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보티스 세바, 내 안의 작고 검은 개와 마주하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6월 10일 9:00 오전

Contemporary Dance

 

안무가 보티스 세바

내 안의 작고 검은 개와 마주하기

 

샤넬이 선택한 힙합 무용단 ‘파 프롬 더 놈’과 함께 내한하는 그가 선보일 새로운 춤의 세계

 

 

힙합의 탄생지는 길 위다. 비트 위에 빠르게 말하는 랩(rap), 턴 테이블에서 서로 다른 음악을 연결하는 디제이(DJ), 스프레이로 벽에 그리는 그라피티(graffiti), 그리고 즉흥적 움직임의 힙합 댄스까지가 모두 힙합 문화다. 여기에서 비롯된 특유의 패션과 라이프스타일까지, 힙합 문화는 전방위에 걸쳐 드러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새로운 세대는 힙스터(hipster)를 동경한다. ‘세련됐다’ ‘개성 있다’는 요샛말로 ‘힙(hip)하다’로 통용된다. ‘힙스터들의 성지’ ‘힙한 카페’ 등이 젊은 세대를 겨냥한 홍보 문구다. 미국 흑인 노예들의 저항 의식에서부터 시작된 힙합 문화는 1970년대 매체의 발전과 맞물려 대중문화로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세대의 문화 전반을 대변하고 있는 힙합이 무대 위 예술의 다양성으로 대두된다. ‘힙’을 사랑한 새로운 세대의 춤은 어떤 모습일까. 이 ‘힙’의 정점에 서 있는 영국의 안무가, 보티스 세바(1991~)와의 대화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했다.

“사람들은 제 춤에 ‘차세대’라는 수식어를 붙이죠. 글쎄요, 저는 신이 제게 준 재능을 나누길 바라기에, 지금 여기에 존재할 뿐입니다. 제 작품은 영혼을 이어주는, 몸을 통해 말하는 진실을 표현합니다. 그 진리가 작품을 통해 ‘지금의 관객’ 마음에 와닿는 것 아닐까요?”

 

‘밖’에서 자란, 잡초 같은 몸짓

보티스 세바 ©HelenMaybanks

안무가로서 보티스 세바의 탄생기는 특별하다. 그는 철저히 무용계 밖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콩고의 전통을 품고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지역의 청소년 클럽에서 랩을 하며 힙합 음악에 빠져 지냈다. 춤을 시작한 것은 15세, 그때부터 그에게 음악은 자유를, 춤은 좌절감을 표출할 수단이었다.

“운이 좋게도 제가 다닌 중학교에 무용과가 활성화되어 있었어요. 아방가르드 댄스 컴퍼니의 토니 아디건 같은 안무가들의 특별 수업도 들을 수 있었죠.”

열아홉, 그는 자신의 힙합 무용단을 꾸렸다. ‘파 프롬 더 놈(Far From The Norm, 이하 FFTN)’, 기존의 틀을 넘어서겠다는 패기가 돋보이는 팀명. 그가 살던 런던 다겐햄의 청소년 클럽에서 만난 친구들과 시작한 이 무용단은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그 스타일을 흡수하는 터전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짧은 작품들을 만들었고, 지역의 스트리트 댄스 신에서 선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저는 엄마의 집에 살면서, 이 꿈을 꾸면 어디까지 가게 될지 궁금해하던 아이였죠. 제 선택을 전적으로 믿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죽어라 열심히 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FFTN은 제 삶이고, 제 세상이에요. 제 인생을 바꾸었고, 삶의 우여곡절을 보여주었으며, 예상치 못한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극장 안으로 들어온 거리의 춤

2004년, 세계 현대 무용계의 메카인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은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극장의 벽은 그라피티가 채웠고, 공간은 심장을 뛰게 하는 강렬한 비트로 가득 찼다. 영국 힙합극의 선구자인 존지 디(Jonzi D)가 선보인 힙합 행사, ‘브레이킹 컨벤션’의 풍경이다. 해를 거듭하며 이들은 더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주네이션, 보이 블루 엔터테인먼트 등 다수의 영국 힙합 단체가 ‘브레이킹 컨벤션’을 통해 그들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런던에 거주하며 FFTN을 만든 보티스 세바가 새들러스 웰스 극장의 손을 잡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찌감치 힙합 댄스에 문을 열었던 극장의 혜안은 2012년, 보티스 세바에게 첫 작품 개발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예술감독인 존지 디, 무대 감독 미셸 노튼, 프로듀서 에마 몬스포드는 언제나 우리의 작업을 지지해주는 이들입니다. ‘브레이킹 컨벤션’은 제 경력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죠. 처음으로 작품을 발전시켰고, 새들러스 웰스의 메인 무대에 FFTN과 함께 섰습니다. 넓은 무대에서의 경험, 그리고 ‘힙합 댄스 시어터’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FFTN의 춤은 힙합 댄스의 언어에 뿌리를 두어 그 독특한 활력과 자유로움을 지녔다. 힙합 댄스의 종류인 팝핀부터 브레이킹·크럼프·하우스까지 다양한 동작이 활용된다. 동시에 이를 보티스 세바만의 방식으로 해체해 드러난 새로운 움직임은 동시대적 담론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공연장 안팎을 넘나드는 것은 물론, 영상까지 영역을 넓히며 성장했다. ‘힙합’ 이상의 것을 담아내는 이들의 ‘힙’은 계속 새로운 언어로 정의되는 중이다.

