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열음, ‘왜?’라고 묻고, ‘어떻게?’라며 고민하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7월 1일 9:00 오전

FESTIVAL 1

올 여름에 만나는 음악 축제 이야기

 

피아니스트·고잉홈프로젝트 손열음

‘왜?’라고 묻고, ‘어떻게?’라며 고민하기

 

음악계를 돌아보게 하는 오케스트라와 음악가들. 그들의 시간을 살펴보다

 

 

살펴보면 국내 음악계에 변화를 낳았던 어떤 프로젝트들이 있다. 1988년 여행자유화가 생기면서 해외 유학의 문턱이 낮아졌고, 이를 통해 1990년대 말에 귀국한 이들은 본토에서 공부한 음악들을 ‘전곡 연주’라는 명목으로 풀어냈다. 학구적인, 때로는 고답적인 레퍼토리 꾸리기였지만, 특정 작곡가나 특정 작품에 빠져든 개개인들의 ‘깊이’가 한국음악계의 전반적인 수준을 끌어올리는 ‘높이’가 되던 때였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말러의 교향곡 전곡에 ‘깊이’ 빠져들었던 부천시향과 서울시향도 교향악단계의 문화는 물론 음악계 전반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이처럼 ‘깊이’가 다진 토양 위에 개성 있는 신인류 음악가들의 등장은 ‘스타일의 다양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특히 2000년대에 명망 있는 콩쿠르를 통해 입지를 다진 그들은 각자의 개성을 보전하면서도, 서로 접속하고 이접하며 다양한 스타일로 음악계를 디자인해 나갔다. 그러던 중 2022년, 고잉홈프로젝트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코로나로 인해 결딴나고 침체된 음악계였기에 그들의 등장은 더욱더 특별했다. 그간 오케스트라에 변화를 주는 요소로 지휘자나 작품의 변화를 꼽았다면, 고잉홈프로젝트는 악단 결성의 방식, 남다른 선곡, 단원들의 소통과 연습의 방식 등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오케스트라 문화를 예견하고 있었다. 2022년 7·8월에 5개의 무대를 선보이며 ‘새로운 스타일’을 선언했고, 2023년 8월 3개의 공연으로 ‘남다른 스타일’을 자랑했다. 작년 12월 6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베토벤 전곡 시리즈’의 첫 발을 내딛은 고잉홈프로젝트는 7월과 8월에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이어갈 4개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

 

피아니스트가 말하는 ‘오케스트라’

늘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는 레퍼토리가 궁금하다. 최근에는 어떤 음악가나 작품에 빠져 있나?

6월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나 29번 ‘하머클라비어’를 여러 번 연주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2일)와 멜버른(5일), 싱가포르(7일)에서, 그리고 한국에 체류하는 이틀 동안 수원과 서울의 스타필드 별마당 도서관(8·9일)에서 이 곡과 함께 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나는 평생 이 곡만 치고 살라고 협박받으면 얼씨구나 하며 받아들일 정도로 이 곡에 완전히 점철된 사람이다. 이어지는 연주회로 지칠 때도 “지금 하머클라비어 연주하러 가는 건데?”라고 자문하면 피곤함이 사라진다. 그래서 ‘하머클라비어’와 함께 한 6월이 행복하게 지나갔다. 서울 연주를 끝내고 캐나다 오타와로 와서 오랜만에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내게는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각별한 곡이다. 6월의 시간을 좋아하는 곡들로 채워 벅찰 정도로 행복한 며칠이었다.

