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2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음악가의 꿈을 키운 어린 날의 멜로디
글 이경선(1965~) 서울대에서 김남윤을 사사, 피바디 음대에서 실비아 로젠버그를 사사하며 최고연주자과정을 수료했다. 줄리아드 음대에서 전문연주자 과정을 마친 후, 미국 오벌린 음대·휴스턴 음대 교수·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했다. 하노버 콩쿠르·윤이상국제콩쿠르 등의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대통령 표창 및 난파음악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디애나 대학교 내 제이콥스 음악원 종신교수직을 맡고 있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악기로 표현하는 순간
#비탈리 #샤콘 #인생 첫 클래식 음악
요세프 수크(바이올린)
감상 포인트
슬프고도 절제된 선율 속에 담긴 위로
중학교 1학년 여름, 전북 고창에서 김남윤(1949 ~2023) 선생님의 지도로 열리는 음악캠프에 일주일간 참여했습니다. 시골 촌뜨기가 서울 학생들(특히, 예원학교 학생들)과 한자리에서 함께 했던 시간은 제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전까지 별 생각 없이 하던 연습은 어느새 목표가 있는 연습으로 차츰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당시 준비했던 곡은 비탈리의 샤콘이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가슴 아리는 아픔과 미련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비탈리(1632~1692)는 바로크 시대 음악가이지만, 낭만 시대 바이올리니스트인 페르디난트 다비트(1810~1873)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샤콘은 그가 발표한 첫 곡으로, 균형을 강조하는 바로크적 화성 진행과는 전혀 다른 대담한 전개를 보이며, 리듬의 변화 역시 매우 과감합니다. 연주하기에 재미있고, 초반부가 쉬우며, 선율이 슬프면서도 절제되어 있다는 세 가지 요소 때문에 아직 도전할 수준이 아님에도 무리해서 덤벼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 이 곡을 통해 난생처음 음악의 아름다움을 악기로 표현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 수업도 빠져가며 참여한 음악캠프에서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들어보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교무실에서 악기를 꺼내 샤콘 전곡을 연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전까지 존재감 없이 살아온 제가 하루아침에 교내 스타가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사건이었죠.
샤콘은 바로크 교회음악의 전형을 보여주는 비탈리의 다른 작품과 비교했을 때 매우 이질적인 곡이기 때문에 ‘작곡가가 과연 비탈리인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꼽히는 작품인 만큼, 누구든 마음이 울적할 때 이 곡을 들으면 위로와 힐링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비 오는 날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일상에서 자주 듣는 곡
오귀스탱 뒤메이(바이올린)·마리아 주앙 피르스(피아노)
감상 포인트
따스한 선율 속 브람스의 고독이 느껴지는 연주
브람스는 40세가 지나고 나서야 첫 바이올린 소나타를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며 소나타 1번을 완성했습니다. 작품은 휴가지의 아름다운 정경을 숨길 수 없다는 듯 산뜻하고 따스한 느낌을 줍니다.
브람스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요제프 요아힘(1831~1907)과 이 곡을 초연했고, 당시 관객으로 있던 클라라 슈만은 아낌없는 찬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생일 선물로 헌정한 가곡 ‘비의 노래’와 소나타 1번의 3악장이 굉장히 유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곡은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숨결로 그 선율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며, 미소를 머금게 하는 고귀한 엔딩으로 마무리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이 곡을 즐겨 듣곤 하는데, 그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20여 년 전, 유럽에서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공주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전생을 볼 수 있다고 했지요. 제가 전생에도 바이올린을 켰고, 남성이었으며, 이름은 다름 아닌 ‘요제프 요아힘’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터무니 없는 그녀의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들었지만, 어쩐지 그 이후로 브람스 곡을 접할 때면 스스로 전생에 요아힘이었다고 가정하고 연주하게 됐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또 바이올린을 하게 될까?’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요아힘의 친구 브람스를 만나러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낭만주의의 새로운 음악적 어법과 전통적인 형식의 결합으로 특유의 음악을 작곡한 브람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스승의 아내인 클라라를 멀리서 사랑했던 고독한 남자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에는 구구절절 그의 마음이 담겨있어 한 음도 함부로 연주할 수가 없습니다. 비가 내리는 오늘, 제 음악에 영감을 부어주는 브람스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잊혀진 악기를 위한 슬픔의 소나타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곡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첼로)· 벤저민 브리튼(피아노)
감상 포인트
슬픔에 잠긴 슈베르트의 심정이 전해지는 곡
잊혀진 악기 아르페지오네는 6현을 가진 소형의 첼로로, 바흐 시대에 사용되었던 비올라 다 감바와 흡사한 모양과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이 악기를 위해 작곡된 것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즉흥곡 형식으로 단기간에 작곡된 이 작품은 세 개의 짧은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율이 어찌나 감미로운지!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동안 얼마나 힘들게 연주하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중학교 3학년 때에도 김남윤 선생님과 나덕성 선생님(첼로)의 여름 음악캠프에 참여했습니다. 캠프에는 저녁마다 학생들의 연주를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긴 생머리의 선배 언니가 연주하는 멋진 첼로 소리에 반해 처음 들었던 이 곡의 멜로디가 뇌리에 뿌리를 내렸고, 이후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그날 밤이 떠올랐습니다.
27세의 슈베르트는 매독 합병증으로 생긴 우울증을 앓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824년 일기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눈이 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전날의 슬픔이 나에게 엄습하여 옵니다. 이렇게 환희도 친근감도 없이 하루가 지나갑니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세상을 즐겁게 바라보기 위해 애를 쓰는 슈베르트의 마음이 전해져 그 슬픔이 승화되고, 듣는 이의 정신을 맑고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31세의 짧은 인생을 산 슈베르트의 정신을 고이 간직하며, 성찰적이고 빼어난 우아함이 담긴 이 곡을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