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게르하르트 오피츠
빌헬름 켐프 이후, 독일 피아니즘의 계보를 이어 온 건반 앞의 파일럿
연주자에 관한 자료를 찾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꽤 오래된 자료도 마주치곤 한다. 그렇게 찾은 2008년 독일에서 촬영한 40여 분의 다큐멘터리. 이 인터뷰의 주인공인 게르하르트 오피츠의 머리 위로 제목이 뜨며 시작하는데, 그를 두고 ‘파일럿’이라 칭한다. 처음에는 그의 자유로운 음악세계를 뜻하는 은유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더니, 영상의 말미에 항공 제복을 입은 그가 기장이 앉는 곳에서 능숙하게 비행기를 모는 것이 아니겠는가. 깜짝 놀라 공연 이야기를 제쳐두고 최근에도 비행기를 조종하는지 먼저 물었다.
“그럼요. 여전히 비행을 좋아합니다. 유럽에서 공연을 할 때면 종종 직접 비행기를 몰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하늘을 날며 그들의 목적지에 내려주는 운전기사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가진 항공기는 정교한 전자기기를 갖춘 고성능 제트기입니다. 최신의 기술과 지식을 익혀서 운전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꾸준히 도전해 왔어요. 일상을 뒤로한 채 콕피트(조종석)에 앉아 270도로 펼쳐진 창문을 보면 정말 특별한 순간이 펼쳐집니다.”
이어진 문답에서는 그의 음악을 향한 꾸밈없는 진심은 물론,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작가이자 파일럿이었던 프랑스인 생텍쥐페리(1900~1944), 그리고 그가 쓴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파일럿도. 비행을 하는 예술가가 바라본 그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진하게 다가왔다. 인터뷰를 위해 들었던 그의 리스트 ‘사랑의 꿈’이 유난히 순진한 첫사랑 같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10년이 넘었다고.
1997년에 첫 방문을 한 후, 2000년·2003년·2008년에 내한했으니 15년 만이다. 2020년 평창대관령음악제에 참가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한 격리 규정이 엄격하여 포기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공연과 리허설 전까지 피아노가 없는 공간에서 2주간 머물러야 했는데, 독주회를 준비하는 피아니스트로서 불가한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기억 속의 한국은 친절하고 애정 어린 신사·숙녀가 많았고, 덕분에 지금도 다가오는 서울 공연을 매우 고대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1895~1991)에게 젊은 날 마스터클래스를 받은 후, 그 인연이 이어져 사제관계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빌헬름 켐프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청중에게 그는 위대한 음악가이지만, 제자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친절한 신사였다. 젊은 연주자에게 여러 영감을 나눠주곤 했는데, 프레이징과 노래하는 선율을 만드는 법, 특정한 음색을 만들어 내는 법, 템포에 자유를 주는 법, 피아노 작품을 오케스트라 작품처럼 들리게 하는 법 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테크닉을 전수해 준 것인가?
그 반대이다. 그는 일반적인 ‘피아노 선생님’과 다르게 연주의 기술적인 면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젊은 연주자들이 테크닉을 익히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믿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알려 줄 시간에 작곡가를 향한 존경심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예술적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줬다. 그의 생전에 무대를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이 여러 번 주어졌는데, 그때마다 원래 알던 작품도 천국에서 내려온 듯이 새롭게 들려서 큰 감명을 받았다.
고향을 마음에 새긴 채 세계를 탐구하는 여행가
그러한 스승과 유사하게 독일 작곡가의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독일인으로서 독일 레퍼토리에 집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느껴지는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작곡가의 레퍼토리는 어린 시절부터 익힌 모국어 같다. 바흐·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슈만·브람스·레거·슈트라우스·쇤베르크 등의 독일 작곡가들에게서 집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껴왔다. 이들 모두가 독일의 문화적 배경에서 자랐고, 독일 문화와 상호 작용하며 존재했기 때문이다.
스승보다는 더 넓게 독일 레퍼토리를 탐구했다. 언급한 막스 레거(1873~1916)가 대표적인 예이다. 1990년대부터 연주해왔고, 2018년에는 이 실황을 담은 음반(DG)을 발매하기도 했다.
지금도 항상 독일이 가진 문화유산에 감탄하고 있는데, 이를 탐구할수록 스스로 더 성숙해지는 걸 느낀다. 수십 년에 걸쳐 이러한 감각을 얻는다는 것에 감사하다. 독일이라는 소재는 내게 영원한 영감의 원천일 것이다.
그 레퍼토리의 중심에는 브람스가 있다. 2009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브람스 연맹이 수여하는 ‘브람스 상’을 받았고, 2014년에는 브람스가 생전 받았던 바이에른 막시밀리안 과학 예술 훈장을 받았다. 브람스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며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을 4일에 걸쳐 연주하는 음악회를 30여 회 진행해왔고, 그가 남긴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200번이 넘게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왔다. 관객들도 이런 노력을 알아주었는지, 공연이 끝난 후 내게 좋은 대화를 걸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이 브람스의 작품에 점점 더 빠져들도록 격려하곤 했다. 이렇듯 브람스의 음악에는 오랫동안 깊은 애정을 키워왔다. 그가 죽고 56년이나 지난 후에 태어났지만, 그의 음악을 듣고 연주함으로써 그에게 더욱 다가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브람스는 내성적이고, 삶의 깊은 감각을 알아내려고 했고, 친우의 말을 꺾어버리기보단 귀를 기울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브람스만 연주하는 것은 또 아니다. 이번 내한에서는 슈베르트와 리스트를 연주하고, 일본 작곡가의 작품만 모아서 연주한 음반도 발매했다.
어렸을 적부터 슈베르트와 리스트를 참 좋아했다. 19세기 빈의 문화 영향 아래에 자란 두 작곡가는 모두 베토벤을 열렬히 숭배했던 이들이다. 슈베르트의 이른 죽음으로 리스트와 슈베르트가 서로를 충분히 알 시간이 없었는데도, 리스트는 슈베르트 역시 매우 존경했고, 그의 가곡을 피아노로 옮겨서 유럽 관객에게 선사했다.
색다른 레퍼토리에 도전하는 것은 한계를 넘고자 하는 의지가 주는 자연스러운 방향이다. 다른 나라의 음악을 포함하여 언어·생활방식·문화 관습 등을 공부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실제로도 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스페인·헝가리 등의 음악에 빠졌었고, 음반 녹음 기회가 찾아온다면 언제든 도전하고 싶다.
어느새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의 나이에 더 가까운 세월이 다가왔는데,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이 가진 레퍼토리, 그 너머의 레퍼토리에 가능한 많은 시간을 투자하도록 격려하고 싶다. 예를 들어 당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하고 싶다면, 그의 오페라를 공부하는 것이 전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며,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그의 가곡 세계를 알아야 한다. 다른 작곡가도 모두 마찬가지다. 나는 평생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시간보다 피아노 밖의 세계에 놓인 음악을 탐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모두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가능한 모든 감각을 열어 시간과 공간을 향해 나아가자!
글 이의정 기자 사진 금호문화재단
게르하르트 오피츠(1953~) 1977년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첫 독일 우승자로, 빈 필과 베를린 필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했다. 1978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의 데뷔 음반 이후 78장의 음반을 발매했고, 1981년 뮌헨 국립음대에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Performance information
게르하르트 오피츠 피아노 독주회
11월 2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연세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5번, 환상곡 ‘방랑자’, 리스트 발라드 2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