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TRIP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 기념 여행
체코, 음악을 담다
체코를 거쳐 간 작곡가들을 따라 음악의 숨은 명소들을 만나다
여행길 위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퍽 반갑다. 그래서일까. 유럽에선 낯선 한국인들끼리라도 저녁이 되면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 각자의 여행길을 나누곤 한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로 이어지는 길을 따르는 이들이 다수 있다. 그중에서도 체코는 ‘유럽의 3대 야경’으로 불리며 여행객들의 발길을 끄는 듯하다.
확실히,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해 질 녘 풍경에는 이들이 기대하는 낭만이 흘러넘친다.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중세의 돌다리 카를교는, 멀리 프라하성의 불빛이 꺼질 때까지 한없이 거닐기에 제격이다. 낮이 되면 프라하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붉은 지붕의 구시가지 전경도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흔히 회자하는 명소들로만 체코를 누리고 떠나는 여행객들의 뒷모습을 보면 아쉽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체코는 프라하의 골목만큼이나 아기자기하고 매력적인 음악 이야기를 품고 있는 나라다. 카를교 바로 앞에는 모차르트가 즐겨 묵었던 파흐타 백작의 안뜰이 ‘더 모차르트’ 호텔이란 이름으로 숨겨져 있고, 강을 따라 걸으면 알폰스 무하가 남긴 벽화가 압도하는 오베츠니 둠(시민회관)도 만날 수 있다. 프라하를 벗어나 만나는 체코의 음악 유산도 풍성하다.
특별히, 올해 2024년은 스메타나(1824~1884) 탄생 200주년이다. 스메타나는 체코 민족 음악의 뿌리와 같은 작곡가로,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올해는 그야말로 체코 ‘음악의 해’다. 그의 뒤를 이어 보헤미안의 숨결을 세계화하는 데에 일조한 드보르자크(1841~1904)도 올해 서거 120주년에 닿는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날 체코의 음악을 더 깊이, 자세히 느껴볼 수 있는 숨은 명소들을 소개한다.
오스트리아가 아닌, 체코의 모차르트
체코의 국민 작곡가 스메타나나 드보르자크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잊지 말아야 할 존재는 모차르트다. “프라하 사람들은 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한다”라는 모차르트의 말처럼, 빈 초연에서 악평 받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2년 후 프라하의 청중에게는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이들의 환대에 반한 그는 그해 10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아예 프라하에서 초연한다.
‘돈 조반니’의 대본을 작업한 로렌초 다 폰테는 동시대의 인물인 카사노바와 인연이 깊었다. 실제로 카사노바가 묵었던 프라하의 파흐타 백작의 저택은 모차르트가 말년에 프라하 방문 당시 자주 묵은 곳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와 카사노바의 이 우연이 그의 ‘돈 조반니’에 얼마나 영감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파흐타 백작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더 모차르트’ 호텔이 운영 중이다. 카사노바가 파흐타 백작 부인을 유혹하던(!) 호텔의 중정에서는 저녁이 되면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연주회가 펼쳐지기도 한다.
로브코비츠 성 |
모차르트·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이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프라하성은 설명이 필요 없는 체코의 대표 관광지다. 거대한 성 한쪽에 자리 잡은 로브코비츠 가문의 성은, 마치 하나의 문화 박물관 같다. 성 내에는 수 세기의 명화와 유물, 악보들이 가득 차 있다. 특별히, 로브코비츠 가문의 일곱 번째 백작은 베토벤의 주요 후원자였고, 베토벤의 교향곡 3·5·6번이 그에게 헌정됐다. 이를 증명하듯 로브코비츠 성에는 베토벤 당대의 교향곡 4번과 5번의 악보를 비롯해, 모차르트·글루크의 악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에는 당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비용 지급을 위해 적은 베토벤의 자필 계산서까지 놓여 있어 음악에 대해 이 가문이 가졌던 깊은 열의가 느껴진다.
참고로, 로브코비츠 성의 테라스는 프라하 전경을 볼 수 있는 장소 중 최고의 각도를 자랑한다. 매일 오후 1시에는 프레스코화로 꾸며진 홀에서 음악회도 열리니 이곳의 방문을 놓치지 말길.
