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헬렌 그라임, 시구에 음을 붙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8월 1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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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헬렌 그라임

시구에 음을 불어 넣다

 

대표곡 ‘자정 가까이’(서울시향 한국 초연)를 앞두고 미리 듣는 작곡 이야기

 

 

‘오래된 종 다섯 개가 서둘러 간절히 부르고, 애원하고, 항의한다 (…)’ ‘은빛 달은 누군가 그 높은 곳에 돌려놓아 (…)’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1885~1930)의 ‘매 야간의 의식(Week-night Service)’에 등장하는 이 시구는 작곡가 헬렌 그라임(1981~)의 마음에 닿아 음악으로 변했다. 그렇게 2012년에 탄생한 ‘자정 가까이(Near Midnight)’는 2013년 초연됐다. 자정 가까이에 울리는 이 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그의 NMC 레이블(영국의 살아있는 작곡가의 작품을 녹음하는 음반사) 데뷔 음반인 ‘밤의 노래들’에 이 작품이 수록됐고, 같은 해에 영국 작곡가 어워드 후보에도 올랐다. 이 종소리는 이제 한국에서도 들어 볼 수 있다. 이달에 내한하는 지휘자 니컬러스 카터가 서울시향과 함께 ‘자정 가까이’를 연주한다.

그라임은 유럽 현대음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곡가로, 주로 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선보여 왔다. 19세부터 위촉을 받아 곡을 쓰기 시작한 그는 오늘날까지 작곡한 대부분의 작품이 모두 위촉 작일 정도로 여러 단체에게 사랑받는 아티스트이다. 그의 첫 관현악 작품인 ‘꼬리구름(Virga)’은 2010년 피에르 불레즈가 파리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기도 했다. 그와 곧 다가오는 한국 초연에 관한 질문을 시작으로 작업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초연되는 ‘자정 가까이’는 영국 시인 D.H. 로런스의 시 ‘매 야간의 의식’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습니다. 시의 내용이 음악에 모두 담겨 있나요?

영감을 받았지만, 아주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시에서 묘사하는 이미지가 음악 소재로 사용됐죠. 낡은 종소리나, 높이 걸린 달처럼요. 특히 종소리는 팡파르 같은 효과를 주기도 하고, 소리의 거리를 알려주는 신호처럼 사용되기도 했죠. 작품에서 들을 수 있는 아주 높고 짤랑거리는 두 대의 트럼펫 소리도 이 종소리 이미지에서 착안했습니다.

헬렌 그라임: 밤의 노래들(2014) NMC NMCD199 린지 마시(클라리넷)/ 할레 솔로이스츠/ 마크 엘더·제이미 필립스(지휘)

‘자정 가까이’는 2013년에 마크 엘더/할레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습니다. 이 작품은 맨체스터 할레 오케스트라의 위촉으로 시작하여 이 악단을 위해 작곡했습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할레 오케스트라의 제휴 작곡가(Associate Composer)로 지내기도 했는데, 작곡하면서 고려했던 악단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할레 오케스트라는 부드러운 벨벳 같은 현악 파트를 가지고 있고, 저는 이걸 잘 살려내고 싶었어요. 작품의 세 번째 섹션에서 긴 음가의 낭만적이고 선율적인 메아리를 제2바이올린에 넣었는데, 바로 그걸 의도한 것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섹션에는 목관악기마다 독주 파트를 넣었는데, 이 부분들은 당시 악단 수석의 음색을 각자 고려해서 쓴 거였어요.

NMC 데뷔 음반인 ‘밤의 노래들’에서도 ‘자정 가까이’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마지막 트랙에 뒀는데, 의도한 것인가요?

음반의 트랙 순서를 전부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작품이 그때까지, 그러니까 2014년까지 작곡한 것 중 최신작이었고, 이 음반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표작이었어요. 물론, 그 뒤로도 작품을 꾸준히 써서 지금 여러 대표작이 있습니다.(웃음)

 

오보에, 시집, 전시회를 유랑하며

2003년에 메도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로부터 오보에 협주곡을 위촉받은 것을 시작으로, 작곡가로서 빠르게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이 작품의 초연 협연자로 본인이 직접 오보에를 연주했고, 같은 해에 영국 작곡가상도 받았죠. 작곡가로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프로가 됐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오보에 협주곡의 기회를 잡은 건 정말 행운이었죠. 초기에 그런 운 좋은 기회와 도움을 주신 훌륭한 분들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요. 물론 좋은 평을 받으면 그 뒤의 작품 활동이 부담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저는 그 뒤의 여러 위촉이 어느 정도 적당한 간격으로 이어져서 숨을 돌리며 서서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로열 칼리지에서 에드윈 록스버그(1937~/오보이스트·작곡가·지휘자)와 줄리안 앤더슨(1967~/작곡가)을 사사했습니다. 두 분은 어떤 스승인가요?

