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 오페라 데뷔 40주년, 소프라노 홍혜경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6월 27일 9:00 오전

COVER STORY

 

소프라노 홍혜경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40주년

‘역사’를 써내려간 그의 노래를 따라 걷다

 

 

 

소프라노 홍혜경은 1984년, 한국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올랐다. 그 발걸음은 곧 우리나라 성악 음악계가 디딘 첫 걸음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해외 오페라 극장에는 한국 성악가들의 진출이 끊이지 않는다. 이 역사의 시작 40주년을 기념하며, 홍혜경은 오는 7월 예술의전당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그가 앞서 걸었던 길목마다, ‘객석’에도 40년간의 자취가 남아있었다. 공연을 앞두고, 그와 함께 기록을 들추며 이야기를 나눴다. 역사로 남는 그녀의 도전기, 그 뜨거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허서현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객석 DB

 

 

메트 오페라가 상주하는 링컨센터

1982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오페라) 무대에 선 한 성악가의 눈이 반짝인다. 꿈의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하는 것이 떨리기보다는 ‘편했다’라고 느낀 순간. 그의 마음에는 ‘아, 이 곳이 내가 노래할 곳이구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게 2년 뒤, 메트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에 한국인 성악가로서는 최초로 데뷔의 신호탄을 쏜다.

홍혜경이 7월 3일에 갖는 공연은 이 ‘메트 오페라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다. 주로 대형 오페라를 올리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성악가 한 명의 무대로만 채워지는 것도 보기 드문 경우다. 이 공연은 연광철(7.26), 사무엘 윤(11.16)이 함께 하는 ‘보컬 마스터 시리즈’의 일환으로, 이제 한국도 이러한 히어로와 헤로인을 내세울 정도로 ‘성악 강국’이 되었음을 반증하는 기획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대한 무대를 앞둔 장본인은 정작 “40년은, 물론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이지만 매일을 살아온 당사자에게는 ‘그만큼이나 시간이 지났구나’ 싶은 거지요. 40주년이라고 폭죽을 터뜨리며 대단히 생각하는 것은 없어요”라며 겸손함을 표한다.

이번 공연은 벨 칸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오페라의 아리아로 시작된다. 벨리니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이여’와 서곡, 도니체티 ‘안나 볼레나’ 중 ‘울고 있나요?’와 ‘로베르토 데브뢰’ 서곡, 그리고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 중 ‘고요한 밤은 평온하고’와 ‘운명의 힘’ 서곡이 이어진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은 홍혜경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아리아 ‘아! 꿈속에 살고 있구나’도 만날 수 있다.

지휘자 이병욱이 포디엄에 서고, 국립심포니가 연주하는 이 콘서트 오페라 후반부에는 레하르의 오페레타와 푸치니의 작품으로 꾸려진다.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 서곡으로 시작해 아리아 ‘빌야의 노래’ 그리고 오페레타 ‘주디타’ 중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인 ‘내 입술, 그 입맞춤은 뜨겁고’로 이어진다. 푸치니의 작품은 ‘마농 레스코’의 간주곡으로 시작, 홍혜경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투란도트’의 류 역이 부르는 아리아 ‘주인님, 들어주세요!’가 이어진다. 마지막 곡은, 소프라노들의 인생을 돌아보는 데에 늘 등장하는 아리아,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다.

 

어떤 기준들로 공연 레퍼토리를 고르셨나요?

1부의 몇몇 곡은 제가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벨 칸토 아리아들을 특별히 넣어봤어요. 평생 극장 측으로부터 역할을 제안받기만 했잖아요. ‘저 작품 정말 아름답다. 내가 잘 부를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아리아들을 포함했습니다. 공연을 하는 7월 3일이면, 67세가 되는 날이기도 해요! 그러니 그중에서 제 나이에 소화할 수 있는 곡들을 골랐죠.

벨리니 ‘노르마’나 도니체티 ‘안나 볼레나’,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의 아리아는 특히 벨 칸토의 선율이 돋보이는 것들입니다. 어떤 조건을 갖춘 소리가 ‘벨 칸토’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한데요.

‘벨 칸토’는 한 시대의 장르를 규정하는 요소였죠. 실제로 노래할 때, 벨 칸토란 ‘레가토로 노래하는 것’을 의미해요. 그리고 레가토로 노래하기 위해서는 호흡이 중요하죠. 벨 칸토는 결국 테크닉을 잘 갖춘 상태에서 구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벨 칸토로 부르는 정말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많죠. 특히, 벨 칸토로 부를 때는 오케스트라가 노래의 선율을 방해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게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요한 오케스트라의 아르페지오 위에, 성악가가 가볍게 레가토의 공명을 타고 음 하나하나를 엮어 나가는 것이죠.

