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공연수첩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5월 27일 8:00 오전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REVIEW 

 

능란한 연주자의 리드

세르게이 말로프 현악 독주회

4월 23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띠로리~’ 클래식 음악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 곡의 도입부는 알아차린다는 바흐 토카타와 푸가 BWV565의 A음 트릴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현악 독주회를 감상하러 왔는데 들려온 오르간 소리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윽고 세르게이 말로프(1983~)가 전자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입장하여 그 소리의 출처를 보여주었다. 익숙한 오르간 작품이 전자 바이올린 하나로 재현되자 시각과 청각의 ‘인지 부조화’가 생기는데, 그 감각이 나름으로 재밌다. 처음에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연주를 시작한 연출이 영리했다. 덕분에 전자 바이올린의 음색이 더욱 오르간 소리처럼 인식됐다. 이 곡은 오르간에서도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하는 작품인데, 울림통도 없는 얄브스름한 전자 바이올린에서 그 움직임을 재현해 내는 말로프의 테크닉이 돋보였다. 이후 루프스테이션을 활용한는 짧은 작품을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두 번째 곡은 바로크 바이올린을 들고 등장하여, 바흐 무반주 소나타 1번 BWV1001을 선보였다. 앞선 전자 바이올린의 왜곡된 음향효과로 인해 섬세함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가진 정교한 서정성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특히 2악장 푸가는 음향효과를 활용해 웅장함을 보여주었던 첫 곡을 넘어서는 거대함이 보였다. 공간을 채우는 폭넓은 다이내믹이 느껴졌고, 테크닉은 말을 더 얹을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 BWV1012는 말로프의 시그니처인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로 연주했다. 보통 첼로 곡으로 알고 있는 작품인데, 음악학자들이 이 작품은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를 위한 작품이었다는 의견을 제기해 왔고, 말로프의 연주는 이 주장에 설득력을 더했다. 각 악장이 가진 특성은 이 낯선 악기의 다양한 음색 특징을 하나씩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처럼 느껴질 정도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악기는 희극적인 음색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무게감이 있어, 홀로 연주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2악장 알라망드에서는 아련한 노스탤지어가, 3악장 쿠랑트에서는 피들스러운 재간이 느껴졌다. 4악장 사라반드는 무척이나 따뜻했고, 5악장 가보트와 6악장 지그는 재치 있게 우아했다. 현의 A부터 Z까지 들려주는 훌륭한 독주회였다.

이의정 기자 사진 제이에스바흐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연극 ‘에브리우먼’

5월 10~12일 국립극장 달오름

 

봄은 통계적으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이다. 각종 기념일과 청명한 날씨가 주는 활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싱그러운 5월의 어느 주말, 부서지는 햇살을 뒤로한 채 죽음을 목격하러 어두운 극장 안으로 향했다. 밀로 라우(1977~)의 ‘에브리우먼’(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해외 초청작)은 독일 실험연극의 산실 베를린 샤우뷔네 제작으로, 2020년 공동 제작을 맡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초연했다. 작품은 우르시나 라르디(1970~)가 출연하는 1인극이지만, 스크린을 통해 실제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헬가 베다우가 무대에 오른다(12일 관람).

멀리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캄캄한 무대 위에 그랜드 피아노와 여러 개의 종이 상자, 두 개의 거대한 암석,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 있다. 연관 없어 보이는 이 사물들은 라르디의 대사 속에서 직조된다. 그녀는 카세트 플레이어로 닐 영의 ‘Cortez the Killer’를 틀며 자전적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 경마장에서 겪은 말의 죽음, 빙하가 녹은 자리에 남은 암석…. 어느새 무대 뒤편 스크린에 베다우가 등장한다. 그녀는 “취미로 돌을 수집하는데 담석 때문에 죽게 되다니 믿을 수 없다”며 건조한 농담을 건네고, 라르디의 이야기를 듣다 잠에 빠지기도 하며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라르디는 “목이 마르다”는 베다우의 요청에 물을 들고 스크린에 나타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등 무대와 영상의 시공간적 간극을 허문다.

