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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륙을 넘나드는 ‘만신’의 여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유은선 & 연출가 박칼린
일 년 넘게 준비한 신작 ‘만신: 페이퍼 샤먼’으로 전하는 치유의 굿, 위로의 소리를 들어보자
“파묘요!” 짧은 외침과 함께 일순 일꾼들이 묫자리를 파(破)한다.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파묘’(2024)는 올해 개봉작 중 최단기간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상반기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특히, 살(煞)을 대신(代)하는 ‘대살굿’ 장면은 극 중 명장면으로 꼽힌다. 장재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 땅의 역사적 상처와 트라우마를 ‘파묘’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는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씻김굿’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오는 6월, 또 다른 ‘치유의 굿’을 다룬 국립창극단의 신작 ‘만신: 페이퍼 샤먼’(이하 ‘만신’)이 무대에 오른다. 작품은 주인공 ‘실’을 통해 각 대륙의 비극과 고통을 다양한 형태의 굿으로 치유하는 과정을 그릴 예정이다. 생사(生死)와 음양(陰陽)의 경계를 한지로 표현한 ‘페이퍼 샤먼’의 ‘씻김굿’은 영화와 달리 사뭇 고요하고 평화롭다.
지난해 7월, 국립창극단의 2023/24 레퍼토리 시즌 기자간담회에서 신임 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은 부임 후 첫 창작극인 ‘만신’의 연출가로 박칼린을 소개했다. 뮤지컬 문법에 능통한 박칼린 표 창극에 물음표가, 뮤지컬 ‘명성황후’로 데뷔한 박칼린 표 한국 무속에 느낌표가 찍혔다. 이번 작품은 지금껏 정통 판소리(‘심청가’), 경극(‘패왕별희’), 셰익스피어의 비극(‘리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극으로 재해석해 온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다. 개막을 한 달여 앞두고, 작품 준비에 한창인 두 사람을 만나 ‘만신’의 탄생 비화를 들었다.
‘만신’은 샤머니즘을 다루는 창작극입니다. 이번 작품의 소재를 무속으로 선정한 계기가 있나요?
유은선 작년 4월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새로운 작품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기존의 ‘리어’, ‘베니스의 상인들’ 등 훌륭한 작품도 많지만, 국립창극단의 정체성에 맞는 새로운 작품 구상이 필요했죠. ‘한국적인 소재’와 ‘순수 창작극’, 이 두 가지 요소를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을 고민하던 중 국악을 전공하고, 소리를 배운 박칼린 연출가가 떠올랐어요. 그때부터 박칼린 연출가에게 “일단 나랑 뭐든지 하자”고 이야기했죠.
박칼린 오래전부터 무속인들이 지닌 육감에 대해 다뤄보고 싶었어요. ‘만신’은 창극으로 고안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유은선 예술감독님의 권유로 국립창극단과 함께하게 됐어요. 만신(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은 치유의 존재입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넋을 달래고, 저승으로 가는 길을 돕는 역할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최근 외국에서는 ‘샤먼(Shaman)’이라는 표현 대신 ‘치유자(Healer)’ 또는, ‘예민한 자(Sensitive People)’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해요. 이번 작품에서는 만신을 통해 세계 곳곳, 각 대륙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아픔을 달래고 치유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굿,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위로
한밤중, 북유럽의 샤먼 ‘이렌’은 숲의 생명을 지키는 기도를 올린다. 동이 틀 무렵, 동쪽 대륙의 끝에서 영험한 힘이 솟아 오르고 ‘이렌’과 각 대륙의 샤먼들은 삼신굿이 열리고 있는 이 땅의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태어난 예민한 자 ‘실’은 여러 대륙의 샤먼들과 각 대륙의 영혼들을 만나고, 그들이 지닌 아픔을 치유하는 여정을 떠난다.
‘실’과 샤먼들이 흰 바탕에 써내려 갈 무수한 이야기, 종이 한 장보다 얇은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샤먼을 표현하고자 이번 작품의 무대와 의상, 소품은 한지로 만들어졌다. 특히, 창극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장르이기에 음악이 작품의 인상을 좌우한다. 박칼린은 “북유럽부터 아마존까지, 각 대륙의 문화를 포괄하는 다양한 장르의 토속음악이 담겨 있어요. 낯설게 들릴 수도 있지만, 모두 오음계 안에서 공통된 리듬을 띄고 있기에 음악적으로는 통일되어 있죠. 만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굿음악도 잔잔히 흐르고요”라고 설명한다.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유은선 무속이라는 새로운 소재로 박칼린 연출가와 작품을 만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우려하는 시선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무속을 소재로 하는 창극을 만들 때 국내에서 박칼린만큼 적합한 연출가는 없다고 생각했죠.
박칼린 첫 창극 연출작이다 보니 걱정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기존 창극 공연과 다른 스타일에 단원들도 조금 의아해하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저를 믿고 따라 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요. 다들 소리꾼이다 보니 ‘말’로 소통하는 게 굉장히 수월한 편이에요.(웃음)
무속 문화에 대한 고증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 같습니다.
박칼린 무속의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린 시절 토속 신앙에 기반을 둔 가정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작품의 주제에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고증의 압박에 사로잡혀서 며칠 전까지 모든 디렉션과 안무, 장단의 고증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연습했어요. 안무가, 작곡가, 작가 등 스태프들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죠. 알고 지내던 만신 선생님에게 조언을 듣고 작품에 대한 자료를 정리한 뒤에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국립창극단에서 저에게 바라는 지점은 다름 아닌 ‘박칼린의 방식대로 풀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무속에 사용하는 ‘굿음악’과 창극의 ‘판소리’ 모두 전통예술에서 중요한 음악입니다. ‘만신’에서 음악적으로 눈여겨볼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칼린 눈여겨볼 대목은 단연 오프닝 장면이에요. 김금미 선생님이 북유럽 음계로 소리를 내시거든요. 더불어 이번 작품에서 창극 배우들이 구음으로 선보일 바람, 새, 동물 소리 등도 관객에게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과 연,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시도
창작극인 만큼 작창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작창(전통음악의 장단과 음계를 활용해 소리를 짓고, 노랫말과 대본을 수정하는 일)을 맡은 안숙선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고요.
