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수현
서울시극단 ‘굿닥터’에 출연 중인 그의 활발한 활동과 부지런함을 살피다
올 하반기 연극계의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발견되는 배우가 있다. 연극배우 김수현. 역할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팔색조이지만, 그것을 과시하거나 뽐내는 데에는 별로 관심 없다. 상대방과 주고받는 호흡이 만족스러우면 그 자체로 행복하고, 연습을 시작하면 한시도 쉬지 않고 인물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배우다. 한 작품에 깊게 빠져들며 집요하게 집중하는 편이라 좀처럼 다작(多作)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올해는 그의 출연작이 세 편이나 연이어 공연되었다. 관객 입장에서는 좋은 배우의 연기를 계속 볼 수 있어 참으로 반가운 일이지만 배우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터, 서울시극단의 ‘굿닥터’(10.6~11.12)에서 열연하고 있는 그를 만나 연극배우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올 하반기 활동이 돋보입니다.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7.2~8.6), ‘토카타’(8.19~9.10), ‘굿닥터’(10.6~11.12)를 쉬지 않고 연이어 공연하고 있습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특별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작품을 준비할 때 연출가나 관계자들이 저를 떠올려주시는 것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고마운 일들이 운이라고 생각해요.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원래 성격은 주목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라 배우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격과 맞는 직업을 고민하다가 건축가가 되려고 했었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자다가 깨서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랬는지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영화학과에 진학했는데, 그땐 연극학과와 이제 막 분리된 때라 선배들은 영화와 연극을 구분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연극학과 일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선배들 작업에 조명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마지막 날 모든 참여 스태프가 무대로 나와 커튼콜을 함께 받게 됐어요. 그때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주었습니다. 설레고 심장이 막 뛰고 흥분되고. 그 기분을 잊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배우가 됐고, 그 박수 소리에 홀려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역할에 몰입하는 그 남자의 시선
각 작품을 보면, 같은 배우인가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얼굴로 당당해서 공포스럽기까지 한 아이히만(‘아이히만’), 대사의 울림으로 상실과 외로움 자체를 표현했던 남자(‘토카타’), 작품 전체를 쥐락펴락하며 즐거워하는 작가(‘굿닥터’)는 서로 성격도 다르고 결도 다릅니다. 캐릭터를 분석하고 표현하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특별한 방법은 없지만, 대본을 열심히 보는 편입니다. 연출가에게도 많이 기대요. 대본을 놓고 같이 상의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인물을 구체화합니다. 인물에 대해 생각이 많고 오랫동안 고민을 하기 때문에 한 작품에 집중하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러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작업하는 것이 많이 어렵습니다. 올해는 예외적인 경우라 좀 부담이 됐습니다.
그동안 출연했던 작품을 보면 배역이 크고 작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역할도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을 봤거든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이렇게 답을 드려서 좀 죄송한데, 선착순입니다.(웃음) 배우라는 직업이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제안을 받으면 그 작품이 마치 제 운명처럼 느껴져요. 일정 맞춰보고 가능하면 함께 작업을 합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는데, 특히 어려웠던 역할은 무엇인가요? 덧붙여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어떤 역할일까요?
모든 역할이 다 어렵습니다만, 가장 최근 작품이라 ‘토카타’의 남자 역할이 기억에 남습니다. 상대역인 손숙 배우와 직접 대사를 주고받지 않은 상태에서 온전히 남자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이 작품 전체적으로는 또 조화를 이루어야 했거든요. 어느 정도의 감정선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연출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해보고 싶은 역할은 딱히 없지만 좀 단순하고 가벼운 인물을 해보고 싶어요. 그동안 해왔던 인물들이 대체로 진지하고 무게감이 큰 인물이라서 소박하고 단순한 인물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멜로드라마도 안 해봤네요. 정통 멜로드라마의 남자주인공도 좋고요.(웃음)
쾌활하고 명랑한 ‘굿닥터’의 작가
연극 ‘굿닥터’는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재치있는 단편들을 각색해서 엮은 옴니버스 희곡이다. 토니상, 퓰리처상 등을 수상한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작가, 닐 사이먼(1927~2018)이 체호프에 대한 존경심으로 각색했다.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익살스러운 이야기 속에 보여주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재채기’ ‘가정교사’ ‘치과의사’ ‘늦은 행복’ ‘물에 빠진 사나이’ ‘생일선물’ ‘의지할 곳 없는 신세’ ‘오디션’으로, 총 8개의 에피소드를 선보인다. 에피소드는 ‘작가’ 역을 맡은 배우가 등장해 자신의 작품에 대해 관객에게 말을 건네며 시작된다.
‘굿닥터’에서는 작품을 쥐락펴락하는 ‘작가’ 역을 맡았습니다.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작가 역을 들여다볼수록 쉽지 않았어요. 작가가 극 밖에서 계속 자신이 창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자 혹은 전지적 시점의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극 중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극중극 속 하나의 인물처럼 보여야 할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정확히 선을 긋듯이 답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에피소드에 따라 결을 다르게 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연극을 완성하는 것은 관객이잖아요. 관객의 반응을 보면서 거기에 맞춰 태도와 정서를 유지하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아직 공연 초반이라 계속 탐색하고 있습니다.
‘굿닥터’는 여러 에피소드를 모은 희곡입니다. 극중 작가의 입장에서, 마음이 가거나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생일선물’이 조금 더 정서적으로 와 닿습니다. 물론 요즘 감수성으로는 성매매 자체가 문제적이긴 하지만, 아들을 어른으로 인정하고 싶으면서도 귀여운 아들로 머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상반된 감정, 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크게 와닿습니다. 에피소드를 소개할 때도 작가의 어렸을 때 일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더 마음이 가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자지간의 보편적 감정이 저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작품 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이번 공연에서 처음 봤습니다.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농담하는 모습도 처음 봤어요. ‘굿닥터’의 배역이 작가이기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을 스스로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도 춤추고 노래하는 연기를 볼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웃으며 춤추고 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정말 힘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사람의 시선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연기도 힘든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더더욱 힘듭니다. 다시는 못할 것 같아요.(웃음)
배우 김수현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참 아쉬운 일이다. 쑥스러운 듯, 즐거운 듯, 환하고 밝은 표정이 김수현 배우와 제법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함, 외로움, 경쾌함이라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정서들을 각각의 작품에서 색다른 인물로 펼쳐낸 김수현은 깊고 너른 강처럼 조용하면서도 한결같은 모습의 배우다. 그렇듯 거대한 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상대 배우에 대해서, 연출에 대해서, 관객에 대해서 항상 귀를 활짝 열고 그것에 명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품으면서도 전혀 생색내지 않는 강과 같은 배우. 그가 연극무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배우라서 참 든든하다. 내년에는 진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그를 다시 또 만나길 기대해 본다.
글 배선애(연극 평론가) 사진 세종문화회관
Performance information
서울시극단 ‘굿닥터’
10월 6일~11월 12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닐 사이먼(원작)/김승철(연출)/문새미(번역)/김수현(작가 역), 김귀선(장관·경관·아버지 외), 정원조(사제·지배인 외), 문상희(장관 부인·여자 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