‘피아니스트가 조직한 오케스트라’라… 러시아 내셔널 심포니를 만든 피아니스트 플레트뇨프가 떠오르기도 하고. 오케스트라를 통해서도 음악가로서의 길을 펼치고 있는데, 이러한 길을 걷기 이전에 오케스트라가 멋있게 다가갔던 ‘첫 순간’을 회상한다면 언제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쩌다 내가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오케스트라에 애정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자칭 음반광이자 공연광이던 중학생 때는 뮤지컬보단 연극을, 블록버스터 영화보단 단편영화를 좋아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음악에서도 오페라보단 가곡을, 오케스트라보단 현악 4중주를 좋아했다. 지금도 말러, 슈트라우스, 브루크너 등의 대형곡이 오르는 교향악단 공연에 갈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곤 한다. 내향형 인간이 큰 파티에 가기 전에 자기도 모르게 발동되는 긴장감 같은 거랄까.(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을 수 없는 교향악과의 강렬한 추억이 몇 있다. 므라빈스키(1903~1988)나 스베틀라노프(1928~2002)의 몇몇 음반들, 그리고 게르기예프의 초기 음반들 몇 개를 접했을 때… 그러고 보니 모두 러시안 지휘자들과 악단들이다. 특히 게르기예프/마린스키(구 키로프 시절부터)가 일구는 소리와 질감을 참 좋아했다. 2012년에 그들과 협연할 때 무대에서 그 소리를 들으니 정말 강렬하게 다가오더라. 원초적인 청각적 쾌감, 그 경험을 그때 처음 느껴봤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저서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2015년에 발간되었지만, 당시 5년간 기고한 글을 엮었으니 2010년부터의 생각이 담긴 글들이다. ‘쓰기’ 위해 ‘읽기’가 중요한 것처럼, 타인의 연주를 통해 단련한 청감으로 훌륭한 연주들을 선별한 ‘손열음표 초이스’라는 생각이 든다. 매료된 피아니스트나 음악가들도 바이센베르크(1929~2012), 인청쭝(1941~), 카스만(1967~), 왕샤오한(1980~) 등 개성적인 이들이 많고. 그것들이 피아노 버전의 초이스였다면, 지금은 ‘손열음의 오케스트라 초이스’에 대해 묻고 싶다. ①음색적으로 매력 있는 오케스트라, ②매력적인 선곡력과 ③강한 개성을 가진 오케스트라를 꼽는다면?

음색적으로는 아무래도 첫 눈에 반했던 러시아 악단들이다. 더 정확하게는 음반으로 접한 구소련 시대의 악단들. 지금도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한 모스크바 필하모닉,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 모스크바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등을 제일 좋아한다. 이외 레코딩을 통해 좋아하게 된 악단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조지 셸),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네빌 마리너)가 생각나고. 1~2년 사이에 내가 함께 연주하며 ‘음색’적으로나, ‘강한 개성’을 느낀 악단은 오슬로 필, 디트로이트 심포니,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정도이다. 두 질문(②·③)을 놓고 볼 때 고잉홈이 세인트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심포니 버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코즈모폴리턴 버전처럼 진화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미국 세인트폴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교향곡과, 상임단원들이 주도하는 실내악 프로그램이 비슷한 중요도로 병행한다. 지휘자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함께 레퍼토리를 선정해가는 것도 흥미롭고.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사실 고잉홈의 롤모델이다. 다만 창단자인 이반 피셰르(1951~/지휘)와 졸탄 코치슈(1952~2016/피아노·지휘)부터 단원들 대부분이 ‘헝가리 출신’인 것에 비해 고잉홈은 10여년 후에 그보다 범세계적인 악단이 되었으면 한다. 스스로 애국자라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발전의 최대 걸림돌이 순혈주의라고 생각한다. 이 악단이 대한민국 미래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멜팅팟’이 됐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강한 개성(③)의 악단으로는 영국 오로라 오케스트라도 꼽고 싶다(지휘자 니콜라스 콜론·로빈 티치아티가 창단한 실내 오케스트라). 그저 ‘모든 단원이 암보하여 연주하는 악단’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2019년에 처음 협연하면서 보니 그 너머의 매력이 있더라. 곡 하나를 선보이더라도 늘 이유를 스스로 묻고 찾아내는 악단이랄까. 그 자세에 탄복하게 되었다.

 

