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허프/최수열과 TIMF/무용 ‘다른, 춤을 위해’/연극 ‘크리스천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8월 1일 9:00 오전

REVIEW

 

CLASSICAL MUSIC

 

스티븐 허프 서울시향 협연 & 피아노 독주회

이성적인 냉철함과 감각적인 자유스러움

7월 10·11일 롯데콘서트홀 / 7월 13일 금호아트홀 연세

 

지난 7월,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의 협연과 독주를 한 주에 모두 감상할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가 있었다. 그의 내한 독주회는 무려 16년 만으로 리스트,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와 함께 여성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1857~1944)의 작품을 독주회 프로그램으로 처음 선곡했다고 밝혀 더욱 관심을 끌었다. 서울시향과 3년 만에 함께 오른 무대에서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두 공연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그의 저서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2022)에 언급돼 큰 주목을 받았다.

협연 무대에서 허프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했다. 화려한 기교와 극적 서사를 풀어놓는 독주자, 독주와 대결하며 아름다운 향연으로 압도하는 오케스트라의 익숙한 구도는 허프의 연주에서 재설정됐다. 그는 힘을 온전히 내려놓은 뒤 물 흐르듯 유연하게 음들을 연결했고, 자의적 표현을 앞세우기보다 김은선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의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을 지향했다. 여기에는 좋은 소리를 우선하는 이성적 냉철함이 뒷받침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허프가 저서에서 언급했듯 라흐마니노프의 연주에서 취한 특징들일 것이다. 반음계 스케일 연주에서 서로 엉겨 붙어 소리 구름이 된 듯 불명확하게 들리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명료한 선율에 집중하게 하는 아우라로 점차 설득되었다. 앙코르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멜로디 F장조로, 허프는 이 곡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루바토와 폭넓은 다이내믹, 수비토의 표현까지 다양한 표정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관객은 그의 또 다른 자유로운 영혼을 접했다.

이틀 뒤 열린 독주회에서는 허프가 그의 책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한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와 쇼팽의 소나타 3번 b단조, 그리고 잠깐 언급한 샤미나드의 소품 네 곡을 연주했다. 전반부 시작과 함께 연주한 샤미나드의 ‘가을’은 감상에 젖은 저음과 명징한 선율의 대비, 폭풍우와 같은 표현이 인상적이었으며, 이어 연주한 ‘이전에’에서는 정박 리듬과 고풍스러운 꾸밈음에 옛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반부 시작에 연주한 ‘주제와 변주’에서는 천진난만한 경쾌함을, ‘숲의 요정’에서는 진중한 선율을 지나 음의 유희로 그리는 요정을 만나게 된다. 허프는 독주의 자유를 누리며 여러 선명한 특징들을 팬터마임처럼 연주하여 음악 속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들려주었다.

전반부 샤미나드에 이어 연주된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 S178에 대해 허프는 ‘외향적이고 낭만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프레이즈마다 극과 극을 오가는 만 가지 표정을 지어 보였으며, 모든 능력과 열정을 쏟아놓으려는 기세로 감상자의 마음을 압도했다. 그러면서도 자로 잰 듯한 이성적 시각을 놓치지 않았다. 압도하는 이성적 열정! 이것이 바로 허프가 그리는 낭만이다.

쇼팽의 소나타 b단조 3번에 대해서는 ‘내향적이고 고전적’이라고 표현했는데, 시작은 강렬하고 의지에 찼으나, 곧 내면으로 침잠해 간다. 허프는 세상에 도전하기보다는 이에 순응하고 외면하는, 내면의 갈등으로 번민하는 방랑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어느새 감상자들도 그의 길을 따른다. 은은하게 퍼지는 우아한 매력! 우리가 쇼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자, 허프의 연주를 듣는 이유다.

