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AL TRIBUTE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1949~2023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객석’에 담긴 그의 흔적을 따라서
1949년 출생해 서울예고를 졸업한 후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이반 갈라미언·펠릭스 갈리미르 사사한 그는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음악원 개원부터 함께해 2015년 명예교수로 임명됐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경희대 음대 교수,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200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을 비롯 하노버·파가니니·차이콥스키 콩쿠르 등의 심사를 도맡았다. 2014년부터는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원장을 맡았으며, 옥관문화훈장(1995)·자랑스런 한국인 대상(2014)·홍조근정훈장(2015)을 비롯해 난파음악상·한국음악평론가상·금호음악스승상·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다.
지난 3월 12일, 음악계의 큰 별이 졌다. 한국 바이올린의 대모인 김남윤이 지병으로 별세한 것이다.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던 그의 죽음은 여러 매체의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이러한 소식의 반경을 통해 그녀가 음악계에 남긴 의미와 힘을 여러 사람이 체감할 수 있었다. ‘후학 양성에 힘썼다’라는 수식어는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평생의 삶을 후학 양성과 제자들에 쏟았던 고인을 묘사한다면 그 문장은 적확한 표현으로 빛을 발한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현재 한국 바이올린계의 큰 줄기를 이룬다. 김현미·양고운·이경선·백주영·유시연과 같은 중견 교수들의 스승이며, 콩쿠르에서 빛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젊은 연주자들도 다수가 그에게서 배웠다. 신지아·클라라 주미 강·장유진·임지영 등이다.
향년 74세. 병상에 누워있을 때도 제자의 콩쿠르 우승 소식에 기뻐했다던 음악계의 정신적 지주를 떠나보내기엔 아직 이른 때였다. 고인의 발인이 있던 지난 15일, 추도식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서초캠퍼스) 앞 광장에서 진행됐다. 명예교수인 그를 추도하기 위해 유족과 제자는 물론 다수의 예술계 관계자가 모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대진과 졸업생 대표 박지훈의 추도사, 유족 대표 감사패 전달,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의 추모 연주가 이어졌다.
고인이 평생 몸담은 교정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추모가 이어지고, 운구 차량에 참석자 전체가 헌화하며 고인을 기렸다. 스승을 그리워하는, 아직은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그 뜻을 한 번 더 마음에 기려보는 이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기자는 현장에서 음악계에 큰 산이 되어준 고인을 마음속 깊이 기렸다. ‘그의 헌신으로 풍요로워진 음악계에서 우리가 누린 혜택은 무엇인가’. 그리고 국화꽃 한 송이 내려놓는 대신 ‘객석’에 담긴 그의 기록들을 들춰보고 이를 통해 그녀의 역사를 공유하는 것이 고인의 뜻을 더 널리 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기사는, 고인을 기리며 ‘객석’의 글로 써 내려가는 헌화다.
① 영재로서의 김남윤
평생 수많은 영재를 배양한 김남윤이지만, 그 또한 단 14세의 천재 소녀로 처음 주목받았다. 제3회 동아음악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단발머리의 소녀는 당시 서울대 재학생이던 김민과 함께 기록을 남긴다. 그는 당시 이화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별들의 전쟁
‘객석’ 2016년 6월 호 ‘1960년대 예술계 둘러보기
– 천재 소년·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장’
동아일보가 주최한 전국음악경연대회는 독특하게도 ‘대한민국에 한하되 연령, 학력 등 일체의 제한을 두지 않는’(동아일보 1963년 3월 15일) 콩쿠르였다. 따라서 초·중·고는 물론 대학생들이 한 부분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대결 중 하나는 1963년(제3회)일 것이다. 당시 이화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남윤(14세)과 서울음대생 김민(21세)의 대결. 1차 예선 과제곡은 베리오 ‘발레의 정경’, 2차 예선은 베라치니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전악장, 본선은 비오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이었다. 1위 김남윤, 2위 황보엽(16세, 서울예술고), 3위 김민이 입상했다.
