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4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촘촘히 쌓아 올린 현의 시간
글 강동석(1954~) 1967년 도미해 줄리아드 음악원, 커티스 음악원에서 이반 갈라미언을 사사했다. 몬트리올 콩쿠르, 칼 플레쉬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입상했고,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프랑스 뮤직알프 및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 #치고이너바이젠 #인생 첫 클래식 곡
야사 하이페츠(바이올린)
감상 포인트 하이페츠만의 강한 개성과 독창성이 드러나는 명연주
처음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들었던 곡은 대부분 바이올린 연주였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LP가 제한적이어서 다양한 음반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 들었던 음반 중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1901 ~1987)가 연주한 ‘치고이너바이젠’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은 바이올린 레퍼토리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로, 클래식 음악 애호가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특히, 하이페츠의 연주는 거의 한 세기 동안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훌륭한 교본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이페츠를 두고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연주는 저를 포함한 많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노 프란체스카티(1902~1991), 예후디 메뉴인(1916~1999), 레오니드 코간(1924~1982), 이츠하크 펄만(1945~) 등 저명한 연주자들도 하이페츠를 존경해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그 자체만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하이페츠가 연주한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이나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그만의 독특한 예술성을 드러냅니다. 그의 연주와 음색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만큼이나 독보적이어서 단번에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요즘은 하이페츠만큼 강한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연주자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연주자들이 하이페츠를 비롯한 선배 연주자들의 음악을 더 이상 즐겨 듣지 않는 점이 아쉽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프랑스 음악의 매력에 빠지다
#쇼송 #바이올린·피아노·현악 4중주를 위한 협주곡 Op.21 #일상에서 자주 듣는 곡
알프레드 코르토(피아노)·자크 티보(바이올린)
감상 포인트 쇼송의 섬세한 감정을 담은 코르토와 티보의 연주
프랑스 음악의 열렬한 팬으로서, 기회가 될 때마다 드뷔시와 라벨의 현악 4중주 작품을 찾아 듣곤 합니다. 특히, 칼베 현악 4중주단의 연주를 즐겨 듣습니다. 1919년 칼베 현악 4중주단을 창단한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 제프 칼베(1897~ 1984)는 파리 음악원에서 실내악을 가르쳤는데, 당시 프랑스를 대표했던 최고의 음악가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와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1880~1953)가 함께한 쇼송의 바이올린·피아노·현악 4중주를 위한 협주곡 Op.21 역시 좋아하는 연주입니다. 쇼송의 음악은 한없이 풍부한 감정을 지닌 낭만주의 음악의 정수로, 종종 비극적이고 외로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쇼송의 음악적 스타일과 그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 및 색깔은 무척이나 독특한데, 이러한 점은 그의 피아노 3중주와 4중주 작품에서도 드러납니다. 쇼송은 44살에 자전거 사고로 사망했는데, 그가 더 이상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슈베르트의 성악곡도 자주 듣습니다.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와 ‘백조의 노래’는 표현력이 풍부하며 간결하지만, 깊이가 있는 작품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자면, 음악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죠. 여러 음반 중에서도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녹음이 특히 매력적입니다.
실내악과의 만남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연주
과르네리 현악 4중주단
감상 포인트 후기 현악 4중주에서 드러나는 베토벤의 깊은 내면
커티스 음악원 재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작품을 만난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콰르텟 중 하나였던 과르네리 현악 4중주단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이들은 베토벤 현악 4중주 외에도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1887~1982)과 슈만·브람스·드보르자크의 피아노 5중주 등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음반들을 여러 차례 녹음했습니다. 당시 과르네리 현악 4중주단의 연주로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를 들었는데,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죠.
베토벤의 후기 작품을 듣다 보면 너무나 강렬하고, 자유로워서 늘 예상치 못하게 놀라곤 합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작곡 세계 안에서 기존의 규칙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곡 스타일은 매번 바뀌었는데, 이는 베토벤의 개인적인 삶만큼이나 극적이었습니다. 특히, 후기 현악 4중주에서는 당시 베토벤의 정신적 상태와 그가 지닌 잠재력의 깊이가 드러나곤 합니다.
그렇게 커티스 음악원에서 실내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피어났고, 그 시기는 음악가로서의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실내악을 접한 순간은 지금까지도 제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음악적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학생들에게 실내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들이 실내악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