라르디는 베다우에게 죽을 때 어떤 모습이길 바라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비가 내리는 여름, 침대에서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죽고 싶다고 답한다. 라르디는 천장에서 비가 내리도록 무대 장치의 버튼을 누르고, 피아노에 앉아 바흐의 ‘오소서, 이방인의 구세주여’ BWV659를 연주한다. ‘쏴’하는 빗소리와 함께 영상 속 베다우가 멀어지고, 다시 캄캄한 어둠만이 남는다(헬가 베다우는 샤우뷔네 초연 후, 2023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잠깐의 침묵. 작품은 80분 동안 죽음을 다루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두려움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삶과, 한 사람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관객에게 죽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극장

 

 

오롯이 자신을 마주한 순간

뮤지컬 ‘헤드윅’

3월 22일~6월 23일 샤롯데씨어터

 

객석에 불이 꺼지자, 공연장 문을 열고 한껏 치장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는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환호를 받으며 객석 통로를 경쾌하게 걸었고, 이윽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헤드윅으로 분한 전동석이었다(5월 4일 관람).

헤드윅이 자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풀어 놓기 시작한다. 그의 본명은 한셀, 동독에서 자유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미군 루터와 결혼하기 위해 이름을 헤드윅으로 바꾸고 성전환수술을 감행했으나, 수술이 잘못돼 정체 모를 1인치의 살덩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 그는 그렇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채로, 헤드윅이 되고 만다. 그래서인지 그는 공연 내내 여성의 모습을 ‘연기’한다. 목소리 톤을 높이고,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걷는다. 헤드윅은 루터에게 버림받은 이후 새로운 남자 토미와 사랑에 빠지지만, 토미에게도 배신당한다. 그리하여 현재의 남편 이츠학을 만나게 되는데, 사실 이츠학은 여성이다. 이츠학은 헤드윅과는 반대로 굵은 목소리를 내며, 일부러 건들거린다. 헤드윅과 이츠학의 연극적인 행동이 어쩐지 애처롭다.

영상 디자인과 영상 중계 등 약 1천2백 석 규모의 큰 극장을 십분 활용한 연출도 눈길을 끌었다. 배우와 관객과의 소통이 많은 ‘헤드윅’의 작품 특성상, 무대와 먼 자리의 관객도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신경 쓴 티가 났다. 특히 반투명 스크린의 활용이 신선했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단연 극의 마지막 부분이다. 평생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한 헤드윅이 울분을 토해낸다. 드레스와 가발을 모두 벗어 던지니, 이내 속옷 차림의 한 남자만이 무대에 덩그러니 남았다. 헤드윅이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 이후부터 전동석이 보여준 시원한 발성과 긴 호흡의 넘버도 인상적이었다. 목소리에서 이제야 온전히 자신을 드러낸 듯한 후련함이 느껴졌다. 화려하게 꾸민 채로 무대에 올랐던 헤드윅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무대 뒤로 조용히 퇴장한다. 첫 장면과 대조되며 여운을 남겼다. 퇴장하는 문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와, 그의 미래가 희망적일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동석이 마지막 넘버 ‘미드나이트 인 라디오’에서 “손을 들어”라는 가사를 부르자 관객이 손을 들어 올리며 호응했는데, 그 순간 관객들의 얼굴에는 같은 감동이 스며 있었다.

김강민 기자 사진 쇼노트

 

 

대책 없이 파멸하는 사랑의 춤

무용 ‘로미오와 줄리엣’

5월 8~19일 LG아트센터 서울 LG 시그니처홀

 

발레계의 이야기꾼인 안무가 매튜 본(1971~)이 2019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자신의 무용단 ‘뉴 어드벤쳐스’와 함께 선보였다(14일 관람). 매튜 본은 창의적 각색으로 직관적 이해가 가능한 공연을 만들어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대중 수용적인 전달력이 눈에 띄었다. 모든 등장인물의 움직임이 짜임새 있는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극으로서는 몰입도가 높다. 매튜 본이라는 흥행 브랜드 아래서 성장한 뉴 어드벤쳐스의 젊은 무용수들은, 탄탄한 실력과 자유로운 표현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매튜 본은 이야기의 배경을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강압적 시설로 옮겼다. 이곳에서 티볼트는 줄리엣의 사촌이 아니라 성적으로 학대하는 경비다. 로미오는 이 시설에 전학을 온 학생이며, 그를 친절히 맞아주는 친구 머큐시오와 발타자르는 동성 연인임이 적극적으로 극에 드러난다.