에드윈에게 오보에와 작곡, 지휘까지 폭넓게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의 발전에도 무척 크게 작용했죠. 또한 줄리안의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의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영감을 많이 주고요. 두 분 덕분에 다양한 음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점을 저의 학생에게도 전달하고 싶습니다.

‘자정 가까이’도 그러하듯, 작품에서 T.S. 엘리엇, 시그프리드 서순, 아서 필립 라킨 같은 영국 시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인가요?

시는 제 음악에서 언제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작업 초기 단계에서 다양한 측면으로 작곡에 영향을 주거든요. 최근에는 성악이나 목소리를 사용하는 작품도 여럿 썼는데, 대부분 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50곡에 달하는 작품을 출판했습니다. 그중에는 시에서 출발해서 관현악곡이 된 ‘자정 가까이’도 있고, 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 바이올리니스트 협연자가 있는 ‘곧 봄이 될 것이다(It will be spring soon/2021)’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작업할 작품의 편성은 어떻게 결정하나요? 선호하는 편성이 있나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모든 작품이 전부 위촉이에요. 그래서 편성은 전부 위촉한 단체가 결정했죠.(웃음) 오케스트라 작품을 확실히 좋아하지만, 실내악과 성악 작품 작업을 마다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런 과정에서 연주자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특권이고, 잘 알고 있는 연주자를 위해 협주곡을 작업하는 것도 무척 즐깁니다.

음악과 문학 외에 다른 예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은 편인가요?

최근에는 시각 예술로도 시선을 돌려서 로라 엘렌 베이컨과 같은 조각가와도 협업하고 있어요. 다른 예술이 작업하는 과정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전시도 관람하고, 예술 관련 서적도 찾아보는 편이에요.

다른 작곡가의 작품도 즐겨 듣나요?

물론이죠!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정말 많이 듣는 편입니다. 물론 시기에 따라서 다르긴 합니다. 작곡에 집중하는 시기에는 음악을 그다지 듣지 않는 편이에요.

새로운 삶과 사랑을 위한 노래(2021) BIS BIS2468 루비 휴스(소프라노)/ 조셉 미들턴(피아노) 헬렌 그라임 ‘밝은 여행자들’ 외

어떤 음악을 듣는지 궁금해요.

제가 최근에 들은 음악의 작곡가들을 쭉 나열해 볼게요. 윌리엄 버드(1540~1623), 라벨(1875~1937)과 아이브스(1874~1954)도 들었고, 한스 아브라함센(1952~)과 올리버 크누센(1952~2018), 주디스 위어(1954~)와 탠시 데이비스(1973~)까지 있네요. 그밖에 다양한 민속음악도 찾아 듣고, 시간만 있다면 더 나열할 수도 있습니다.

목록에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도 여럿 있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면 본인의 작곡도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작품이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수준에서는 제 생활의 모든 것들이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본인이 쓴 작품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것이 있나요?

얼마나 자주 연주됐는지, 누가 연주했는지, 관객의 반응은 어땠는지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꼽기가 어렵네요! 보통은 지금 작업 중인 작품이나, 방금 막 완성한 작품을 좋아합니다. 편애를 살짝 하자면, 바이올린 협주곡(2016)과 트럼펫 협주곡(2022), 연가곡 ‘밝은 여행자들’(2017)·‘기쁨의 명상’(2019)에 애착이 가네요.

이의정 기자 사진 와이즈뮤직클래시컬

 

헬렌 그라임(1981~) 2003년 영국 작곡가 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로열 칼리지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2011/12시즌부터 2014/15시즌까지 할레 오케스트라의 제휴 작곡가로 임명됐다. 2019년 스코틀랜드 신음악 어워드에서 우승했으며, 2020년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니컬러스 카터/서울시향(협연 헬레나 윤투넨)

8월 9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헬렌 그라임 ‘자정 가까이’(한국 초연), R.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슈만 교향곡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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