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ESENT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다가가다, ‘지금의 나’를 담은 음악으로!
긴 기다림 끝에 발매한 음반, 그리고 이를 기념하는 리사이틀. 그의 모든 선택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본래 2022년 발매 예정이던 그의 음반이 이제야 세상에 공개됐다.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일정이 계속 늦어진 것. 팬들의 기다림도 길어졌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녹음으로도 발매는 충분했으나, 그는 과감히 시간을 더 투자하기로 했다. 이유는 단 하나. ‘현재의 자신’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인생이 제 뜻대로 됐던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게 생긴 모든 일은 겪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감사한 시간이었죠.” 그 ‘필요한 시간’을 모두 겪고 돌아왔기 때문일까. 그는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다. 첫 개인 음반 발매와 리사이틀을 앞둔 한수진과 대화를 나눴다.
음반 발매를 축하합니다. 음반 기획 과정이 궁금합니다.
사실, 제가 열여덟 살 때 위그모어홀에서 한 리사이틀을 녹음했었거든요. 처음엔 그 음반을 발매할까도 고민했습니다. 연주의 생생함을 담고 싶었고, 스튜디오 녹음 음반보다 실황 음반이 훨씬 생동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만 위그모어홀 연주는 다음에 발매하고, 지금의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음반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어요.
수록곡도 고심해서 골랐을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서 소중한 곡들로만 담았습니다. 특히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4번은 저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셨던 펠릭스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과 어렸을 때 공부했던 곡이자, 최근에도 연주한 인생의 동반자 같은 곡입니다. 비버 파사칼리아 g단조는 존경하는 이순열 원로 평론가께서 제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추천한 곡으로, 이 곡을 알게돼 감사했어요. 마지막 곡, 슈베르트 ‘음악에 부쳐’는 제가 위로도 많이 받고, 저의 고백이 담긴 곡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악곡이지만 꼭 수록하고 싶었습니다. 수록된 모든 곡들이 저와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음반 발매 기념 공연 2부엔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네요!
1부는 피아노(신재민), 2부는 오케스트라(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와 함께하는 연주회가 일반적이진 않죠. 그렇지만 음반 발매 기념 리사이틀을 꼭 음반에 수록한 작품으로만 구성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 아이디어를 준 워너 클래식스는 큰 편성의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공연을 제안했는데, 결국 규모를 줄인 형태가 되었죠. 그리고 청중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비발디 ‘사계’를 선곡했습니다.
이번 공연에는 음반 수록곡 중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만 들려주는데요. 이유가 있었나요?
듣기에 편안하면서도, 색채감이 넘치는 곡입니다. 이 소나타의 1~4악장을 사계절 혹은 결혼 생활의 네 단계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은 프랑크가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며, 이 곡을 예수의 생애, 즉 사랑·복음·고난 등의 에피소드에 비유해 해석했습니다. 원래도 이 곡의 모티브가 마치 심장박동처럼 느껴져 흥미로웠는데, 선생님의 해석에 공감되면서 저에게 더 특별한 곡이 되었습니다.
이번 연주회의 감상 포인트를 짚어준다면요?
모든 연주는 항상 다르기 때문에 굳이 어떤 지점을 집중해서 감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음향도 하나의 악기입니다. 장소에 따라 울림이 달라지고, 연주 타이밍도 달라지죠. 그날그날의 느낌에 같이 호흡하시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을 음악으로 구체화하다
음반과 리사이틀에서 호흡을 맞춘 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소개해 주세요.
피아니스트 프레디 켐프의 연주는 천진난만함이 느껴지면서도, 아름답고 독특합니다. 다른 음악가의 연주를 들으며 ‘저 연주자의 해석이 나와 결이 맞는다’라는 걸 느낄 때가 있는데, 음반을 함께 작업한 프레디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녹음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요. 또, 저랑은 다르기에 시너지가 생길 것 같다는 연주자도 있습니다. 리사이틀을 함께 하는 피아니스트 신재민이 그렇습니다. 그에겐 곡 전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고, 그게 실제 연주에서도 느껴집니다.
연주 중 눈빛과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질 때가 있어, 꼭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번 연주회에서 관객과 공유하고 싶은 상상이 있나요?
예를 들자면 비발디 ‘사계’ 중 겨울 2악장입니다. 비발디는 작품의 계절마다 시(소네트)를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분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도 같이 적어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너무나 더운 여름날, 강아지가 짖는 소리’ 같은 글귀를요. ‘겨울’의 2악장엔 포근한 분위기에, 창밖엔 비가 내리는 모습이라고 악보에 적혀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비를 표현하고, 협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따뜻한 선율을 연주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비’가 조금 우울하게 느껴져서 겨울이니만큼 눈으로 바꿔 상상했어요. 따뜻하고 포근한 집 안에서, 창밖으로 소복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장면으로요.
지난 2월,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공연’에서 막스 리히터의 ‘리컴포즈드 비발디 사계’도 연주했습니다.
‘리컴포즈드 비발디 사계’는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1966~)가 비발디 ‘사계’를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다시 작곡된(recomposed) 비발디의 사계’입니다. 재밌는 건 리히터가 이 부분을 비발디와는 완전히 다르게, 오케스트라의 아주 높은 음들을 사용해 차가운 느낌으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마치 유리 조각 같은 눈 결정이 사방에 퍼져 있고, 그 상태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듭니다. 모든 게 다 멈춰진 순간, 우주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아요. 이런 부분을 함께 상상해 본다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 될 미래, ‘미래’를 위한 지금
계획 중인 활동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은 지금 맡은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제 연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1940)와 같은 영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요. ‘판타지아’는 클래식 음악을 바탕으로 만든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제가 어린 시절 정말 좋아했거든요. 어린 시절에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음악을 경험하는 일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믿습니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네. 언젠가는 꼭 음악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습니다. 재능 있는 학생들이 차별받지 않고 마음껏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유럽 최정상의 연주자들이 모인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선 거장들께 좋은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물론, 동료들과도 서로 존중하며 피드백을 주고 받습니다. 이 시스템을 한국에 가져오고 싶습니다.
요즘 음악가로서 하는 고민이 있다면요?
저는 음악 덕분에 감사한 일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음악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사람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줄 방법은 무엇일지’에 관한 고민을 자주 합니다.
새로운 소속사인 ‘SH아트앤클래식’에서 첫 발을 뗐습니다. 앞으로 선보일 공연들에 대해 귀띔해 주세요.
관객이 호기심을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고민 중입니다. 2월에 선보였던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이나 이번 리사이틀처럼요. 또,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없는 보석 같은 아티스트들과의 협력을 구상 중입니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 무대, 곧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하하하’ 하는 청량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년쯤으로 기대해 주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수진이 표현할 ‘내년의 한수진’을 기대해도 좋다.
글 김강민 기자 사진 워너 클래식스
한수진(1986~) 런던 퍼셀 음악원, 옥스퍼드 대학·영국 왕립음악원,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안드리예프스키·자카르 브론·아나 추마첸코·정경화를 사사했으며, 15세에 역대 최연소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2위에 입상해 주목받았다. 대한민국 예술원 음악부문 젊은 예술가 상을 수상했다. 스페인 테너리프 콩쿠르 심사·부산국제클래식음악제 수석 부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외교부 문화외교 자문위원·사랑의 바이올린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한수진 바이올린 리사이틀
4월 15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신재민(피아노),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
멘델스존 현악 교향곡 2번,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비발디 ‘사계’, 몬티 ‘차르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