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6월 3일 9:00 오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차이콥스키의 아내’

대가의 아내를 ‘연기’한 그 여자, 안토니나의 속내

 

때때로,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연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 연인으로서의 나, 학교에서의 나, 사회생활 속의 나. ‘누군가의 누구로서의 나’가 매번 다른 무대 위에 올라, 계속해서 가면을 바꿔가며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것이 많을수록, 내가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의 연기는 더 다채로워진다.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사회적 맥락에서 나는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진짜 나는 그 속에 없는 것만 같다.

 

깨진 사랑도 사랑이라고…

19세기 러시아 모스크바 귀족 가문 출신의 안토니나 밀류코바(알리오나 미하일로바 분)는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 분)를 처음 본 날부터 그와의 결혼을 꿈꾼다. 차이콥스키에 대한 소문이 많았지만, 안토니나는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의 무관심에도 그를 포기하지 않고 점점 사랑에 매달리며 광기를 부리게 된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1969~) 감독의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차이콥스키에 관한 소문과 전기 중 가장 소란스러운 사건인 안토니나 밀류코바와의 결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나가 각각 37세와 28세의 나이에 만나 결혼한 1877년부터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1893년까지의 두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본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결혼한 이후 신경 쇠약과 우울증이 깊어지고, 안토니나는 결혼 이후 집착에 사로잡혀 무너진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의 저서·문서·일기·서신을 바탕으로 이들 부부의 진짜 삶을 복원해 낸다. 실제로, 극 중 안토니나의 대사는 그녀가 남긴 기록을 기반으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가공됐다고 한다. 특히 ‘차이콥스키를 사랑하는 아내’라는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연기하는 안토니나를 통해 순수한 사랑과 극심한 집착이 종이의 양면과도 같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한 것에 비해, 차이콥스키에 관한 소문들을 은유적으로 묻어두는 표현 방식 때문에 관점이 불투명해 보일 때가 있다. 안토니나의 시선에서 그녀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만 전달해, 관객 역시 차이콥스키를 추측해 보라고 하는 것 같다. 사실 차이콥스키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한 것은 러시아의 정치적인 태도도 큰 몫을 했다. 당시 저급하다고 불리던 모든 사항을 정제하고 차이콥스키를 고귀한 음악인으로 포장하면서, 정작 ‘진짜 차이콥스키’의 정보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감상하고 좋아하기 위해 우리가 그의 사생활까지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담긴 정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창작에 영향을 미친 개인의 삶까지 함께 더듬어 느껴보는 정성을 가져 보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그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돕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시대의 통제 속에서 인간의 본심과 진심마저도, 진짜 사랑과 연애를 하는 몸과 마음까지도 통제받던 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들여다본다.

 

시대라는 연극, 사랑이라는 연기

19세기, 러시아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의 자유와 권리는 억압되었다. 소수자의 사랑은 금기였고, 여성이 이혼하기 위해선 국가의 공식적인 허가와 명령이 필요했다.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19세기 러시아 자체는 연극무대이고,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연극배우 같다”라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 시절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상을 입고, 사회가 강요하는 역할을 연기해야 했던 것 같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던 한 여인과, 사랑을 통제받고 정체성을 숨기며 거짓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둔다. 한 여성의 파국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돌아보고, 강압적인 사회 속에서는 개인이 온전히 주체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비참한 마음으로 공감한다.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무대의 요소를 시각적으로 배열하고 조직했다. 그의 이러한 연출은 화면에 담기는 모든 조형적 요소를 직조해 영상의 미장센으로 만들어 낸다. 배우들의 들숨과 날숨, 그리고 그사이의 쉼표까지,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무대 위의 연기를 닮았다. 때론 연극처럼, 때론 뮤지컬처럼, 또 무용극처럼 보이는 장면들로 인해, 마치 공연을 관람하는 것 같다. 특히 안토니나가 미쳐가는 과정을 표현한 마지막의 무용 장면은 그 자체로 부끄러움과 고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살아있는’ 안토니나를 표현한 연출

영화적 문법으로 보자면,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연출은 낯설어서 매력적이다. 그는 무대와 영화, 장르의 차이를 굳이 경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고, 기어이 ‘지독한 집착’을 극의 언어를 이용해 영상으로 표현했다. 게다가 사랑과 욕망, 비밀과 파국 등 통속극이 떠오르는 구조 속에서도 시대에 대한 통찰과 그 시대 속 살아있는 여성의 숨결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차이콥스키에 관한 많은 소문과 의혹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오직 안토니나가 알고 있는 정도만 관객들에게 공유한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관점을 확대하기보다는 사회라는 시스템에 의한 폭력성을 부각한다. 이를 통해 억압된 사회의 분위기와 시선이라는 고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펼쳐보지 못한 한 여성의 삶을 함께 살아낸다.

안토니나는 달아나는 법을 모르는 인물이다.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뜨거움에 화상을 입고, 남편 차이콥스키의 차가움에 동상을 입으면서도 계속 그의 곁에서 살아간다. 영화는 집착하는 여성의 광기 어린 사랑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차이콥스키의 들러리 혹은 그림자처럼 박제되어 있던 한 여성의 삶을 현재로 불러냈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에 남은 한 줄의 기록이겠지만, 그 시절 속 안토니나는 살아있는, 젊고, 아름답고, 생생하고, 사랑이 넘치는 한 사람이었다. 재능이 있었지만 음악인이 될 수 없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살아갈 수 없던 시절, 아내라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했던 소망을 짓밟힌 채 사라진 한 여인의 삶이 생명을 얻었다. 이렇게라도, 이제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인정해 준다면 안토니나는 무덤 속에서라도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것 같다.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작곡 다닐 오를로프

출연 알리오나 미하일로바, 오딘 런드 바이런

 

[OST] 다닐 오를로프 | 온라인 발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작곡가 다닐 오를로프가 음악에 참여했다. 오를로프는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연주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차이콥스키적이고도 러시아 음악의 전통이 녹아든 선율을 들려 준다. 그의 음악은 영화의 미장센과 어우러지며 녹아들기도 하고, 현기증을 일으키는 장면에서는 에너지를 폭발시키기도 하며 영상에 극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 | | set-list 01 Fate 02 Glimmer 03 I Write to You 04 Solitude 05 It’s Him 06 My Heart Awaits You 07 Path 08 Drops 09 Presentiment 10 Insomnia 11 Vertigo 12 None, But the Lonely Heart 13 Doom 14 To Forget So Soon 15 It Was In Early Spring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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