유은선 안숙선 선생님과는 20여 년 전 박칼린 연출가와 함께했던 아리랑TV의 국악 프로그램 ‘사운드 앤 모션’에서 처음 알게 됐어요. 박칼린 연출가는 박동진 선생에게 소리를 배운 경험이 있었고, 저는 ‘깍두기’로 선생님 댁에 따라갔죠.(웃음) 새벽에 선생님과 청계산 등산을 하기도 했고요. 안숙선 선생님은 한국에서 작창을 가장 오래 하신 분이에요. 국립창극단에서 첫 작품을 선생님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라며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과거의 인연이 이 작품까지 이어진 거죠.
예술감독 부임 후 첫 창작극인 만큼 기대도, 걱정도 많을 듯합니다.
유은선 현재 국립창극단의 성과는 이전 세대가 가꿔온 노력의 열매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명성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책임감도 느껴지고요. 김성녀 예술감독(재임기간 2012~2019) 시기에 국립창극단이 셰익스피어의 희·비극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시도했던 것처럼 한 번쯤은 색다른 시도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큰 흐름 속에서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또는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칼린 다시 뮤지컬로 돌아가서 일 년 정도 한 작품을 깊게 준비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참, 그 사이에 ‘만신’이 잘 되면 해외 공연을 할 수도 있겠죠? 미국 서부에서 원주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아프리카에서 부두교(voodoo)와 합동 공연을 하고,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샤먼이 가진 치유의 힘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어요.
유은선 누가 그러더라고요. 국립창극단을 두고 ‘이제는 내 새끼들이 된 거다’라고요. 그동안 쌓아온 경력을 총망라해 이곳에서 기획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앞으로는 같은 레퍼토리를 선보이더라도 무대나 연출이 아닌, 국립창극단 배우들의 공력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작품은 베일에 싸인 미신적인 존재를 다루지만, ‘만신’의 탄생을 앞두고 두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쾌하다. “각 대륙에 남겨진 숙제를 푸는 것”. 신과 인간을 잇는 만신 ‘실’의 탄생 비화를 듣고 있자니, 이들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을 잇는 ‘치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가올 6월, 창극으로 선보일 21세기 만신의 여정을 기대해 본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극장
유은선(1962~)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동아음악콩쿠르 국악작곡 부문 1위·KBS국악대상 작곡상·문화관광부장관 희망문화나눔표창 등을 수상했으며,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국악방송 방송본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박칼린(1967~)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학사 및 서울대 음악학 석사를 졸업했으며, 박동진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부산시립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1995년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로 데뷔해 ‘오페라의 유령’(2002), ‘노트르담의 꼽추’(2004), ‘아이다’(2006), ‘시카고’(2009~2010) 등 70편이 넘는 뮤지컬 작품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창극단 ‘만신: 페이퍼 샤먼’
6월 26~30일 국립극장 해오름
연출·구성 박칼린, 극본 박칼린·전수양, 작창 안숙선, 작창보 유태평양, 작곡 격음치지, 안무 김윤규 외
김우정·박경민(실), 김금미(이렌), 김수인(바바카), 민은경(아이야나) 외
ENJOY
시대를 아우르는 굿음악 속으로
천년의 시간을 이어 온 단오굿부터 힙하게 재탄생한 무가와 굿거리까지, 지금 바로 즐겨보자!
기자가 꼽은 ‘굿어롱’ 플레이리스트
신(新) 샤먼의 등장
#추다혜차지스(CHUDAHYE CHAGIS) #리츄얼 댄스
추다혜(보컬), 이시문(기타), 김재호(베이스), 김다빈(드럼)
‘맺힌 간장 다 풀려 놉서~’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려오는 펑키한 리듬과 함께 ‘록’과 ‘소리’를 넘나드는 보컬 추다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제주도 무가 ‘서우제소리’에 힙합 사운드를 더해 재해석한 이 곡은 나른한 리듬으로 신과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것은 굿인가, 주술인가
#악단광칠 #영정거리
김현수(대금), 이향희(피리·생황), 김동훈(아쟁), 원먼동마루(가야금), 전현준(타악), 선우진영(타악), 방초롱·이유진·최은비(노래)
그야말로 신명나는 굿 한판이다. 아니, 리듬으로 사람을 홀리는 주술이다. 황해도 굿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곡으로, 영정(零丁)을 달래고 질병·근심·액운을 걷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이 연주하는 반복되는 리듬과 가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걱정은 저 멀리 사라진다.
굿의 원형을 찾아서
강릉단오제 6.6~6.13
단오굿, 천년의 염원을 담다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단오(음력 5월 5일)를 기념해 매년 강릉에서 개최된다. 음력 5월 4일부터 5일간 열리는 단오장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농사의 번영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 단오굿은 영동지역의 안녕과 생업의 번영을 기원하며 여러 무속 신을 차례로 모시는 의례로, 무녀는 국사 성황신위와 대관령 신목을 모시고 5일 동안 20거리 내외의 굿을 한다. 강릉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재로,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립창극단 ‘만신’을 관람하기 전, 대중에게 공개되는 굿의 원형을 축제와 함께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