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GAME&MUSIC_8
게임을 듣다
메이플스토리
반짝이는 추억, 성장하는 용사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넥슨의 MMORPG(대규모 사용자를 위한 온라인 게임/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메이플스토리’는 자타 공인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입니다. ‘메이플스토리’가 지금까지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에는 아기자기한 그래픽, 다채로운 맵과 탄탄한 직업 시스템, 그리고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수 백 여개의 ‘음악’이 있죠. 이번 호에서는 ‘메이플스토리’의 음악이 왜 특별한지에 대해 알아보고 제가 다녀온 특별한 공연의 후기를 남겨보겠습니다.
음악이 그려낸 화면 너머의 판타지
음악이 게임을 이루는 요소들과 유저의 경험에 딱 들어맞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음악을 좋은 게임음악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메이플스토리’의 ‘엘리니아’라는 마을의 음악입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솟아오른 나무로 우거진 요정들의 마을, 엘리니아는 마법사를 선택한 모험가들이 주로 활약하게 되는 장소입니다.
이곳의 음악 ‘달빛의 그림자(Moonlight Shadow)’는 피아노와 플루트의 청량한 음색을 사용하여 초록색 숲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리듬은 통통 튀는 부점 리듬을 사용하여 게임 플레이에 활기를 더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듣다 보면 유저는 저절로 고개를 들썩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키보드를 누르며 점프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낍니다. 이러한 감정을 유도하는 것은 영리한 설계라고 생각합니다. 엘리니아는 가로로 길게 늘어진 다른 마을들과는 달리 세로로 길게 뻗어 있는 형태여서 점프를 하거나 사다리를 타며 맵을 종적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숲의 청량한 이미지와 점프를 해야만 하는 유저의 경험, 이 두 가지를 반영하는 듯한 엘리니아의 음악은 그야말로 좋은 게임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메이플스토리’의 음악은 판타지 세계를 훌륭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음악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장소에 담긴 이야기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왕국 ‘루디브리엄’은 얼핏 본다면 동심이 가득해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이 정지해 있고 아래로 갈수록 손길이 닿지 않은 낡은 장난감들이 기괴한 몬스터로 변모하여 유저를 위협하는 그로테스크함이 공존하는 곳이죠.
경쾌한 팡파르로 시작하는 루디브리엄 마을의 음악은 3박자의 밝은 왈츠 음악으로 금관악기와 캐스터네츠, 스네어 드럼 등의 타악기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난감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루디브리엄 성 안으로 들어가 장난감 공장에 다다르면 왈츠 풍의 음악과는 비슷하지만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들이 들리면서 음악이 묘하게 기괴해지기 시작하죠. 더욱더 깊숙한 곳, ‘시계탑 최하층’이라는 공간에 다다르게 되면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시계가 흘러내리고 있고, 깜찍한 장난감 몬스터가 아니라 무서운 외형의 괴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음악은 여전히 루디브리엄 마을에서 들을 수 있었던 3박자를 고수하고, 스네어 드럼이나 캐스터네츠 등의 타악기들을 사용하면서, 서로 상반되는 분위기의 일들이 루디브리엄이라는 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온전한 것은 음악
유저들이 ‘메이플스토리’의 음악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메이플의 음악들이 훌륭하기도 하지만, 그 음악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청취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메이플스토리’는 사냥, 아이템 수집 등 긴 시간을 요하는 과제들이 많은데, 그럴 때 무수히 긴 시간 동안 반복되는 음악은 유저의 기억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로 인해 유저들이 메이플의 음악을 들으면 좋고 나쁨의 감정을 넘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받기도 하죠. 그 이유는 그들이 강렬한 노스탤지어, 즉 향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메이플스토리’에 다시 접속한다 할지라도 예전과 같은 기분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메이플스토리’ 역시 2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여기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과거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음악’뿐이고, 과거의 모습을 온전하게 지킨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향수를 느끼게 되는 셈이죠. 이러한 음악을 공연장에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요? 재즈와 만난 메이플스토리 10월 9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재즈 온 메이플스토리’의 마지막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 공연에서는 올해 3월에도 한국을 방문한 네덜란드의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와 작년에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심포니 오브 메이플스토리’ 공연의 주역 아르츠 심포니오케스트라가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음악은 ‘메이플스토리’를 상징하는 로그인 테마 ‘스타트 더 어드벤처’였고, 무대의 대형 스크린에 띄워진 로그인 화면에 ‘재즈 온 메이플’이라는 아이디가 입력되며 게임에 접속하는 듯한 느낌을 선사했죠. 이후 ‘헤네시스’ ‘에레브’ ‘루디브리엄’ ‘에델슈타인’ ‘시간의 신전’ 등 다양한 지역들의 음악과 스토리 콘텐츠인 ‘블랙헤븐’의 주제곡까지 풍성하게 꾸며진 공연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에레브 사냥터 음악, 일명 ‘수련의 숲’으로 알려진 ‘Raindrop Flower’는 재즈적인 편곡이 매우 잘 어울렸습니다. 지휘자 김유원의 노련한 손짓 아래 아르츠 심포니는 출중한 연주를 보여주었고, 특히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멤버 마크 반 룬의 몽환적인 피아노,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프란스 반 호벤의 베이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음악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로이 다커스의 환상적인 드럼까지 조화로운 공연이었죠.
많은 이들이 예상하듯 ‘재즈 온 메이플스토리’에서 관객들이 느꼈던 감정은 ‘향수’였습니다. 20년이라는 세월을 담은 음악들로 차려진 콘서트에서 관객들은 한 명 한 명이 메이플 세계에서 모험을 펼쳤던 ‘용사’들이었죠. 하지만 꽤 의외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번 연주회가 단순히 ‘향수’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곡들은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만의 독창적인 해석과 함께 재창조 됐고, 이는 공연의 시작부터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로그인 테마인 ‘스타트 더 어드벤처’는 특징적인 도입부가 생략되었고, 에델슈타인의 주제곡(‘Edelstein City’)을 매우 느리게 연주하여 베이스가 담담한 독백을 이야기하는 음악으로 편곡됐습니다. 그 외에도 음악을 들으면서 원곡이 잘 떠오르지 않거나, 희미하게 떠오르는 음악들이 많았는데요. 이제는 메이플스토리의 음악 역시 과거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메이플을 즐겼던 세상의 용사들이 계속해서 성장하듯 음악 역시 용사들과 함께 성장해야 하는 것이죠. 현재와 미래가 불안하다고 발걸음을 뒤로 돌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글 이창성
서울대 작곡과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게임과 음악의 관계에 관해 관심을 두고 있으며 게임음악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재 KBS 1FM의 PD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