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창단 50주년을 맞은 국립합창단
한국 합창을 밝혀온 소리의 별자리
코로나 시기는 노래의 날개와 목소리의 온기를 잃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위로의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고, 새 노래를 짓고,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디자인하고, 아마추어들의 장을 만들어 주었다. 국립예술단체의 숨은 주역으로 노래해 온 50년. 그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본다
글 송현민·허서현·김강민 사진 강태욱(Workroom K) 자료제공 국립합창단
01 PROLOGUE
국립합창단의 역할과 의미 _송현민
02 HISTORY
5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_송현민
03 INTERVIEW
윤의중 단장 겸 예술감독·유수정 부지휘자 _허서현
04 SUMMARY 2022·23
공연 연보 _김강민
05 GRoup INTERVIEW
파트장 박송이·최성철·강문선·주호남 _허서현
06 FESTIVAL PREVIEW
합창을 즐길 수 있는 강릉 세계합창대회 _김강민
PART 1 PROLOGUE
국립합창단의 역할과 의미
무대를 빛내는 든든한 노래의 기둥으로
지난 몇 년이 그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악기로 칭송받지만, 2020년에 발발한 코로나 속에서 그 위상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임이 금지되며 합창의 조화는 흩어졌고, 소리에 담긴 따듯한 입김은 비말의 위협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마스크를 착용한 채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합창은 근래 몇 년 동안 힘겨운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올해 국립합창단이 창단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코로나의 열세는 한층 수그러들었고, 이들은 힘겨움의 시간을 지나 이제 탄생의 기쁨을 노래로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국립합창단’이라는 이름은 친숙하고 많은 무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만, 이들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은 물론 KBS교향악단이나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에서 우리는 악기들과 어우러지는 이들의 목소리를 만나왔습니다. 일례로 12월 송년음악회에서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국립합창단의 목소리를 빼고는 베토벤의 ‘합창’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한때 열풍이었던 말러의 교향곡 시리즈는 물론 국립오페라단이 바그너의 ‘파르지팔’ 같은 대작에 도전할 적에도 국립합창단은 목소리의 구름이 되어 무대를 든든하게 채웠습니다. 이처럼 국립합창단은 여러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든든한 소리의 기둥과도 같습니다.
국립합창단은 1973년 창단 이후 한국합창계의 ‘효시’이자 음악계의 ‘주춧돌’과 같은 존재로 여러 무대를 장식해 왔습니다. ‘객석’은 2014년에 41살이 된 국립합창단을 집중 조명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그들은 여러 무대에 올랐고, 아마추어 합창단들이 모이는 여러 경연대회를 기획하여 노래의 장을 펼쳤습니다. 한국의 합창곡을 생산하는 전진기지이자, 합창의 형태를 뮤지컬, 음악극, 오페라와 접목시켜 변형시켜보는 실험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시기에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위로의 선율에 더해진 위로의 가사는 우리에게 왜 언어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 언어가 음악과 만날 때의 감동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국립합창단이 50세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국립합창단의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는 공연도 많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함께 하면서도 그 이름이 잘 도드라지지 않는 공연(찬조·외부 출연)도 많은데, 올해는 이러한 공연 속에서 많은 관객들이 국·립·합·창·단의 이름을 찾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서 그 이름이 지금보다 더 진하게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봅니다.
글 송현민(편집장) 사진 강태욱(Workroom K)
한국 최초의 ‘국립’ 합창단
국립합창단은 우리나라 합창음악의 전문성과 예술성 추구를 위해 1973년에 창단된 전문합창단으로 본격적인 합창 예술운동의 선두주자이자 합창음악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선도해왔다.
2000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단체로 독립, 재단법인으로 재발족하여 매년 5회의 정기연주회와 60여 회의 기획연주, 지방연주, 해외연주, 외부출연, 공공행사 등 다양한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불리는 헨델·바흐·하이든·멘델스존·브람스·카를 오르프 등 세계적인 작곡가의 합창작품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국립합창단은 합창음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한국 창작 합창곡 개발과 보급, 한국적 특성과 정감을 표출하는 창법, 해석법의 정립 등에 앞장서며 한국 합창음악의 대중화 및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동안 초대 단장 나영수, 2대 배덕윤, 3대 나영수, 4대 오세종, 5대 염진섭, 6대 김명엽, 7대 나영수, 8대 이상훈, 9대 구천을 지나, 현재 10·11대 윤의중 단장 겸 예술감독이 국립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창단 50주년 기념연주회, K-클래식 한류 사업, 써머 코랄 페스티벌, 창작합창 컬렉션 등 다양한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합창음악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국립합창단의 다섯 빛깔 공연들
정기공연
연 5회의 정기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국립합창단은 르네상스부터 현대음악은 물론 합창의 정수인 종교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또한, 한국가곡과 민요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작·편곡하여 합창곡의 다양화와 한국 합창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기획공연
합창의 저변 확대를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지원하고, 인적자원을 양성 중이다. 신진 지휘자 양성과 활동을 위한 데뷔콘서트, 합창지휘경연대회는 국내 합창계의 꾸준한 관심을 환기 중이다. 문화정서 함양과 체계적인 교육을 지원하고자 전국고교합창경연대회와 전국골든에이지(어르신)합창경연대회를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 아래 매년 개최하고 있다.
