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감독 네오 소라
출연 류이치 사카모토
OPUS
Ryuichi Sakamoto
음표로 꾹꾹 눌러쓴 20개의 이야기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코다(coda)’는 이탈리아어로 꼬리라는 의미로, 음악에서는 한 악곡이나 악장에서 끝맺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이는 악구를 일컫는다. 문학에서도 앞부분에서 제시된 테마나 모티브를 강조하거나 요약하는 장을 ‘코다’라 부르는데, 일종의 에필로그 같은 역할을 한다. 내 삶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요약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코다 기호를 어디에 찍어야 할까? 글로 기록할 수 있다면 내 삶의 어느 시점을 불러와 요약해야 할까? 끝을 앞둔 순간에 마침표를 경쾌하게 꾹 찍을 수 있는 사람보다는 말줄임표로 미련을 남겨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 같기는 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코다
긴 부연 설명 없이 몇 개의 수식어만으로 그 사람의 삶, 심지어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다.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우리에겐 그의 이름만 들어도 문득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그리고 일상을 살다가 우연히 들리는 음악을 통해, 우리는 또다시 문득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
네오 소라(1991~) 감독의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지난 2023년 3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필름이다. 영화가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담고 있지 않지만 내밀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연출을 맡은 네오 소라 감독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평생을 지켜봐 왔을 아버지이자 위대한 예술가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빛과 소리를 통해 회화처럼 그려낸다.
사적인 이야기 한마디 없이, 사적인 호기심을 채우거나 죽음을 앞둔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도 없이, 피아노와 류이치 사카모토가 온전히 하나의 심장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여준다. 다양한 음악의 변주를 통해 각기 다른 생명체를 만든 그가 피아노라는 오롯한 근원으로 돌아간 순간을 담는데, 명암이 선명한 흑백 필름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혼까지 찍힌 것 같다.
굳이 명명하자면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다큐멘터리의 느낌을 담은 콘서트 영화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사람의 삶이 궁금한 관객들은 중간중간 설명이나 인터뷰를 기다리겠지만, 잠깐 쉬어가자는 몇 마디의 대화를 제외하고 영화는 20곡의 음악을 연주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피아노, 그리고 이 두 생명체가 만들어 내는 20개의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흔한 이야기 하나 없이 우리는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한 사람을 고스란히 느낀다. 그의 음악은 빛으로 해가 저물고 떠오르는 순간을 표현한 듯하다. 첫 번째 연주에서 마지막 연주로 이어지는 모든 순간이 그의 삶을 몽타주처럼 하나로 응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가깝게는 제작자인 아내와 감독인 아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이야기이면서, 더 넓게는 전 세계 팬들에게 남기는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사람의 코다 같은데, 그 자체만으로도 울렁이는 감동이 된다.
영원한, 마지막 콘서트
암 투병 중 죽음을 감지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전 세계 팬들을 위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마지막 콘서트를 기획하는데, 그 콘서트가 바로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다. 그는 2022년 9월 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 하루에 두 곡에서 세 곡을 두세 번에 걸쳐 연주했다. 영화는 사카모토가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곳”이라고 평했다는 NHK 509 스튜디오에서 촬영돼, 그의 미세한 숨결까지 담겼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직접 선별한 20곡의 음악은 그의 삶의 흔적이자, 주름 같은 것들이다. 그는 선곡부터 편곡과 녹음 과정에도 참여하면서 자신의 음악이 오롯이, 제대로 필름에 기록되도록 했다. 네오 소라 감독은 다양한 각도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표정, 연주하는 손, 연주하는 몸, 그리고 그와 대화하는 또 다른 주인공인 피아노를 대비가 선명한 흑백 영상으로 기록했다.
네오 소라 감독은 음악보다 앞서거나 음악을 왜곡하는 편집이나 촬영기법 없이, 연주와 음악,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예술가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의 콘서트 현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느낀다. 흑백 영화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것에 집중해, 류이치 사카모토의 손가락과 연주할 때 미묘하게 확장되는 혈관, 그의 호흡, 피아노의 질감을 촉각처럼 느끼게 한 촬영이, 어떤 점에서는 미술관에서 만난 영상 작품 같기도 하다.
음악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실제로 숨을 쉬지도 않지만, 희한하게도 공기와 만나면 생명처럼 살아난다. 관객들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순간 피어나는 20개의 생명과 만난다. 그리고 음악에 담긴 그의 이야기와 삶, 눈물과 숨결을 함께 느낀다. 네오 소라 감독은 연주와 연주 사이, 이따금 힘들어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 삶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음악이라는 생명체는 약해지지 않고 생생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죽음을 앞둔 회한이나 삶에 대한 집착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담담하고 섬세한 그의 이야기는 음악이라는 유기체, 그 생명과 핏줄처럼 이어진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흔적을 우리의 삶에 영원히 공기처럼 남기고, 음악을 통해 영생이라는 인간의 꿈을 세상 모든 곳에서 실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이 연주되는 곳에서 그는 다시 살아나고, 그의 음악이 담긴 영화 속에 혈관처럼 유영한다.
모든 곡이 좋지만, 유작이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1962~)의 영화 ‘괴물’의 삽입곡 ‘아쿠아(Aqua)’는 히로카즈 감독이 작품을 통해 던졌던 묵직한 질문을, 우리의 등과 머리와 어깨에 계속 짊어지우면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아쿠아’를 이번 영화에서 10번째 음악으로 다시 만나는 순간, ‘괴물’이 던진 슬픔, 우울함, 따뜻하면서도 차가웠던 그 질문들이 다시 환기되는 것을 느꼈다. 이외에도 류이치 사카모토는 우리가 영화에서 만났던 그의 여러 곡을 연주하며, 그 음악과 함께했던 우리의 시간, 그날의 감촉, 그때의 기억까지도 피어나게 한다.
별도의 OST가 발매되지는 않았고, 영화를 통해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최상의 음향시설이 갖춰진 돌비 애트모스 영화관에서 그의 마지막 콘서트를 관람하기 권한다.
| | | set-list
01 Lack of Love 02 BB 03 Andata 04 Solitude 05 For Johann 06 Aubade 2020 07 Ichimei-Small Happiness 08 Mizu No Naka No Bagatelle 09 Bibo No Aozora 10 Aqua (note: the sequence with “Piano tuning break”) 11 Tong Poo 12 The Wuthering Heights 13 20220302-Sarabande 14 The Sheltering Sky 15 20180219(w/prepared piano) 16 The Last Emperor 17 Trioon 18 Happy End 19 Merry Christmas Mr. Lawrence 20 Opus-ending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