“힙합 댄스가 뿌리라면, FFTN의 댄스는 그 뿌리에서 계속 자라는 나뭇잎이죠. 힙합에 뿌리를 내리고 계속 진화하기 위한 새로운 영감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무용단으로서 말이죠. 매번 어떻게 새로워야겠다는 철칙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계속해 나갈 뿐이에요.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은 물론 위대하지만, 새로움을 위해서는 또다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술 앞에서, 우린 언제나 학생이죠.”

 

누구에게나 있는 ‘검은 개’의 트라우마

2018년, 보티스 세바와 새들러스 웰스 극장의 특별한 시너지가 한 번 더 발생했다. 이번 내한에 선보일 그의 최신작 ‘블랙독(Black Dog)’이 탄생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새들러스 웰스 극장 20주년 기념 위촉작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듬해 세계 3대 공연 상으로 불리는 로렌스 올리비에 상 최우수 무용 신작으로 선정된다.

“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할 때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었고, 저는 아버지가 된다는 걸 실감하지 못할 때였어요. 그 이후로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팬데믹을 지났고, 그렌펠 타워 화재에선 사람들이 화마를 피해 건물에서 뛰어내려야 했죠. 조깅하던 아흐무드 아베리가 무고하게 총에 맞아 죽었고,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되며 흑인인권운동(블랙 라이브스 메터)이 다시 격화됐습니다. 아들이 태어나고 단 4년 만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죠. 팬데믹으로 몇 달을 갇혀 지내며, 화를 참기 어려웠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걸 바라보면서, 다시 ‘블랙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이 작품에 대해 의구심이 많았는데, 관객의 판단에 맡길 때가 온 것 같더군요. 제 작품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억눌려 왔던 과거를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관객을 데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죠.”

‘블랙독(Black Dog)’, 즉 검은 개를 우울증에 비유한 이는 영국의 작가 새뮤얼 존슨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도 “평생 나를 따라다닌 검은 개(블랙독)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보티스 세바의 ‘블랙독’도 이러한 뜻을 같이한다. 단순한 우울증을 넘어, 트라우마와 슬픔의 시간을 지나온 모두를 위한 작품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해소되지 못한 자아파괴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세상을 이해한다.

“우리는 감정을 털어놓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부정적 환경을 경험합니다. 저 또한 그래왔고, 이 경험을 활용함으로 그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과거는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죠.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인정하며,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길 바랍니다.”

‘블랙독’의 완성도는 오랜 협업으로 이어온 제작진과의 호흡에서도 힘을 받는다. 그는 지난 7년간 작곡가 톨벤 실베스트와 거의 모든 작업을 함께 했다. 일렉트로닉과 힙합을 기반으로 한 여러 악기의 사운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전율”을 준다. 조명을 맡은 톰 비서, 후드 누빔 의상을 제작한 라이언 도슨 라이트도 두 작품 째 함께 해온 동료들이다. 그는 “이 작품의 아주 작은 몸짓까지 주의 깊게 볼 것을 추천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금의 시대에 건네는 위로

“전 이 작품을 구성하는 첫 번째 조각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퍼즐 조각은 수석 프로듀서인 리 그리피스일거예요. 세 번째 조각은 최고의 프로덕션 팀, 그리고 무대 안팎에서 이 작품에 마음을 다하고 있는 모든 아티스트들이죠. 2018년 초연 이후 ‘블랙독’은 계속 발전해왔습니다. 작품은 궁극적으로 시적인 힘을 가질 겁니다.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이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도록요.”

그의 춤은 길에서 태어났고, 우리를 또 다른 성찰의 길로 안내한다. 무엇보다 그의 이번 내한이 특별한 이유는 2017년 한국 무용수들과 협업으로 선보였던 ‘ZEN 20:20’과 달리 보티스 세바와 FFTN의 오롯한 진면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17년 당시 한국 무용수들이 보여준 집중력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이번에는 제 무용단의 공연을 한국에 처음 선보이기에 또 다른 기대감이 드네요. 이번 투어에서는 특히 평소 극장을 잘 가지 않던 관객들도 ‘블랙독’을 직접 공연장에서 경험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는 언제나 평범한, 대단한 것 없는 환경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해 작품을 만드니까요. 공연은 언제나 현장에서 완성되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의 가능성이 한국의 공연에서도 발견되고, 살아 숨 쉬는 것을 보고 싶네요.”

