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COLUMN
테너계의 보석 같은 가수
이안 보스트리지가 가진 30년의 광채
어떤 수식어가 적절할까. 이안 보스트리지(1964~)에 관한 글은 어떤 문장으로, 어떤 단어로 시작해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를 한 단어,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슈베르트 가곡의 권위자라고 하자니, 그에 못지않게 탁월한 벤저민 브리튼 연주가 턱 하고 마음에 걸린다. 브리튼 음악뿐인가? 보스트리지는 스트라빈스키, 본 윌리엄스, 토마스 아데스 같은 현대 작곡가들의 오페라에서도 활약하고, 시대를 훌쩍 거슬러 올라가 17세기 초기 바로크 시대의 노래도 섭렵한다. 심지어 그는 국제적 명성의 테너이기 이전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관객을 향해 목소리를 내뱉은 후 30년. 보스트리지는 여전히 경계 없이 광채를 발산하며 유유히 음악가로서의 지평을 넓혀가는 중이다.
세련된 다이아몬드 같은 현대음악
보스트리지는 거의 매년 하나 이상의 음반을 발표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데뷔 후 꾸준히 음반 작업을 해 왔다. 가장 최근 음반은 올해 6월 발매된 ‘어리석은 욕망’(Pentatone)❶으로, 미국 작곡가 브래드 멜다우(1970~)의 연가곡을 담았다. 멜다우는 윌리엄 블레이크·예이츠·셰익스피어·괴테 등 대문호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들을 통해 ‘포스트-미투’ 시대에 성적 자유의 한계란 무엇인지 질문한다고 술회한 바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작곡가의 배경을 드러내는 듯, 작품의 이곳저곳에서 재즈 음악의 향기가 풍긴다.
이번 음반을 듣고 슈베르트로 잘 알려진 보스트리지의 현대 가곡이 생경했다면, 그의 브리튼 음반들을 추천한다. 우선 벤저민 브리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나온 2013년 ‘브리튼의 노래’(Warner Classics)❷가 있는데, 내년부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 세계적인 음악가 안토니오 파파노(1959~)가 피아노를 연주했고, 기타리스트 슈페이 양도 함께했다.
보스트리지는 브리튼의 오페라 작품도 여러 번 노래했다. 2000년 발매된 ‘나사의 회전’(Erato)❸부터 ‘빌리 버드’(Erato)❹, ‘루크레티아의 능욕’(Erato)❺이 눈에 띈다. 이중 ‘나사의 회전’과 ‘빌리 버드’는 각각 2003년 그라모폰 클래식 음악 어워즈 오페라 부문 우승, 2009년 그래미 어워즈 최우수 오페라 음반상을 받은 명반이다.
보스트리지의 브리튼 음반 중에서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2005년 발매된 것으로 세레나데, 일뤼미나시옹, 녹턴이 수록된 것(Warner Classics)❻이다. 그가 부르는 브리튼의 ‘일뤼미나시옹’을 세종솔로이스츠와의 협연으로 올해 11월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이 음반은 테너와 오케스트라 사이 균형 잡힌 조화로 완성됐다. 귀에 꽂히는 보스트리지의 깨끗한 발음과 음색이 오케스트라와 만나 생동감을 일으킨다.
‘전쟁 레퀴엠’(LSO Live)❼도 보스트리지의 브리튼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반이다. 자난드레아 노세다(1964~)가 이끄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코러스가 함께했고, 소프라노 사비나 츠빌라크(1977~), 바리톤 사이먼 킨리사이드(1959~)가 보스트리지와 함께 솔로를 맡았다.
그밖에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난봉꾼의 행각’(DG)❽, 토마스 아데스의 오페라 ‘폭풍’(Warner Classics)❾ 역시 보스트리지의 현대 음악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음반들이다. 두 음반은 각각 1999년과 2013년 그래미 어워즈에서 최우수 오페라 음반상을 받았다.