클레멘티눔 |
수백만 권의 자료 속, 보석 같은 음악들
프라하의 거대한 ‘도서관’인 클레멘티눔은 16세기 예수회에 의해서 설립된 대학이자 도서관 등의 복합단지이다. 큰 부지에 바로크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부 사용되고 있는 도서관에 들어서면 “이런 장소라면 공부 열심히 할 맛이 나겠네!” 하는 농담과 감탄이 나온다. 별도로 보존 중인 예수회 당시 도서관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은 가히 명불허전이다. 클레멘티눔 관계자가 특별히 보관 중인 몇몇 음악 자료들을 손수 꺼내서 선보여 주었다. 모차르트와 그의 아내 콘스탄체, 아버지 레오폴드의 자필 편지를 비롯하여 드보르자크의 제자인 체코 작곡가 요제프 수크의 실내악 자필 악보 등이었다. 거대한 보석함에서 등장한 클래식 음악의 역사가 이곳 프라하 도심 한복판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체코 음악의 심장,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
냉정하게 유명세를 따지자면, 클래식 음악에서는 드보르자크의 인지도가 스메타나보다 높다. 하지만 적어도 체코 내에서 두 작곡가에 대한 무게감은 사뭇 다르다. 드보르자크가 체코의 음악을 들고 국제적인 활약을 했다면, 스메타나는 체코의 민족정신 그 자체다.
1848년, 체코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꿨을 때, 스메타나도 이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혁명 실패로 잠시 스웨덴으로 피신했던 그는 1860년대 다시 체코로 돌아와 민족 운동의 선두에 서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선보였다. 체코어로 만든 오페라 ‘팔려 간 신부’(1866)는 이들의 운집에 힘을 보탰다. 그의 나라 사랑이 담긴 교향시 ‘나의 조국’이, 지금까지 체코의 제2의 국가처럼 여겨지는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감수성이 뒷받침한다.
스메타나가 태어난 체코의 작은 도시 ‘리토미슐’에서는 매년 6월 ‘스메타나 음악 축제’가 열린다. 프라하로부터 벗어나 2시간 여를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 스메타나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 이를 기념하며 축제에서는 그의 오페라 전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은 도시도, 2024년을 체코 오페라의 선율로 가득 채울 준비를 마친 듯하다.
오베츠니 둠 | 예술가들의 뜨거운 애국심
여행객들에겐 ‘아르누보 식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1층의 카페테리아가 명소로 알려졌지만, 오베츠니 둠의 진정한 명소는 크고 작은 홀들에 있다.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이 건축물의 공간 곳곳은 당대 예술가들이 세심하게 만든 벽지, 창틀, 커튼 등의 무늬로 가득 차 있다. 알폰소 무하의 회화 작품으로 장식된 ‘시장의 방’ 홀은 이 투어의 백미다.
‘시민 회관’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프라하 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눈부신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손꼽히는 이곳에 1,200석 규모의 스메타나 홀이 있다. 매년 스메타나의 서거 일인 5월 12일에는 이곳에서 그의 ‘나의 조국’을 연주하며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가 시작된다. 올해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는 키릴 페트렌코/베를린필의 연주로 열 예정이며, 피아니스트 조성진(5.24),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가 속한 젠 트리오(5.25)도 음악 축제의 일환으로 무대에 오른다.
루돌피눔 | 체코 필하모닉의 본거지
지난해 10월 내한해, 호연으로 사랑받은 체코 필하모닉이 상주하는 곳이다. 이곳 루돌피눔에서, 드보르자크의 지휘 아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프라하 초연하며 지금의 체코 필하모닉이 창단됐다. 바깥 지붕 난간에는 여러 클래식 음악 작곡가 동상이 서 있는데, 이들을 마주 보는 듯 공연장 마당에는 드보르자크의 동상이 서 있다.
내부에는 드보르자크홀(약 1,000석)과 수크홀(약 200석)이 자리 잡고 있다. 드보르자크홀 무대에는 나무로 된 ‘마에스트로 전용 포디엄’이 있다. 체코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의 것이다. 관계자를 따라 마에스트로의 방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야나체크를 따라, 제2의 도시 브르노에 닿다
체코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프라하가 위치한 서쪽은 보헤미아, 그리고 동쪽이 모라비아다. 모라비아는 사람들의 억양과 분위기가 좀 더 쾌활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경상도 사람을 억양으로 알아차리듯, 식당 주인의 서빙하는 모습을 보면 ‘아, 모라비아 사람인가?’ 정도로 유추할 수 있다.
프라하로부터 기차로는 2시간 30분, 자동차로 2시간 여를 달리면 도착하는 브르노는 이 모라비아에 위치한 도시로, 그 규모가 체코에서 두 번째다. 대학이 많아 인구 연령대가 젊고, 관광객으로 가득 찬 프라하와는 또 다른 도시의 분위기를 풍긴다. 브르노 국립극장을 비롯해 오페라·발레를 올릴 수 있는 야나체크 극장, 그리고 유럽 최초로 전기를 사용한 마헨 극장 등이 모두 브르노에 있다.
야나체크 하우스 | 20세기 주요 오페라의 탄생지
야나체크(1854~1928)는 모라비아 지역 출신의 작곡가다. 그는 학교를 세운 설립자였고, 음악 이론가였으며 모라비아 민요의 연구가였다. 오페라 ‘예누파’를 통해 거둔 성공은, 당시 이미 50대인 야나체크가 작곡가로서의 업적을 이을 수 있게 해준 기회였다. 그는 현대적으로 민족주의 음악을 수용하며, 모라비아의 방언이 가진 언어의 뉘앙스까지도 곡에 적극 활용했다.
