.

국립오페라단 유튜브

크노마이오페라

 

 

 

 

 

 

 

PART3 REVIEW

창단 60주년 기념 오페라 ‘왕자, 호동’

손수연(오페라평론가)

 

 

 

 

 

 

 

 

국립오페라단의 창단작인 오페라 ‘왕자, 호동’은 그야말로 전설로만 전해오는 신비스러운 존재였다. 2012년 갈라 형식으로 짧게 선보인 것을 제외하면 1962년 초연된 이래 기념비적인 이 오페라의 전막 공연을 보거나 음반을 통해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젊은 작곡가 장일남의 첫 오페라 ‘왕자, 호동’은 창단작품으로 많은 관심 속에 공연되었다. 평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세간의 평가도 엇갈렸다. 그러나 오페라로서의 작품성은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오페라단 창단 60주년을 맞이하여 이 오페라가 재공연 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간 무수한 추측과 베일에 싸여있던 이 작품을 직접 확인할 기회가 왔다는 점에서 설레는 소식이었으나, 한편으로 가뜩이나 고전하고 있는 한국 창작오페라의 씁쓸한 현실을 다시금 복기하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막이 오르고 드디어 듣게 된 음악은 음렬주의 경향의 불협화음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필자의 막연한 선입견을 전혀 벗어난 것이었다. 대부분 조성음악의 범주 안에서 진행됐으며, 극적인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장7도 등의 비화성음으로 긴장감을 조성했다. 악곡의 전개가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문법에 충실한 오페라를 보는 기분이었다. 베르디의 후기 오페라와 같은 색채도 느껴졌다. 또한 이따금씩 들려오는 5음 음계의 민요조 멜로디도 인상적이었다.
장일남이 우리 귀에 오랫동안 머무는 선율을 특기로 하는 작곡가라는 것은 가곡 ‘비목’ ‘기다리는 마음’ 등을 통해서도 익히 알려진 바다. 이 오페라에서도 1막의 합창장면, 2막 호동왕자와 공주의 아리아와 아리오소 등에서 기억에 남는 멜로디를 들려주었다. 우리 오페라 창작 초기의 작품이다 보니 아리아가 나와야 할 부분이 아리오소로 그치고 만다든지, 중창 장면에서 언어적인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하모니가 완성되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이 눈이 띄고 이로 인해 작품의 주제에 비해 음악적으로 단조로운 오페라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이번 작품은 손으로 기록한 스코어 사보와 오케스트라 사본만이 남아있어 이를 전예은 작곡가가 많은 부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창작보다 더 버거웠을 지도 모르는 이 작업에서 그는 연출 상 뒤바뀐 장면을 매끄럽게 연결하고 원작에는 없었던 해금을 추가하며 공주의 애타는 심경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등 많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날 장일남의 음악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지휘자 여자경으로 생각된다. 여자경은 클림오케스트라와 위너오페라합창단을 탄력 있게 이끌며 이 오페라의 음악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켰다.
여기에 호동 역할의 테너 김동원과 공주를 노래한 소프라노 김순영도 섬세한 음악적 해석력과 가창, 조화로운 음색으로 두 인물의 감정과 갈등을 잘 표현했다. 장초 장군 역할의 베이스 박준혁, 최리왕의 테너 정의근, 무고수 역할의 베이스 이준석 역시 맡은 역할을 안정적으로 잘 소화해냈다.
코너 머피가 담당한 무대와 의상은 원작의 복잡다단한 배경과 줄거리를 단순하게 만드는데 효과적이었다. 계단으로 처리된 무대 위에 낙랑의 노랑, 고구려의 파랑, 그리고 빨강, 검정, 흰색 등 5가지 색깔만이 상징적으로 사용됐다. 공주는 빨간 내리막길에서 자명고를 찢고 죽음을 맞는다. 이 길은 파멸이자 공주가 흘린 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리뉴얼한 국립극장 무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 무대 또한 60년 전 오페라의 재현을 넘어 약 2천 년 전 설화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라고 하겠다.
이날 공연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은 남녀 소리꾼의 등장이다. 원작에 없던 프롤로그에서 이들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해설을 대사가 있는 무대극으로 전달했다. 이들은 3막의 도입에서도 고수와 함께 다시 등장했다. 이 작품은 초연 때부터 대본의 개연성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았다. 이번 오페라에서 창극 형식을 추가한 것은 이러한 문제점을 다소나마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한승원 연출가는 사전 프로덕션 미팅에서 ‘현재에 고전을 의미 있게 복원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지, 미래의 60년을 내다보는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했었다. 이번 공연을 보면 그는 미래의 60년을 내다보는 작품을 선택한 듯하다. 국악과 서양오페라의 융합적 시도가 있었고, 노래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에 변사 역할과 같은 해설이 있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무대를 보여줬고 자명고의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무대 위에서 무한대의 상상력을 제안했다. 공연 전 필자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공연의 의의를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의 성과를 토대로 이 오페라가 지속적으로 공연되기를 바란다.