지방공연
지방 자치단체 및 공연장이나 지역 예술단체를 초청하여 지역의 합창문화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의 문화회관 및 인근 소외시설을 대상으로 문화 향유권을 신장하고, 합창 향유의 수준을 높이고자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해외공연
서양음악의 종주국들을 순회하며 매년 아시아, 미주, 유럽 등의 음악제와 공연장의 초청을 받고 있다. 2005년 일본 교토국제합창심포지엄, 2006년 독일월드컵 승리기원 연주회, 2009·2011·2013년 독일 자를란트 국제뮤직페스티벌 초청연주회, 2017년 한국·카자흐스탄 수교 25주년 기념연주회 등을 통해 한국 합창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외부출연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서울시향 등의 단체들과의 합작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수준 높은 합창단(Symphonic Choir)으로서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리아만큼 중요한 오페라 합창곡들을 소화하며 공연예술의 질을 높이고 있다.
PART 2 HISTORY
전통은 다지고,
만남과 새로움을 추구해온 50년
단순히 연주만 일삼지 않았다. 한국적 합창곡 생산을 위해 꾸준히 위촉하고,
저변을 넓히고자 만남의 장을 일구고, 차세대 육성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들의 50년 시간을 살펴본다
“창단의 실제적 이유는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소위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 때문이었다. 당시 평양에 갔던 남쪽 인사들은 북쪽이 보여준 잘 훈련된 대형가무극을 보고는 놀라서 그 대응방법으로 비슷한 성격의 단체인 국립가무단(전 예그린악단·현 서울시뮤지컬단)에 특별예산을 편성, 300명 규모로 확대하려 했다. 당시 국립극장장은 가무단을 200명으로 하고 나머지 100명으로 합창단을 만들어 뮤지컬과 오페라와 교향악단에 두루 쓰려고 했다. 그래서 국립극장의 여덟 번째 단체로 탄생한 것이 국립합창단이다. 전적으로 당시 국립극장장인 김창구 씨의 선견지명과 결단 때문이었고, 나는 오페라와 뮤지컬 양쪽을 안다는 것 때문에 창단 단장으로 발탁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이 깨지면서 북쪽에 대응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국립극장에 특별 지원되던 예산이 끊어져 합창단은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 되었다. 합창단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이미 나돌아서 단원들은 동요했고, 어떻게든 재생을 염원하던 나는 당시의 총무 최흥기(전 서울시립합창단 단장) 씨에게만 사정을 알렸다. 그리고 단원들에게는 국립합창단 마크를 새긴 운동복을 맞춰 입히고는 합창단은 없어지지 않았다며 동요하던 단원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살얼음판 같은 하루하루였다.