원작의 음악인 프로코피예프 선율이 사용됐으나, 편곡을 거쳤다. 이 음악의 하이라이트인 ‘기사들의 춤’에서 매튜 본이 발견한 움직임은 흥미롭다. 감시 아래의 학생들은 경직되고 통일된 춤을 추는데, 이때에는 프로코피예프 음악 특유의 거친 리듬감이 들려온다. 반면 감시하는 이들이 없을 때의 춤은 원초적이고 자유로우며 같은 음악임에도 리듬이 아닌 멜랑꼴리한 선율이 들려온다. 안무가로서 매튜 본이 가진 음악적 감각이 돋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2인무는 그가 발레에서 탄생한 이단아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파드되를 연상시키는 두 남녀의 춤은 발레 속 사랑의 몸짓을 닮았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고 싶었던 매튜 본의 의도에 따라, 작품은 원작에서 느껴지던 분위기를 완전히 떠났다. 오히려 마치 최신 OTT 플랫폼의 미국 하이틴 영화를 보는 듯한 소재 사용, 차별 없음을 강조한 인류애적 주제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 분위기 속 두 사람의 죽음은 사랑의 서사와 아무런 상관없는 ‘총기 사고’가 된다. 사랑으로 두 가문의 화합을 이뤄냈던 원작과 달리, 이들의 죽음은 현실적으로, 혹은 현실에서보다 더 의미 없이 휘발된다. 매튜 본이 생각하는 새로운 세대의 결말이란 이렇게 수동적인 걸까? 극의 여운보다는 춤의 여운이 남았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예상 밖의 아쉬움을 남기고 떠났다.

허서현 기자 사진 LG아트센터

 


 

CLASSICAL MUSIC

 

윤한결/한경arte필하모닉

브람스 교향곡을 향한 젊은 시선

5월 3·4일 예술의전당 외

 

2023년 8월 6일에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에서 우승한 윤한결이 5월 3일과 4일 한경arte필하모닉과 함께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선보였다. 특히 윤한결은 한경arte필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연주한 적이 있고(2022.7.1/롯데콘서트홀), 본지 2023년 10월 호의 인터뷰에서 연주하고 싶은 곡으로 브람스 교향곡 3번을 꼽은 바 있어, 이번 공연이 더욱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필자는 그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는데, 당시 언급한 교향곡 3번을 연주하는 날(5월 3일)에 참석했다(5월 4일은 교향곡 2·4번 연주).

교향곡 3번이 무대를 열었다. 이 곡은 밝고 화사하게 시작하는 듯하지만, 기대에서 벗어나는 화음에 애틋함을 숨기지 않는다. 한 여인에 대한 연모, 그러나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는 안타까움. 윤한결이 프로그램 노트에 직접 적은 ‘돌고 돌며 반복한다’라는 설명은 이 곡에 담긴 감정의 음악적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 연주가 갈등의 소용돌이에 갇혀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꿈결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전개가 브람스의 이야기를 감상자의 마음 한편에 자리한 추억 이야기로 변모시키고 몰입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제스처 처리와 음색 표현을 후순위로 둘 위험이 있다. 현악의 극적 표현은 하나의 음색으로 융화되어야 하며, 목관의 선명한 음색은 정서적 표현을 고민해야 한다. 4악장에서는 관현악의 거대한 역량을 한껏 드러냈다. 마지막 지시어 ‘운 포코 소스테누토(음의 길이를 조금 길게 유지하면서)’로 인해 속도감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애틋하게 들려왔으나, 어느덧 산뜻하게 울리는 마지막 화음을 듣고 흥미진진했던 여정에 박수를 보냈다.

교향곡 1번 또한 드라마로서의 전개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긴 호흡으로 이어가는 1악장의 첫 선율부터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며, 박진감 있는 리듬 표현으로 이를 악장 내내 유지했다. 여기에는 팀파니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불과 서주 부분에서 말렛(타악기 채)의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과장되어 보이기도 했지만, 이는 ‘거인의 발걸음’을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적극적인 시도였을 것이다(브람스는 “거인(베토벤)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어 교향곡을 쓸 엄두를 못 냈다”라고 고백했다).

