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GAME&MUSIC_14 게임을 듣다
게임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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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리스
전설적인 게임 음악에 숨겨진 이야기
4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블록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테트리미노’라고 불리는 일곱 종류의 블록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평평한 줄이 만들어지면, 차곡차곡 쌓였던 사각형들이 가로로 깔끔하게 지워지죠. 그렇게 계속해서 블록들을 쌓고, 지우고, 쌓고, 지우고… 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는 게임, 바로 올해 40주년을 맞이한 ‘테트리스’입니다.
테트리스에는 어떤 등장인물도, 서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그저 버튼을 누르며 떨어지는 블록을 요리조리 돌리고, 쌓을 뿐이죠. 그런데 이런 특징 덕에 테트리스는 전설적인 게임으로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됩니다.
철의 장막을 젖히고 서방을 침공한 사각형
1984년, 소련 과학원에서 근무하던 프로그래머 알렉세이 파지노프(1955~)는 컴퓨터 ‘일렉트로니카 60’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퍼즐 게임을 제작했습니다. 그 게임이 바로 테트리스였죠. 파지노프는 거의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이 퍼즐 게임에 빠져들어, 일하는 도중에도 이 게임을 그만둘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후 테트리스는 소련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이윽고 미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1980년대는 아직 미국과 소련의 팽팽한 냉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싸우진 않았지만, 과학·문화·예술 등 온갖 분야에서 치열하게 경쟁했죠. 이 둘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두 축으로서 대립했고,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악마화했습니다. 이러한 기조는 그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소설이나 게임에도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미국이 묘사하는 여러 악당은 하나같이 보드카를 마시거나, 붉은 깃발을 들고 있거나,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을 쓰는 등 대놓고 러시아인을 저격하고 있었죠. 소련 공군을 무찔러 소련의 핵 시설을 파괴하는 슈팅게임이나, 세계를 침공하는 소련의 군대를 저지하는 게임 등, 미국의 게임계는 소련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산했습니다.
테트리스는 이런 소련의 악마화된 이미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그야말로 ‘중립적인’ 퍼즐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을 그만둘 수 없었던 파지노프처럼, 미국 시민들 역시 테트리스에 중독됐죠. 당시 어떤 이들은 테트리스가 소련이 미국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만든 비밀병기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테트리스는 중립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러시아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인으로부터 크게 인기를 얻었다는 점입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음악이 있었죠.
‘테트리스’ 음악의 최종 강자는?
테트리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이지만, 그 어떤 게임보다 복잡한 저작권 분쟁에 시달린 게임입니다. 테트리스는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개발한 게임이지만, 소련의 공산주의 정책으로 테트리스의 저작권은 국영기업 ‘엘로그(Elorg)’에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저작권이 명확하게 정리되기 전에 불법으로 다양한 테트리스가 유통되면서 테트리스 저작권 분쟁에는 미국의 게임사 ‘스펙트럼 홀로바이트’ ‘미러소프트’ ‘아타리’, 그리고 일본의 게임사 ‘세가’ ‘닌텐도’ 등이 복잡하게 얽히게 됩니다. 결론만 짧게 말하면 승리한 것은 러시아의 엘로그, 일본에서 게임사를 운영했던 네덜란드인 헹크 로저스(1953~), 그리고 일본의 닌텐도였습니다. 나머지 게임사들은 테트리스의 라이선스를 얻지 못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됐죠.
저작권 문제가 정리되기 전, 1985년부터 1990년 사이에 많은 게임사들이 여러 테트리스를 제작하고 유통했습니다. 테트리스의 흥행에서 역할을 한 것은 이국적인 러시아 문화 요소였는데, 당시 미국인은 소련을 적대하는 한편 러시아 문화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여러 게임사가 성 바실리 성당 이미지가 포함된 테트리스 게임을 팔았고, 러시아 음악을 게임의 배경음악으로 채택했습니다. 가령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에서 출시한 ‘테트리스’(1988)는 ‘평원의 노래(Polyushko Polye)’를 비롯한 러시아 민요와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모음곡’ 중 ‘러시아 춤’이 담겨 있었죠.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아타리의 아케이드용 ‘테트리스’(1988)에도 여러 러시아 민요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테트리스 음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은 러시아 민요 ‘코로베이니키(Korobeiniki)’, 바로 ‘행상인의 노래’ 일 겁니다.
‘행상인의 노래’는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1821~1878)의 시에 선율을 붙인 민요입니다. 적당한 빠르기로 시작했다가 갈수록 속도가 붙어서 곡의 후반부가 되면, 관객을 격정적인 감정으로 흥분하게 만드는 음악이죠. 이는 테트리스와 잘 어울리는데, 테트리스 역시 처음에는 꽤 여유 있는 속도로 블록이 내려오다가 점점 빨라져서 플레이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블록들이 수직 낙하하기 때문입니다. ‘행상인의 노래’는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의 테트리스에 처음으로 실렸으며, 닌텐도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의 ‘테트리스’(1989)에 실린 이후 국제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테트리스로 평생 기억될 민요
당시 닌텐도의 사운드를 담당했던 다나카 히로카즈(1957~)는 게임보이 테트리스에 ‘행상인의 노래’,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3번 중 미뉴에트, 그들의 창작곡까지 이렇게 총 세 곡을 싣고, 각 곡을 ‘Type-A’ ‘Type-B’ ‘Type-C’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세 곡의 공통점은 모두 단조로 작곡되어 싸늘한 느낌을 주고, 빠르기가 갈수록 빨라지며, 게임보이 특유의 ‘칩튠’(편집자 주_사인파·백색 소음 등 기본적인 소리 파형을 겹치고 합성하여 만든 소리로, ‘뿅뿅뿅’하는 소리가 대표적이다)이 굉장히 오묘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보이 테트리스는 3천 5백만 장이 팔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행상인의 노래’는 러시아 민요라는 이미지 대신, 테트리스의 음악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됐죠.
‘행상인의 노래’는 1985년과 1990년 사이에 범람했던 수많은 테트리스, 그리고 테트리스 음악 중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곡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테트리스의 저작권 분쟁에서 엘로그·헹크 로저스·닌텐도가 승리했지만, 소련이 붕괴하자 테트리스의 원작자였던 파지노프가 테트리스의 권리를 일부 돌려받았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1996년에 ‘테트리스 컴퍼니’를 세웠고, 앞으로 출시될 테트리스 게임에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죠. 여기에는 블록의 색깔, 블록의 가짓수, 게임의 규칙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테트리스의 저작권 분쟁을 해결하는 데에 닌텐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이 가이드라인에는 음악에 관한 규정이 딱 한 문장 적혀있습니다. “테트리스는 무조건 ‘행상인의 노래’를 포함해야 한다.”
글 이창성 서울대학교 작곡과 이론 전공을 졸업 후 동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게임과 음악의 관계에 관심을 두어 게임음악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재 KBS 1FM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