투명한 옥구슬 같은 바로크 음악
보스트리지가 현대작품 못지않게 광범위한 작업을 보여주는 분야는 바로크 시대 음악이다.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Erato)❿와 퍼셀의 ‘디도와 에네아스’(Virgin)⓫는 모두 각 영역에서 가장 훌륭한 음반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명반이다. 두 음반 모두 에마뉘엘 아임(1962~)과 그가 이끄는 르 콩세르 다스트레의 연주로 녹음되었다. ‘오르페오’에서 두드러지는 17세기 바로크 초기의 현란한 장식은 보스트리지의 섬세하고 깨끗한 기교를 만나 빛난다. 또 ‘디도와 에네아스’에서는 보스트리지의 에네아스는 물론이고 디도를 맡은 수전 그레이엄(1960~)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바로크 시대의 두 거장 바흐와 헨델의 음반도 중요하다. 바흐의 ‘요한 수난곡’(Hyperion)⓬은 시대악기 앙상블인 계몽주의 시대 오케스트라와 스티븐
레이턴(1966~), 그리고 그가 설립한 성악 앙상블 폴리포니가 함께했다. 보스트리지는 이 프로젝트에서 복음사가를 맡았다. 복음사가는 사건의 흐름을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하는데, 보스트리지의 드라마틱한 복음사가는 현장감 있는 목소리로 사건을 전개시킨다. 2007년에 발매된 ‘그레이트 헨델’(Warner Classics)⓭은 헨델의 여러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아리아들을 묶어낸 것이다. 해리 비킷(1961~)이 이끄는 계몽주의 시대 오케스트라와 작업한 이 음반은 오페라 ‘아리오단테’ ‘아시스와 갈라테아’ ‘세르세’ ‘세멜레’, 오라토리오 ‘부활’ ‘입다’ ‘메시아’ 등 헨델의 주요 성악 작품의 아리아들을 한데 모았다. 국내 관객이 특별히 좋아하는 오페라 ‘세르세’의 ‘그리운 나무 그늘 아래’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 등의 노래도 수록되어 곁에 두고 듣기 좋은 음반이다.
‘세 명의 바로크 테너’(Warner Classics)⓮는 인기를 누리던 카스트라토를 밀어내고 테너의 역량과 가능성을 확장시킨 18세기의 위대한 테너 존 비어드(1717~1791), 프란체스코 보로시니(1695~1747), 안니발레 파브리(1697~1760)를 기린 음반이다. 수록된 헨델·비발디·스카를라티·칼다라·콘티·가스파리니의 아리아들은 모두 세 가수들의 요구에 따라 각자의 목소리를 가장 아름답게 선보일 수 있도록 작곡된 것들이다. 이중 여섯 곡은 세계 최초 녹음이며, 이 사실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음반이다. 보스트리지는 역사학자로서의 전문성을 가득 실어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며 이 시기 잊힌 레퍼토리들에 새 숨결을 불어 넣는다.
추가로, 마크 민코프스키의 ‘상상 교향곡’을 떠오르게 하는 ‘헨델: 상상 오페라’(Erato)⓯는 헨델 사후 250년을 기념하며 제작된 음반이다. 이미 발매된 적 있는 여러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편집한 컴필레이션이지만, 보스트리지를 비롯해 조이스 디도나토(1969~), 필립 자루스키(1978~), 나탈리 드세이(1965~) 등 헨델 오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가수들의 노래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오랜 시간 품어 만든 진주 같은 독일 가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 보스트리지를 빛나게 하는 것은 독일 예술가곡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슈베르트 가곡은 그의 모든 작업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완성도를 들려준다. 가장 최근 발매된 보스트리지의 슈베르트 가곡 음반은 펜타톤 레이블에서 삼부작으로 제작한 것이다. ‘겨울 나그네’⓰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백조의 노래’⓱가 각각 2019년, 2020년, 2022년에 발매되었다.
펜타톤의 슈베르트 가곡 삼부작은 모두 음반 커버가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영국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토마스 아데스(1971~)와 함께 녹음한 ‘겨울 나그네’다. 연습실에서 리허설하는 듯한 두 음악가의 모습이 세피아 톤으로 스케치 된 그림인데, 보스트리지의 비쩍 곯은 얼굴과 위태로워 보이는 가느다란 몸,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움푹 팬 아데스 얼굴은 어딘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19세기 초 낭만의 시절, 실연을 겪은 그 사내가 고통을 노래하는 모습은 이런 모양이었을까.