허프는 익숙함과 낯섦의 깊은 간극을 넘나들며 관객을 담장 너머의 세계로 인도했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서울시향·금호문화재단

 

 

최수열/TIMF앙상블 협연 황수미

밤 9시를 즐겁게 침범한 현대음악

7월 4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밤 9시, 일과가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편안한 공간에 돌아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혹은 혼자만의 여유를 갖는 때. 이 사적인 영역에, 낯선 현대음악이 성큼 들어왔다. 지친 하루 끝에 현대음악‘까지’ 감상할 에너지가 없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불필요한 이성을 내려놓게 되어 여유로운 감상이 가능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사소한 감각의 자극들로 만난 현대음악은 제법 매력적인 놀거리였다.

주로 독주회가 진행되는 리사이틀홀에, 오케스트라 대형의 악기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현대음악 연주회답게, 각종 타악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이사 온 날 정리 안 된 집 같죠?” 공연은 마이크를 들고 등장한 최수열의 재치 있는 멘트로 시작됐다. 익숙하지 않은 레퍼토리가 적힌 프로그램 북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긴장 중이던 관객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예술의전당 기획의 현대음악 시리즈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기획된 데에는 지휘자 최수열이 가진 전문성과 대중 친화적 역량이 동시에 발휘된 점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의 친절한 설명 덕에 관객은 ‘유기농 우유 깡통’까지 사용된 타악기의 면면을 알게 된다.

첫 곡은 4분 길이의 짧은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헬무트 라헨만(1935~)의 ‘구에로’는 긁어서 소리를 내는 타악기 ‘구에로’에서 따온 곡명이다. 피아노 독주지만, 음은 하나도 연주되지 않는다. 대신 건반을 긁거나 줄을 튕기고, 페달만을 밟는 등 피아노 자체를 타악기처럼 다룬다. 옆 관객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해진 홀에서 피아니스트 윤혜성은 리듬과 다이내믹이 느껴지는 몰입 높은 연주를 선사했다.

이어 진은숙(1961~)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노래를 모은 ‘퍼즐과 게임 모음곡’이 연주됐다. ‘주황 앨리스’로 등장한 황수미의 무대 매너가 관객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았다. 의상뿐 아니라 노래 하나하나에서 오페라 전막 공연을 연상케 하는 표현력이 두드러졌다. 황수미는 낯선 곳에 떨어진 앨리스였다가, 공작 부인이었다가, 괴기스러운 고양이였다.

실연으로 들을 때마다 놀라운 입체성으로 다가오는 진은숙의 관현악법은 작은 리사이틀홀을 음향으로 압도했다. 연주를 맡은 TIMF앙상블은 충실한 연주력으로 풀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규모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악기별 주자가 한 명씩이었기에, 개인의 역량에 따른 음색이 두드러질 정도였다. 밀도 있게 짜인 앙상블은 음악적 만족감을 더했다.

진은숙의 또 다른 작품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2009/2011)은 진은숙이 홍콩과 광저우 방문 당시 얻은 영감으로 쓴 작품이다. ‘구갈론’은 옛 독일어에서 유래해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다’ 또는 ‘그럴듯한 수법으로 속이다’라는 뜻으로 낡은 주택가, 좁은 골목길, 잡동사니를 파는 시장 등의 시끌벅적함이 묘사된다. ‘대머리 여가수의 비가’ ‘틀니 낀 점쟁이의 비죽거림’ ‘돌팔이 의사의 땋은 머리를 추격하기’ 등의 소제목의 작품이 20여 분간 이어진다. 흥겨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선율은 알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아련함을 불러일으켰다.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는 KCO모더니즘(음악감독 김민)과 함께 11월 7일에도 막이 오른다. 이 단체는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CO)의 단원으로 구성된 현대음악 앙상블. 루치아노 베리오 ‘싸이’, 프리드리히 굴다의 첼로 협주곡(협연 심준호), 루이 안드리센 ‘워커스 유니온’이 연주된다. ‘현대음악을 감상하기 딱 좋은 시간’이 된 밤 9시, 그 특별한 감각을 경험해볼 기회다.