이러한 접근은 교향곡의 의미뿐만 아니라 음악회가 지니는 공연으로서의 의미를 회복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1악장에서의 표현이 느린 2악장과 지나치게 대비되어서인지, 약 40초를 쉰 후 다음 악장을 시작했다. 2악장은 관악기 독주의 서정적 선율과 몽환적인 현악 앙상블의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3악장은 아직 꿈결에 머문 듯했고, 4악장의 시작은 모호함을 더욱 가중했다. 어둠 속에서 희망의 길을 여는 호른 주제와 첼로 주제를 염두에 둔 것이겠으나, 분위기 전환이 충분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나 진정한 결론은 마지막 C장조 ‘피우 알레그로(더 빠르게)’에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역진하며 최고의 환희를 관객과 나누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연주와 음반은 수없이 많지만, 윤한결의 관점은 여기에 또 다른 모습으로 투영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가 경험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은 오늘의 감상자들에게 고전 음악에 대한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한경arte필하모닉

 

 

힐러리 한·안드레아스 해플리거 듀오 리사이틀

전성기가 끝나지 않을 듀오

5월 11·12일 예술의전당 외

 

비 내리는 촉촉한 5월의 오후, 힐러리 한(1979~)과 안드레아스 해플리거(1962~)의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를 듣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그래미상 3회 수상, 시카고 심포니와 뉴욕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늘 평단과 관객에게 두루 좋은 평가를 받는 힐러리 한의 브람스는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하루 전에 있었던 츠베덴/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에 인후통으로 공연이 어려워진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대신해(5월 8일 공지) 훌륭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보였다는 소식이 그의 공연을 향한 주목도를 더 높이기도 했다.

빈 좌석은 거의 없었다. 정교하고 탄탄한 힐러리 한의 음색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지만, 해플리거의 소리, 그리고 둘의 하모니는 또 다른 이야깃거리이기에 주의를 집중했다.

소나타 1번의 1악장에서, 궁금증의 일부가 풀렸다. 첫 시작부터 달콤하고 부드러운 둘의 연주는, 특히 해플리거의 ‘감싸 안는’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하나의 움직임이 된 두 사람이 나아가는 여유로운 춤은 듣는 이를 설레게 했다. 2악장은 바이올린 활 사용의 교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활을 끝에서 끝까지 사용하며 소리를 탄력 있게 유지하는 힐러리 한의 능력을 볼 수 있었다. 활 끝까지 갔다가 중간에서 다시 시작하는 ‘리테이크’ 주법을 사용할 때에도 소리나 프레이징이 끊어지는 법 없이 윤기 있게 이어졌다. 이러한 활 테크닉 덕분에 2천5백 석의 콘서트홀에서도 힐러리 한의 소리는 잘 울려 퍼졌다. 해플리거 역시 볼륨을 높이기보다는 섬세하게, 그러나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울림을 줌으로써 균형을 맞췄다. ‘비의 노래(Regenlied)’라 불리는 3악장은 선율적으로, 동시에 유희적으로 표현했다. 리듬으로 긴장을 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여유롭게 풀어나가며 절제미를 살렸다.