야나체크가 삶의 대부분을 보낸 곳, 브르노에는 그의 생가가 남아있다. 아담한 정원 속에 파묻혀있는 야나체크 하우스의 문을 열면 그가 작곡 당시 사용하던 피아노가 놓여 있다. 야나체크의 음악에는 20세기적 불협화음의 구조가 많다. 그는 이곳에서 한 손으로는 불협화음을 계속 신경질적으로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악보에 음표를 그려나가는 식으로 작곡했다고. 말년이 되면 알아보기 힘들 만큼 휘갈긴 듯 그린 자필 악보들도 다수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서 탄생한 음표들은 스메타나의 ‘팔려 간 신부’에서 시작되어 드보르자크의 ‘루살카’를 거쳐, 야나체크로 이어지는 20세기 오페라의 한 줄기를 이뤘다.
겨울이 가고, ‘프라하의 봄’이 오면
100여 년 전, 한국의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라고 물었다. 1968년, 구소련에 의해 민주·자유화 운동을 저지당한 체코인들 역시 ‘봄’을 갈망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얼어붙은 겨울이 가고, ‘자유의 봄’이 찾아오길 희망한 시간이다.
그렇게 ‘프라하의 봄’은 체코의 근현대사에 주요한 사건 속에 자리 잡았다.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는 독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며 1946년에 시작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구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부침을 겪었다. 격동의 역사를 뚫고 이어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는, 이제 체코인들의 자부심을 담은 축제이자 국제적인 음악 거점의 역할하고 있다.
페트로프 피아노 | 160년간 이어져 온 제작의 역사
페트로프(Petrof)는 체코 자국의 피아노 제작 브랜드다. 1864년, 안토닌 페트로프(1839~1915)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피아노는 5대째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체코의 근현대사와 함께 페트로프 피아노도 격동의 시기가 있었다. 1948년부터는 국유화되었다가, 2001년 다시 페트로프 가문에게 소유가 돌아온 것이다.
이 역사를 거치면서도, 페트로프는 전체 공정의 80%를 수작업으로 고수하며 정교한 피아노 제작의 브랜드를 지켜왔다. 흐라데츠 크랄로베에 위치한 페트로프 공장에서 제작 공정 하나하나를 모두 가까이 확인할 수 있었다. 한때 피아노 제작 강국이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직접 피아노를 생산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체코의 장인 정신이 깃든 이 공장에는 220명의 장인이 70% 이상의 부품을 자체 제작한다. 공장 옆에는 갤러리가 같이 자리 잡고 있어 다양한 페트로프의 피아노를 경험할 수 있다. 익숙한 브랜드와 비교해보자면 야마하 피아노보다는 따뜻하면서도, 가와이 피아노보다는 명료한 소리를 가지고 있어, 페트로프 피아노만의 음색이 장점으로 다가왔다. 올해, 창립 160주년을 맞이한 페트로프는 다양한 디자인과 프로젝트를 시도하며 피아노 제작의 영역을 활발히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국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표하며, 브랜드의 활력을 더해가는 페트로프 운영진들과의 만남은 체코 음악 산업의 현재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체코관광청
Special Preview
1월, 한국에서 만나는 체코 음악가들
이 모든 체코의 매력적인 장소로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면, 다가오는 1월 한국에서도 체코 음악의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먼저, 1월 18일(롯데콘서트홀)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한국을 찾는다. 체코의 대표적인 공연장 루돌피눔에 체코 필하모닉이 있다면, 오베츠니 둠에는 바로 이 프라하 심포니가 자리 잡고 있다.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연장이자, 체코 시민들의 역사를 깊게 품은 홀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체코의 음악적 감성을 대표하고도 남는다. 상임 지휘자 토마시 브라우너(1978~)와 함께 내한하며, 레퍼토리를 전부 드보르자크의 작품으로 꾸렸다. 드보르자크의 ‘전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그리고 문태국 협연으로 첼로 협주곡이 연주될 예정이다.
한편, KBS교향악단의 1월 정기 연주회(26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는 체코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슈파체크(1986~)가 협연자로 등판한다. 2016년부터 2020년 시즌까지 악장을 역임한 그는 체코필 역사상 최연소 악장을 맡은 바이올리니스트로 현재 프라하에 거주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피에타리 잉키넨의 지휘로 함께하는 이번 공연에서 그는 드보르자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보인다. 요제프 슈파체크는 2015년, 체코 음악의 대부인 지휘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가 이끄는 체코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이 작품의 음반을 발매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