프로그램 후반부는 레하르의 ‘주디타’,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노래들, 그리고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와 같이 잘 알려진 아리아들도 배치되어 있네요.

하나의 콘서트 오페라로서 곡의 시작과 끝을 다 고려해서 만든 프로그램이에요. 후반부 작품은 관객들이 모두가 알고, 좋아하는 곡들이죠. 앙코르도 그런 작품들로 골라볼 예정이에요.

구노 ‘로미오와 줄리엣’ 속 줄리엣의 아리아 ‘아! 꿈속에 살고 싶어라’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반갑습니다. 이 역할로도 무대에 많이 오르셨잖아요.

줄리엣을 참 오래 했죠. 10대의 줄리엣을 젊을 때부터 아이를 낳은 후까지 불렀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줄리엣 역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는 제가 50살이 훌쩍 넘었을 때였죠. ‘이걸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고민하며 사람들을 관찰했는데, 그때 사춘기 시절의 제 딸이 눈에 쏙 들어오더군요. 제 딸이 굉장히 밝고, 또 사랑도 참 많거든요. 그 아이의 몸짓과 말투, 성격 등을 떠올리면서 무대에 올랐죠. 그때 메트 오페라의 중계 해설을 맡은 분이 제 나이를 알곤, ‘어떻게 저렇게 무대에서 소녀처럼 뛰어다니냐’고 할 정도로 역할에 딱 성공했었죠. 딸에게 고맙고 흡족하기도 하면서, 줄리엣의 노래를 떠올리면 지금도 우리 딸 생각이 나요.

그 외에 맡았던 오페라 역할 중 꼽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자주했던 것 중에는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의 삶을 표현할 때 많이 몰입했죠. 음악도 참 좋았고, 그녀의 비참한 스토리도 마음에 와 닿았고요. 아,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백작 부인 역도 정말 재밌어요. 백작과 레치타티보로 말을 주고받으며 싸우는 장면 끝에, 멋진 아리아를 딱 부르면 박수가 쏟아져 나왔으니까요.

 

‘메트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본지 또한 올해 창간 40주년을 맞이했다”로 이어지는 기자의 질문에는 앞서 겸손과 달리 한층 격양된 목소리로 축하를 전해온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잡지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죠. ‘객석’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또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이 깊이 있고 수준이 높은 것이라 생각해요. ‘객석’의 40주년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대단한 것이고, 저 또한 기쁜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간 ‘객석’이 기록해온 홍혜경에 대한 기사를 모두 찾아 보았다. 네 번의 표지 인물로 다룬 것을 포함해,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23권의 잡지가 40년의 역사가 함께 끌려 올라왔다.

 

성악을 시작한 특별한 동기는 어떤 것인가요?

“예원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성악을 가르치시던 김옥자(1929~ 2019) 선생님께서 유학을 권유하시더군요. 그래서 유학을 택했지요. 그 때만해도 오페라 무대에 선다든지, 성악가가 된다든지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때가 15살 때였거든요.”

*객석의 과월호는 당시 맞춤법을 따랐다 「객석」 1986년 6월호 ‘매력적인 감수성, 메트로폴리탄 주역으로 등장’

 

 

♪ 메트 오페라에 등장한 ‘이변’에 대한 관찰

홍혜경의 이름이 처음 ‘객석’에 등장한 것은 1986년 6월 호, 그녀가 메트 오페라에서 모차르트 ‘티토왕의 자비’의 세르빌리아 역으로 데뷔하고 2년이 지난 시점이다.

데뷔 이후, 그녀는 이미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986/87 시즌의 가장 기대되는 성악가가 되어 있었다. 메트 오페라가 공연하는 링컨 센터에서 특파원을 마주한 홍혜경의 모습은 당당하다. “순수하고 미묘하지만, 가득 차 있다. 유려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목소리와 감정 표현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관중은 마치 주술에 걸린 듯 넋을 잃었다”는 외신의 호평이 그 모습에 힘을 싣는다. ‘꿈의 무대’인 메트 오페라에 기적처럼 등장한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기록은 예원학교 입학 후의 얘기로 시작되는데, 예원학교에 입학하기 전은 어땠나요? 당시에는 성악 교육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아서 노래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선 특별한 환경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의 영향이 컸죠. 어머니가 당시 풍금 연주를 하시면서 노래를 퍽 좋은 음성으로 부르셨거든요. 제 외할아버지는 미국인 선교사 레이 프로보스트를 적극적으로 도우셨어요. 그 선교사가 우리나라의 첫 장로교 교회를 세웠을 때, 할아버지는 장로님이셨죠. 선교사가 일본에 의해 급히 그곳을 떠나게 되면서, 남기고 간 것이 풍금이었어요. 그 풍금을 저희 어머니가 저를 뱃속에 품고 만삭일 때도 즐겨 연주하셨던 거죠.