Performance information

‘왕자, 호동’

3월 11~12일 국립극장 해오름
원작 유치진/작곡 장일남/작사 고봉인/연출 한승원

 

PART4 INTERVIEW

베이스 전승현

국내 초연에 서는 설렘

임원빈 기자

 

국립오페라단의 도전
베르디 ‘아틸라’ 한국초연 4.7~10

국립오페라단은 창단 이래 수많은 작품을 국내 초연하며 새로운 작품을 한국 오페라 역사에 새겼다. 최근 한국 초연한 작품들은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2010), 바그너의 ‘파르지팔’(2013), 비제의 ‘진주조개잡이’(2015), 드보르자크 ‘루살카’(2016),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2021) 등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베르디의 ‘아틸라’가 이름을 올린다. 이번 무대의 아틸라 역을 맡은 베이스 전승현을 만났다.

 

1995년 중앙콩쿠르 우승을 안겨준 작품이 ‘아틸라’였습니다. 하지만 전체 오페라를 다룬 건 이번 공연이 처음이라고요.
오랫동안 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한 번도 ‘아틸라’ 배역을 제안 받은 적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어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틸라와 에치오의 역할이 베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음역이 매우 높아 바리톤에 가까운 음역을 부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극적인 연기와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선보여야 하니 쉽지 않은 작품임은 틀림없죠.

‘아틸라’는 아퀼레이아 왕의 외동딸 오다벨라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로마의 장군 에치오와 함께 훈족의 왕 아틸라를 암살하는 음모를 다룹니다. 아틸라의 이야기를 빌려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드러낸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사람이었기에 이탈리아의 민족주의가 두드러진 건 당연합니다. 1막에서 로마 장군 에치오는 훈족(헝가리) 왕 아틸라와 협상을 하는데, 로마를 나에게 넘겨주면 로마 외 모든 세상은 아틸라에게 주겠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훈족(헝가리)에 대해 ‘야만적’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해서 한 민족을 깎아내리는 장면도 있고요.

연출가 페터 콘빈츠니는 2013년 테아터 안 데어 빈이 선보인 ‘아틸라’의 연출을 맡았습니다. 그는 작품을 ‘정신적으로 유아기에 머무른 어른들의 이야기’로 해석하며 2막 피날레 합창 장면에서 휠체어를 등장시키는가 하면, 어린이가 색연필로 멋대로 쓴 듯한 낙서가 무대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반면, 이번 공연의 연출가 잔카를로 델 모나코는 전통적인 연출기법을 선호합니다.
‘아틸라’의 연출은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이 권력 다툼을 애국심 핑계로 한 기득권들의 쟁탈전이라는 풍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애국’과 ‘대제국 ‘재건’을 내세운 작품이라고 하죠. 하지만 이번 작품의 연출·무대·의상을 맡은 잔카를로 델 모나코는 해학적인 작품으로 보지 않고 진중한 시각에서 다루며 전통적인 연출을 지향합니다. 그는 호랑이 가죽 무늬의 의상을 아틸라에게 입히는가 하면,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마의 화려했던 시절을 정통적인 방식으로 무대를 꾸밉니다. 또한 가수들의 감정의 변화에 따라 무대조명 효과도 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마리오 델 모나코는 뛰어난 테너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오페라를 보며 자랐고 많은 성악가의 무대를 보며 무대에서의 ‘의미 없는 움직임’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무대에서는 그의 연출적인 특징이기도 한, 가수들의 움직임이 절제된 ‘프리즈’(Freeze) 기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전승현(1973~) 서울대·독일 쾰른 음대에서 수학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극장 주역으로 데뷔 후, 라 스칼라 극장,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 묵직한 이름의 무대에 오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1년 독일정부로부터 ‘캄머쟁어(궁정가수)’ 칭호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 성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쟁을 앞둔 아틸라의 두려움

극 중 아틸라는 악역일 수 있지만, 훈족에게는 용맹한 왕의 모습입니다. 아틸라를 어떤 인물로 묘사하고 싶은가요?
제가 집중한 건 그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극 중 한 대목에서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로마를 치러 가겠다고 마음먹은 날 밤, 그는 꿈을 꿉니다. 꿈에서 노인이 나타나 로마를 떠나지 않으면 큰 벌을 받는다고 예언하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죠. 세계를 정복했지만, 전쟁에 나가기 전 아주 나약한 모습이 그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한 이 부분은 한 곡에 인물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연약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노래와 연기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외모가 아틸라와 닮아 ‘아틸라 전’으로 불린다고요. 오래전부터 무대와 일상의 삶을 분리하고 싶었다고 들었습니다.
아틸라의 강인함 모습 뒤에 연약함이 있듯이,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한 작품을 위해 따르는 엄청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수들은 모두 아틸라이지 않을까요? 또한 성악가는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삶을 노래와 연기를 통해 펼칩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살 수 없는 삶은 ‘아틸라 윤’으로 살고, 공연이 끝나면 다시 ‘전승현’으로 돌아옵니다.

