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2
피아니스트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긴 호흡으로 걷는 음악의 길
쇼팽 콩쿠르 우승 후 8년 만에 쇼팽으로 내한하는 그가 지나온 시간들
©Sammy Hart
무대에 서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보고 듣는 사람에게 특정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운명을 지닌다. 문제는 그 이미지가 그 예술가의 전체가 아닌 일부에 해당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넓히려는 노력에 고심하게 된다.
피아니스트가 한 작곡가의 스페셜리스트라는 평가를 얻게 되면, 그는 그 순간 기존의 이미지와 함께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청중에게 알리기 위해 애쓴다. 2010년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율리아나 아브제예바(1985~)의 이미지는 ‘쇼팽’일 수밖에 없었을 터. 다른 프로그램이 아닌 이 작곡가의 작품을 청중에게 들려줄 때의 각오나 원칙은 오히려 매우 독특하지 않을까 싶었다. 8년 만의 내한 독주회 프로그램을 쇼팽의 작품으로 구성한 그의 생각이 더욱 궁금해졌다.
콩쿠르 ‘이후’의 쇼팽, 그 ‘이상’을 위한 시간
“제가 무대에 올리는 곡들을 얼마나 자주 연주하는지 세어 본적은 없는데요. 오히려 쇼팽 콩쿠르 이후, 콩쿠르에서 연주한 몇몇 곡들은 일부러 오랫동안 손대지 않았습니다. 좀 더 신선한 접근을 위해서 필요했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어 ‘환상곡’, 혹은 ‘환상 폴로네이즈’ 같은 곡은 10년 정도 연주한 적이 없고, 소나타 2번도 2011년 이후에는 연주한 적이 없네요. 쇼팽 작품들에 관해서는 제가 어떤 곡을 콩쿠르 이후에 얼마나 자주 연주했는지 보다 얼마나 연주하지 않았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쇼팽 콩쿠르 챔피언이 다루는 쇼팽의 해석이 강한 권위를 지닐 것이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청중이 있기 마련이고, 연주자에게는 그 사실 자체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매우 과감한 프로그램 구성이라고 볼 수 있는 아브제예바의 이번 독주회에서는 쇼팽의 ‘환상 폴로네이즈’, 마주르카 Op.41 그리고 소나타 3번 등이 연주된다.
“쇼팽의 작품으로만 관객 앞에 서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인데요. 쇼팽 프로그램을 결정하기까지 스스로 많은 성장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시대의 음악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라 다른 시대의 음악을 공부하고 배우는 것, 예를 들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통해 쇼팽의 음악에 아이디어가 부여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발생하죠. 이번 공연으로 쇼팽 음악의 비전을 제시하고, 제가 요즘 느끼는 쇼팽의 음악은 어떤지, 한국 관객과 함께 공유할 순간을 기대하고 있어요. 이번 연주는 스케르초 3번 같은 비교적 초기 음악부터, 후기 작품인 ‘환상 폴로네이즈’ 그리고 소나타 3번 등으로 구성했습니다. 마주르카는 특별히 더 애정을 갖고 있는 작품인데요, 연주할 때마다 쇼팽의 본질이 담긴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마주르카 네 개에 경이적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해 내죠.”
러시아 피아니즘의 계보를 잇다
쇼팽 콩쿠르를 거쳐 간 여성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아브제예바를 설명할 때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후 45년만의 여성 우승자’라는 수식이 빠지지 않는다. 여성 피아니스트의 연주에서 흔히 기대하는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미감보다 선이 굵고 구성력이 뚜렷한, 호흡이 긴 연주를 구사하는 아브제예바이기에 더욱 주목되는 소개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아르헤리치와 같은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이 늘 감격스럽습니다. 특히 콩쿠르에 참가했을 당시, 그가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하죠. 우승 이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또한, 1949년 우승자였던 벨라 다비도비치(1928~)와의 인연도 언급해야겠네요. 그녀도 제가 우승했을 당시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고, 뉴욕과 NHK홀에 제 공연을 보러 오신 적이 있어요. 감사한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출신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을 거쳐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로도 있었던 다비도비치는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의 어머니다. 아브제예바에게 20세기 중반 전성기를 보냈던 대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반가운데, 그녀에게 이상적인 쇼팽 연주자는 역시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인 듯하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는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1901~1961)입니다. 그의 음악적 사운드와 표현력, 그리고 자유로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인상이 그를 쇼팽의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하는 아티스트로 만드는 듯합니다. 하지만 해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연주자의 음악적 뿌리보다는 개개인의 성향이 더욱 중요할 것 같습니다. 쇼팽의 악보가 우리에게 제공된 그에 대한 유일한 자료이지만, 그 속에는 많은 자유가 부여되며, 각각의 연주자들은 곡에 대해 서로 다른 모습을 내놓죠. 이 자체가 음악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명의 연주자가 하나의 곡을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음악은 매우 독특하고, 아름다운 마법입니다.”
