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ouRS Winner 1
소리의 유전학을 찾아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시벨리우스 콩쿠르 도전과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긴 이야기
양인모(1995~)가 ‘객석’으로 에세이를 한 편 보내온 적이 있다. 보스턴에서 우버를 탑승하다 마주한 일화에 대한 짧은 글이었는데 재밌었다. 그의 미국 생활을 살짝 엿본 것 같기도 하고, 유쾌한 필력에 감탄하기도 했다. 침체된 코로나 기간 동안 양인모는 국내에서 가장 활발히 연주하는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자주 들리는 공연 소식에 무감해지던 찰나, 갑작스레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지난 5월까지 라일란트/프랑스 메츠 오케스트라와 함께 국내 5개 도시 내한공연을 함께했던 양인모여서 새삼 놀랐다.
양인모와의 대화는 늘 신선하다. “베를린 라이프는 어떠냐”는 질문에 “도시에 시위가 많아서 영감을 받는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핀란드는 어땠냐”고 물으면 “차가운 공기가 맛있다”고 얘기한다. 멀리서 지켜본 양인모는 비슷한 나이의 연주자 중 가장 개성 강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렇기에 또래 연주자들처럼 커리어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 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보스턴에서 베를린으로 둥지를 옮긴 것이다. 2015년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스무 살의 양인모는 미국에 살고 있어서 몇몇 기회를 놓쳐야만 했다. 시벨리우스 콩쿠르를 잘 마무리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와 영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7년의 시간을 머금은 그는 지금, 시벨리우스 콩쿠르 우승 기회로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지난해 친구인 래퍼 릴러말즈(바이올리니스트 김민겸)와 함께한 인터뷰 이후 1년 만인 듯하다(‘객석’ 2021년 6월호). 슬슬 한국에서는 코로나 거리두기 제한이 풀리는 분위기다. 어떻게 지냈나.
2020년 10월 베를린에 왔다. 베를린에 처음 왔을 때 코로나 때문에 집 앞에 있는 카페들도 다 문을 닫은 상태였다. 베를린에서는 ‘예술 없이는 침묵밖에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왜 음악을 해왔는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지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했을 것이다.
앗, 팔목에 타투가 보인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도 되나.
2021년 1월 1일에 친구 릴러말즈와 패션계 종사하는 한 친구와 같이 한 타투다.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젊고 뜨거운 마음을 기념하고 싶었다. 팔목에다가 한 이유는 연주할 때 보였으면 좋겠어서….
베를린은 유럽 예술가들의 집결지이지 않나. ‘베를린 라이프’는 어떠한가.
베를린에는 전위적인 예술이 많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리 시위도 많아서 정치적인 관심도 생긴다. 이 사람들에게는 뭐가 그렇게 중요하기에 나와서 외치는지 궁금하다.
한창 해외 무대 커리어를 쌓는 시기일 텐데, 팬데믹이란 시대적 분위기가 억울하진 않았나.
다 같이 답답했던 시기니까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개인 시간이 많아지니 어떻게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음악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오히려 좋았다.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음악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였다. 그 고민들이 시벨리우스 콩쿠르 참가로 이어졌다.
코로나 기간 동안 부산시향 ‘올해의 예술가’로 활약하는 등 국내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지난 2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아주 정체되어 있던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음반 ‘현의 유전학’(2021·DG)도 코로나 한창일 때 발매했고, 예술요원으로 군복무하며 한국에서 봉사 활동도 많이 했다. 지난해 3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데뷔 리사이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릴 때부터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의 독주 무대를 종종 상상해왔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할 때 안네 소피 무터(1963~), 기돈 크레머(1947~)가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걸 봤다. 그들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렇게 성장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작년 예술의전당 리사이틀은 통과의례를 거친 느낌이었다.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사사 미리암 프리드)을 졸업한 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사사 안티에 바이타스)로 넘어가 석사 과정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다.
2019년 12월에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했다. 바로 베를린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한 학기가 미뤄졌다. 미국에 있는 6년 동안 많은 걸 배웠지만 내 소리가 좀 더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에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안티에 바이타스 독주회가 있었다. 백스테이지로 찾아가 배우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듬해 1월에 베를린에서 오디션을 봤다. 현재 3학기 중이다.
