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5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비올리스트 최은식
나의 스승들을 떠올리며
글 최은식(1967~) 서울예고 재학 중 도미해 커티스 음악원을 거쳐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수학 후,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신시내티 음악원 교수로 재직했다. 보로메오 콰르텟 창단 멤버로서 뉴욕 영콘서트 아티스트 콩쿠르와 프랑스 에비앙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 있다. 현재 전주비바체실내악축제 예술감독 및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악과의 첫 만남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BWV1041 #어린 시절 들었던 클래식 음악
아르파드 게레치/레 솔레스테스 로망즈 (협연 아르투르 그뤼미오)
감상 포인트 아르투르 그뤼미오의 바이올린 독주가 돋보이는 1악장 연주
어린 시절, 음악 애호가였던 부친 덕분에 집안엔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친께서 주로 감상하셨던 장르는 트로트였는데 여러 장르의 음악 속에서 자란 저는 어린 나이에도 조용필, 나훈아, 남진, 이미자 등 그 당시 유행했던 가요의 가사를 모두 외워 부르곤 했습니다.
소년 시절엔 축구와 야구에 흠뻑 빠져있었고, 교내 축구팀과 야구팀에서 활동하며 운동선수를 꿈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운동보다 피아노 배우기를 권유하셨는데 운동을 좋아했던 당시의 저는 악기 배우기를 거부했고, 지금은 그때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을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습니다.(웃음)
초등학교 4학년 음악 시간, 담임선생님은 새로운 노래를 가르쳐 주실 때마다 제게 노래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새로 배우는 노래를 정확하게 부르는 저를 유난히 예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학년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께서는 바이올린 공부를 권유하셨고, 그때부터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서정옥 선생님께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평생을 함께하게 된 ‘음악’이라는 선물을 주셨던 선생님들께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생전 처음 바이올린을 접했던 순간부터 악기를 잡는 법, 활을 쓰는 법을 배우며 느꼈던 생소함과 희열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며 즐겨 들었던 곡은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BWV1041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악보와 LP가 함께 들어있는 책이 있었는데, 음반이 없었던 저는 악보에 들어있는 LP로 이 곡을 수없이 듣곤 했습니다. 지금도 이 곡을 들으면 마치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듭니다.
실내악을 향한 열정은 언제나 ‘포르티시모’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 Op.131 #현악 4중주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곡
과르네리 콰르텟
감상 포인트 베토벤 후기 작품의 진가를 보여주는 과르네리 콰르텟의 1989년 녹음
1982년, 비올라의 음색에 반해 비올라 전공으로 서울예고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운 좋게도 LA 필하모닉 비올라 수석이었던 헤이치로 오히야마(1947~) 선생님의 오디션에 합격해 9월, LA에 있는 크로스로즈 예술과학고등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할 생각이 없었던 저는 그렇게 비올라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실내악에 관심이 많았던 고등학교 3학년 무렵, 과르네리 콰르텟의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 전곡 연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공연에서 현악 4중주에 매료되었고, 그날 이후 콰르텟의 비올리스트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당시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곡은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 Op.131이었는데, 이 곡은 베토벤이 가장 좋아한 작품으로, 자신의 실내악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만의 새로운 점이 있다면 기존의 4악장 구성을 깨고 7악장으로 구성한 점, 그리고 악장과 악장 사이를 쉬지 않고 연주한다는 점입니다. 슈베르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고 싶어 했던 곡이기도 하며, 베토벤이 죽음을 앞두고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실내악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1926년부터 1939년까지 콜리쉬 콰르텟의 비올리스트였던 유진 레너(1906~1997) 교수님입니다. 선생님께 이 곡을 배우며 음악의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네 명의 연주자가 생각과 마음을 합쳐서 연주할 때의 포르티시모는 오케스트라의 포르티시모보다 강력하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곡을 듣고 있자면 레너 교수님의 순수함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떠오르곤 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친구 같은 음악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2번 Op.120-2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연주
윌리엄 프림로즈(비올라), 제럴드 무어(피아노)
감상 포인트 브람스 말년의 애틋함이 잘 드러난 윌리엄 프림로즈와 제럴드 무어의 1937년 녹음
비올라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바이올린 연주보다 쉬워서? 절대 아닙니다! 모든 악기에는 각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바이올린에서 비올라로 전향한 이유는 비올라의 깊은 음색에 반했기 때문입니다. 바흐는 비올라를 ‘하모니의 중심’이라고 표현했고, 모차르트부터 베토벤·슈베르트·파가니니·드보르자크·힌데미트 등의 작곡가들은 비올라를 즐겨 연주하곤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던 저는 재학 중인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 댁에서 생활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부인은 피아니스트였는데, 학교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셨습니다. 피아노가 있는 방에는 수백 장의 클래식 음악 LP가 있었는데, 저는 매일 밤 그 LP를 감상하곤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비올리스트 윌리엄 프림로즈(1904~1982)가 연주한 두 곡의 브람스 소나타 음반을 즐겨 들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림로즈는 당시 청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비올리스트였습니다. 그는 런던 콰르텟을 거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가 지휘하던 NBC 심포니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비올리스트를 키워냈습니다. 제가 배웠던 교수님들의 스승님이기도 하죠.
브람스가 말년에 작곡한 두 곡은 제게 희망과 열정을 가져다준 친구 같은 곡입니다. 특히, 비올라 소나타 2번 Op.120-2에는 마치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듯한 애틋한 표현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1악장은 사랑스럽고 온유하며, 2악장은 열정적이지만 다소 우울한 아웃사이더의 목소리, 3악장에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브람스의 몸부림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이 멀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교차할까요? 그 어떠한 언어보다 마음에 가깝게 다가오는 예술은 바로 음악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