허서현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DANCE

 

다른, 춤을 위해 Part 2

서로 다른 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

7월 11일~13일 대학로극장 쿼드

 

금배섭 안무 ‘닳아가는’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의 기획 공연 ‘다른, 춤을 위해’는 일종의 ‘트리플 빌’ 방식이다. 7월 첫째 주와 둘째주에 3일씩 발레·현대무용·한국무용을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둘째 주에 오른 ‘다른, 춤을 위해 Part 2’에서는 블랙토 무용단의 ‘누 블랙’(발레·이루다 안무), 금배섭 안무의 ‘닳아가는’(현대무용), 99아트컴퍼니의 ‘이야기의 탄생’(한국무용·장혜림 안무)을 선보였다(7월 12일 관람).

이루다의 ‘누 블랙’은 어둠 속에서 시작한다. 천장에서 조명 하나가 내려와 객석을 수색하듯 찬찬히 훑는다. 조명의 시선은 바닥에 고치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무용수에게로 향한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의 쓸쓸한 선율이 흘러나오자, 무용수가 번데기에서 탈피하듯 고치를 뚫고 나온다. 그는 발레리나가 되어 불안정한 발레 동작을 반복한다. 어느새 빠른 템포의 런웨이 음악이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무대 뒤편의 미디어아트는 무용수들의 군무에 화려함을 더한다. 무용수들이 하나둘 무대 밖으로 사라지고, 홀로 남은 발레리나의 독무는 기존의 발레 동작에서 조금씩 어긋나며 어둠 속으로 서서히 소멸한다. 캄캄하고 어두운, 기괴한 동작의 발레는 마치 어떠한 심연을 들여다본 듯했다.

두 번째 무대는 금배섭의 ‘닳아가는’. 텅 빈 무대 위에 일상복을 입은 무용수가 등장했다. 그는 음악도 없이 비닐봉지 다발을 들고 널찍한 무대 곳곳을 쏘다닌다. 곧이어 비닐봉지 다발을 뜯어 하나씩 공중으로 흩뿌린다. 그 순간, 고요하던 무대에 잔잔한 통기타 선율의 포크 음악이 흐른다. ‘기다려도 변하는 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바라보았지 밤새도록 바라보았지’. 금배섭은 무엇과도 교감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교감하지 못하고, 사물과 교감하는, 아니 사물과는 ‘교감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면서 결국 스스로 비닐봉지, 빨래집게처럼 사물화 되어가는 과정을 표현한다. 그는 공연 내내 혼자였지만, 그의 ‘닳아가는’ 몸짓을 바라보는 관객 개개인의 상상력이 무대 곳곳을 가득 채웠다. 25분 동안 이어진 금배섭의 솔로 무대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진한 여운이 담긴 박수가 쏟아졌다.

직전 무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멀리서 아카펠라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무대인 장혜림의 ‘이야기의 탄생’은 ‘태초에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여인…’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했다. 무용수들은 태곳적 야생의 소리 같은 화음을 쌓아가며 작은 원을 만들었다.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가사 없는 노래, 무대 뒤편까지 길게 늘어진 무용수들의 그림자, 손을 맞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는 원무(圓舞)의 원시적인 모습에서 앙리 마티스의 ‘춤’(1910)이 떠올랐다. 작품은 한국무용에 서사와 아카펠라, 오카리나 연주를 더해 아득히 멀리 느껴지는 태고의 시간을 무대 위에 잘 펼쳐내었다.

서로 다른 세 장르의 몸짓이 하나의 무대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각각 돋보인다. 발레에서 가져온 트리플 빌의 장점이 잘 드러난 공연이었다. 각 작품의 내용부터 공연의 형식까지, 지금 이 시대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8월 22~25일에는 블랙박스 극장인 쿼드의 공간적 성격을 십분 살려, 스탠딩으로 즐길 수 있는 ‘쿼드여름페스타’가 열린다.