한국에서는 초연 무대이지만 베르디의 친숙한 음악적 어법들이 녹아든 작품인 것 같습니다. 관객들이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감상해야 할까요?
베르디는 자신이 좋아하는 테마를 여러 오페라에 등장시킵니다. 이 작품에도 ‘맥베스’에 나오는 테마가 살짝 노출되기도 해요. 이 때문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전쟁을 배경으로 해 병사들이 대거 출연하는 만큼 합창도 주목할 만합니다. 또한 화려한 무대 장치로 시각적인 즐거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는다면?
앞서 이야기한 아틸라의 꿈 장면입니다. 그리고 아틸라와 에치오가 처음 만나 부르는 2중창 ‘당신은 세계를 얻게 될 것이니’ 또한 극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두 베이스가 바리톤의 음역을 소화해가며 주고받는 대목에서 작품의 진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오페라단 ‘아틸라’

4월 7~1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발레리오 갈리(지휘)/잔카를로 델 모나코(연출·무대·의상)/전승현·박준혁(아틸라)/유동직·이승왕(에치오)/임세경·이윤정(오다벨라)/신상근·정의근(포레스토)/구태환(울디노)/나한유(레오네)/
국립합창단

 

PART5 OPINION

평론가 3인, 국립오페라단
발전을 위한 제언

이용숙·박명기·탁계석

아직도 남아있는 과제

문화는 경제논리에 지배될 수 없다는 비판과 우려 속에 국립오페라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지도 20년이 지났다. 이 20년간 한국 오페라에서 가장 성장하고 발전한 분야는 연출이다. 전환이 거의 없는 미니멀한 무대와 조명 및 첨단 영상기술을 이용한 무대 변화가 현재 유럽 오페라 연출의 전형적인 동향인데, 현재 한국 오페라 무대에서도 그런 유럽의 동향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연출, 무대디자인, 의상디자인, 조명디자인 등을 오페라 선진국의 인력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스템과 교육 기회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악 분야는 오래전부터 우리 오페라의 강점이었지만, 최근 들어 유럽과 미주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성악가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공연에서도 오케스트라, 연출, 무대의 취약함을 성악적 완성도로 커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연출과 기술 분야의 인력을 성장시키는 일은 아직 큰 과제다.
오페라 전문합창단이 없어 짧은 연습기간 동안 합창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한 문제점이다. 그리고 가수와 합창단의 연기훈련이 좀 더 철저하게 이루어져, 공연에서 완벽한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서양 오페라 42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오페라 70여 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대단히 짧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이룬 성과는 놀라울 정도다. 국립오페라단은 우수한 공연 제작을 통해 이 서양의 예술장르를 우리나라에 이식하는 데 무엇보다도 큰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이식의 단계를 벗어나 우리가 창작한 오페라를 해외에 소개하고 우리의 독자적인 창작 역량을 인정받아야 할 시기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오페라에 맞는 좋은 대본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을 양성하고 지원해 세계무대에서 자신 있게 공연할 만한 신작 한국오페라를 제작하는 일이 급선무다. 세계를 향한 국립오페라단 도약의 열쇠는 바로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킨 우리 작품 창작에 있다.
국립오페라단의 단장이 바뀔 때마다 운영 시스템이 완전히 달라지고, 국립오페라단의 전통을 세워갈 수 있는 자료 축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대단히 안타깝다. 이제까지의 공연 기록과 비평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리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국립오페라단의 발전을 위한 문화부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문화정책, 특히 오페라 장르가 속해있는 공연예술 분야의 정책 방향을 정하고 실현하는 문화부의 역할은 한국 오페라 발전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오페라 관객이 적고 오페라 장르가 특정 소수 관객을 위한 예술장르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문화부 인력 중 오페라에 조예가 있는 전문가의 존재 자체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장르 특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문화부가 오페라 장르 발전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해온 것이 우리나라의 오랜 현실이다. 지식의 부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국립오페라단이 국립예술단체로 존재하는 한 이 단체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시길 간곡히 당부드린다.