소나타 2번의 1악장 주선율은 바이올린의 밝고 힘찬 노래로 만날 수 있었다. 연주자 특유의 깨끗하고 맑은 음색이 잘 드러나는 악장이었다. 해플리거의 민첩한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소나타 1번과 2번에서 조금은 한 발 뒤에서 따르던 피아노가 소나타 3번에서는 훨씬 대등하게 앞으로 나섰다. 또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정밀한 파트너십이 돋보였는데, 특히 1악장, 둘이 같이 하행하는 스케일에서 약간씩 머뭇거리며 진행하는 루바토의 타이밍을 둘이 꼭 맞추어 음악적인 뉘앙스를 잘 살렸다. 4악장에서는 피아노가 음악적·음향적으로 반보 앞에 나서면서 화려하고 격정적인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역시 전체 공연 중에 몸동작을 가장 크게 하며 거침없이 종국을 향해 전진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와인은 익을수록 모서리가 둥글어진다. 10대부터 지금까지 소위 ‘30년 동안 전성기’라고 하는 힐러리 한의 연주가 바로 그랬다. 둘의 연주는 과시적이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힘이 단단한 자존감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몇몇 악장의 느리게 잡은 빠르기는 호불호가 있겠지만, 여유와 노련함에 있어서 탁월했다. 앙코르로는 미국 작곡가 윌리엄 그랜트 스틸(1895~1978)의 ‘어머니와 아이(Mother and Child)’, 그리고 슈만·브람스·디트리히가 공동작곡한 ‘F-A-E 소나타’ 중 ‘스케르초’를 연주했다.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마스트미디어

 

 

오충근/부산심포니 ‘낭만의 온도’

부산의 미래를 다진 ‘B’

4월 28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31년 전통의 민간 오케스트라인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BSO)의 제56회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아름다운 열정과 역동적인 면모를 발휘하는 BSO는 참신하고 다양한 기획력으로 관객들이 찾는 부산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지역 예술계의 온도를 높이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날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거대한 에너지 속의 숭고한 낭만 선율의 브루크너 교향곡 4번 ‘로맨틱’을 연주했다. 부산의 ‘B’, 브루흐와 브루크너의 ‘B’, BSO의 ‘B’가 한데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첫 순서로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이 최다 우승자로 선정한 ‘콩쿠르 퀸’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의 협연으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연주되었다. 역동적인 울림의 1악장에서 바이올린 독주가 비장하게 시작하고,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그의 탁월한 해석에 청중은 압도되고 말았다. 힘차게 뻗어 나가는 더블 스토핑과 현란한 활의 운용, 감미롭고 지적인 선율 등 탄탄한 연주력을 보여주었는데, 협연자가 브루흐의 이 곡을 처음 협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감이 인상적이었다. 관객석에서 환호와 놀라움이 터져나왔다.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이 ‘브루크너 탄생 200주년’을 기리며 브루크너의 향연이 이어지는 가운데 부산에서도 올해 처음, 관객들과 호흡하며 직관의 무대를 팬들에게 선사했다(같은 날, 서울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 참가한 인천시향도 브루크너의 200주년을 기념하고자 교향곡 7번을 연주했다). 2부에서 들려준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은 작곡가의 가장 대표작이다. 브루크너가 50세에 완성한 후 여러 수정 판본이 있는데, 1881년 하스판이 연주되었다. 공연 전 오충근 예술감독은 “부산에선 실연으론 좀처럼 듣기 어려운 브루크너의 명작인 만큼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연주 시간만 1시간이 넘는 대작을 오 예술감독은 암보로 지휘했다.

신비롭고 은밀하게 시작되는 현악기 앙상블과 그 위로 울려 퍼지는 호른의 소리는 황토빛 중세의 건조한 도시가 떠오르다가 때로는 평화롭고 경이로운 자연을 맞이하기도 했다. 호른이 중심이 되어 흐르며, 전 악장을 전원적이면서도 힘차게, 또 목가적 분위기로 유도했다. 황홀한 시간이 일순간 흐르는 듯했다.

200년 전 음악에 동시대적 에너지로 카타르시스를 이끈 이번 연주는, 한편으로는 부산의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도 쉽지 않은 레퍼토리였겠지만, 묵묵히 음악의 순수함을 지켜온 BSO의 30년 넘는 전통과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관객도 음악뿐 아니라 이러한 BSO 역사와 함께 호흡하며 성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부산은 클래식 음악 전용홀 개관을 앞두고 설렘과 기대가 가득하다. 부산콘서트홀이 8월에 준공돼 2025년 개관을 앞두고 있으며, 부산오페라하우스는 2026년 준공과 2027년 개관을 예정 중이다. 무엇보다 글로벌 허브도시로서의 자부심과 고매한 예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준비된 부산’이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의 또 다른 중심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기대감으로 인해 이번 공연은 오랜 시간 부산을 지켜온 악단이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김윤선(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DANCE

 