그러던 중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쪽을 향해서 악담을 퍼붓던 북쪽의 격렬한 대남 비방방송 때문이었다. 북쪽은 비난성명과 함께 자극적인 합창곡을 매일 반복하여 방송했다. 대응에 고민하던 KBS는 당시 방송국에 근무하던 음악평론가 이상만 씨를 통해 가사 전달이 잘 되는 국민가요 합창곡들을 녹음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김창구 극장장에게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의 녹음과 북쪽의 것을 비교해 들었던 김종필 총리가 윤주영 문공부 장관에게 치하했고, 기분이 좋았던 장관은 극장장에게 또 치하를 하게 되니, 국립합창단을 존속시키고 싶던 극장장은 그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연주회를 열어주면 좋겠다고 진언했다. 장관이 흔쾌히 승낙하여 급히 연주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렇게 갑작스런 준비로 창단 1년 2개월 만인 7월 18, 19일 이틀 동안 창단 연주회를 하게 되니 그날을 창단일이라고 기록하는 경우도 생겼다.(나영수)”
1970년대
창단┃한국합창곡 생산┃전국 순회┃ 대학생합창발표회┃대곡 초연┃
1974년 7월 18·19일에 오른 한국합창곡발표회가 첫 공연이었다. 창단 연주회를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구성한 것은 서구 음악의 모방만 치닫고 있던 음악계의 상황에 비출 때 의미 있는 첫 출발이었다. 공연은 ‘민족예술의 노래’(이은상 작사·김희조 작곡)로 막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국립합창단이니만큼 첫 연주회는 한국 합창곡으로만 꾸미겠다고 극장장에게 보고했다. 40명의 작곡가들에게 곡을 보내 주십사 부탁도 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온 곡은 몇 곡 되지 않았고 구색을 맞춰 하룻밤 음악회를 꾸미기에는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여성합창곡을 남성합창곡으로, 가곡이나 중창곡을 합창곡으로 편곡하기도 하면서 꾸몄다. 지금 보면 억지 춘향 격인 프로그램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나영수)”
나영수(1938~)는 국립합창단의 초대 단장이다. 제2회 정기공연은 1975년 2월 20·21일 그의 지휘로 ‘아베 마리아’ ‘할렐루야’ ‘영광’ 등의 종교음악, ‘새 몽금포타령’ 등의 민요, 오페라와 뮤지컬을 편곡한 합창으로 구성되었다.
1976년 7월에는 처음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시작했고, 4월과 12월에 정기공연을 가졌다. 특히 지방 순회공연은 이후 국립합창단이 매년 전국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여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를 통해 전국 조직인 한국합창총연합회(1976) 설립과 전국 시립합창단 창단에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1977년 제6회 정기공연부터 시작된 대학생작곡발표회는 음악학도들을 대상으로 하며 합창곡 창작 활성화에 기여했다.
“한국 합창곡만으로 꾸몄던 창단 연주회의 성공 이후 매년마다 한 번은 한국 합창곡으로만 무대를 꾸몄다. 3회가 지나고부터는 좋은 곡도 잘 생산되지도 않아 10년 계획으로 대학생 합창곡 발표회를 열었다. 10년간 150여명의 대학생 작곡가들과 작품을 놓고 분석·토론하며 연주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유익했던 사업이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응모 편수가 줄어서 마감기한을 연장하며 어렵게 치러 냈다.(나영수)”
1979년 제12회 정기공연은 6월 4·5일에 홍연택 지휘로 바흐의 B단조 미사를 공연했다. 대곡(大曲)의 국내 초연이라는 역사적 의의와 함께,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과의 협연, 국내에 부재한 오보에 다모레 주자를 위해 일본 NHK교향악단 단원을 초청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과 국민개창운동으로 합창 중흥의 분위기를 마련해줬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서거를 하고, 뒤 이은 12·12사태가 일어났다. 소용돌이는 국립극장도 피해갈 수 없었다.(나영수)”
1980년대
정기공연 증가┃단원 오디션┃나영수 사퇴┃ 창단 10주년┃환향녀
1980년은 국립극장 설립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합창단은 제14회 정기공연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올렸다. 1981년 제16회 정기공연에서 나영수는 브람스 ‘사랑의노래 왈츠’를 독일어로 연주했다.
1982년부터 국립합창단은 정기공연 횟수를 연 2회에서 4회로 늘렸다. 제19회 정기공연은 나영수 지휘로 대학생합창곡발표회가 6월 29·30일까지 열렸다. 그러나 나영수가 오디션 파문을 이유로 단장직을 사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새로 부임한 허규 국립극장장은 오디션 제도를 도입해 국립극장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오디션을 시행하지 않던 다른 단체와는 달리 합창단은 매년 자체 오디션(나 혼자 심사하고 단원들과 대화도 나누는)을 했기 때문에 따로 오디션이 필요 없다고 나는 순진하게 반대했다.(나영수)” 결국 이 일을 계기로 나영수는 홍콩에서 연 첫 해외연주를 마치고 1982년 말에 사임한다.
1983년 제24회 정기공연은 장충동 신축 국립극장 개관 10주년을 기념한 것으로 제2대 단장으로 취임한 배덕윤이 지휘를 맡았다.
“후임에는 국립오페라단 측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합창과 성악을 전공하고 서울음대에서 강의하며 의욕 넘쳤던 배덕윤 씨가 취임했다. 하지만 지휘자로서의 이상과 현실이 잘 맞지 않아 취임 8개월 만에 퇴임하게 되었다.(나영수)”
배덕윤의 사임 후 국립합창단은 1984년에 상임지휘자 공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던 중 나영수가 제3대 단장으로 재취임했다.