지금의 개념으로 생각해보면, 태교를 음악으로 하신 거였네요.

말을 배우기도 전에, 노래를 먼저 배웠으니까요. 목소리는 타고 났던 것 같아요. 노래를 참 예쁘게 잘 따라하는 소녀였다고 하시더군요. 어딜 가나 사람들 앞에서 꼭 노래를 했고, 칭찬받는 것이 무척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종교적인 노래들을 통해 서양 음악도 친숙하게 접했으니,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이 내 적성이 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의 장르가 된 것 같아요.

미국으로의 유학을 권유한 김옥자 선생은 예원학교에서 만난 스승인가요?

예원학교에 입학하는 건 당시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연주자들을 선생님으로 둔 셈이였죠. 교장 선생님은 지휘자인 임원식 선생이셨고, 김옥자 선생 또한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하신 성악가셨거든요. 선생님들께서 제게 “넌 한국에서 더 배울 게 없으니, 미국으로 가라”고 해서 시험을 보게 된 거죠.

 

♪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1970년대, ‘노래를 참 예쁘게 잘하는’ 10대 소녀의 머릿 속에 미국이란 그저 ‘우리나라에 와서 전쟁을 도와줬다는 나라’였다. 미국에 가서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공하겠다는 꿈이나, 대단한 오페라 무대에 서겠다는 포부를 가질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런 길을 앞서 걸은 한국인 성악가가 전무했던 때. ‘선구자’로 길을 개척한 이의 현실은 그렇게 “있는지도 몰랐던 길을, 지나놓고 보니 걸어 왔더라”는 표현으로 회상된다.

그런 그녀를 이끈 것은, 미국에서 처음 만난 스승 엘리자베스 비숍이었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했던 그는 16살의 홍혜경이 매년 두 번씩 줄리아드 음악원에 있는 폴홀(Paul Hall)에서 한 시간 프로그램의 리사이틀을 소화하도록 가르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숍은 바둑을 둘 때 몇 수 앞서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메트 오페라에 세우기 위해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시킨 것 같다”는 것이 홍혜경의 기억이다.

 

비숍은 그에게 선생으로서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해주었다. 늘 비타민을 섭취해야 한다는 자상한 배려와 함께, 영어를 하루 빨리 배워야 한다는 따끔한 충고 또한 잊지 않았다. 반면 유럽 언어의 발성법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한국어 발음을 완전히 잊어버려라고 하는 가혹한 주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모든 입술의 움직임과 잔향은 영어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철칙을 지키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객석」 1992년 9월호 ‘고국 무대에 서는 메트로폴리탄의 프리마 돈나’

 

당시 줄리아드 음악원 예비학교에 재학하셨을 때의 이야기네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토요일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리아드 음악원에 가서 음악에 관한 수업을 들었죠. 음악사부터 피아노 연주법, 악보 보는 법 등 모든 것을 배우는 과정이었어요.

좋은 스승을 만난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1년에 두 번씩 리사이틀을 한다는 건, 정말 많은 레퍼토리를 익혀야 하는 것이었어요. 특히나 언어적으로요. 영어부터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모든 언어를 신경 써서 익히도록 하셨죠. 한국말이 너무 하고 싶어 한국인 친구들 쪽으로 가서 수다를 떨려고 하면, 선생님이 어디선가 저를 보고 있다가 딱 손짓으로 저를 멈추게 하시기도 하고요.

당시 줄리아드 음악원 예비학교에 한국에서 온 성악 전공자는 몇 명이나 있었나요?

악기 전공에는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제가 예비학교를 다닐 때는 한국인이 아무도 없었어요. 저뿐이었죠. 한국인 성악가들을 학교에서 만난 건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과정에 다닐 때쯤이었어요.

지금 줄리아드 음악원에 있는 한국 학생들의 수를 생각하면, 굉장히 큰 차이네요.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 성악가들이 미국으로 많이 들어온 것을 느꼈을 때가 있어요. 제가 메트 오페라에 데뷔하고, 한국에서 첫 내한 독창회를 가진 1992년 이후로 줄리아드 음대는 물론, 맨해튼 음대 등으로 더 많은 한국 학생들이 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의 제 연주가 누군가에게는 ‘아, 나도 저 사람처럼 메트 오페라에 데뷔할 수 있겠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제 앞에 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꿈꾸지 못했었지만, 저를 보고 누군가는 희망을 가지고 꿈을 꿀 수 있지 않았겠어요?

