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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
자신만의 온전한 무대를 준비하는 시간
안네 조피 무터의 장학생으로 성장해 국제무대에 서기까지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녀의 커리어는 화려하다. 금방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유명 생존 지휘자와는 모두 협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년 뉴욕 필과 데뷔해 리카르도 무티와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데뷔, 만프레트 호네크와 체코 필 데뷔를 마쳤고, 그 외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마리스 얀손스, 마이클 틸슨 토마스, 유리 바슈메트, 야닉 네제 세갱, 앨런 길버트, 얍 판 츠베덴 등과 협연하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6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최예은의 탁월한 음악성은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10세의 나이로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연주 경험을 쌓고, 금호문화재단의 악기를 대여받아 여러 콩쿠르에 참가하며 그녀는 성장했다. 14세에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 15세 때 레오폴트 모차르트 콩쿠르에 입상했으며 몬트리올 콩쿠르,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모두 입상하며 주목받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1963~)였다. 그녀는 2005년 최예은을 자신이 세운 안네 조피 무터 재단(The Anne-Sophie Mutter Foundation/이하 무터재단)의 장학생으로 선정해 오늘날까지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1997년 설립된 무터재단은 재단으로부터 지원받은 수많은 인재가 오늘날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최예은은 당시를 “음악과 인생의 멘토를 만나게 된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바이올린 여제 무터와 수양딸 최예은’(연합뉴스)이라는 표현의 기사가 나올 정도로 둘 사이는 각별하고, 베를린 필하모니, 프랑크푸르트 알테 오퍼, 뉴욕 카네기홀, 도쿄 산토리홀의 무대에도 함께 올랐다.
무터로부터 “음표들 사이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이해하는 연주자”로 인정받은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 그녀가 지금껏 듣지 못한 새로운 음악들로, 우리에게 다가올 채비를 마쳤다.
관객은 완성된 무대를 만나기에 무대 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 공연 전후로 생기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한 번은 연주 시작 시각에 맞춰 제가 묵고 있던 호텔로 공연장 측에서 보낸 리무진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호텔 정문으로 내려갔어요. 리무진 기사님께 콘서트홀로 가는 거냐고 여쭤보았고 그분은 러시아어로 “다(Да) 다(Да)”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렇게 이동한 지 20여 분이 지났을까요? 갑자기 창밖의 풍경은 도심을 벗어난 외곽이었고,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지 않겠어요? 당황한 저는 기사님께 영어로 몇 마디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다, 다”인 거예요. 다시 돌아가려면 1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을 알고, 공연장 측에 상황을 전달했죠. 결국 저는 차 안에서 복장을 갈아입고, 이미 관객이 5분 이상 기다리고 있었던 무대 앞에서 악기를 열고 입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아찔한 상황이었는데요. 그래도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는 해프닝이었습니다.
연주 여행을 하다 보면, 각국의 청중이 음악에 반응하는 것도 다를 것 같습니다. 한국 청중은 열정이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주자들의 평이죠. 기억에 남는 관객이 있나요?
예전에, 베이징에서 리사이틀을 할 때요. 관객석이 무대를 원형으로 두르고 층층이 올라가는 형태의 홀이었어요. 연주 마지막 곡이 끝나고 커튼콜을 받아서 무대에 나가는데 인사를 하자마자 무언가가 무대로 쏟아지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물체들은 관객석에서 던지는 곰 인형, 꽃다발 등이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 꿇어앉아 악기를 온몸으로 감쌌어요. 다행히 같이 연주했던 피아니스트가 중국 관객의 이러한 호응 방식에 대한 경험이 있어서 그분의 침착한 대응과 에스코트로 무대 뒤로 나갈 수 있었던 기억이 나요. 지나고 생각해보니 중국 관객에게 죄송하더라고요.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커튼콜 받을 때 당황하지 않고 악기 없이 무대에 나갔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스승
금호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금호영재콘서트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그 연주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무대에서 연주하는 소중한 경험을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금호문화재단의 악기를 대여받아 연주한 것 역시,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나 몬트리올 콩쿠르,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입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금호아트홀에서 연주할 때는 그저 연습한 만큼 무대에서 잘하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또 연주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꼈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의 무대는 저를 위해서 열어주는 생일파티와 같았고, 성장한 이후 지금 제가 서는 무대는 오히려 제가 호스트로서 제 생일상에 손님들을 모시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무터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무터는 본인에게 어떤 멘토인가요?
무터 선생님을 보며 저는 그녀의 프로페셔널함에 경탄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모든 시간과 경험을 의미 있게 사용하려고 하고 휴식 시간조차 어떻게 쉬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을지 일정을 짜는 분입니다. 그 분에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쉬고 있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음식이나 복장, 읽는 책,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를 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모습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자극을 많이 받게 되죠. 하지만 무엇보다 제게 인상적인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발전,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향한 그녀의 의지와 열정이에요. 저도 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그런 의지와 열정을 갖는 삶을 바라고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펼치는 시간
온타리오 필과의 협연 때 현지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 출연해 윤이상(1917~1995)의 ‘니나의 정원’ 중 ‘작은 새’를 연주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음색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느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접하고 연습했었던 곡이라서 그 곡에 대한 애정이 깊습니다. 어려서 자주 먹었던 음식을 커서도 항상 찾게 되는 음식이 되듯, 제게 그 곡이 그래요. 윤이상 선생님의 다른 곡들도 듣지만, 이 곡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 기회가 될 때마다 연주하고 있습니다.