“후임 단장을 찾지 못해 공석은 계속 됐다. 주위의 권유와 극장장과 단원들의 간곡한 권유로 3대 단장으로 내가 재취임하게 됐다. 국립합창단만의 색깔과 위상을 위하여 큰 작품 위주로 프로그램을 짜기로 했다.(나영수)”
1985년 제31회 정기공연에서 바흐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요한 수난곡’을 선보였다. 아시안게임이 열린 1986년에는 제35회 정기공연 ‘아시아경기 대회 경축공연’을 춘천 시립문화관에서 가졌다. 1987년에는 1977년부터 선보인 대학생합창곡발표회가 10주년을 맞아서, 대학생합창곡발표회를 10주년 기념 공연(12월 4일)으로 선보였다. 1988년 제42회 정기공연은 예술의전당 개관(1988) 기념으로 로시니의 ‘작은 장엄 미사’를 국내 초연했고, 제43회 정기공연은 국립합창단 창단 15주년 기념 공연으로 선보였다.
1989년에 가장 주목 받은 것은 제47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 창작 가극 ‘환향녀’였다. 이종구가 작곡한 ‘환향녀’는 기존 오페라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주인공을 없앰으로써 극적 전개에 좀 더 집중한 작품이었다. 서양악기와 국악기, 전통무용과 현대무용, 신시사이저 등을 사용해 한국 오페라의 새 양식을 모색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1990년대
객원지휘┃한국적 정체성┃러시아 합동공연┃정율성┃IMF┃운영의 변화
국립합창단은 1991년 창작 칸타타로 최창권이 작곡한 ‘계백’을 야심차게 선보였다. 나영수는 최창권에 대해 “대표작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하여 많은 뮤지컬, 무용음악, 영화음악으로 일찍부터 우뚝 서 있는 분”이라며, “그는 대중과 순수를 자연스럽게 넘나들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두루 갖춘” 작곡가로 소개(10월 29일 공연팸플릿)했다. 1992년에는 다섯 개의 정기공연 중 4명의 객원지휘자 김병엽·염진섭·유봉헌·오세종가 함께 했다. 이러한 기획의 이면에는 국립합창단 창단 이후 서울시립합창단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인 전문 합창단이 탄생하면서 지휘자 부족이 큰 문제라는 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정체되기 쉬운 직업 합창에 신선한 피의 수혈”(1992년 3월 19·20일 제55회 공연팸플릿)을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국립극장은 임기가 만료된 나영수의 후임으로 부지휘자이자 서울시립가무단의 지휘자 오세종을 제4대 단장으로 임명했다. 1990년대 중반으로 향하면서 음악계는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실험을 구체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1994년 제66회 정기공연에 오른 이건용의 창작 칸타타 ‘들의 노래’는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전통 장단, 동학 노래로 알려진 ‘새야새야 파랑새야’, 천도교 신도들의 주, 전봉준의 유시 등을 중요 모티프로 삼았다.
1995년은 광복 50주년을 맞은 해로 제70회 정기공연을 겸해 ‘용비어천가’를 선보였다. 이영조가 작곡한 곡으로 “시조창, 판소리적 요소, 삼화음 구조의 전통 서양음악어법, 전자음향기기와 컴퓨터를 이용한 새로운 음향의 구성 등 지금까지의 음악사에 나타난 음악기법을 각 부분별로 총괄적으로 구사”(제70회 공연팸플릿)한 작품이었다. 1996년 ‘신춘음악회’는 러시아 국립방송 볼쇼이 합창단과의 합동음악회로 주목받았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과 한·중 수교, 한·소 수교 등을 계기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음악 수입 통로의 확장은 러시아・동유럽 등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1996년 10월 31일부터 이틀간 열린 제74회 정기공연은 정율성(1914~1976)의 가곡들을 선보였다. 정율성의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의 군가였는데, 당시 그의 존재는 국내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정율성의 가곡을 조명한 것은 당시로서는 선구자적 시도였다. 한편 오세종은 제75회 정기공연(1997)을 끝으로 사임하고 1년간 국립합창단은 객원지휘 체제로 운영된다.