 

한국인으로서 가장 성공한 성악가의 한 사람인 소프라노 홍혜경이 지난 9월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부천시립교향악단의 관현악 반주로 독창회를 가졌다. 홍혜경의 이번 독창회는 그가 메트 오페라의 주역으로 발돋움한 이래 첫 번째 가진 내한 독창회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끌었다. 홍혜경은 85년 이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매 시즌 메트에서 프리마 돈나의 자리를 굳혀 놓고 있다. 91/92시즌만 해도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다섯 작품 중 4개 작품에서 모두 주역으로 출연해 적어도 모차르트에 관한 한 정상의 소프라노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객석」 1992년 10월호 ‘메트에서의 성공 이후 첫 금의 환향’

 

 

♪ 시대의 대표 성악가

1994년, 홍혜경이 메트 데뷔 10년차를 맞이하고 있을 때 이른바 ‘한국의 빅3 소프라노’가 국내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소프라노 조수미(1962~), 신영옥(1961~)과 함께 ‘한국이 낳은’ 프리마 돈나는 국내 음악계의 꾸준한 자랑이었다. 1995년 시즌, ‘리골레토’의 질다 역에 조수미와 신영옥이 더블 캐스팅 되며 화제를 더했다. 이때부터 이들의 활약을 함께 조명하고 비교하는 것이 국내 관객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홍혜경은 명료한 창법과 청아한 목소리의 소유자란 평가를 받으며 10년 넘게 메트에 서고 있는 고참 성악가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 중 일리아의 공주 역에 캐스팅된 그녀는 빼어난 목소리에 미모까지 갖춘 트로이 공주를 세련된 무대 매너와 풍부한 음악성으로 처리, 많은 찬사를 받았다.

「객석」 1994년 12월호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의 프리마 돈나들’

 

메트 오페라에서 자리 잡은 그녀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무대에도 함께 했다. 1995년 9월호 표지를 함께 차지한 조수미·신영옥과는 그해 광복 50주년 기념 음악회로 무대를 장식했다. 말 그대로 ‘빅3 소프라노’의 전성기였다.

 

세계 오페라계의 프리마 돈나로 우뚝 선 우리의 소프라노 신영옥·조수미·홍혜경.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광복 50주년 행사를 위해 내한한 이들 스리 소프라노의 모든 면을 철저 비교한다.

음악적인 특성

신영옥 / 고운 소리 결, 정교함, 맑은 음색의 리릭 콜로라투라 가수. 고운 피아니시모 처리로 끈적거리면서도 명주실 같이 뽑아내는 서정적인 노래에서 특히 돋보인다. 자신 없는 것은 로시니 작품같이 스케일이 많이 나오는 작품들이라고.

조수미 / 기교파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모든 음역에 걸쳐 빛깔의 변함이 없이 고르게 울려퍼지는 영롱한 목소리와 자로 잰 듯한 정교함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콜로라투라 가수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기교적이고 빠른 노래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역은 그녀의 최고의 장기. 자신 없거나 부족한 부분을 묻는 말엔 노코멘트.

홍혜경 / 전형적인 리릭 소프라노로 명료한 창법. 청아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돋보인다. 젊었을 때의 레나타 테발디를 연상시킨다. 오페라에서는 극적 기복이 뚜렷한 감정 연기와 노래를 장기로 한다.

「객석」 1995년 9월호 ‘커버스토리 : 빅 3 소프라노 철저 비교’

 

 

1998년 7월, 그녀가 다시 본지의 표지에 등장했을 때는 백악관 초청 연주를 가진 때였다. 미국을 방문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였다. 이전 시즌에, 메트 오페라를 넘어 유럽에까지 진출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96/97시즌에 그녀는 빈 슈타츠오퍼에서 ‘라 보엠’의 미미로,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서는 ‘카르멘’의 미카엘라로 무대에 오른 후였다. 인터뷰에는 메트 오페라를 장악한 디바의 순수한 열정과, 이로 인해 국내에도 퍼지기 시작한 오페라 성악가에 대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인식이 엿보인다.

 

종합예술인 오페라에서 ‘돋보인다’는 말을 듣는 것은 노래만으로 결코 얻을 수 없는 평가이다. 노래의 해석은 물론 연기와 춤, 맡은 역의 성격과 인품까지 파악하고 재창출해낼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중학교 때 유학을 갔다고는 하지만 홍혜경의 영어 가사 전달은 미국인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미국의 음악평론가들이 감탄할 정도다. 그러면 이러한 홍혜경 완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메트에서 지난 13년 동안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성악가들과 공연했습니다. 그 중엔 미디어의 총애를 받는 위대한 성악가도 있었고…. 나이를 초월해 여러 종류의 성악가들과 공연할 수 있었어요. 오페라에 출연할 정도면 기본적으로 소리·테크닉·연기·발성·스타일 등 모든게 좋아야 합니다. 그런 좋은 출연자들 가운데서 튈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연주가들이죠. 자기만의 독특한 멋, 개성, 카리스마가 튀어나올 때 청중은 감동을 받아요. 전달하는 음악에 청중을 찡하게 만드는 파워가 있을 때 감동적인 것이죠.”