‘파격’으로 시작하고 ‘정석’으로 다지다

2022년, 고잉홈이 탄생하며 선보인 5일간의 ‘고잉홈 위크’는 공연 전부터 선곡만 보아도 설레는 ‘황홀한 선곡’이었다. 공연 ‘전’의 선곡표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이때 처음 느꼈다. 이 기운은 2023년에도 이어졌다. 해외 악단도 내한하면 국내 관객 시장의 눈치를 보며 단골 레퍼토리를 꺼내는데, 고잉홈은 분명 남다른 선곡으로 강한 엔진을 장착한 외인구단처럼 보였다. 한편 2024년은 베토벤이다. 예년에 비해 차분해졌다는 생각이 들고,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고잉홈만의 실험적인 레퍼토리를 더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다. 뭣 모를 아쉬움도 있고. 그래서 왜 ‘베토벤’이었나 묻고 싶다. 베토벤의 ‘그래야만 한다’처럼, 뭔가 당위성이나, 음악적 뿌리로의 회귀 본능 같은 게 있었나?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진리 같은 이유로는 고잉홈의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하고 싶은 작품을 연주하는 게 고잉홈의 큰 의의 중 하나니까. 여기에 고잉홈을 바깥에서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도 이제는 고잉홈의 정체성이 보다 또렷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 실현을 위해서 베토벤이 제격인 것 같았다. 베토벤 시리즈가 ‘음색’적으로, ‘선곡’의 측면에서, ‘개성’의 발현에서 고잉홈만의 색을 본격적으로 ‘조색’할 수 있는 시리즈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지금의 나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이 거울 같은 음악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그의 음악은 작품 내의 전개방식이 음악사적으로 혁명적일지라도 그 원소들이 아주 기본적인(‘primitive’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것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그의 교향곡들이야말로 악단의 소리와 음소를 가장 낱낱이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만으로도 프로젝트성 악단이 아닌 정규 악단을 꿈꾸는 고잉홈에게는 베토벤과의 동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안에서도 고잉홈만의 실험적인 선곡은 살아 있다. ‘베토벤 시리즈’라는 상투적인 공연명이지만, 국내서 잘 연주되지 않는 작품들-레오노레 서곡 1·2번, 슈테판 왕 서곡, 아테네의 폐허 서곡, 명명축일 서곡 등-을 연주하니 이 역시 고잉홈의 개성을 확립하는 시리즈이지 않을까 싶다.

한편 고잉홈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시즌마다의 특징이 있다. 이 역시 선곡에 따른 판단인데, 실체를 드러낸 2022년에는 ‘파격성’의 군단이었고, 2023년에는 다양한 레퍼토리로 ‘다양성’을 보여주고, 2024년에는 베토벤의 작품만으로 어떤 ‘통일성’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즌마다 색채가 다를지라도 고잉홈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관객 입장에서의 다양성’.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의 교향악계는 몇몇 악단을 제외하면 레퍼토리 쏠림 현상이 크다. 물론 자주 연주되는 특정 곡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청중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넓어졌으면 한다. 이건 고잉홈을 넘어 피아니스트로서의 바람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내가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성인데, 피아니스트로서 나는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재밌어하고 설레게 하는 것들을 마냥 만들고 쫓아가는 편이다. 하지만 명색이 ‘악단’이라면 그보다 뭔가 더 ‘의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고잉홈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로부터 의미와 재미가 생긴다고 본다. 고잉홈처럼 자생하는 이끼 같은 단체가 다른 악단도 할 수 있는 것을 똑같이 따라 한다면 과연 그 존재의 의의가 무엇일까? 아직 시작 단계여서 이런 의욕도 있을 수 있고, 이 악단이 조금이라도 사회적인 역할과 공헌을 할 수 있는 바람이 여전히 있다.

작년 5~6월에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으로 국내 전국 공연장을 채웠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고잉홈 무대에 올라도 될 텐데, 손열음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고잉홈은 2022년 모차르트의 관악 세레나데 10번, 바순 협주곡을, 2023년 호른 협주곡을 연주했다)

사실 고잉홈과 나의 음악적 성향이 크게 연관되진 않는다. 개인의 취향을 오케스트라 선곡에 드러내는 것도 어색한 일이고. 무엇보다 나는 모차르트를 ‘큰 교향악’ 작곡가로 보기보단, 피아노와 바이올린 신동이었던 그를 오페라 작곡가로 보는 편이다. 그래서 언젠가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콘서트 버전으로 올리는 날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고잉홈 멤버들의 모차르트 애정은 끝이 없다. 9월 크레디아 파크콘서트에서 그의 서곡(‘피가로의 결혼’)과 협주곡(플루트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중 몇 개 악장, 그리고 이베르(1890~1962)의 ‘모차르트에 대한 오마주’를 연주할 예정이다.

베토벤의 음악으로 ‘기본’과 ‘색’을 드러내고, 다음 고잉홈과 함께 걸을 작곡가는 누군가?