1998년은 창단 25주년을 맞은 해로 단장 겸 예술감독직에 염진섭이 선임되었다. 그는 합창음악이 청소년에게 한층 가깝게 다가가도록 했으며, 제83회 정기공연은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 200명을 무료로 초대하여 골드 헤드폰(뼈의 진동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을 설치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메시아’를 선보인 제88회 정기 공연(1999.12.10·11/국립중앙극장 대극장)은 국립극장 전속단체로서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1999년 말 김대중 정부는 국립예술기관 구조조정 방침을 발표했고, 국립예술단체들의 이전 계획이 발표된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IMF라는 암운으로 정부는 국립극장의 몸집을 줄였다. 결국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과 같이 국립합창단은 몸담았던 국립극장을 떠나 재단법인으로 독립하게 됐다. 그 어려운 책임을 염진섭 단장이 떠맡게 되었다. 단장 호칭도 예술감독으로 바뀌었다. 합창단 운영의 모든 책임을 감독이 지는 것이었고 단원들의 신분도 호봉에 의해 받던 월급직에서 연봉인 계약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일본·러시아·대만 등의 해외 순회 연주를 성사시켰다.(나영수)”
2000년대
예술의전당 입주┃나영수 귀향┃해외(일본·독일) 공연
국립합창단은 27년 동안의 국립극장 시대를 마감하고 2000년 예술의전당으로 이전했다.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한 국립합창단의 행정·운영·예산·직제관리 등은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국 기초진흥과에서 관장하며 직접 지원을 받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1년의 첫 공연은 ‘한·일 친선 신춘음악회’였다. 바흐 음악에 정통한 오타니 겐지가 지휘를 맡아 멘델스존과 브루크너, 한국 합창곡을 비롯하여 일본의 합창곡을 선보였다. 2002년의 송년음악회는 헨델의 ‘메시아’로, 한·중·일 합동 연주로 국립합창단 100회 맞이 특별 공연이기도 했다. 2003년은 창단 30주년 기념작으로 1989년에 선보였던 ‘환향녀’를 ‘돌아온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렸다. 2004년 제105회 정기공연에서 이영조의 ‘죽은 자를 위한 네 개의 노래’와 브람스의 ‘독일진혼곡’을 연주했다. 이영조의 곡은 2003년 대구 지하철역 사고로 희생된 이들의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2005년에 김명엽 예술감독이 부임했다. 국립합창단은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을 선보였다. 김덕기의 객원지휘, 안산시립합창단, 프라임 필하모닉이 함께 했다. 2006년에는 독일 월드컵을 기원하고 한·독 수교 123년을 기념하고자 독일 쿠르하우스 비스바덴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김명엽 재직 시절에도 한국적 합창에 관한 시도와 실험은 지속되었다. 2007년 제118회 정기공연에서는 국악작곡가 박범훈의 합창 ‘정선’과 브루크너·포레의 합창곡 등을 선보였다. 강효주(민요)와 이자람(판소리),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함께 했다. 제119회 정기공연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를 국내 최초 전곡 연주로 선보였다. 2008년은 제7대 예술감독(2008~2011)으로 나영수가 세 번째로 취임했다.
“세 번째의 취임에서 나는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국립합창단이 한국 합창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창작의 산실이 될 수 있도록 대작 칸타타 3편, 소품 100편을 제작하고 악보를 만들어 전국의 합창인들에게 배포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합창지휘자가 부족한 현실에서 국립합창단이 지휘자 양성의 도장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지휘 횟수를 줄이고 중견지휘자 4명과 신예 지휘자 10명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나영수)”
2008년 창단 35주년 기념 공연 ‘35년의 노래’는 제123회 정기공연으로, 국립합창단에서 연주한 노래 가운데 나영수가 16곡을 선곡한 공연이었다. 2009년 기획 중 ‘신진지휘자 양성을 위한 데뷔콘서트’는 나영수가 만든 프로젝트로 젊은 지휘자들이 국·공립합창단의 문화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인큐베이팅 시스템이었다.
2010년대
나라오페라합창단┃전국실버·고교합창경연대회┃ 미래 양성
2011년에 제8대 예술감독으로 이상훈이 취임해 2014년 7월까지 국립합창단을 이끌었다. 2012년 국립합창단은 제141회 정기공연으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나라오페라합창단과 함께 했다. 나라오페라합창단은 2009년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국립오페라합창단원 해직 사건을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합창단으로 잠시 국립합창단 산하에 존재했다.
