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LLENGE
플루티스트 한여진
어른스러운 젊은 연주자
편견에 굴하지 않은 의연함으로 독일 유명 악단의 수석에 오르다
국내에서 플루트는 ‘우아함’과 ‘예술적 허영’의 이미지를 포괄하며 ‘여성의 악기’로 취급된다. 악기 소재인 백금을 귀금속 사치품 이미지로 인식하면서부터다. 2023년 교향악축제에 참가한 19개 국내 악단에서 남성 플루트 수석이 있는 곳은 창원시향(김동욱)과 제주도향(전재욱) 뿐이다.
그러나 세계적 오케스트라 기준에서 실상은 정반대다. 베를린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파리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NHK 심포니처럼 국가를 대표하는 악단의 수석 플루티스트는 전부 남자다. 유럽과 미국 중견 악단으로 범위를 넓혀도 성별 분포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프레이즈를 소화할 순발력과 악기 중량을 다룰 근력, 소리를 ‘짱짱하게’ 뽑을 파워를 중시하면서 남성을 압도적으로 우대했다. 박예람이 벨기에 모네 왕립 심포니 수석에 임용됐지만 ‘동양’ ‘여성’ 중에 ‘어린’ 플루티스트가 일류 유럽 악단의 수석에 오르기는 ‘하늘에 별따기’다.
뮌헨 국립음대 안드레아 리버크네히트(1965~) 문하의 2001년생 한여진이 ‘별의 순간’에 다다랐다. 지난 2년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한 한여진은 북독일 엘프필하모니 수석 플루티스트 오디션에 합격해, 올 8월부터 2년간 연수를 시작한다. 솔리스트적 기교, 앙상블의 블렌딩, 악단 구성원으로 처신하는 사회성을 평가받고, 정단원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종신 수석이 된다.
‘실력은 인정하겠으나 뭔가 안 맞는다’며 동양인 여성의 입단을 부결시킨 무수한 사례를 보면, 수석 트라이얼은 미운 인상을 지워야 선거를 이기는 정치인의 운명과 닮았다. 한여진이 밟을 여정은 꽃길보단 가파른 길에 가깝다. 그렇지만 세계 정상급 플루티스트를 지망한다면 이 길이 옳은 길이다. 제임스 골웨이(1939~)와 에마뉘엘 파위(1970~)도 베를린 필 수석이 아니었다면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좋은 악단 수석으로 솔로와 실내악 활동을 병행한다면 그것이 성공한 플루티스트 인생이다.
지난 7월 7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한여진 플루트 리사이틀은 콩쿠르와 오디션 인생을 정리하는 의정보고회 겸, 트라이얼에서 이기고 오겠다는 출정식 성격이 함께 했다. 전반부 바흐 ‘샤콘’, 카르그 엘레르트 ‘교향적 칸초네’, 폴 타파넬 ‘마탄의 사수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젊은 엘리트 연주자의 가능성을 시연하는 자리였다. 플루티스트 조성현, 첼리스트 김진경, 피아니스트 문재원과 함께한 후반부의 바흐 트리오 소나타 BWV1039, 프로코피예프 플루트 소나타 연주는 한여진이 악단에서 어떤 앙상블을 이뤄야 사랑받을지 자문자답하는 시간이었다.
지난 고베 콩쿠르에서 ‘마탄의 사수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불었다. 개성이 지나치면 악단이 원하는 특정한 소리와 역할에서 멀어질지 모른다는 부담은 없나?
솔로로 연주할 때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할 때 내 소리가 많이 다르다. 플루트가 언제나 블렌딩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고 수석이라면 개인적 역량을 더 중시하는 움직임도 느낀다. 독주회와 오케스트라에서 사용하는 주법이 애초에 다르기도 하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을 이끌던 시절, 파위도 잠시 안식년을 갖고 다른 악단에서 활동했다. 베를린 필처럼 전통의 악단이라면 자신의 소리를 찾아가는 개인의 여정을 지지하지만,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이 개편된 엘프 필하모니는 과도기 악단이다. 이럴 때 입단이 부담일 수도 있는데.
독일에서 공부하다 보니 남독일 악단에 끌리긴 하지만 지금은 북독일에서 배울 단계다.
독일 유학 기간에 ‘득음’의 순간이 있었나?
어려서부터 소리에 고민이 참 많았다. 유학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뮌헨 음대 안드레아 교수님을 만나서 배우기도 했지만 소리란 게 빨리 변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2018년 가을 유학을 왔는데 혼란한 기간과 코로나를 지나 2021년 게반트하우스에 가면서 소리를 배운 게 나에겐 득음이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은 공연은.
말러 페스티벌이다. 안드리스 넬손스와 교향곡 2번, 8번을 함께 했다. 넬손스가 낭만주의 곡의 에너지를 정말 잘 끌어낸다. 리허설 동안 솔로가 실수를 하면 크게 창피했는데 넬손스는 자괴감을 느끼지 않도록 편안하게 리허설을 만든다. 인격이 정말 특별하다.
7월의 공연을 되짚으며
독주회 내내 지치는 모습이 없던 게 인상적이다.
그렇게 보였나? 전혀 아니다.(웃음) ‘내가 연주를 끝까지 마칠 수 있을까’ 하며 연주했다. 그래도 청중이 모이면 힘이 올라오는 편이라 스스로 보기엔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좋다.
바흐 ‘샤콘’의 플루트 연주는 무언가를 참고한 것이었나.
카를 닐센 콩쿠르 출전 때 심사위원 중 한 분께 악보를 받았다. 유튜브를 통해 바이올린, 피아노, 플루트 연주를 찾아봤는데 맘에 드는 편곡이 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연주를 위해 여러 부분을 필요에 따라 내가 직접 수정해 갔다. 연주회 첫 순서로 둔 것도 도전이었다.
샤론 베잘리(1972~)를 빼면 플루티스트가 안정적으로 음반을 내면서 성장하는 건 어렵다. 성장의 계기를 만들려면 필요한 게 뭘까?
공연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이번 독주회를 주최한 측(플루트아트센터)은 개런티를 떠나, 아티스트가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후반부 바흐 트리오 소나타를 듣다 보니 클로드 볼링 편곡의 장 피에르 랑팔 프로젝트가 연상됐다. 플루티스트가 정말 잘 불면 클래식 음악과 재즈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이 있다.
나 역시 재즈가 좋다. 2015년 막상스 라뤼 콩쿠르에서 수상한 곡도 재즈였다. 그전에 없던 확신이 새로 생겼다. 작곡가가 내 연주를 무척 좋아했고 작곡한 원본도 선물했다.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티스트의 성공은 어떤 기준으로 판정될까?
단지 좋은 지휘자, 잘하는 악단이 아니라 내 삶을 잘 형성할 환경이 함께 하는 오케스트라에 머문다면 성공이라고 개인적으론 정의한다. 그래서 독일에서 나는 계속 연주 생활을 이어가고 싶다. 유학 초기부터 스승(리버크네히트)은 현실을 이야기했다. “너는 여자고 동양인이고 어리다. 너는 다른 사람 보다 다섯 배는 잘해야 겨우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버틸 것이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한여진(2001~) 201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플루트 컨벤션에서 만 9세의 나이로 유럽에서 데뷔했다. 2014년 카를 닐센 콩쿠르 특별상, 2015년 막상스 라뤼 콩쿠르 작곡가상, 2016년 베를린 콩쿠르 1위를 달성했다. 2021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플루트 수석과 부수석으로 활동했으며, 2023/24 시즌부터 독일 NDR 엘프 필하모니의 플루트 수석으로 임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