이용숙(음악평론가) ◎‘국립극장 70년사’ 요약·발췌

 

K-오페라 비전을 세워라

금년은 국립오페라단이 6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의 예술가들과 공연문화는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바탕이 되는 극장 시스템이 아직도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국가의 기간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의 연구와 노력으로 먼저 그 기반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공연예술을 위한 극장 역시 세계화된 모습과 시스템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 일은 민간이나 예술가들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붙이자면 극장(theatre)라고 하면 오페라극장을 말하는 것이고, 오퍼(oper)라고 극장이나 오페라 공연을 말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오페라를 ‘하우스’와 ‘작품’으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페라극장의 기능과 역할을 매우 축소해서 생각하는 편이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일임에도 전혀 개선할 의지가 약해 보이는 부분이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작은 희망이 있다면 국립오페라단이나 서울시오페라단(1975년 창단) 보다 나중에 생긴 대구오페라하우스(2003년 개관)는 이러한 문제점을 깨닫고, 오페라 전문가들이 직접 극장을 운영하고 동시에 제작과 공연도 직접 참여하고 있다. 오페라의 기본이 되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만이라도 절반의 전속개념으로 두고 있고, 극장 시설을 온전히 오페라 제작과 공연을 위해 사용한다. 부산에도 큰 규모의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있는 중인데, 건물이 완공되기 전에 극장장이나 예술감독, 합창 오케스트라, 공연 전문 인력을 상주시키는 글로벌한 오페라하우스로 탄생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결국 오페라의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이 지금껏 만들어낸 공연예술 행위 가운데 오페라야말로 대중적이면서 인격의 수준을 높여주는 동시에, 감동과 행복을 주는 종합적인 예술이다. 오페라는 1597년 피렌체에서 처음 그것을 만든 예술 작가들이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행복감을 느끼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었다.
나라에서 멋진 오페라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고, 좋은 예술가들은 시민들과 오페라라는 예술광장에서 만나는 것이 일상이 된다면, 더욱 살맛나는 세상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페라뿐 아니라 서울시향이나 KBS교향악단도 아직 자체 공연장이 없다는 것은 우리 정부나 기업이 아직도 자동차 공장보다 예술 공장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경제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인간의 가치와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박명기(한국오페라연구소 대표)

 

세계적 수준의
극장과 작품 만들기

역사의 시계추를 저울에 다는 것은 방향을 찾기 위함이다. 국립오페라단 60주년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은 그래서 불편하다. 오페라에 요구는 여전히 상당하지만 이를 담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가까운 10년의 과정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갓길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주행이 엉망이지 않았는가. 낙하산 시비를 증명이라도 하듯 역대 5명의 단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오페라 정책이란 게 있기나 하는가? 책임의 공방을 넘어 오페라계 성숙이 필요한 이유다.
가까스로 박형식 단장의 부임으로 조직이 안정권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3명이었던 정규직을 30명의 고용직 신분을 보장한 결과다. 지난해 몇 회의 전문가 지속 토론이 있었지만 보고 자료용일뿐 방향은 못되었다. 이런 형식 절차가 답이 아니다. 수장의 주장이 절실한 때다. 시간과 예산 낭비의 소모성은 우리 오페라 발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조직이 아닌 극장을 가진 제대로의 국립의 위상이 세워져야 한다.
국립오페라단 60주년의 진정한 GPS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첫째가 오페라극장이다. 전용구장 하나 없는 프로 경기가 있을 수 없듯 셋방살이 국립오페라단의 초라한 신세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지난해 국감에서도 전용 극장을 지어 달라고 한 것은 진일보 한 것이다. 실제 국립극장 맞은 편에 위치한 한국자유총연맹 부지를 오페라극장으로 하자는 것과 현 오페라하우스를 예술의전당과 분리해 운영하자는 논의에 주목한다. 때마침 새 정부 출범이어서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는 작품이다. 지난달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장일남의 ‘왕자, 호동’ 복원은 창작오페라 역사성의 부활이다. 작품의 생명력이 살아 있음을 발견한 것은 국립의 해법일 수 있다. 현실의 다층적 요구가 국립을 숨 가쁘게 한다. 한 해에 140회에 이르는 지역 문화 향수권, 아카데미 인력 양성과 무대 제공이 선순환 생태계를 위해 필요한 작업인 것은 맞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물음에 충실해야 한다. 자기 극장 갖기와 세계적 수준의 작품 만들기의 목표다.
‘빨간 바지’ ‘레드슈즈’의 실험성 작품을 넘어 세계 극장에 올릴 수 있는 완성도의 작품과 선진 오페라극장들과 소통 가능한 시스템을 장착하는 일이다. 세계 최고 절정에 오른 성악의 기량에 공회전 할 시간이 없다. K-오페라로 우리가 뉴 노멀(New Normal)을 제시해야 할 때이고, 새로운 오페라 60년을 향한 출발점이다.

탁계석(한국예술비평가협회 회장)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