“한때 떠들썩했던 국립오페라합창단 사태는 염진섭 감독 때 일이다. 국립오페라단의 정은숙 감독(2002~2008)은 두 단체의 공연 스케줄이 자주 겹쳐 오페라단 산하에 합창단을 따로 만들었다. 내가 6년간 음악감독으로 지도 했는데, 정은숙 감독 후임인 이소영 감독이 국립오페라단합창단을 해체해버렸다. 갈 데가 없어진 단원들이 민노총 산하에 가입해서 격렬하게 데모를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그들을 3년간 국립합창단에 소속시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해질 것이라 생각한 국립합창단 단원들은 반발했다. 문광부와 노동부, 국립오페라단과 국립합창단, 해체된 단원들과 내가 복잡하게 얽힌 어려운 문제였다. 국립합창단 산하에 나라오페라합창단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에 기록해두려고 이 글속에 남긴다.(나영수)”
국립합창단은 전국실버합창단 경연대회(현 전국골든에이지(어르신)합창경연대회)를 기획·개최했다. 급격한 고령화 사회에 발맞춘 기획한 아마추어 합창 경연대회로 2012년 처음 개최된 이래 57개가 넘는 실버 합창단이 참여하여 경합을 펼쳤다. 2013년 국립합창단은 창단 40주년을 맞이하였다. 2013년과 2014년에 정기공연 이외 해외 연주, 데뷔콘서트, 전국고교합창경연대회 등 합창의 대중화와 수준 향상을 위한 여러 기획물을 선보였다. 2014년 제9대 예술감독으로 구천이 임명되어 이러한 여러 기획물을 지속시켰다.
2020년대. 그리고 지금
코로나┃온라인 콘텐츠┃위로┃미래
2017년 제10대 예술감독으로 윤의중이 취임했고, 2020년 재임명되었다. 그의 재직 기간에는 무엇보다 코로나로 공연이 원활하지 않았다. 지속되어온 여러 경연대회는 동영상과 온라인 등 비대면 콘텐츠를 통해 진행되었다. 펜데믹이 악화되면서 국립합창단은 지친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프로젝트 합창곡 ‘괜찮아요’를 온라인을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또한 지금까지 이어져온 창작의 전통을 어김 없이 발휘하여 미디어 콘서트 ‘포에틱 컬러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빛과 시 그리고 음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콘텐츠는 김영랑, 김소월, 박재상의 시를 음악으로, 음악에서 빛으로 확장된 합창 예술 콘텐츠로 클래식 영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리 송현민(편집장) 사진 국립합창단
(이 글은 국립합창단이 발간한 ‘국민과 함께 노래해 온 40년’(2014)에 게재된 나영수 전 단장의 ‘국립합창단 40년 회고’, ‘국립극장 70년사’(2020) 중 ‘국립합창단사’(김은영)를 발췌·요약했으며, 2020년부터의 역사는 국립합창단의 여러 자료를 참조했다)
PART 3 INTERVIEW
제10·11대 단장 겸 예술감독 윤의중
창작과 혁신으로 전통과 미래를 돌보다
2017년 제10대 예술감독으로 취임 당시 ‘국립합창단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고, 창작곡 발전에 힘을 실었다. 2020년 연임을 거치며 제11대 예술감독이 되었고, 지금까지 10곡에 가까운 창작 합창곡을 탄생시켰다. 50주년을 함께 맞이한 예술감독이 된 그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50년을 그려본다. 합창의 선구적 역할을 한 선배들이 전통을 남긴 것처럼, 후대의 음악가들이 지금의 국립합창단을, 그리고 열정을 다해 남기고 있는 창작 합창곡을 값진 유산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창작칸타타 ‘동방의 빛’과 ‘나의 나라’, 합창교향시 ‘코리아판타지’, 창작합창서사시 ‘훈민정음’ 등 최근 국립합창단에서 다수의 대규모 창작곡을 선보여 왔다.
‘국립’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의무감이 있었다. 우리나라 연주자들의 실력에 비할 때, 창작 음악의 발전 속도가 저조하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국립합창단만의 대표 레퍼토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다.
목표한 성과를 어느 정도 거두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이야기를 다뤘고, 전통 악기나 소리와의 협업을 통해 특유의 정서를 가진 공연들이 탄생했다. 합창이라는 분야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장르를 개척해온 것 같다. 6년간 10곡 정도를 발표했는데 무엇보다도 초연곡들을 재연하는 것이 중요했다. ‘훈민정음’의 경우 지방 공연까지 포함해 10번 이상의 공연을 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클래식 ‘명작’들도 초연 이후 많은 수정을 거치며 재연되었다. 우리 또한 사명감을 가지고 송년음악회나 신년음악회를 열어 대중도 즐겨 들을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남기고자 노력했는데 그 바람이 잘 이뤄진 것 같다.
일반적으로 관객이 합창 공연을 관람할 때는 가사 전달을 분명히 하고자 종종 자막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방식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듣고 싶다.