보스트리지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가늠할 수 없는 만큼, 이 음반에는 오랜 기간 축적된 시간과 연륜이라는 단단한 지반이 들려온다. 이에 아데스와의 호흡이라는 신선한 숨결이 더해져 완성됐다. 두 사람의 ‘겨울 나그네’는 2020년 인터내셔널 클래시컬 뮤직 어워즈(ICMA)에서 수상과 ‘BBC 뮤직 매거진’ 2019년 11월 호의 음반으로 선정됐으며, 2019년 프레스토 올해의 음반 파이널리스트에 올랐고, 2019년 라임라이트 매거진 올해의 음반, 2020년 오푸스 클라식 어워드 올해의 남자 가수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아데스와의 호흡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스트리지와 가장 오랫동안 슈베르트 가곡을 함께해 온 줄리어스 드레이크(1959~)와의 작업은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드레이크는 솔리스트로서뿐만 아니라 가곡에 남다른 애정과 해석을 선보여 주목받은 피아니스트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시리즈로 제작한 ‘슈베르트의 노래’(Wigmore Hall Live)⓲⓳는 모두 드레이크와 완성한 것으로, 위그모어홀에서 펼쳐진 실황 공연이 담겨있다. 빠른 템포의 격정적인 ‘폭풍’이나 차분하게 처연한 ‘저녁 별’ 같은 슈베르트의 짧은 노래를 감상할 수 있으며, 잘 몰랐던 슈베르트의 명곡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잘 짜여진 전체 프로그램과 그의 음악적 구성력까지 엿볼 수 있는 시리즈다.
드레이크와는 이렇듯 짧은 노래들을 모아 완성한 음반을 여럿 발매했다. 1998년에 발매된 ‘슈베르트: 가곡’⓴과 2005년 ‘슈베르트: 25곡의 가곡’, 2007년 ‘슈베르트: 가곡’은 모두 워너 클래식에서 제작된 슈베르트 가곡 모음집이다. 괴테부터 뤼케르트, 콜린 같은 시인의 시에 음악을 붙인 슈베르트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오색찬란 오팔 같은 광범위한 표현력
슈베르트 외에 독일 가곡도 불렀다. 드레이크의 피아노 반주와 함께 부른 ‘시인의 사랑’(Warner Classics)은 1998년 그라모폰 어워드 독창곡 부분에서 수상한 음반이다. 어딘지 모르게 처연함이 느껴지는 청년 보스트리지의 얼굴이 음반 커버에 새겨져 있으며, 음반을 재생하면 그 얼굴에 퍽 어울리는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가 흐른다. 이 녹음에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비롯해 ‘연가곡’과 짧은 노래들도 수록되어 있다.
그는 독일 가곡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후고 볼프의 가곡도 불렀다. 그중 2006년 안토니오 파파노와 함께한 ‘볼프의 가곡: 아이헨도르프와 괴테의 시’(Warner Classics)를 소개한다. 슈베르트나 슈만의 전통을 잇는 한편,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볼프의 대담하고 복잡한 화성은 노래의 신비로운 감각을 한층 높인다. 볼프의 단편 가곡들은 보스트리지의 극적 해석과 함께 하나의 드라마가 된 듯 생동감을 일으킨다.
마지막으로 독일 현대음악, 그중에서도 오페라 장르에서 활약한 헨체의 가곡을 묶은 ‘여섯 개의 아라비안 노래’(Warner Classics)도 들어볼 만한 명반이다. 보스트리지 특유의 정확한 발음과 극적인 음악 해석은 어디로 진행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헨체의 음렬음악에서도 두드러진다. 드레이크가 함께한 이 음반은 그라모폰 매거진 2001년 4월 호에 이달의 음반으로 꼽히면서 보스트리지의 광범위한 음악적 가능성을 이른 시기에 증명한 음반이다.
글 박수인(음악학자)
PERFORMANCE INFORMATION
세종솔로이스츠와 이안 보스트리지의 ‘일뤼미나시옹’
11월 4일 김포아트홀 / 5일 세종예술의전당
10일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 /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8일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
프랭크 브릿지 ‘왈츠 인터메조’, 벤저민 브리튼 ‘일뤼미나시옹’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