「객석」 1998년 7월호 ‘커버스토리 : 백악관 초청연주 가진 홍혜경 뉴욕 현지 취재’

 

 

지속적으로 캐스팅 될 실력을 유지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오페라 극장처럼, 전속 성악가로 소속된 것이 아니라 매번 주역으로 캐스팅이 되어야 했던 것이니까요. 살아남기 위해, 계속해서 인정받기 위해 기울인 나만의 노력이 있었나요?
무대 위에서 영리해야 했어요. 여전히 오페라 성악가가 목소리만 좋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독주회를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왠만해서는 관객들의 시선이 내게 오겠죠. 하지만 오페라는 달라요. 함께 무대에 오르는 성악가들, 무대 장치와 의상들, 무용수들까지 함께 펼쳐져있죠. 그중에서, 내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

어떤 오페라 성악가가 무대 위에서 시선을 사로잡나요?

무대에 섰을 때, 하나의 캐릭터가 완벽히 되어야죠. 몰입이 깨지는 순간이 생기면 관객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노래로 그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 노래 끝났다’고 생각해서 캐릭터로서의 흐름을 깨는 행동, 예를 들면 노래를 부르겠다고 헛기침을 한다거나, 머리카락이라도 조금 만지작거리는 것이 몰입을 흐트러트릴 수 있죠. 그 흐름이 멈춰지면, 관객의 시선이 떠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캐릭터의 몰입을 끝까지 이어가는 법, 그걸 무대 위에서 공부해서 제대로 쟁취해야 하죠. 그렇게 캐릭터의 감정에 푹 빠져서 공감했을 때 관객이 보내는 박수는 다르거든요.

 

 

♪ 홍혜경이 남긴 국제적 발걸음들

2003년, 홍혜경이 다시 한 번 ‘객석’의 표지로 우리를 찾아왔을 때, 그는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었다. 원형 경기장인 베로나 아레나에서, 그는 ‘투란도트’의 류 역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같은 역으로 그 해의 12월 라 스칼라에도 오를 것을 예정하고 있었다.

 

특히 홍혜경의 ‘들어 보세요, 왕자님’은 베로나에 모인 이탈리아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마이크 없이 자연 발성만으로 부르는 베로나 원형 경기장에서 홍혜경의 미성은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들렸으며, 둥글고 훌륭한 공명과 발성으로 베로나 무대에 골고루 울려 주었다. 아름답고 청명한 홍혜경의 목소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다리던 바로 그것이었다.

「객석」 2003년 9월호 ‘커버스토리 : 홍혜경 베로나 현지 인터뷰’

 

 

메트 오페라에서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유럽의 무대에 서셨죠. 당시는 반대의 순서로 커리어를 쌓는 성악가들이 대부분이었다고요.

미국에서 졸업을 한 성악가들은, 졸업하자마자 유럽으로 오디션 투어를 가는 게 당시는 일반적이었으니까요. 여러 오페라 극장에 가서 오디션을 보고, 잘 하는 이들은 거기서 대부분 극장 소속의 성악가가 됐어요. 2~3년 정도 연주 경험을 쌓으면서 인정을 받으면 그땐 이미 미국에서도 소문이 돌죠. 그러면 메트 오페라에 와서 오디션을 보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럽으로 갈 생각도 없었고, 당시 에이전시도, 선생님도 ‘너는 바로 메트 오페라로 가라’고 했었어요. ‘도전해봐라’가 아니라, ‘바로 가야된다’였죠.(웃음)

메트 오페라에 대한 국제적인 주목도가 그만큼 높다는 방증입니다. 메트 오페라에서의 성공은 결국 국제적인 커리어를 가지는 자격을 얻는 것이었으니까요.

사실 동양인이 메트 오페라 무대에 오르는 것을 관객들이 어색하게 생각할 때였긴 해요. 당시 음악감독이었던 제임스 러바인은 그런 부분에서 편견이 없는 지휘자였어요. 연주자가 가진 피부색이 아닌, 재능을 보는 사람이었고요. 덕분에 저도 편견 없이 인정받을 수 있었죠. 특히, 모차르트 오페라에 설 기회를 많이 제공했다는 점이 제겐 가장 중요했고요.

모차르트 오페라 경험이 준 이점은 무엇이었나요?

모차르트 오페라는 성악가에게 참 ‘건강한’ 레퍼토리에요. 젊었을 때 잠깐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부담스러운 역할을 맡으면 성장하기 어렵거든요. 당시 한 해에 연이은 모차르트 프로덕션 세 개에 서기도 했어요. 좋은 레퍼토리로 길러지면서, 러바인이 저를 국제적인 커리어로 이끌었죠.