합창은 음향적으로는 소리가 잘 전달되더라도, 가사가 안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훈민정음’의 경우 자막을 사용했고 좋은 효과를 거뒀다. 합창에서는 가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선이 분산된다는 관점에서 관객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어떤 작품이든 단순히 가사에만 의존하여 이해하기보다 미리 그 곡에 대해 공부도 하며 이해도를 높이고 공연장을 찾는다면 더 많은 감동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창작적 요소를 활용하여 작품이든 공연의 형태든 기존과 다른 공연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와 단원들도 그렇고, 국립합창단에서의 활동에는 사명감과 의무감이 배어 있다. 연간 공연 횟수도 많고, 심지어 특정 달에 몰려 있어서 한 달에 15회 공연을 할 때도 있었다. 무척 힘든 스케줄인데, 이를 잘 견디는 단원들을 볼 때면 같은 음악가로서 좋은 동료를 만났다는 마음과 감사함을 느낀다.
창단 50주년 기념 공연으로 선보인 ‘창작칸타타 베스트컬렉션’(6월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는 초대 단장 나영수 지휘자와 은퇴 단원들이 한 무대에 올랐다.
어떤 분야든 존경할 만한 선배를 두었다는 것은, 그 분야 발전 자체에 큰 의미를 끼친다. 은퇴 단원들이 당시 열정을 쏟아 만들어낸 국립합창단의 전통을 잘 이어받고, 지금의 역사를 후세가 잘 본받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재단법인 운영 방식 내에서 전통과 예술성을 잃지 않고, 청중 확보를 통한 재정의 안정화를 확보하는 것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국립합창단이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국비 지원만으로는 어떤 예술 단체든 성장하기 어렵다. 기업의 후원 및 기부 문화가 활성화돼야 미래가 더욱 밝을 것이다.
한 지역의 건강한 예술계 형성의 기본 인프라로 합창이 꼽힌다. 합창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기능한다고 생각하는가.
프로 합창단도 물론 많은 역할을 하겠지만, 생활 합창도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다. 합창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오늘과 같이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이 약화되는 시기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까운 공터 어디에나 운동 시설이 있는 것처럼, 사회 어느 곳에서든 합창에 참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정서에 좋은 순환 구조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다양한 감수성을 다루는 생활 합창곡을 많이 남기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하반기 국립합창단의 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
8월 30일에 카를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 31일에 류재준의 신작 ‘미사 솔렘니스’를 선보인다. 최근 발표된 그의 교향곡 2번을 함께 연주할 때도 느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곡을 쓰는 뛰어난 작곡가다. 75분가량의 긴 작품이지만, 라틴어 가사이다. 해외 관객들도 국립합창단을 통해 언어 장벽 없이 뛰어난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9월에는 한류 확산 프로젝트로 미국의 시카고, 워싱턴DC, 뉴욕, LA에서 우리의 창작 합창곡을 선보이는 투어를 예정 중이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강태욱(Workroom K)
부지휘자 유수정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 위에 서다
윤의중 예술감독을 도와 공연 전반의 사항들을 세워나간다. 악보 리딩, 가사 통일, 암보 등의 작업을 맡는다. 레퍼토리의 구성과 흐름이 매끄럽도록 돕고 기름칠을 한다. 유수정은 이처럼 기초와 기본을 닦아 그 위에 합창의 집이 잘 지어질 수 있도록 한다. 2022년부터 부지휘자로 함께 하고 있는 유수정(1983~)은 연세대 교회음악과 합창지휘(학사)를 전공하고 미국 신시내티 음대 합창지휘 석사 졸업, 오클라호마 음대 합창지휘 박사과정을 마쳤다.
‘국립합창단’의 강점은 무엇인가?
단원들의 개인 기량이 뛰어나다. 연주의 경험이 풍부하며, 새 작품을 소화하는 능력도 높다. 무대에서의 집중력도 강점 중 하나다.
최근 국립합창단 무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지난 2월, 국립합창단은 미국 ACDA(미국합창지휘자협회)의 초청을 받아 신시내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단원들은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관객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다. 50주년 기념 공연인 ‘창작칸타타 베스트컬렉션’에서는 한국의 역사를 합창과 오케스트라, 국악기와 판소리 등과 결합한 작품으로, 역사적 서사를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젊은 합창지휘자’로서 느끼는 현실은 어떤가. 양질의 지휘자를 양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합창지휘자의 활동은 현실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휘자 양성을 위해서는 지휘자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보다 많은 기회가 필요하다. 합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물질적 후원이 모아진다면, 지휘자들이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허서현
PART 4 SUMMARY
2022·23 주요 활동 연보
걸어온 길을 보며 걸어갈 길을 기대하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합창이 필요한 장소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다양한 모습과 레퍼토리로 국민을 만나왔다. 객석을 가득 메운 공연부터 축제까지, 합창이 울려 퍼지는 곳에는 항상 국립합창단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됨에 따라 공연장에서 관객과 호흡할 수 없었을 때도 무관중 온라인 공연으로 사람들과 함께했다.