② 연주자로서의 김남윤
미국에서의 활동 무대를 국내로 옮긴 지 10여 년이 지났을 즈음, 그는 1년에 30회가 넘는 무대에 서며 ‘무서울 정도의 집념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 1986년 10월, ‘객석’과의 인터뷰에 남은 그의 기록은 왕성히 활동 중인 30대 연주자로서의 김남윤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눈에 띄는 것은 그가 30대에 이미 품고 있던 교육관과 철학이다. 실내악에 대한 강조, 예비학교부터 시작하는 전문 음악원, 대중을 위한 음악 페스티벌, 장학재단까지…. 2023년에 읽자니 마치 미래를 예언이라도 한 듯이 한국 음악계는 그의 바람의 방향과 함께 확장되어 왔다. 앞선 음악가들의 비전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불어 흥미로운 것은 본지 기자와 인간적이며 소탈한 대화를 나누는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 점이다. 기자와 사이가 돈독했는지, 농담 섞인 첫 질문 “할 말 없습니까”에 자신이 표지에 나와 판매 부수에 지장이 생기겠다는 농담조로 답을 하며 자신이 품고 있는 예술에 대해 요목조목 말해나간다. “할 말은 다 한다”는 당시의 기록은 ‘인간적인 포용력, 자유분방한 표현력’이라는 수식어를 단 젊은 날의 김남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음악원도 필요하고, 페스티벌도 필요하고
‘객석’ 1986년 10월 호 ‘인간적인 포용력, 자유분방한 표현력’
김남윤을 만났다. 자주 얼굴을 대하는 그와 인터뷰를 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예의 그 웃음과 유머가 사람을 즐겁게 한다. 인터뷰보다는 더욱 많은 농담이 오간다. 그 가운데도 그는 할말을 다한다. 다시 한번 그에게서 깊은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한다. 그와의 인터뷰는 기자로서의 업무가 아니라, 친구로서의 즐거움이다.
– 할 말 없습니까?
“할 말 많지요. 우선 내가 표지에 나와 ‘객석’의 판매에 지장이 생기게 된 것에 대해 사과부터 드립니다.” (그는 웃는다. 이렇게 인터뷰가 진행된다. 그러나 때로는 정색을 하고 진지한 대화도 오간다)
– 실내악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데…
“물론이죠. 얼마 전까지 서울챔버의 악장을 했고, 현재 서울 무지카 트리오의 멤버입니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긴데, 꼭 솔리스트가 되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솔리스트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장학재단을 하나 하고 싶어요. 재질 있는 아이들이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때마다 속이 상해 울고 싶어요. 정말 너무 아까운 경우가 많아요.”
– 우리나라 음악계에 결여된 것이 있다면?
“음악원이 필요합니다. 예비학교부터 시작하는 전문 음악원이 있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에 지원도 있어야 하고…, 또 페스티벌도 유치해야 합니다. 클래식음악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페스티벌 말입니다. 정장이나 연미복보단 연주자나 청중 모두가 청바지나 티셔츠 차림으로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쉽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그런 페스티벌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③ 스승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을 전하며
1992년 9월호 ‘객석’은 특집 기사로 ‘바이올린의 명교수 갈라미언 VS 딜레이’를 마련했다. 교육자로서의 생애와 교수법, 그들이 길러낸 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들,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이 말하는 갈라미언과 딜레이가 기사의 순이었다.
김남윤은 스승 이반 갈라미언의 교수법에 대한 회고를 본지에 직접 기록했다. 스승에 대해 남긴 자세하고도 애틋한 그의 글은, 어쩌면 지금 김남윤을 그리워하고 있는 많은 제자의 공감을 자극한다. 이제는 그녀, 김남윤의 교수법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고 전수해 나가야 할 차례이기 때문이다.
