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TÁR(타르)’
비열한 예술가와 신성한 예술, 그 사이
돌이켜 보면, 살면서 가장 많이 해야 했을 일은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 작품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이다. 예술은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내 삶이 어떤 경계 밖으로 비집고 나가지 않게 잘 다독이고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 살면서 가장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은 그 예술 작품을 만든 예술가를 직접 만난 일이다. 결국 예술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예술가 역시 사람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영혼을 울린 예술을 만들어낸 예술가가 그저 나와 닮은, 고작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초라한 경험이다.
비열한(RAT) 예술가 (TAR)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수석지휘자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세계 최고의 포디움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와 친밀한 관계였던 여성 지휘자 크리스타의 죽음과 비서 프란체스카(노에미 메를랑)의 증거 제출로 인해 타르의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다. 타르는 의혹을 부인하지만, 그간 저지른 여러 횡포와 맞물려 인심을 잃고, 결국 베를린 필에서 쫓겨난다.
토드 필드(1964~) 감독의 영화 ‘TÁR(타르)’는 리디아 타르의 명성과 몰락의 과정을 통해 예술가와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하는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계속해서 배반한다. ‘TÁR’는 전기 영화를 가장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즉, 모큐멘터리에 가깝다. 타르는 가공의 인물이며, 실제 영화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아니라 드레스덴 필하모닉이다. 그리고 실제로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 자리에 오른 여성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베를린 필은 1982년에 처음으로 제1바이올린의 정단원으로 여성을 선발했을 정도로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악단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여성형 명사 ‘마에스트라’가 아닌, 남성형 명사 ‘마에스트로’라고 불리길 원하는 세계 최초, 최고의 여성을 중심에 두지만, 성평등이나 젠더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수석지휘자라는 영화의 설정은 오히려 비열해 보일 정도로 적나라한 파괴력과 비린내를 풍기는 욕망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 부패한 권력의 속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속에 타르라는 예술가의 사회적 성취와 인간적 결함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 표기를 국문 ‘타르’가 아닌 원문 ‘TAR’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알파벳의 철자 순서를 바꾸면 다른 뜻의 단어가 되는 애나그램(anagram)이 영화와 인물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는 타르가 몰락하는 열쇠가 되는 인물 크리스타(Krista)의 이름이 ‘At Risk(위험에 처한)’의 애나그램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대비해 보면 타르(TAR)의 이름은 담배를 태울 때 생기는 유해 물질 타르와 같은 철자를 사용하며, 애나그램을 적용하면 쥐 또는 비열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RAT’, 예술을 뜻하는 ‘ART’가 된다.
어쩌면 예술(ART) 그 자체인 타르(TAR)
영화 속 타르는 말러 교향곡 5번의 녹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 곡을 완성하면 타르는 말러 교향곡 전곡을 모두 실황 녹음한 유일무이한 지휘자가 된다. 타르의 멘토이자 말러 권위자라 불리는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도 이루지 못한 성과다. 세계적 명성은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약속한다. 실제로 타르는 단원 채용과 오디션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다.
예술가 타르가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완벽하지만 인간 타르는 오만하고 위선적이다. 예술가의 얼굴을 하고 나설 때, 비평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본인이 나온 기사를 모두 스크랩한다. 위키피디아의 프로필 하나하나를 수정하는 타르는 예민하고 강박적이며 모자라고 서툰 사람이다.
결국 인간으로서의 부족함과 권력을 가진 예술가로서의 오만함은 성공한 예술가로서의 삶에 균열을 만든다. 조화를 잃는 순간, 예술의 성취도 위태로워진다. 타르는 자신의 단원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이끄는 사람이 아닌 통제하는 사람이 된다. 오케스트라 음악은 결코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이 아니기에 타르의 유연성 없는 리더십은 뚝 부러지고 만다.
‘TÁR’는 내밀하고 예민한 영화다. 토드 필드 감독은 지휘자처럼 각기 다른 색채의 화두를 하나로 조율하고 이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타르 역의 케이트 블란쳇(1969~)은 솔리스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감독을 돕는 악장 역할을 한다. 그녀는 완벽한 연기로 모든 제작진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으고 이끈다.
예술가 타르의 성취를 보여준 전반부 이후, 인간 타르는 분열되고 곤두박질친다. 예술·예술가·인간 사이를 오가는 영화는 완벽하고 신성한 예술은 있지만, 완벽하고 신성한 예술가는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한결 편안해진 타르의 표정이 포기인지 달관인지 알 수 없듯, 그것이 타르의 몰락인지 완전하고 새로운 시작인지는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말처럼 ‘한 번도 정숙한 적이 없었던 예술’은 부도덕함, 착취, 불면과 살의, 질투와 경쟁, 이기심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타르(TAR)는 하나의 인격이 아닌, 예술(ART) 그 자체가 아닐까? 예술가 타르, 인간 타르, 그리고 타르의 예술을 분리해 생각하니 복잡했던 영화의 화두가 단순해진다. 기묘하게 엔딩 크레딧을 맨 앞으로 배치하더니 ‘TÁR’는 영화가 끝난 후에야 그렇게 진짜 질문을 던진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했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 | | OST
TÁR
도이치 그라모폰 / 힐두르 구드나도티르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이야기지만, 실제로 영화 속에서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감상할 수 있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말러 교향곡 5번 역시 영화의 표지처럼 등장하는 중요한 곡이지만 막상 영화 속에서는 한 악장도 온전히 연주되지 않는다. 그 아쉬움을 사운드트랙을 통해 달래볼 수 있다.
| | | 트랙 리스트
01 Guðnadóttir: For Petra (Vocal Version) (Hildur Guðnadóttir)
02 Guðnadóttir: Mortar (Hildur Guðnadóttir & London Contemporary Orchestra)
03 Introductory Words by Hildur Guðnadóttir (Hildur Guðnadóttir)
04 Guðnadóttir: For Petra (Recording Session) (London Contemporary Orchestra & Robert Ames)
05 Hildur’s Impressions (Hildur Guðnadóttir)
06 Guðnadóttir: Tár – I. Largo (The London Contemporary Orchestra)
07 Guðnadóttir: Tár – II. Allegro (The London Contemporary Orchestra)
08 Guðnadóttir: Tár – III. Moderato (The London Contemporary Orchestra)
09 Mahler Symphony No. 5 I. Trauermarsch & II. Stürmisch bewegt(Rehearsals)
10 Mahler Symphony No. 5 IV. Adagietto (Rehearsals)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