국립발레단 ‘인어공주’

보상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연민

5월 1~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레라 아우어바흐(음악), 존 노이마이어(안무·무대·조명·의상), 사이먼 휴잇(지휘)/국립심포니

‘인어공주’는 2005년 코펜하겐 오페라하우스 개관작으로 덴마크 로열 발레가 초연했고, 2007년 함부르크 발레가 공연을 앞두고 기존의 1·2·3막 구성에서, 프롤로그·1·2막·에필로그로 개정했다. 국립발레단이 이번에 선보인 버전은 개정작이다. 함부르크 발레 예술감독 존 노이마이어(1939~)가 안무했고, 발레단 소속의 로이드 리긴스·나우르카 모레도 부부가 노이마이어를 대신해 전막을 다듬었다. 마임과 표정에서 자신만의 진폭을 조율한 조연재·최유정이 국립발레단 최고 서열은 아니지만, 인어공주 역에 캐스팅됐다(필자는 1일 관람).

노이마이어는 다섯 명의 주조역(시인·인어공주·왕자·공주·바다마녀)간 갈등을 통해 원작자 안데르센의 개인적 불행을 무대에 드러냈다. 시인을 안데르센의 분신으로 설정했지만, 캐릭터상으론 자기희생을 거듭하는 인어공주의 행로가 안데르센의 개인사를 반영한다.

노이마이어는 안무가보다 연출가 관점에서 인어공주의 집착을 집요하게 그렸다. 애착이 보상받지 못하리란 결말을 알지만, ‘운명의 벽’을 두드리듯, 애정을 외부와 제3자에 알리는 이면에, 청년 시절 이성애에 실패하고 노년에는 동성애 낙인을 두려워한 안데르센을 연민하는 노이마이어의 감정이 묻어난다.

안데르센과 노이마이어를 대신해 인어공주가 애정을 부르짖은 상대는 왕자의 외피를 쓴 사회의 도덕률로 읽힌다. 욕망에 귀 기울이고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노이마이어의 안데르센을 향한 역방향 훈계가 이어진다. 2018년 동성 결혼으로 사랑의 대상을 찾은 노이마이어처럼, 공간을 초월해 영원한 사랑을 갈구한 인어공주도 파트너를 찾으리란 희망이, 인어공주가 ‘하늘의 별’이 된 열린 결말로 불씨를 이었다. 개정 이후 버전이 지닌 신파성과 동어 반복을 서유럽 시장은 외면했고, 일본·중국·한국이 존중하는 흐름은 추후 컨템퍼러리 발레 수입과 유통 면에서 유의할 조류다.

1일에 공연한 조연재는 아가페적 헌신과도 거리가 먼 인어공주의 중층적인 감정 혼란을 세계 초연에 관여한 무용수처럼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고통스러운 변태 과정에 이어지는 육상 생활의 어색함 사이, 급속한 감정 전환에 따른 연기 결핍의 우려를 조연재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로 말끔하게 지웠다. ‘인생작’을 만난 환희가 조연재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했다. 안무가는 물속을 우아하게 유영하는 장면보다, 뭍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인어의 불안을 볼거리로 활용했다. 꼬리가 찢어진 채 휠체어에 앉아 왕자와 공주의 밀어를 훔쳐보는 연출은 캐릭터를 통해 가학을 즐기게 된 노장의 욕망을 환기했다. 동작적으로 노이마이어식 미학을 펼칠 공간이 넓었지만, 결국 자기연민을 관조하는 멜로드라마로 자족했다.

국립발레단은 노이마이어의 아카이브 가운데 동북아시아 정서에 부응하는 작품으로 협업을 시작했다. 노이마이어는 결혼과 팬데믹을 겪으면서 아카이브 재생에 의욕을 보인다. 팔십 대 중반의 거장에게 1989년 도쿄 발레 위촉 ‘달에 모이는 일곱 개의 하이쿠’를 제작하던 시절의 체력을 요구할 순 없으나, 국립발레단의 놀라운 흡수력을 이어갈 차기작 연계를 더 늦출 순 없다.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사진 국립발레단

 

 

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표류하는 창작의 좌표

4월 25~27일 국립극장 해오름

 