정리 김강민 수습기자
PART 5 Group INTERVIEW
각 성부의 파트장 박송이·최성철·강문선·주호남
50년 역사의 원동력, 파트장들의 이야기
소프라노 파트장 박송이(2007년 입단)
50주년을 맞아, 50년 후를 그려봅니다
2014년 ‘객석’에서 국힙합창단을 다루면서 ‘울릉도에서 유럽까지’ 모두 누비는 단체라고 표현한 것이 기억나네요. 국립합창단은 여전히 합창이 필요한 곳이 어디든 달려가고 있습니다. 50주년을 맞아 기념 공연을 하면서, 100년 기업으로 향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립합창단은 관객 점유율이 높은 편이에요. 좋은 전통을 선배들로 물려받은 것처럼, 후배들에게 지속 가능한 합창단, 사랑받는 합창단으로 우리나라에서 모범이 되고 세계 음악계에서도 우뚝 서 있는 합창단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테너 파트장 최성철(2005년 입단)
합창을 통해 삶을 배웁니다
50주년을 맞아 국립합창단이 여러 공연들을 해내고 있는 것이 큰 영광입니다. 합창의 간단한 정의는 두 사람 이상 모여 노래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삶 자체를 배울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합창을 하는 것도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지난해에 음반(‘Voices of Solace’)을 녹음하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해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국립합창단의 모습이 나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막연한 K-클래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에 걸맞은 도전을 이어가기 위한 행보였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최근 국립합창단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이나 헨델 ‘메시아’와 같은 작품을 연주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이 작품들이 종교의 관점이 아닌 문화적 관점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길 희망합니다.
알토 파트장 강문선(2004년 입단)
자부심의 크기
창단 50주년 공연에서 무대에 오른 은퇴 단원들을 보며 ‘나도 50년 후에 저분들처럼 합창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요즘 국립합창단의 공연 일정은 너무 바빠서, 당장 눈앞에 있는 공연을 해내느라 분주했거든요. 선배들이 일궈낸 것들 위에, 우리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으니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아준다면 더 힘이 날 것 같네요. 저는 무대 위에서 늘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사실 단원들 각자는 최고의 실력자로 살아온 이들이잖아요.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노래하는 것을 볼 때면 ‘역시 국립합창단!’이라는 찬사가 저도 모르게 나옵니다.
베이스 파트장 주호남(1998년 입단)
‘국립’의 가치가 더욱 빛날 그날까지
훌륭한 기량들을 갖춘 단원들은 정통 클래식 합창부터 창작곡까지 두루 소화하고, 그들의 자부심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여러 세대가 모여 어우러지는 가운데, 도전적인 대규모의 프로젝트부터 작은 소도시에서의 공연까지 모두 ‘국립’이라는 가치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은퇴 단원들과 함께 한 공연에서도 그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관객의 관심과 여러 지원이 더 늘어난다면 국립합창단이 가진 잠재력이 지금보다 폭발하는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PART 6 FESTIVAL PREVIEW
국립합창단이 참여하는 강릉 세계합창대회 7.3~13
전 세계 사람들의 합창 즐기기
오는 3일, 강릉에서 34개국·323개 합창팀·총 8천여 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세계합창대회가 개최된다. 2002년 부산 개최 이후 21년 만의 한국 개최로, 두 번 개최가 된 국가는 오스트리아와 한국이 유일하다. 2000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12회를 맞았으며, 국경·인종·배경·장르를 뛰어넘어 모두가 즐기는 축제를 지향한다.
국제대회 참가 이력을 보유한 합창단이 참가하는 챔피언 경연과 합창 전문가로부터 코칭·평가·조언을 받는 오픈 경연, 만 6~12세의 합창 꿈나무들이 참가하는 어린이합창단 부문과 연륜이 느껴지는 만 55세 이상의 시니어합창단 부문, 장르를 가리지 않는 현대음악·종교음악·민속음악·재즈·팝까지 경력, 나이, 장르에 상관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준비되어 있다. 부대행사도 다채롭다. 국립합창단·강원도립무용단·강릉시립합창단의 축하 무대, 세계 합창단의 거리 행진, 워크숍 등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어느새 합창의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글 김강민 수습기자 사진 강릉 세계합창대회
강릉 세계합창대회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