그의 쇼팽 연주를 기다리며 문득, 그가 지금까지 다뤄 온 러시아 레퍼토리들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는 프로코피예프(1891~1953)의 세계가 무척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2·7·8번 등은 아브제예바의 프로그램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곡들이다.
“프로코피예프에 늘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형식면에서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멜로디가 작품 속에 가득 차 있어요. 저는 프로코피예프가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토카타 형식의 음악 스타일 뿐 아니라 피아노 소나타·협주곡·교향곡·발레 등 모든 장르에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굳건히 유지했던 작곡가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압도된 후 거의 30년 동안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순간을 바랐는데, 작년에 드디어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 곡을 공부하고 배우며, 무대 위에 올리는 그 모든 과정이 매우 행복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음악을 받아들이고, 악보를 통해 포용 가능한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아브제예바의 자세에서 그 역시 러시아 피아니즘의 적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존경하는 스승과 선배들이 일궜던 20세기의 눈부신 유산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까.
“좋은 질문이네요. 20세기 러시아의 음악학교들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시대 음악학교의 형태가 지금까지 동일하게 존재하지는 않고, 그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학생들은 인터넷의 발달로 수많은 연주자들의 각기 다른 음악 스타일을 접하게 되었고, 젊은 음악가들이 해외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하는 기회도 많아졌죠. 러시아 피아니즘을 포함해 21세기의 음악적 변화를 얘기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추세로 보면 기술적 측면, 예를 들어 영상과 녹음 분야에서는 믿을 수 없는 발전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의 발전이 있어도 녹음을 포함한 기록들이 실제 공연장에서의 경험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 공연이 아니더라도, 동료이자 친구들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다른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에 직접 찾아 주시는 관객을 존중합니다. 공연장에서 관객과 음악으로 삶의 순간을 공유하는 행위는 영원히 그 절대적 가치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무대 위 연주를 만드는 정중동의 힘
연주자에게는 실력과 함께 행운이 필요한 분야가 있는데, 바로 실내악 작업이다. 솔로 활동만큼 꾸준히 이어진 아브제예바의 실내악 활동은 뛰어난 음악가들과의 긴밀한 교류가 이어졌기에 가능했다.
“앙상블을 통해 동료들과 무대 위에서 음악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 실내악을 연주하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는데요.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가 주요 멜로디를 이끌어 가면서 함께 조화로운 순간을 만들 때, 솔로 파트와 오케스트라 파트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곡의 핵심부에 다다를 때 그런 느낌을 받곤 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1947~)와는 솔로 연주와 크레메라타 발티카 연주를 함께 했고, 율리아 피셔(1983~)는 저와 오랜 시간 동안 음악적 협업을 이어온 연주자입니다. 이들과 2년에 한 번씩 리사이틀 투어를 하고 있으며,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도 함께 했습니다. 내년에는 첼리스트 다니엘 뮐러 쇼트(1976~)까지 힘을 합친 3중주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요.”
모든 음악가에게 강요된 정중동의 시기였던 지난 3년, 아브제예바 역시 조용하지만 내실 있는 움직임으로 연주자의 삶을 꾸려 왔다. 코로나 기세가 한참이었던 작년 1월, 피에타리 잉키넨의 KBS교향악단 취임연주회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한 기억은 그에게 무척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울러 2020년 봄부터 시작했던 ‘바흐 프로젝트’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주제로, 이와 다른 작품들과의 연관성을 살피는 창의적인 렉처였다(그녀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2020년 3월은 저에게도 전례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락다운으로 온 세상이 단절되었죠. 그 당시, 3월 중순부터 매주 목요일에 온라인 렉처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기대 이상의 반응을 일으키며 많은 온라인 관객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제예바의 바흐 프로젝트’라는 이름도 만들어졌고, 1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관객에게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 전곡을 소개했죠. 이러한 경험은 관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절실하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연주자로서 큰 자극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프로젝트도 50만 이상의 누적 조회수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공연이 없었던 시기에도 이어진 관객의 관심과 지지는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대 위의 제게 더없이 큰 응원입니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마스트미디어
©Sammy Hart
율리아나 아브제예바(1985~) 러시아의 피아니스트로,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후 여성 피아니스트로서 45년 만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에 영국 ‘텔레그래프’는 그의 연주를 ‘쇼팽의 감성과 일치하는 세심한 연주’라며 호평했다. 최근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와 우크라이나 구호 기금을 위한 연주회를 개최한 바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피아노 독주회
5월 12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쇼팽 ‘환상 폴로네이즈’ Op.61, 스케르초 3번, ‘뱃노래’ Op.60,
마주르카 Op.41, 소나타 3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