2025년이 라벨 탄생 150주년이라 그의 관현악곡을 연주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여름 공연을 거쳐 마지막은 라벨의 기일인 12월 28일에 ‘죽음’을 테마로 하는 시리즈를 구상 중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계획 중. 비밀이다.(웃음)

 

‘공유’하는 음악이 곧 ‘고유’한 스타일이 되다

고잉홈프로젝트 ©김시훈

고잉홈은 이제 아카데미 오케스트라로도 기능하고 있다. 선보이고 있는 베토벤 전곡 시리즈 공연에도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이처럼 교육을 통한 공유의 장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아카데미야말로 시작할 때부터 꿈꿔온 프로젝트이다. 그래서 창단한 지 불과 1년 반 만에 시작할 수 있었던 거고. 고잉홈의 멤버 상당수가 독일·프랑스 오케스트라 소속의 아카데미 출신인데, 그때의 경험이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국립심포니의 ‘KNSO 국제아카데미’ 외 아카데미 시스템을 도입한 악단이 별로 없고, 그래서 우리가 선취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오케스트라 마니아였던 적은 없어도, 유럽 오케스트라의 ‘공공성’에 경도된 적은 몇 번 있었다. 처음 독일로 유학을 왔을 때, 도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단과 그 숫자를 보고 놀랐다. 종류도 클래식 음악, 경음악, 극단, 오페라, 어린이극장 등등. 음악가라면 솔리스트로의 길만 바라보았던 나는 그 인프라와 수에 압도당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함경(현 서호주심포니 수석)과 조성현(연세대 교수·쾰른필 수석 역임)이 베를린필 카라얀 아카데미에 차례로 입단해 그들의 공연을 여러 번 관람했는데, 그러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악단의 문화와 기능을 대대로 되물림하는 것을 보며 ‘아! 이게 음악을 공부하는 이들이 더욱 잘 살 수 있는 길이구나, 더 많은 사람이 음악을 향유하는 메소드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경험들이 아카데미의 바탕이 된 여러 조각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아카데미에 참여하려는 지원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지난 12월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냈을 적에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이들이 지원해서 뿌듯했고 감사했는데, 이번에는 3배에 달하는 지원자들이 신청해서 놀랐다.

그들은 고잉홈의 어떤 매력에 매료된 것 같나?

국내에서 드문 기회이기도 하고, 무대에서 드러나는 고잉홈 특유의 수평적 유대 관계가 덜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의 사회 전반이 그렇지만 음악계나 교육계의 서열 문화가 강하다 보니 악단 내에도 나이가 어리거나 학연·지연이 없는 이들이 다소 소외되곤 한다. 그런데 고잉홈은 국내 학연·지연과 상관 없는 외국 음악가들이 많이 참여하고, 리허설도 (한국어에 비해 경어가 없는) 영어로 진행되고, 심지어는 포디엄에 오르는 지휘자 한 명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음악 만들기도 아니다보니, 이러한 수평적 문화를 그들이 높이 산 것 같다. 많은 문의가 있었지만, 대형 악단이 아니다보니 많은 이들을 선발할 수 없어 아쉬움과 미안함이 든다.

2022년 고잉홈 창단연주회를 선보인 후 깨달음 혹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 해는 너무 힘든 해였다. 지나고 보니 고잉홈 탄생을 위한 산고 같은데, 지금 드는 생각은 ‘그 때 돈을 좀 더 아낄 순 없었을까?’하는 생각이다.(웃음) 약 90인조 편성으로 ‘봄의 제전’을 준비하는데, 음악가들의 보수도 챙기고, 첫 프로젝트인 만큼 기록영상도 신경 써야 하는 등 그때를 떠올려보면 지금도 아찔하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간 다시는 앞으로 못 나갈 것 같다는 생각에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다.(웃음)

송현민 편집장 사진 파이플랜즈

 

손열음(1986~)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수학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 및 모차르트 협주곡 최고 연주상 수상, 대관령음악제 제3대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고잉홈프로젝트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토벤 전곡 시리즈 2 (7월 12일 오후 7시 30분) ‘레오노레’(피델리오) 서곡 2번, 3중 협주곡(손열음·스베틀린 루세브·김두민), 교향곡 4번 외

베토벤 전곡 시리즈 3 (7월 14일 오후 5시) ‘레오노레’ 서곡 1번, ‘슈테판 왕’ 서곡, 교향곡 5번 ‘운명’ 외

베토벤 전곡 시리즈 4 (8월 13일 오후 7시 30분) ‘아테네의 폐허’ 서곡, 교향곡 6번 ‘전원’ 외

베토벤 전곡 시리즈 5 (8월 18일 오후 7시 30분) 명명축일 서곡 Op.115, 교향곡 7번·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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