나무 탁자도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 수 있다는
교수법의 대가
‘객석’ 1992년 9월 호 ‘나의 스승 갈라미언’
일찍이 뉴욕 신문은 ‘나무 탁자도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 수 있는 갈라미언 교수법’이란 기사를 특종으로 실은 적이 있다. 그만큼 그의 바이올린 교수법은 마법에 가까웠다.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줄리어드에 입학한 나는 갈라미언에게 배우기 시작했다. 그에게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바이올린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의 교수법은 간단명료했다. 외부적으로는 그의 클래스가 ‘지옥의 레슨실’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그의 교육방법은 의외로 쉬웠다. 그는 결코 어려운 핑거링을 쓰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나 아주 쉬운 핑거링으로 어려운 곡을 소화해낼 수 있도록 지도했다. (중략) 아직 어렸던 나는 선생님의 큰 눈이 무서웠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던 그 선생님을 마치 조선시대 서당의 훈장만큼이나 어려워했다. 그러나 가끔씩 다정스럽게 웃어줄 때면 마치 손자 녀석이 할아버지 수염을 만지고 놀 듯, 그만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러시아 태생인 그는 항상 말없이 학생들에게 광활한 대평원을 일궈 옥토로 만드는 소를 말씀하시곤 했다. 단지 앞에 놓인 한 줄의 이랑만을 바라보며 밭을 갈아가는 소는 어느새 그 드넓은 밭에 무수한 이랑을 만들어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딴생각 없이 앞에 놓인 연습에 열중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 한 곡 한 곡 자신의 것으로 터득해 갈 수 있다고 그는 학생들에게 강조하시곤 했다. 그는 그것 이상 학생들에게 더 요구하지 않았다.
콩쿨을 준비할 때면 학생들에게 항상 해주시는 말이 있다. “네가 일등을 한다고 갑자기 너를 더 사랑할 것도 아니고, 네가 실패한다고 해도 나는 너의 실력을 믿으며, 또한 너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하는 제자이다. 결코 등수에 신경 쓰지 말고 집중해서 노력하라”는 것이다.
선생님의 더 많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던 안타까움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새삼스러워진다.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내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학생들을 접할 때 갈라미언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랑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④ 김남윤의 바이올린 수업
2010년에 들어오면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3층은, 스타 연주자들을 탄생시킨 유명한 ‘김남윤의 레슨실’이 있는 곳이 된다. 눈에 띄는 성과에, 대체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이 늘어가던 시점. 레슨실의 문을 거리낌 없이 ‘객석’에게 열어준 덕에 지면에는 모든 이들이 가장 그리워할, 그의 레슨 한 장면이 남아 있다.
그 어머니의 입은 매섭고 마음은 따뜻하다
‘객석’ 2011년 5월 호 음악 스승 10인을 만나다 | 김남윤의 바이올린 수업
권혁주·신현수·클라라 주미 강·장유진·윤소영 등을 낳은 그 유명한 레슨실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3층 깊숙이 자리해 있었다. 이날 레슨을 받은 이재형은 열아홉 살 대학생으로, 지난 2009년 음악원에 영재 입학해 현재 예술사 과정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중략) 김남윤 교수는 제자에게 잔소리가 많다. 굉장히 많다. 어떨 때는 잔소리를 하는 자신의 소리가 스스로도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란다. 스승은 옷 입는 것은 물론이고, 말투와 걸음걸이, 밥 먹는 모양까지 제자의 모든 것에 참견이다.
연주 내내 김남윤 교수는 연주자와 거리를 둔 채 레슨실을 서성였다. 저만치 벽에 기대 서서 제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가 싶다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코앞에서 듣는 바이올린의 포르테는 귀가 터질 만큼 강력한데, 그보다 더 큰 소리가 순간 반대쪽 귀를 때린다. “더!” “더 크게 그레셴도 해야지! 단 디가디가디다, 단 디가디가디다!” 제자의 포르테를 끌어내기 위해 스승은 더 큰 “포르테!”를 외쳤다. 제자의 “더” 나은 연주를 기대하며, 아담한 레슨실이 마치 큰 정원인 양 걷고 또 뛰는 스승의 모습은, 비록 인상을 쓰고 있음에도 즐거워보였다.
“나는 가르치는 게 참 재미나요. 특히 좀 느린 것 같던 애들이 갑자기 막 피어오를 때, 그걸 지켜보는 기쁨은 정말 커요. 현수·주미 이후로도 좋은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기대가 되고, 그래서 재미있어요.”
글·정리 허서현 기자 사진 한국예술종합학교·객석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