홍예원 기자 사진 대학로극장 쿼드

 


 

THEATER

 

두산인문극장 ‘크리스천스’

‘내 믿음’이 더 옳다는 믿음

6월 25일~7월 13일 두산아트센터

 

민새롬(연출)/루카스 네이스(극본)/정지수(번역·드라마터그) 외/박지일(폴)·김종철(제이)·안민영(엘리자베스)·박인춘(제니)·김상보(조슈아) 외

두산아트센터 인문극장 시리즈, 올해 주제인 ‘권리’의 마지막 작품이다. 미국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의 이 극(2015)은 교회와 믿음을 제재로 한다.

20년 전 작은 상가의 교회를 개척했던 폴 목사는 교인 3천 명을 둔 거대한 성전을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 진 빚을 다 갚은 날, 그는 개신교 교리에 반하는 ‘지옥은 없고, 우리 모두는 누구나 천국에 간다’라는 새로운 믿음을 본인 교회의 근본으로 삼겠다며,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발언한다. 처음에는 오랜 기간 따른 폴 목사를 지지하는 신자가 많았으나, 평생의 믿음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없는 노릇. 교회의 신자들은 바로 이웃이었던 다른 신자들과 갈등을 겪으며 점차 해체된다. 자신의 주장에 신자들이 따를 것이라 여겼던 폴 목사는 신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까지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어떠한 믿음이 본인이 따를 수 있는 진짜 ‘믿음’인지 중얼거리고, 암전을 맞는다.

관객이 감상의 중심을 종교적 측면에 둘 것인지, 그렇지 않은 부분에 둘 것인지는 중요한 요소이다. 전자라면 극 속 논쟁을 즉각적으로 따라가며, 거기서 드러나는 각 ‘신자’의 주장에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게 된다. 누구의 교리가 더 옳고, 그 주장의 허점은 없는지 살피는 토론회의 방청객이 되어 극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거듭난다. 후자라면 이 종교적 입씨름에서 벗어나, 각 ‘권력자’가 이익을 위해 어떠한 불합리를 저지르는지 지켜보게 된다. 누구의 언행이 모순되는지, 인물 간의 관계 변화는 어떠한지 살피면 무대와 경계 없는 구조로 설치한 관객석에 스스로 경계를 세우는 관조적인 관람객이 된다.

폴 목사의 새로운 믿음은 차별과 차등에 반대한다. 그는 남을 위해 삶을 희생하는 이가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지는 교리를 부정한다. 믿음이 없어도 모든 이에겐 구원이 있다는 것. ‘믿음을 가진 특별한 나’에서 끌어내려진 신자들은 이에 반발한다. 울타리 안의 우리만이 구원받을 것이며, 교회의 목적은 울타리 안쪽으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지, 울타리를 부수어 아무나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논쟁은 쉽게 흥분하며, ‘관용’을 보이지 못하는 기존의 신자들을 ‘악인’처럼 그린다.

그러나 폴 목사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모두를 포용하는 천국을 그리지만, 당장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를 성전에서 쫓아냈다. 그는 빚을 다 갚자 교회에 모인 이들의 생계는 고려하지 않고, 독선적인 설교를 교회의 그 누구와도 회의하지 않고 결정해 버렸다. “당신과 대화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큰 거리가 존재하네요”라는 폴 목사의 반복적인 대사는 결국 그에게 소통의 의지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가 이 큰 거리를 극복하고 대화의 강렬한 충동을 달성한 순간은 어떠한 권력 없이 익명의 인간으로 지금의 아내와 우연히 만났던 처음 순간뿐. 모든 권세를 입은 뒤엔 소통보다 거리 유지를 택한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자신의 믿음에 대한 더 많은 권리를 준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인간일 뿐이다.

이러한 주제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음향·무대 효과의 역할이 컸다. 마치 예배에 온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재현된 성가대 단원들의 생생한 표정과 행동, 층고가 높은 공간에서 반사되는 듯한 예배당 안의 마이크 음향과 공간 소음은 이들이 한국 사회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었다.

이의정 기자 사진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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