 

홍혜경은 1988년, 제임스 러바인이 지휘한 ‘니벨룽의 반지’(DG) 중 ‘라인의 황금’에서 보글린데를 불러 레코딩 데뷔했다. 러바인은 자신의 베르디 ‘아이다’ 레코딩(Sony)에는 홍혜경을 여사제로 출연시켰다. 그녀의 첫 독집 앨범 ‘Arias’는 1998년 BMG에서 발매했다. 이듬해 도널드 러니클스 지휘의 스코티시 체임버의 벨리니 ‘캐플릿가와 몬테규가’(Teldec)와 제니퍼 라모어와 함께 노래한 오페라 듀엣 앨범 ‘Bellezza Vocale’(Teldec)도 발매되었다. 그리고 2000년 도널드 러니클스/애틀랜타 심포니의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Telarc)에 참가한 것이 비교적 최근의 레코딩 행보라 할 수 있다.

「객석」 2003년 9월호 ‘커버스토리 : 홍혜경 베로나 현지 인터뷰’

 

 

♪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오페라의 미래는?

2003년 베로나 페스티벌 ‘투란도트’

그녀가 메트 오페라에서 빛나는 동안, 세기가 바뀌었다. 21세기를 맞이한 오페라는 예술 장르로서의 위기를 맞았다. 변화는 불가피했다. 2006년, 메트 오페라의 운영 감독으로 부임한 피터 겔브는 새 시즌의 개막작 ‘마술 피리’를 고화질(HD) 생중계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오페라의 시대가 온 것이다. 변화의 바람은 거셌다. ‘미디어’에 어울리는 오페라 성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2008년부터는 메트 오페라를 직접 찾는 관객보다 고화질(HD) 생중계를 관람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고, 2014년 말 메트는 고화질(HD) 생중계로 3천5백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354억 원)을 벌었다.

홍혜경은 메트 오페라에서 이 모든 변화를 직시했다. 그리고 이 세기의 변화 속에서도 그녀는 꾸준히 빛났다. 한국인 성악가들의 진출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2007년, ‘피가로의 결혼’에서 홍혜경이 그녀의 시그니처 롤 중 하나인 백작 부인으로 출연할 때, 신예 소프라노 캐슬린 김은 바르바리나 역으로 메트 오페라에 데뷔를 알렸다. 같은 해, 테너 김우경과 함께 ‘라 트라비아타’의 주역을 맡으며 그녀는 또 한번 메트 오페라에서의 ‘최초’를 기록했다. 메트 오페라 역사상, 동양인 커플이 주역으로 오른 최초의 무대였다.

 

2004년 워싱턴 국립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워싱턴 국립 오페라

2007년, 테너 김우경 씨와 메트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함께하셨죠. 올해는 두 분이 로열 오페라에서 ‘라 보엠’으로 만난다고요. 근래 들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 성악가들이 늘고 있습니다. 세계 무대 대선배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해주세요.

제 경험에 의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메트에 있는 여자 성악가 중 데뷔한 뒤 매년 공연하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제가 제일 오래전에 데뷔했죠. 처음 두각을 나타내면 여기저기서 제의가 들어오죠. 그때 중요한 건 커리어에 욕심을 내지 않는 거예요. 각자 자신의 목소리에 맞는 작품이 있어요. 또 맞는 배역이 들어왔다고 해도 주의할 게 있어요. 한 가지 작품, 한 가지 배역에 빠져선 안 되죠. 그러면 오페라계에서 “쟤는 이 역할이 맞는다”며 계속 같은 배역을 줄 수도 있거든요.

요즘 올려지는 오페라를 보면 새삼 ‘연출의 힘’을 실감하게 됩니다. 시시각각 새롭게 도전적인 연출로 작품이 올려지며, 이제 성악가들의 몫도 노래에만 국한될 수 없게 됐는데요.

아시겠지만 메트가 달라지고 있어요. 새로운 디렉터 겔브가 오면서부터죠. 오페라 극장에 오는 사람들은 50세가 넘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의 시대가 지나면 올 사람이 있을까가 고민이 되죠. 오페라라는 것이 사실 굉장히 오묘하고 아름다운 예술이거든요. 그렇지만 그러한 오페라도 이 세상에 맞아떨어져야 사람들을 끌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겔브는 미디어에 굉장히 신경 쓰고 있어요. 오페라를 모든 미디어에 보내고 있죠. 그러나 미디어를 통한 오페라는 라이브로 노래하는 무대와는 달라요.

「객석」 2008년 1월호 ‘소프라노 홍혜경 : 절제, 그것이 롱런의 비결이다’

 

 

최근 한국 성악가들의 메트 오페라 진출은 더욱 활발합니다. 테너 이용훈와 백석종, 소프라노 박혜상까지 메트 오페라에서의 활약상이 두드러집니다.