미국과 독일의 연주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미국이 원하는 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줄리아드 음악원의 영향이 크다. 이반 갈라미언(1903~1981)은 훌륭한 연주자들을 많이 배출한 분이다. 미국에서는 갈라미언으로부터 비롯된 소리 미학이 있는 듯하다. 미국에 있는 큰 홀을 다 채울 수 있는 둥글고 큰 소리…. 나도 처음엔 그런 소리를 좇아가다가 결국에는 소리 하나하나가 좀 더 이유가 있기를 바랐다. 소리에 굴곡이 많았으면 좋겠다. 미국의 소리를 비꼬는 건 아니고, 개인적인 취향을 얘기하는 것이다.
‘소리’에 있어서 영감을 준 바이올리니스트는.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공부할 때 유럽 연주자들의 마스터클래스를 인상 깊게 들었다. 특히 크리스티안 테츨라프(1966~)는 소리의 강약 범위가 넓다. 미국에서 하면 좀 의아해하는 그런 소리들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게 흥미로웠다. 내가 중학교 때 내고 싶었던 소리다. 미국에서 많은 걸 배웠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벗어나야 했다. 더 자유로운 소리가 있는 곳으로.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만난 안티에 바이타스는 레슨 방식이 어떠한가.
새로 배운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악기 잡는 법부터 시작해서…. 바이타스는 내 오른손이 항상 릴랙스 되어 있다고 말한다. 릴랙스가 되면 좋은 점도 있지만 어떤 아티큘레이션은 하기 힘들다는 등 구체적인 것들을 배우고 있다.
기존에 잡혀있던 연주 스타일을 바꾸는 게 쉽진 않을 텐데.
바이타스의 방법 중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야겠지만, 이때까지 익숙했던 것들을 잠시 멀리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흡수하는 중이다. 이번 시벨리우스 콩쿠르를 준비하면서도 소리가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시벨리우스 콩쿠르가 남긴 것들
우승을 축하한다. 많은 고민 끝에 콩쿠르 참가를 결정한 듯 보인다. 먼저 콩쿠르가 열린 핀란드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처음 방문한 핀란드의 경치에 반했다고.
헬싱키에 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맛있었다. 콩쿠르 기간에는 호텔에서 연습만 했고, 2차 무대를 끝내고 조금씩 돌아다녔다. 스트레스가 심하니 아무 곳이나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콩쿠르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티켓을 사서 내리고 싶은데 내려서 무작정 걸어 다녔다. 어느 때는 숲속을, 어느 때는 호수를 걸어 다니며 우연히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주했다. 숲에서 나는 냄새는 지금까지 못 맡아본 그런 향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핀란드 사람들은 어땠나.
처음 만났을 때는 무뚝뚝한 면이 있는데, 알고 보면 친절한 사람들이다. 슈퍼마켓에서 오렌지 주스 성분에 관한 질문을 영어로 물으면 직원들은 같이 고민해주면서 적합한 제품을 골라준다. 연주 무대에서도 호응을 많이 해줬다. 속은 되게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핀란드는 주변에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비싼 옷이나 비싼 차로 멋 부리지 않는다. 핀란드에서 소소한 행복을 많이 느꼈다. 헬싱키뿐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도 궁금해진다. 이번 콩쿠르 우승 계기로 앞으로 핀란드의 정서를 더 알아갈 것 같아서 신난다.
핀란드는 지휘자 강국이기도 하다. 세계 주요 악단의 포스트들을 핀란드 지휘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꼭 한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핀란드 출신 지휘자가 있다면.
서울시향에서 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1953~)와 협연한 것이 핀란드 지휘자와의 첫 호흡이었다. 핀란드 지휘자를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결선에서도 그렇고 핀란드 지휘자들은 간결하고 묵직하게 전하는 것 같다.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사카리 오라모(1965~)의 음반을 많이 들었다. 우승 세리머니가 끝나고 오라모와 길게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와 좋아하는 작곡가나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비슷하더라.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앞으로 함께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을 가져다준 곡 아닌가. 이번 결선에서도 연주했는데, 곡 해석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시벨리스의 음악에 대한 견해가 많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시벨리우스 협주곡에서도 좋아하는 부분과 지루한 부분이 나뉘었다. 지금은 곡 전체가 흥미롭다.
‘인모니니’에 이어 ‘인모리우스’라는 별칭이 탄생했다!
작곡가마다 일기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차르트의 일기장은 피아노 협주곡이었고, 슈베르트에게는 가곡이었고, 시벨리우스에게는 바이올린 소품들이었을 테다. 작곡가 본인도 바이올리니스트였으니까. 이번 콩쿠르가 끝나고 시벨리우스 증손자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시벨리우스와 얼굴이 닮지는 않았는데…. 여하튼 그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에 대한 애정을 많이 설명해 줬다. 본인이 기록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연주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시벨리우스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다.