현대음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여러 현대음악을 연주할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진은숙(1961~)의 ‘그란 카덴차’와 외르크 비트만(1973~)의 현악 4중주, 펜데레츠키(1933~2020)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한국에서도 자주 연주하고 싶어요. 그리고 여러 한국 작곡가의 새로운 곡들도 궁금하고, 그들과 함께 작업해 보고 싶습니다.
2013년 도이치 그라모폰(DG)을 통해 멘델스존, 슈베르트,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작품을 음반에 수록했습니다. 새로운 음반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시점입니다.
그 외에도 새로운 음반 계획을 현재 논의 중입니다. 앞으로는 해외 활동만 중시하지 않고 한국에서의 활동도 다양하게 할 생각입니다. 오는 4월과 5월에 한국에서 여러 연주가 예정되어 있고, 자선 공연도 계획 중에 있습니다. 추후 소식은 개인 SNS를 통해 올릴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최예은(1988~)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남윤을, 뮌헨 음대에서 아나 추마첸코를 사사했다.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 레오폴드 모차르트 콩쿠르, 몬트리올 콩쿠르,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며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크리스토퍼 에셴바흐, 만프레트 호네크, 앨런 길버트, 켄트 나가노 등의 지휘로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2005년부터 안네 조피 무터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무터와 최예은
REVIEW 안네 조피 무터와 무터 비르투오지 2.3
스승에서 동료가 되는 순간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와 무터 비르투오지(Mutter Virtuosi)가 지난 2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무터 비르투오지’는 무터가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무터재단이 배출한 젊은 음악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버르토크 작품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한 무터는 이번 공연에서 12명의 무터 비르투오지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비올리스트 이화윤이 참여하였고, 이전 투어에서는 첼리스트 브래넌 조,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이 참여했다.
뉴욕 클래식 음악 라디오 방송인 WQXR을 통해 생중계된 이번 공연은 무터가 작곡가 진은숙(1961~)에게 위촉한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그란 카덴차’가 뉴욕 초연되었다. 2018년에 작곡된 이 곡은 2019년 3월 카네기홀에서 무터와 최예은의 연주로 초연될 예정되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2021년 10월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무터와 최예은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작품이 완성된 지 5년이 지나서야 뉴욕의 청중을 만나게 된 ‘그란 카덴차’는 초연을 맡았던 최예은 대신, 중국계 바이올리니스트 낸시 조우의 연주로 무대에 올려졌다.
6분 남짓의 이 작품은 두 명의 독주 바이올린이 서로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두 바이올린이 층을 쌓아가는 형식이 아닌, 불규칙한 대화 같은 선율의 교차, 그리고 상호 모방을 통해 서사가 이어졌다. 곡의 시작과 마무리 역시 두 명이 함께 연주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그래서 두 연주자의 내공과 연주 스타일, 연주되는 악기의 수준까지 ‘균형’이 중요하다. 무터의 이번 미국 투어에서 악장을 맡기도 한 낸시 조우는 이런 조건에 가장 잘 부합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굴곡진 사운드와, 상황에 따라 마치 차안대를 한 경주마처럼 몰아치는 무터의 연주와 비견해도 부족함 없었다. 최근 무터는 작곡가 김택수(1980~)에게 8분 길이의 바이올린 독주곡을 위촉했다. ‘한국인의 공동체 정서’를 주제로 할 이 작품은 내년 10월 스위스에서 최예은에 의해 초연될 예정이다.
가장 대중 친화적인 곡으로 손꼽히는 비발디의 ‘사계’를 무터는 전통적인 화법으로 풀어갔다. 폭풍 같은 화려한 속주로 유명한 ‘여름’ 3악장은 오히려 점잖았고, 무터의 솔로 역시 담백했다. 반면 느린 악장에서는 활을 더 눌러 톤을 진하게 잡았고, 왼손에는 글리산도를 얹어 굵은 붓을 사용해 유화를 그리듯 무게감 있는 필치로 이어나갔다.
강풍을 동반한 추운 날씨 속에 열린 음악회였지만 꽤 많은 관객들이 찾았다. 콘서트가 시작된 지 두 시간이 넘어갔는데도, 무터는 작곡가 존 윌리엄스(1932~)가 이번 투어를 위해 편곡한 그의 ‘Long Good Bye’를 앙코르 곡으로 선물했다. 이후 두 곡이 더 이어졌다. 연주를 모두 마친 무터는 함께 무대를 꾸민 후배 음악가들에게 한 명씩 다가가 안아줬다.
이들을 보며 이러한 무대가 새삼 오늘날 청중인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방식으로, 여전한 조명을 받으며, 흠결 없는 무대를 꾸려낼 수 있는 음악가가 존재하는가 묻는다면, 어김없이 이들의 무대를 떠올릴 것이다.
글 김동민(미국 통신원·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 사진 카네기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