저는 지금이 미국 오페라계 진출의 적기라고 느껴요. ‘DEI’, 즉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시기거든요. 메트 오페라는 다양한 인종의 작곡가와 성악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해요.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 또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때에 힘차게 많이 메트 오페라에 도전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메트 오페라에서도 활발하고 밝은 한국 성악가들의 성향을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40년간 경험한 메트 오페라의 역사 중, 2006년에 변화를 가장 크게 느끼셨다고요.

그전의 운영 감독이었던 조셉 볼페는 메트 오페라의 무대 담당자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어요. 이탈리아 사람으로, 오페라를 사랑한 것은 물론 메트 오페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이였죠. 노동 조합을 이끌기도 했어서, 오케스트라 단원은 물론이고 저 같은 성악가들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페라에 관해서도 전통주의적 관점을 유지했고요. 그렇기에 2006년, 피터 겔브로 운영 감독이 바뀌면서 미디어를 통한 오페라 보급이 중요해진 것은 큰 변화였어요. 예전부터 전통 오페라 속에서 노래하던 이들도 많이 해고 되었죠. 말 그대로 ‘미디어’에 맞는 이들로 교체되면서, 메트 오페라가 확 바뀐 때에요.

사실 미디어를 활용하기 위한 변화는 불가피한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이를 통해서 오페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요. 만약 다음 세대가 미디어로 오페라를 접하지 않아서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어진다면, 장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잖아요? 다만 동네 영화관에서 더 편하게, 더 싸게 오페라를 볼 수 있다고 느끼게 되면 점점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 걱정입니다. 이제는 휴대폰으로도 오페라를 보려면 볼 수 있으니까요.

접근성을 고려한다면 필요한 것이겠으나,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어드는 것이 큰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참 많이 올랐던 ‘라 보엠’은 메트 오페라가 매년 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예요. 주로 맨해튼으로 여행을 온 이들이 연말연시에 보도록 12월 즈음에 많이 올렸죠. 그런데, 요즘 ‘라 보엠’을 시즌 오픈인 9월에 하기도 해요. 수익을 내는 공연이 그만큼 절실한 거죠. 미디어로 방영되는 오페라에도, 여전히 풀 프로덕션을 제작해야 하는 것은 동일해요. 사실 가장 아쉬운 것은 성악이라는 오묘한 사람의 목소리는, 극장에서 들을 때 가장 정확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최근 코로나로 인해, 메트 오페라가 정말 없어지나 싶을 만큼 힘든 시기를 지났기도 했죠. 전통의 방식과 새로운 변화가 부딪히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 나의 노래, 나의 행복, 나의 삶

홍혜경의 기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가족’이다. 1980년대에는 남편과 두 딸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 귀여운 막내 아들이 한 명 더 등장한다. 최전방 오페라 성악가로서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가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던 홍혜경의 가치관은 매번 그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음악과 더불어 제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여자로 태어나 살면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이 뭔지 아세요?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과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이에요.”

「객석」 2001년 5월호 ‘내한공연 갖는 소프라노 홍혜경 인터뷰’

 

요즘 가족들과의 일상은 어떻게 보내세요?

이제는 할머니가 됐죠. 자녀들이 클 때는 정말 쉽지 않았어요. 성악가로서의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아직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죠. 원하던 것이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그때 그렇게 힘들었어도,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자들에게 마음껏 사랑해주고, 사랑 받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데요. 게다가 이제는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럼 저는 자유거든요.(웃음) 요새는 정말 행복하고요, 모든 게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 메트 오페라 무대 계획은 없으셨어요?

시즌 오픈작으로 에이전시 통해서 ‘데드 맨 워킹’의 역할을 고민했던 것이 가장 최근이네요. 현대 오페라라 작품을 살펴봤는데, 아무래도 제게 들어온 역할이 맡기 곤란한 터라 무대에 서진 않았구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번 공연의 부제가 ‘나의 음악, 나의 여정’이더군요. 내 평생을 함께 해준 음악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일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은 “Thank you”. 음악은 … 나의 사랑이고, 친구. 그리고 또 나의 교도관이기도.(웃음) 그런데 정말이에요, 그럴 때 많았어. … 음악은 나의 희망, 나의 기쁨, 나의 삶, 그리고 … 나 자신! 음악은, 음악은 …

 

행복이 묻어나는 성악가의 마지막 답변은, 음율 있는 시를 낭독하는 듯, 자신의 진심을 노래하는 듯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어 마음에 남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속의 음악이 홍혜경의 안에 여전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까.