2차에서 연주한 슈만의 환상곡 Op.131 연주를 가장 만족스러운 무대로 꼽았다. 이번 콩쿠르에선 일부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 위주로 선택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번도 안 해본 슈만 환상곡과 닐센 바이올린 협주곡에 도전하면서 좋은 에너지를 받았다. 심사위원들도 그 곡들에 대한 코멘트를 많이 해줬다. 처음에는 콩쿠르에서 이런 곡들을 해도 될까 고민이 들었다. 콩쿠르에서는 확신을 갖고 연주해야 하니까…. 그래서 이 곡으로 어떻게 하면 더 설득할 수 있을까 깊게 들여다봤던 것 같다. 이 작업이 나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 앞으로도 이런 자세를 유지하고자 한다.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것들
파가니니 콩쿠르 때는 최연소 결선 진출자상을 받는 등 ‘어린 나이’여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반면 이번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는 “참가자 중 연장자여서 다른 참가자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한 인터뷰를 봤다.
가장 연장자는 아니었고…(웃음) 파이널리스트 중에서는 나이가 제일 많았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에는 별생각 없이 콩쿠르에 나간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콩쿠르는 정말 콩쿠르만 생각했다. 어릴 때에는 조급함이 없었는데, 이제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번 시벨리우스 콩쿠르 우승이 훨씬 값지다. 콩쿠르 우승 이후의 행보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안다. 우승이라는 쾌거를 잘 이용해 많은 기회들로 이어나가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파가니니 콩쿠르 당시 여러 굵직한 기회들을 얻었을 텐데,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던 점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유럽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게 가장 아쉽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서 놓친 기회가 많다. 파가니니 콩쿠르가 이탈리아에서 열렸기 때문에 유럽 쪽 연주가 많이 잡혔다. 만약 유럽에 살았다면 연주 커리어가 더 잘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이제는 베를린에 거주하기에 그 부분을 충족할 수 있어서 좋다.
마지막 콩쿠르인가. 또 깜짝 소식을 들려줄 예정인가.
시벨리우스 콩쿠르가 마지막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연주 무대에서 경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겠지. 콩쿠르가 굉장한 사치였다는 생각도 든다. 6개월 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해야 할 일이 콩쿠르 연주곡을 준비하는 것밖에 없었다. 콩쿠르가 끝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연습실에 갇혀서 생활했던 게 오히려 그립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 입단한 이지윤처럼 콩쿠르 입상 후 솔리스트로 주가를 올리던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 악장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솔리스트가 아닌 다른 행보를 고민하기도 했나.
지금은 솔로 활동을 하면서 좋은 음악 파트너를 많이 만나는 게 목표다. 솔리스트라는 타이틀이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팬데믹을 통해서도 우리는 솔리스트로 살아남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지 않았나. 베를린에 오니 음악에 귀천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선 소소하게 음악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솔로 활동에 관심이 있지만, 내가 음악을 하는 옵션이 더 넓어진 것 같아서 좋다.
해외 무대 성공 비결은 ‘나에게 집중해 줄 수 있는 매니저를 만나는 것’ 같다. 젊은 아티스트를 키우는 건 둘러싼 여러 사람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이제 해당 고민을 해야 될 시점에 접어든 것 같은데.
시벨리우스 콩쿠르에 도전한 큰 이유 중 하나가 제너럴 매니저를 찾는 거였다. 나의 음악이 연주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현재 여러 군데에서 제안이 들어온 상황이고, 미팅을 이어갈 계획이다. 조만간 좋은 매니저를 만나게 되길 기대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음악 프로젝트는.
시벨리우스 콩쿠르를 통해 한 작곡가를 깊게 파고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앞으로 작곡가 버르토크(1881~1945)를 탐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인모토크’가 되는 건가…. 소리에 대한 도전을 멋지게 이어 나가길 진심으로 응원하겠다.
소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이어갈 예정이다. 음악이 습관처럼 변하는 것이 싫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시벨리우스 콩쿠르
양인모의 디스코그래피
파가니니:24개의 카프리스
DG 4817765
현의 유전학
DG 4778140
양인모(1995~)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현재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수학하고 있다. 2015년 파가니니 콩쿠르, 2022년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