안무 김종덕/조안무 정소연·이재화/작곡·음악감독 김재덕·황진아/무대디자인 이태섭/조명디자인 장석영/영상디자인 황정남/의상디자인 노현주 외

국립무용단의 신작 ‘사자(死者)의 서(書)’에 무용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작년 4월 김종덕 예술감독 부임 후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국립무용단의 창작 방향성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춤과 예술에서 ‘죽음’이라는 소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다. ‘사자의 서’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죽음 이후의 세계인 49일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모티프가 된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는 고대 문화의 철학과 신앙적 지혜를 환기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 살아있는 자의 특권인 몸짓으로 탐색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소중함을 시사하는 강력한 주제이기도 하다. 신작도 유한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죽음의 시공간을 춤으로 풀어낸 작품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의 관문에서 망자와 저승사자가 펼치는 심판의 행위는 대형 무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장경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지막한 한숨과 저음이 번지며 감지되는 엄중한 분위기에서 죽음의 통과의례가 펼쳐진다. 저승과 이승을 경계 짓는 강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의 구획이나, 50여 명의 무용수가 질서정연하게 바닥을 치는 칠채장단 변주는 심판장의 권위를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이는 사십구재(四十九齋)를 떠올리게 하며, 제의의 공간으로 관객을 기꺼이 안내한다. 특히, 일렬로 가부좌한 무용수들이 목소리와 위패를 이용해 만든 소리의 재단(齋壇)은 신체 행위의 언어적 지평을 확장시킨, 기억할 만한 명장면이다. 1장에서 망자와 연관된 오브제 배치와 수직적 공간 연출이 돋보였고, 무엇보다 장엄한 스펙터클로 치환된 안무가 설득력 있었다.

상상력이 발휘된 숙연한 제의와 달리 2·3장의 전개는 진부했다. 국립무용단의 초창기 무용극이 소환된 듯, 망자의 생애사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방식이다. 3인무와 2인무로 갈무리되어 감정표현에 치중한 (소년기·청년기·장년기를 묘사하는) 회상의 춤(2장)은 넓은 무대를 채우기에 단조로웠다. 추상적이고 어려운 춤도 경계해야 하나, 상투적인 서사는 호기심을 잃게 한다. 무드라(인도 무용의 한 종류)에서 착안했을지도 모를 현란한 팔동작과 휘몰아 가는 공격적인 춤(3장)은 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닌, 생에 대한 집착으로 다가왔다. 테크닉이 뛰어나도 의미의 연관 관계가 불분명한 춤은 공허한 외침으로, 춤 고유의 힘을 잃게 한다. 결국 죽음을 관조하며 궁극적으로 삶의 존재론적 물음표를 던질 수 있는 주제와 멀어져 버렸다.

‘사자의 서’는 죽음의 서사를 통해 동시대에 회복해야 할 마음의 치유에 방점을 두었다. 그러나 작품은 ‘죽음의 화두’를 진득하게 이끌지 못했다. 죽음을 초월하는, 혹은 수용하는 의지와 역량으로 형상화하기보다 예측 가능하게 하는 무용극적 전회가 아쉬웠다. 전통의 창의적 변용이라는 형식에서도 한 걸음 물러서 있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비워내기보다 채움으로, 응축된 호흡으로 수렴되는 품격 있는 춤보다 외향적 발산으로, 한국춤의 미적 특질과는 결이 다른 뉘앙스로 귀결되었다.

재능 있는 조안무들이 합류했으나 통상적인 한국무용의 안무 문법(서사적 시퀀스)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거문고와 현대음악의 매칭도 전형화되어 매력이 덜했다. 그렇다고 정서의 재현이나 내면의 동기로부터 해방을 추구한 현대무용 양식에 가깝지도 않다. 그간 국립무용단은 ‘전통의 현대화’를 기치로 변화를 추구해 왔으나, 이번 신작이 그 흐름에 부응했는지는 의문이다. 전통과 컨템퍼러리를 넘나들되 전통의 통시적 맥락이 짚어지는 작품인지 말이다.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이 공고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미적 사유를 촉발시키는 창작춤을 기다려 보자!

김혜라(무용평론가)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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