객석 2010년 6월호는, 당시 홍혜경의 리사이틀에 대해 “‘이 아리아를 실황에서 이만큼 만족스럽고 완벽하게 들어본 일이 있었던가’ 하고 기억을 되짚어볼 만큼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사무치는 명연이었다.”라는 평을 남긴다. 다가올 그의 공연에 대한 기대를 더하는 기록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번 무대는 역사 속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가의 삶의 궤적을 덧입으며 의미를 더한다. 매 순간, ‘명연’을 펼친 홍혜경의 노래들을 다시 만나는 기회다. 그가 살아온 시간은 모든 노래에 묻어있고, 그 어느 때보다 인생의 향이 짙게 베인 선율들이 울리게 된다. 또한 한 시대의 정점을 경험한 소프라노의 삶은 후배의 성악가들에게도 여전한 귀감이다. 홍혜경과 함께 ‘빅3’로 불렸던 소프라노 조수미는 올해 7월 ‘제1회 조수미 성악 콩쿠르’를 프랑스에서 개최하며 젊은 성악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홍혜경 또한 2013년부터 3년간 연세대학교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는 등 늘 다음 세대 육성에 대한 열의를 드러내왔다.

1984년부터 시작된 꿈의 무대, 메트 오페라로의 도전기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겐 지난 시간에 대한 뜨거운 추억과 회상이다. 홍혜경의 이번 7월 공연은 ‘그런 시절’을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격려일 테다. 동시에 선배 음악가가 걸어온 시간에 대한 이 장대한 기록은, 당시를 겪어보지 못한 다음 세대 음악가들에게 전하는 응원이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열정이 담긴 홍혜경의 40년이, 앞으로의 40년을 꿈꿀 이들의 마음에 지치지 않을 또 하나의 불씨로 자리 잡길 바라며.

 


 

PREVIEW

 

예술의전당 ‘보컬 마스터 시리즈’

오페라극장을 채울 ‘노래 거장’들의 시간

 

VOCAL MASTER SERIES

7월 3일

소프라노 홍혜경

지휘 이병욱, 국립심포니

 

7월 26일

베이스 연광철

지휘 홍석원, 경기필하모닉 예술의전당

 

연광철

오페라극장이 다가올 여름을 오페라 성악가들의 시간으로 가득 채운다. 올해 처음 시작된 시리즈인 ‘보컬 마스터 시리즈’는 국제 오페라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오페라 성악가들의 리사이틀을 선보인다. 전막 오페라를 주로 선보이는 2,000석 이상 규모의 오페라극장에서 성악가 단독 공연은 만나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러나 최근 한국 성악가들의 더 활발한 활약상을 반영하듯, 오페라극장은 밀도 있는 성악가들로 시리즈를 구성했다.

무엇보다 이번 시리즈는 젊은 성악가들을 위한 워크숍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시리즈의 첫 주자로 나서게 된 홍혜경 역시, 마스터클래스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연을 흔쾌히 수락했다고 밝혔다.

“카네기홀에도 비슷한 시리즈가 있습니다. 마스터클래스를 포함하는 것이죠. 그래서 메트 데뷔 40주년이라는 것보다, 마스터가 공연을 하고, 그 다음 세대에 이를 가르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공연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이 공연에 동참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도 그것이고요.”

홍혜경의 지난 메트 데뷔 30주년 기념 리사이틀이 피아노 반주의 콘서트 형식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이번 공연은 더 특별하다. 국립오페라단의 프로덕션을 전담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책임지며 공연의 풍성함이 더해졌다. 아리아 외에 벨리니 ‘노르마’, 도니체티 ‘로베르토 데브뢰’, 베르디 ‘운명의 힘’ 등의 서곡이 프로그램의 흐름에 주요한 레퍼토리로 자리잡고 있다.

홍혜경에 이은 시리즈의 다음 주자는 베이스 연광철이다. 7월 26일에 ‘모차르트부터 바그너까지, 전설의 여정’이라는 주제로 공연을 선보일 예정. 이후의 시리즈는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이 11월 16일에 이어 받아 ‘방랑자’라는 주제 아래 드라마가 있는 음악극 형식으로 진행된다.

박혜상

성악 워크숍의 지원은 지난 5월 모집을 마무리했다. 선정된 젊은 성악가들은 1:1로 직접 피드백을 받게 된다. 세 명의 멘토 성악가가 된 이들 역시 재능 있는 후배들과의 교류를 이어나갈 좋은 기회다.

한편 보컬 마스터 시리즈의 일환으로 아카데미가 진행된다. 이탈리아에 위치한 오페라 교육 기관, 게오르그 솔티 아카데미의 벨칸토 코스가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진행되는 것.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이번 프로그램은 이탈리아 정통의 교육 프로그램을 체험할 기회가 된다. 교수진으로 지휘자 카를로 리치, 게오르그 솔티 아카데미 예술감독 조나단 팝, 그리고 소프라노 바바라 프리톨리·박혜상, 딕션 코치 스테파노 발다세로니가 참여한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오페라극장에서 참가자들의 최종 연주회가 있을 예정이다.

허서현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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