2022년, 보티스 세바는 하이엔드 브랜드 샤넬이 혁신적인 예술가들에게 수여하는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의 첫 수상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한국에서의 공연 이후, 그는 아코스타 댄스·네덜란드댄스시어터의 2024/25 시즌에도 등장을 예정하고 있다. 길 위에서 예술계의 정점까지, 그의 행보는 런던 길거리 벽화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화가 바스키아의 그것과도 비견된다.

“전 세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저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제 작업이 그들이 겪고 있는 힘든 현실들을 마주하고 잘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허서현 기자 사진 성남아트센터

 

Performance information

힙합 댄스 시어터 ‘블랙독’

6월 22·23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23일 공연 종료 후 관객과의 대화 진행)

보티스 세바(연출·안무), 톨벤 실베스트(음악), 톰 비서(조명), 라이언 도슨 라이트(의상), 힙합 무용단 ‘파 프롬 더 놈’

 


 

FROM LONDON

 

브레이킹 컨벤션 2024

차세대 안무가 보티스 세바의 탄생을 도운 힙합 행사.

올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브레이킹 컨벤션 ©Belinda Lawley

지난 5월, 새들러스 웰스 극장은 여느 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극장 건물 앞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보안요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미 비트로 들썩이는 건물에 들어서니 검표 직원들이 공연 티켓을 확인하고 ‘브레이킹 컨벤션 2024’라고 새겨진 팔찌를 채워준다. 입장권 QR코드를 스캔하는 이도, 팔찌를 채워주는 스태프도 틈틈이 춤추기에 바빴다.

출입구 정면에 있는 매표소와 안내대는 커다란 그라피티 작품으로 가려져 있었다. 4층짜리 건물 모든 층 역시 대형 그라피티로 장식되어 있었다. 층별 안내마저 그라피티 레터링으로 써놓아 전에 클래식 발레를 봤던 그 공연장이 거대한 힙합 단지로 변해 버린 모습이었다.

‘브레이킹 컨벤션(Breakin Convention)’은 런던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무용 공연의 메카 새들러스 웰스 극장이 매년 선보이는 축제이다. 영국 힙합의 선구자 존지 디의 제안으로 2004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전 세계 힙합 문화의 기원과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영국 힙합 크루들의 시작을 함께했고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을 무대에 세웠다. 올해 5월 4일과 5일 열렸던 ‘브레이킹 컨벤션 2024’는 20년 차 축제답게 시간과 공간을 활용한 프로그램들이 짜임새 있게 구성돼 있었다. 릴리안 베일리스 스튜디오에서는 사전 행사로 프리스타일 펑크 포럼이 열렸고, 공연에 참여하는 예술가와 팝핑·락킹·브레이킹·프리스타일 등을 함께 해보는 워크숍도 진행됐다.

극장 건물 2층에는 디제잉 부스와 무대가 마련됐다. 유명 DJ들이 번갈아 진행한 이 행사에서 비트박스와 랩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관객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다가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Billie Jean)’이 나오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3층에는 그라피티 서체를 따라 해볼 수 있는 종이와 마커가 책상에 놓여 있었고 건물 밖 공터에는 그라피티 체험 행사도 마련됐다. 먼저 아티스트가 간단한 스프레이 조작법을 알려줬다. 멀리서 뿌리면 흐리게, 길게 누르고 있으면 흘러내리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다. 3명씩 5분 정도 원하는 색깔로 스프레이를 바꿔가며 마음껏 그려볼 수 있기에 대기줄이 길었다.

4층은 힙합 레슨이 열리는 트레이닝 그라운드. 10대 전후의 어린이들이 댄서들의 안내에 따라 움직임을 익히고 있었다. 함께 온 부모들도 뒤편에서 따라 했고 동생들은 바닥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댄서는 “아무도 당신을 평가하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을 보여주라”라고 독려했다. 그중에는 이미 익숙한 듯 몇 가지 기술을 선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틀간 열렸던 행사에서 영국 9개 팀을 비롯, 네덜란드, 프랑스, 국제 연합팀까지 총 13개 팀이 공연했다. 한국팀 진조크루는 5월 4일 토요일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고 일요일에는 첫 번째로 무대를 열며 놀랍도록 화려한 기술을 선보였다. 1층 앞쪽은 객석이 사라진 스탠딩석 구역이 됐다. 가장 먼저 등장한 이는 수어 통역자였다. 스웨그 넘치는 수어 통역자가 사회자와 함께 나와 온몸으로 통역했다. 미국 팀 공연에서는 랩마저도 수어로 전달해 이목을 끌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할아버지도, 지팡이에 의지한 이도, 휠체어 탄 이도 있지만 사람들은 과하게 그들을 보호하거나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다 같이 즐길 뿐이었다.

정재은(런던 통신원) 사진 새들러스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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